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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3

113화 라플라스 (3)

113화 라플라스 (3)

“루시엔과 이자벨은 흰 새 여관에 머물렀다. 비슷한 시기에 임신한 리아논과 이자벨은 금세 가까워졌지. 이자벨은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따뜻하고 친절한 여자였어.”

쿠훌린과 루시엔은 종종 대련했다.

두 사내가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기도 했다.

‘어이 루시엔. 너는 왜 늙지 않는 거지? 처음 봤을 때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잖아.’

‘하하하. 네가 겉늙은 거지, 쿠. 그 지저분한 수염부터 당장 어떻게 하는 편이 좋을걸? 분명 리아논도 좋아할 거야.’

“대련을 마치고 여관에서 마시는 맥주는 각별했지. 그렇게 우리 네 사람은 가족처럼 지냈다. 아, 대륙에서 가장 겉늙은 사내인 브란델도 포함해서 말이야.”

시간이 흐를수록 쿠훌린은 점점 더 루시엔, 이자벨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울러 그는 대륙에서의 생활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더 이상 쿠훌린은 스승 몰래 대륙으로 도망쳤던 철부지가 아니었다. 그는 한 여인의 남편이자, 곧 태어날 아기의 아버지였다. 그것이 그의 내면에 숨어있던 책임감을 일깨웠다.

“나는 루시엔에게 제안했다. 리아논과 이자벨이 출산을 마치면 함께 섬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리아논은 섬 출신이지만, 루시엔과 이자벨은 외부인이니까.”

쿠훌린에게는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스승의 오랜 염원이었던 ‘은월섬의 맹주’ 자리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두 사람을 섬에 데려갈 생각을 했다.

그러나 루시엔은 쿠훌린의 제의를 거절했다.

이유도 묘했다.

‘쿠. 내가 그곳에 가는 길을 알게 되는 것은 좋지 않아.’

‘그게 무슨 말이지? 루시엔.’

루시엔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을 뿐, 납득될 만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루시엔은 이따금 모습을 감췄다.

처음에는 하루 이틀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시일이 길어지고, 빈도도 늘었다.

그렇게 보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루시엔에게 쿠훌린은 말하려 했다. 이자벨의 출산이 머지않았으니 그녀의 곁을 지켜주는 것이 좋겠다고.

“루시엔은 바다를 보는 것을 즐겼지. 그날 밤도 루시엔은 홀로 해안에서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쿠훌린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루시엔이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화 상대가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술에 취해 혼잣말이라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어. 루시엔에게서는 조금의 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루시엔.’

루시엔은 쿠훌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바다를 보며 계속해서 무어라 속삭였다. 그의 음성은 작지만 거칠었고, 깊은 분노 같은 것이 맺혀 있었다.

‘아. 쿠.’

그러던 어느 순간, 루시엔이 쿠훌린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쿠훌린은 루시엔에게 누구와 대화하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루시엔은 혼잣말이었다고 답했다.

납득하기는 어려웠지만 쿠훌린도 더는 묻지 않았다.

‘루시엔. 당분간은 이자벨의 곁을 지켜주는 것이 좋겠어.’

‘그래. 네 말이 맞아. 쿠.’

이후 루시엔은 흰 새 여관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이전보다 따스하게 이자벨을 보살폈다.

쿠훌린은 안심했다. 그러면서 두 여인이 무사히 출산을 마치면 다시 한번 루시엔에게 섬으로 가자고 제안할 생각을 했다.

리아논과 이자벨의 배는 하루가 다르게 불러왔다. 그렇게 두 여인의 출산이 임박한 어느 날, 스카자하가 찾아왔다.

‘······스승님.’

‘벨락에게 들었습니다. 리아논의 출산이 머지않았다고. 참, 벨락은 얼마 전 건강한 사내아이를 품에 안았습니다. 제 아비의 어린 시절을 꼭 닮은 것이 어찌나 우습던지.’

벨락은 은월호가 출항할 때마다 흰 새 여관을 찾아왔었고, 그래서 리아논의 임신 사실을 알고 있었다.

‘출산은 고된 일이지요. 경험 많은 산파(産婆)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스카자하는 리아논을 돕기 위해 온 것이었다.

쿠훌린은 스카자하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어색했다.

스승이 자신에게 존대하는 것이.

‘저는 늙었습니다. 이제 그만 섬으로 돌아오시지요.’

그 말대로, 오랜만에 만난 스승은 늙었다.

쿠훌린은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자신의 뜻을 스승에게 밝힐 때라는 것을 알았다.

‘섬에 외부인을 들이시겠다는 겝니까? 안 됩니다. 은월섬의 존재는 결코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비밀입니다. 제국의 힘을 잊으셨습니까? 암영의 서슬 퍼런 마수를 정녕 잊으셨느냐는 말입니다. 그들이 은월섬의 존재를 알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스카자하의 노한 음성에 쿠훌린은 대꾸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스승이 두려웠고, 또 그녀의 말에는 틀린 부분이 없었다.

‘스스로의 입장을 자각하거라 쿠훌린. 오직 너 하나만을 바라보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가신들이 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냐! 천 년의 왕국이 모래알처럼 부서지던 날, 네 목숨을 구하기 위해 초개처럼 사그라졌던 이들의 죽음을 헛되이 만들 셈이더냐!’

그러나 이번만은 쿠훌린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간 미뤄왔던 은월섬의 맹주 자리에 오르겠다고 말하며, 루시엔과 이자벨을 섬으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그 정도로 쿠훌린은 두 사람을 사랑했고, 믿었다.

‘쿠훌린. 너는 정말로······.’

그리고 쿠훌린은 깨달았다.

스승은 노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슬픔에 빠져 있었다.

‘스승님. 저는.’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리아논과 이자벨의 진통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스카자하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쿠훌린에게 따뜻한 물과 깨끗한 천을 가려오라고 말하며, 은월섬에서 준비한 여러 물품을 챙겨 산모의 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나는 루나프레나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데미안, 너를 만났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쿠훌린은 이야기를 시작하며 이렇게 말했었다. 나를 처음 만난 것은 2년 전의 카론 늪지가 아니었다고. 이전에도 나를 만난 적이 있다고.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

그런데 그 오래전이라는 것이 설마 태어난 순간을 의미하는 것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나는 그날 쿠훌린과 리아논만을 만난 것이 아니다.

나는 루나를 만났다.

‘······내가 루나와 같은 날, 같은 방에서 태어났다고?’

물론 이 말에는 어폐가 있다.

당시 나는 데미안 라플라스가 아니었으니까.

내가 데미안이 된 것은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후의 어느 마석 광산에서였으니까.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지구에서의 삶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는다. 아득한 꿈처럼 여겨질 뿐이다. 그것을 증거하듯 아스트레아의 천칭은 이미 한계까지 오른(현실)쪽으로 기울었다.

그럼에도 나는 지구의 김우진일까. 아니면.

‘이 세계의 데미안일까.’

달빛나무 아래서 루나를 처음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루나를 보자마자 홀린 것처럼 빠져들었다.

[아스트레아의 천칭이 크게 기울어집니다.]

이후에도 루나를 볼 때면 나는 종종 운명과도 같은 끌림을 느꼈다.

그때마다 나의 감정을 대변하듯 천칭이 기울었다.

루나의 아름다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눈부신 모습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을까.

혹여 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루나와 어떤 운명의 실 같은 것으로 이어진 관계는 아니었을까.

소설에서는 허무하게 끊겼던 그 실이, 이 세계에서는 그 반동으로 더욱 강하게 나를 끌어당기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루나도.

두근.

돌연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뛰었다.

루나가 보고 싶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저 쿠훌린의 과거를 들었을 뿐인데.

그 안에서 루나와 한날한시에, 같은 방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인데.

무엇일까. 이 감정의 정체는.

“이후에도 우리는 한동안 흰 새 여관에 머물렀다. 갓 태어난 너희들이 긴 항해를 견디기에는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었지.”

쿠훌린은 스카자하를 설득해 루시엔 가족을 섬에 데려가려 했다. 그러나 스카자하는 그에 관한 대답 없이 돌아갔다. 일 년 후, 은월섬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배를 보내겠다는 말만을 남기고.

두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그리고 신기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한 침대에 뉘어놓으면 마치 서로를 알아보는 것처럼 까르르 웃었고,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면 불안해하며 울기 일쑤였다.

‘사랑스러운 루나프레나. 데미안이 그렇게 좋니? 그래서 언제까지고 함께하고 싶은 거니? 엄마와 아빠처럼?’

그렇게 말하며 리아논은 행복하게 웃었다.

“리아논은 루나 못지않게 데미안, 너를 사랑했다. 그래서 은월섬에서 너를 다시 만났을 때 무척 기뻐했지. 물론 너는 알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아니다. 나는 안다.

표면적으로 리아논은 나와 세실과 카인을 다르지 않게 대했다. 하지만 나는 리아논이 내게 건네던 따스한 눈빛과 감정을 기억한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아마도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여겨지는 그것.

‘여기 친구들과 함께 달빛나무 언덕에 다녀오너라. 아버지도 함께 가서 큰 공주를 보고 싶지만 어머니와 할 이야기가 있거든. 그리해 줄 수 있지?’

처음 은월섬에 도착했던 날의 기억.

그날 쿠훌린은 디네베와 우리를 달빛나무 언덕으로 보낸 뒤, 리아논에게 나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너희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나는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아이들을 지키겠다고. 루시엔과 이자벨과의 관계를 계속 이어 나가겠다고.”

그러던 어느 날.

루시엔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곧 돌아올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루시엔은 돌아오지 않았어. 이자벨은 점차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리아논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나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루시엔을 찾아 나섰다.”

쿠훌린은 대륙 전역을 누볐다. 그러나 루시엔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쿠훌린은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돌아와야 했다. 스카자하가 배를 보내기로 한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착한 흰 새 여관에서, 쿠훌린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이자벨이 데미안과 함께 사라졌다. 루시엔을 찾으러 가겠다는 쪽지 한 장을 남긴 채.

“머지않아 은월호가 도착했다. 루시엔과 이자벨을 찾고 싶었지만 더 이상은 나도 섬으로의 귀환을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지. 그래서 브란델에게 당부했다. 두 사람이 돌아오면 무슨 수를 쓰든 붙잡아 놓으라고. 소식을 듣는 즉시 달려가겠다고.”

항해하는 내내 리아논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리아논 이상으로 슬퍼 보였던 이는 다름 아닌 루나였다.

‘사랑스러운 루나프레나. 울지 말렴. 데미안은 돌아올 거란다. 언젠가 너희들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서로를 마주하게 될 거야. 어떻게 아느냐고? 사실 이건 비밀인데, 엄마는 가끔 미래를 볼 수 있단다? 거짓말 같다고? 그러면 우리 내기할까? 엄마의 말대로 될지 안 될지 말이야.’

루나를 달래며 리아논은 아픔을 극복해 갔다. 그러나 루나는 쉬이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종래에는 극심한 멀미 증세를 보였다.

쿠훌린과 리아논으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아르테미스와 이그드라실을 포함한 은월섬의 그 누구에게서도 뱃멀미 증세가 나타난 적이 없었으니까.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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