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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6

115. 소꿉친구 – 조건

어딘가 낯이 익다.

‘내가 저걸 어디서 봤었나? 아니, 그보다도…’

탐이 났다. 레브는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하리에의 가슴골에 얹혀있는 저 보석을 갖고 싶었다. 그런데 이 감정은 너무 뜬금없는 것이어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면에 죄송하지만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하리에가 차분하게 입을 열어 그의 주의를 환기했다. 그럼에도 레브의 눈동자는 그녀의 가슴골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고, 하리에 가이단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이 사람한테 허락을 받으라고 하셨을까?’

오른 왕국의 무역도시 보스포에서 그녀는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 ‘팔라스 테르탄’이라는, 신께서 그녀에게 점지해줬음이 틀림없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단지 쓰레기 왕자들에게 시집가지 않으려 어떻게든 맺어지고 싶은 탈출구에 불과했지만, 그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하리에는 그의 상냥하고 아름다운 심성에 푹 빠져들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팔라스 테르탄의 마음도 그녀와 같았고, 두 사람은 노을이 지는 테라스에서 입맞춤을 나누었다.

그때, 그이는 자신의 할아버지인 라퍼트 테르탄 공작이 우리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으시려 함을 알리며 도움을 청했다.

같이 공작가로 가자고 부탁했고, 하리에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공작가가 아니라 지옥으로 들어가자고 했어도 그리했을 터라 그녀의 수긍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왔다.

며칠 전에 연락했을 때는 다녀오라 허락하셨는데, 갑자기 수도로 돌아오라 명하셨다.

아버지께 정말 죄송하지만, 하리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어찌 이 남자를 두고 떠나겠는가?

그녀는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떠날 채비를 꾸렸다. 하지만 총관과 기사들이 극구 만류하며 움직이지 않아서 그녀는 여행을 떠날 수 없었고, 총관의 고자질을 들은 팔라스도 그녀를 다독였다.

결국, 두 연인은 다음을 기약했다.

팔라스는 할아버지를 어떻게든 설득하겠노라고, 하리에는 아버지께 간청을 드려 자신이 공작가로 찾아가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과로로 실신하려 하는 시녀들을 보스포에 내버려 둔 채, 하리에는 서둘러 네비스로 돌아왔다.

단장할 여유도 없이 도착한 즉시 아버지께 달려가 소녀는 그이를 사랑하며 공작가에 가고 싶다고 졸랐다.

한데 아버지의 반응이 이상했다.

아버지는 머뭇거리며 쉽게 허락해주지 않으셨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데 입을 열기를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사실 그때 팔라스 테르탄은 죽고 없었다. 그는 이로타시 강을 건너는 도중에 괴한들의 습격을 받았고, 하르베이 변경백은 이를 진작에 전해 들었다.

딸에게 돌아오라 명하길 정말 잘했다. 자칫했으면 내 딸까지 휩쓸려 죽을 뻔하지 않았는가.

가이단 후작은 ‘주군’의 통찰에 놀라워하는데,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돌아온 딸은 팔라스 테르탄이라는 젊은이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팔라스가 그렇게나 마음에 들었는지 귀족의 체통도 잊어버리곤 그의 장점을 해맑게 늘어놓았다.

아버지도 마음에 들어 할 훌륭한 사윗감이라면서 죽고 없는 그와 결혼하기 위해 공작의 허락을 받아오겠다고 졸랐다.

가슴이 아프다.

딸에게 그의 부고를 언제고 알려주기는 해야 할 것이었으나, 후작은 주군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처우를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딸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겠으나, 그녀의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미혼인 하리에 가이단은 그간 영애로서 누려온 풍족한 삶의 대가를 아직 치르지 않은 것이다.

시집가지 못한 애물단지로 남아 다른 귀족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평생 노처녀로 늙어갈 것이 아니라면, 하리에는 팔라스를 가슴에 묻고 다른 혼처를 찾아야 할 것이었다.

그게 그녀에게도 나은 일이리라.

그리고, 그녀의 혼처는 사실 결정되어 있었다. 팔라스 테르탄은 대안에 불과했다.

테르탄 공작가와의 혼약이 무위로 돌아갔으니 이제 하르베이 가이단 후작은 예정대로 딸을 왕자들에게 시집보내든, 그러지 않는 대가로 가문이 고립되는 것을 받아들이든, 결정해야 했는데, 마침 주군이 보낸 물건들이 밀려 들어왔다.

대형 수레 서른 대분의 무기들.

후작은 주군의 의도를 눈치챘다. 그분께선 반란을 일으키려 준비하심이 틀림없었다.

그는 들어온 무기들을 숨겼다.

하필이면 수레들이 저택으로 보내져서 곤란했으나, 남몰래 북동쪽에 있는 가이단 가문의 영지로 보내두었다.

그리고 에브니 드라진 후작을 찾아갔다. 아까 주군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실은 그도 반란을 염두에 두고 준비하고 있었다.

딸을 왕자들에게 시집보내고 싶지 않다.

주군의 뜻을 따르면 가문이 고립되지도 않을 것이다.

왕을 알현한 주군께서 걱정하지 말라 하셨으니 어떤 묘안이 있으실 거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드라진 변경백이 선을 그었다.

“명분도 없이 무작정 반란을 일으키자는 건가? 자네 딸의 사정을 딱하게 생각하지만 그럴 수는 없네. 턱도 없는 일이고!”

“……”

“정 딸이 걱정되거든 다른 혼처를 찾아 시집을 보내게. 그리고 우리와 함께하세. 구아닌 남작은 나와 뜻을 같이하기로 약속했어. 자네까지 합류하면 변경백만 두 명이야. 여기에 ‘오거튼 백작’까지 설득한다면 왕실도 섣불리 우리를 건드리지 못할 게야.”

오거튼 백작가.

‘소아렐 데메트리 오거튼’이라는 마법사가 가주(家主)인 귀족 가문이었다.

오거튼 백작가는 마법사 가문이 아니었다. 마법사는 혈통에 구애받지 않고 정말 희귀하게 탄생하는데, 백작가에서 운 좋게 마법사가 태어났을 뿐이었다.

오거튼 백작의 이름 ‘데메트리’에서 알 수 있듯이, 오거튼 백작은 ‘볼리뉴 마탑’에서 수학(修學)한 마법사였다. 오른 왕국 서부에 위치한 그 마탑은 대륙에 존재하는 다섯 마탑 중 ‘마나 중첩이론’이 가장 발달한 마탑이었다. ‘데메트리’라는 미들네임(middle name)은 학파를 상징하는 이름으로서 볼리뉴 마탑 출신의 마법사들이 가져가는 것이었다.

그러니 오거튼 백작가의 힘은 가이단, 드라진 변경백 가문에 못지않았다.

오른 왕국 이곳저곳에 파견된 마법사들 대부분이 볼리뉴 마탑 출신이었고, 제아무리 용병마냥 돈을 받고 파견을 나간다지만 마법사들의 유대란 지적인 공명(共鳴)으로 강력하게 얽힌 것이기 때문이었다.

드라진 후작이 못을 박았다.

“갑자기 무슨 생각으로 반란을 도모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친구. 마음을 접으시게. 아직은 때가 아니야. 그보다도 우리와 함께하겠는가? 함께한다면 충분히 이 역경을 극복할 수 있네.”

하지만 가이단 후작은 끝내 어물어물, 확답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친우의 말이 옳았고, 매혹이 다소 약해져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주종 관계 업적이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그 자리에서 매혹이 깨졌으리라.

해서 하르베이 변경백은 딸에게 기다리라 일렀다. 주군의 복귀를 기다리면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중언부언하는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하리에 또한 그런 아버지를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거역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팔라스가 죽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고, 아버지가 말하는 손님의 허락을 받으면 팔라스를 찾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부풀어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이 사람한테 허락을 받으라고 하셨을까?’

하리에 가이단은 아버지가 누누이 중요한 분이라고 강조한 손님이 그녀의 가슴골을 쳐다보는 것이 불쾌했으나, 언급하지 않았다.

이 싸늘한 인상의 청년과 아버지가 무슨 관계일지를 추론하며 조심스럽게 간청했다.

집사의 말로는 윌터 총관과 관련이 있는 사람 같다고 했는데…

“저는 테르탄 공작가로 가고 싶습니다.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팔라스 테르탄이라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알고 있다.”

청년이 하리에의 말을 무례하게 끊었다.

“네가 테르탄 공작가의 후계자를 보스포에서 만난 것도, 왜 그곳엘 가려 하는지도 알고 있으니 내게 부연 설명은 불필요하다.”

하리에 가이단은 깜짝 놀라 아버지를 곁눈질했다.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이길래 가문의 속사정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 앞에서 나를 하대하는가?

그리고 나는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계셨다.

이상하다.

하리에는 그 무언의 긍정이 섬뜩할 정도로 괴이하게 느껴졌다.

설령 이 오른 왕국의 왕이라 할지라도 내게 이리 하대한다면 아버지는 불쾌함을 표시하셨을 것이었다.

하다못해 눈썹을 들어 내게 참으라는 의사표시를 전하던가, 어떤 방식으로든 반응하셨을 터인데…

대귀족의 영애로 자라온 그녀는 이 미심쩍음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뭔가 잘못됐다.

어쩌면 아버님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는지도 모른…

“그보다도 그 목걸이는 무엇이냐? 어디서 구한 것이지?”

하리에가 검붉게 타오르는 눈빛을 마주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가슴골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이 외간남자의 눈빛이 그다지 불쾌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하대도 그리 문제 삼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녀는 존칭을 골라 답했다.

“이것은 저와 사랑을 약속한 팔라스라는 분이 선물해주신 것입니다.”

“…그런가.”

레브는 망설였다. 저 보석이 왜 낯이 익은지, 왜 탐이 나는지 모를 일이어서 그는 “내가 왜 이러지?” ─ 곰곰이 생각을 가다듬는데, 하리에가 물었다.

“저… 그러면 소녀는 공작가로 떠나도 좋겠습니까? 아버님께서 손님께 허락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조마조마하게 그의 답변을 기다렸다.

어째서 아버지께서 이분의 허락을 받으라 하셨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으나, 그녀도 어쩐지 납득하고 있었다.

레브는 힐끔 하르베이 변경백을 살폈다.

팔라스 테르탄은 이미 죽었을 텐데… 표정을 보아하니 그는 알고도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좋다. 떠나도록 해라.”

하리에의 얼굴이 활짝 밝아지고, 하르베이 변경백의 눈에 의문이 떠오르는 순간 레브가 덧붙였다.

“하지만 당장은 안 되고, 올겨울이 지난 뒤에나 떠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추운 겨울에 여행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팔라스 테르탄이 공작의 허락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냐? 그때 혼인을 준비해 만나는 편이 여러모로 낭비가 적을 것이다.”

“저, 정말이신가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단, 조건이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환희에 휩싸여 싱글벙글, 표정이 무너진 하리에는 어떤 조건이든 받아들일 수 있다는 듯이 양손을 꼭 모으며 물었다. 레브의 눈동자가 욕망에 타오르는 것도 모르고선.

“그건…”

– 쾅!

그때, 밖에서 무언가가 박살이 나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후작이 벌떡 일어나 집사를 불렀다.

“무슨 일이냐?”

“죄송합니다. 지금 가서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래 알았… 아니다. 내가 가서 확인해보도록 하지. 대화 중에 죄송하지만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가이단 후작은 레브가 나갔다 오라며 은밀히 손짓한 것을 알아차리곤 말을 바꾸었다. 그는 딸과 주군이 대화하도록 내버려 두고 서둘러 소동이 난 곳을 찾아갔다.

– 히히히히히히히힝!!

그곳은 저택의 마구간이었는데, 하인들도 우르르 몰려나와 있었다. 다가가서 확인해보니 조금 전에 났던 커다란 소리는 레브의 말이 마구간 격벽을 걷어차 때려 부순 소리였다.

새까만 흑마가 되어 무지막지하게 힘이 강해진 ‘반테’가 거칠게 울었다.

그놈은 격벽을 부수고 옆 칸에 있던 암컷 말에게 달려들어 짝짓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억지로 떼어내려 해도 고개를 세게 휘두르며 이빨을 보이는 통에 하르베이 후작은 저 발정 난 말을 내버려 두라 지시했다.

이런 식으로 교미하는 것은 아무래도 암컷 말에게 좋지 않은 일이라 말의 생리를 잘 아는 후작으로서는 떨떠름했지만, 아들이 죽은 이후로 그는 말에게 관심이 없었다.

가이단 후작이 주군과 딸이 대화하던 응접실로 되돌아왔다.

“조금 늦었습니다. 레브 님의 말이 소동을 피운 것이었는데, 별일은 아니었습니다.”

바깥의 사정을 설명하며 방에 들어선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붉게 상기된 표정의 하리에와 만족스럽게 미소짓는 레브였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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