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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2

112화 라플라스 (2)

112화 라플라스 (2)

“쿠훌린은 흑기사가 누구인지 알고 있죠?”

단도직입적인 데미안의 물음에 쿠훌린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너라면 그렇게 물을 줄 알았다. 데미안.

“그래. 나는 흑기사가 누구인지 안다.”

“루시엔 아르테미스인가요?”

이 또한 쿠훌린은 예상했다. 그날, 쿠훌린은 흑기사의 이름을 두 번이나 말했다. 그리고 흑기사는 데미안에게 은월검을 발현했다.

은월검은 아르테미스의 블러디드. 당연히 데미안은 그가 아르테미스일 거라 생각했겠지.

그러나 데미안의 생각은 틀렸다.

“아니다. 데미안.”

“아니라고요?”

창문에서 시선을 돌린 쿠훌린은 깊은 눈으로 데미안을 바라봤다.

못 본 사이 소년티를 거의 벗어냈구나.

그리고.

“그의 이름은 루시엔 라플라스.”

더욱 그를 닮게 되었구나.

“데미안. 너의 아버지다.”

***

나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루시엔 아르테미스가 아니라 루시엔 라플라스?

게다가 나의 아버지라고?

“이 이야기부터 해야겠구나. 데미안. 나는 2년 전의 카론 늪지에서 너를 처음 만난 것이 아니다.”

나는 아직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쿠훌린의 목소리가 조금 멀게 느껴졌다.

“······그게 무슨 말이죠?”

“그 말대로다 데미안. 나는 이전에도 너를 만난 적이 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커다란 술병과 술잔 두 개를 손에 든 벨락과, 스카자하였다.

“부르셨습니까. 단장.”

스카자하는 그렇게 말했지만 쿠훌린이 이 방에서 할 이야기를 알고 있는 듯했다.

스카자하에게 예를 표한 쿠훌린이 내게 말했다.

“두 사람은 내가 불렀다.”

“스카자하와 벨락이 흑기사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인가요?”

나는 일부러 ‘루시엔’이라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가 나의 아버지라고?

쿠훌린을 죽이려 한 자가?

웃기지 마. 나는 그자에 관한 아무런 기억이 없다.

아니, 그에 앞서 나는 데미안 라플라스가 아니다.

지구에서 온 김우진이다.

‘김우진.’

오랜만이었다. 나의 진짜 이름을 떠올린 것은.

이상하게 낯설게 느껴진다. 마치 지구에서의 기억이 하룻밤 꿈에 불과했던 것처럼. 그 때문일까. 나는 돌연 머리를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엷은 신음을 흘리며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두통은 머지않아 사라졌다. 쿠훌린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 괜찮아요. 쿠훌린.”

고개를 드니 침대 옆에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스카자하와 벨락이 그 뒤에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네 말이 맞다. 스카자하와 벨락은 루시엔을 알고 있지. 그런 면에서 사실 이 자리에는 두 사람이 더 있어야 한다.”

“둘 중 한 명은 브란델이죠?”

“그래.”

“다른 한 명은요?”

“리아논이다.”

그 말은 조금 놀라웠다.

지금보다 젊은 시절의 스카자하는 은월의 부단장이었다고 들었다. 지금은 그 자리를 벨락이 이어받았고. 따라서 두 사람은 대륙에서 흑기사를 만났을 수 있다. 브란델도 마찬가지.

그런데 리아논이 흑기사를 알고 있다고?

“긴 이야기가 되겠군요. 단장.”

스카자하가 이어 말했다.

“물론 이야기는 은월섬의 어느 반항기 가득했던 소년이 성년식을 마친 후, 그가 증오해 마지않던 ‘빌어먹을 마녀 교관’의 눈을 피해 섬에서 달아난 것부터 시작해야 할 테지요.”

“······스승님.”

쿠훌린이 난처한 얼굴로 스카자하를 돌아봤다.

나는 다시금 놀랐다.

스카자하가 말하는 ‘반항기 가득했던 소년’과 ‘빌어먹을 마녀 교관’이 누구를 뜻하는 것인지 알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호칭은 더는 쓰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단장. 왜 그런 눈으로 보시는 겝니까. 꼭 제가 없는 말을 지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스카자하의 웃는 얼굴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미소 짓는 그녀의 분위기는 평상시와 아주 많이 달랐다.

쿠훌린이 술병에 손을 가져갔지만, ‘환자는 금주해야 한다’는 스카자하의 말에 벅벅 머리를 긁었다.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쉰 쿠훌린이 나를 돌아봤다. 그러고는 시작했다. 은월섬의 어느 반항기 가득했던 소년이 빌어먹을 마녀 교관의 눈을 피해 섬에서 달아난 이야기를.

“성년식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우연히 알게 되었다. 은월호가 오랜만에 출항 준비를 시작했다는 것을.”

“그 이야기를 전한 이는 벨락과 라이칸이라는 이름의 말썽꾸러기들이었고요.”

“······어머니.”

그렇게 16세의 쿠훌린은 깊은 밤, 은월호에 잠입했다.

‘돌아올 거지? 쿠훌린.’

‘걱정 마 벨락. 꼭 돌아올 테니까. 뭐, 언제일지는 나도 모르지만 말이야. 하하하! 그건 그렇고 라이칸, 너는 또 왜 질질 짜고 있어! 엘리샤에게 괴롭힘당하기라도 한 거냐?’

이후 쿠훌린은 배 안에 적재된 커다란 나무통 안에 몸을 숨겼다. 듣다 보니 묘하게 익숙한 이야기였다. 생각났다. 작년에 루나가 했던 짓이잖아.

“오랜만에 대륙으로 돌아온 나는 자유를 만끽했다. 선원이 되고, 용병이 되고, 몸 쓰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해치우며 돈을 벌었지. 물론 매일 밤 술을 퍼먹느라 한 푼도 모으지 못했지만 말이다. 하하하하!”

껄껄 웃던 쿠훌린이 스카자하의 헛기침 소리를 듣고는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뭐, 그때는 나도 많이 어렸지. 딱 지금의 네 또래였으니까 말이다. 이런 말 하기는 뭣하지만 당시 은월섬은 내게 커다란 감옥 같았다. 그래. 어쩌면 데미안, 너는 이미 알고 있겠지. 내가 태어난 곳은 은월섬이 아니다.”

알고 있다.

쿠훌린은 지금은 제국의 땅이 된 ‘아르테미스 왕국’의 후계자로 태어났다.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아르테미스 왕족은 왕가 대대로 전해지던 은밀한 장소인 은월섬으로 피신했다. 사실 말이 왕족이고 왕가지, 살아남은 이는 쿠훌린 혼자였다. 그런 쿠훌린을 왕가를 섬기던 ‘다섯 가문’이 목숨을 걸고 지켰다. 스카자하에서 벨락과 라이칸, 그리고 트리스탄으로 이어지는 헤카테 가문은 아르테미스 왕가를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던 혈족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재미있는 녀석을 만났다. 오를리안 왕국에서 용병 생활을 하던 때였는데, 녀석은 상대 진영에 속한 용병이었지. 검을 부딪치자마자 알 수 있었다. 무지막지하게 강했어.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벨락을 제외하면 또래 중에서 그렇게 강한 자는 처음이었거든.”

그날 쿠훌린은 승부를 내지 못했다.

누구보다 승부욕이 강했던 쿠훌린은 바득바득 이를 갈며 재대결을 꿈꿨지만, 이후 전쟁은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녀석을 다시 만난 건 일 년 후, 루네카 왕국에서 선원 생활을 하던 무렵이었다. 나는 녀석을 한눈에 알아봤다. 녀석도 나를 알아보는 것 같았지. 우리는 한동안 같은 배에서 선원으로 일했고, 금세 가까워졌다. 늑대처럼 사나웠던 첫인상과 달리 온화하고 친절한 녀석이었지. 루시엔은.”

이후 쿠훌린과 루시엔은 함께 광활한 바다와 대륙을 떠돌았다.

그러던 중 쿠훌린은 암영을 조우했다. 그에게는 암영을 향한 본능적인 증오심이 있었다.

아르테미스 왕국의 멸망은 제국의 소행만이 아니었다.

암영의 살수들이 제국의 편에서 암약했다.

“그날이었다. 일루산 블레오파드와 네몬 블레오파드를 만난 것은.”

놀랍게도 당시 일루산과 네몬은 가까운 사이처럼 보였다고 한다. ‘카이라’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어느 여자 살수를 포함해서.

“루시엔과 페르디나를 거점으로 용병 생활을 하던 무렵이었다. 아, 그때는 벨락도 함께였지. 수년 동안 내가 섬으로 돌아가지 않자 벨락이 나를 찾겠다고 대륙으로 도망쳐 나왔거든.”

쿠훌린이 낄낄대며 웃었고, 벨락도 그때 생각이 났는지 소년처럼 킥킥댔다. 물론 스카자하와 눈이 마주치기 전까지만.

“그렇게 우리 셋은 암영과 싸웠다. 페르디나의 용병단도 함께였지. 상황은 여러모로 아군에게 불리했다. 나는 패배를 직감했어. 그러나 결국 승리한 쪽은 아군이었다. 이유는 ‘카이라’라는 여자 살수의 죽음 때문이었지.”

카이라의 죽음에 일루산과 네몬은 크게 흔들렸다. 그래서 유리한 상황이었음에도 전투를 종료하고 그녀의 시신을 수습해 물러났다. 쿠훌린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경험하고, 또 전해 들었던 암영이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행동이니까.

그러나 정작 쿠훌린을 경악하게 한 일은 따로 있었다.

“그날, 루시엔은 은월검을 발현했다.”

당시 쿠훌린은 일루산과 팽팽한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쿠훌린을 카이라가 기습했다. 일루산과 카이라는 이내 협공 체제로 돌입했고, 쿠훌린은 큰 위기에 처했다. 그때, 루시엔이 은월검을 발현해 카이라를 베었다.

쿠훌린과 벨락은 두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전투가 끝나자마자 루시엔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 기술을 발현한 것이냐고.

루시엔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답했다.

‘너를 살리기 위해서였어. 쿠.’

그랬다.

쿠훌린에게 ‘쿠’라는 별명을 지어준 이는 루시엔이었다.

언젠가 쿠훌린이 했던 말이 나의 머리를 스쳤다.

‘그래, 맞아. 내 이름은 쿠훌린이야. 쿠는 친구가 지어준 별명이지. 좋은 녀석이었어. 그리고 엄청나게 강했지.’

“그날의 전투로 많은 용병이 죽었다. 특히 지휘관급 용병들은 대부분 전사했지. 그 혼란을 수습하고, 살아남은 이들을 규합한 이가 루카스와 벨레트다. 그렇게 페르디나 최강의 용병단 ‘황금의 검’이 만들어졌다.”

루카스는 쿠훌린 일행에게 함께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쿠훌린은 거절했다.

루시엔이 떠났기 때문이다.

“루시엔은 아무런 말 없이 종적을 감췄다. 녀석을 찾기 위해 대륙 곳곳을 떠돌았지만 만나지 못했지. 그러던 중 벨락이 내게 섬으로 돌아가자고 제의했다. 알고 보니 벨락에게는 혼약자가 있었더군. 벨락은 내가 꼭 결혼식에 참석해야 한다며 으름장을 놨고, 나는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스승님이 조금 그리웠거든.”

“호오.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겝니까. 하지만 결국 단장은 섬으로 돌아오지 않았지요.”

쿠훌린이 은월섬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흰 새 여관에서 만난 어느 아름다운 여인 때문이었다.

쿠훌린은 그녀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그래서 벨락은 홀로 섬으로 돌아가야 했고, 쿠훌린은 항구 도시 브리즈에서 선원 생활을 하며 그녀와의 사랑을 키웠다.

“내 인생에서 가장 꿈같던 시절이었다. 리아논은 정말 천사처럼 아름다웠지.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리아논이 수줍은 얼굴로 내게 임신 소식을 알렸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어. 우리는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게 점점 배가 불러오는 리아논과 나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

쿠훌린은 임신한 리아논을 위해 선원을 그만두고 흰 새 여관에서 일했다.

그러던 중, 생각지 못한 손님이 여관을 찾아왔다.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찾아 헤맬 때는 만날 수 없더니, 제 발로 내 앞에 나타날 줄이야. 나는 반갑게 루시엔을 맞았다. 게다가 루시엔은 혼자가 아니었지.”

루시엔의 곁에는 한 여인이 있었다. ‘이자벨’이라는 이름의 그 여인은 아이를 밴 상태였다.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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