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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6

116화 성년의 밤 (1)

116화 성년의 밤 (1)

“아하하하! 오늘도 이겼다!”

신이 나서 외친 루나가 케일라와 짝,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러고는 쿠훌린 같은 표정으로 트리스탄을 약 올렸다.

“트리스탄, 너는 성년이면서 미성년인 우리에게 지면 어떡하니?”

“너도 내일이면 성년이잖아!”

“아직은 아니거든? 메롱.”

내일은 루나의 16세 생일이다.

그 말은 즉, 나와 세실과 카인의 생일이다.

그렇다.

내일 우리 네 사람은 성년이 된다.

“디네베가 맛있는 음식을 많이 만들어준댔어! 부럽지? 트리스탄.”

디네베는 요리를 잘한다. 평소 리아논이 식사 준비하는 것을 자주 도왔기 때문인데, 그래서인지 디네베는 오늘 아침부터 음식 재료를 다듬고 있었다.

‘디네베! 내가 도와줄게!’

‘아, 아니, 괜찮아. 루나는 대련해야 하잖아.’

루나가 도와주겠다고 하자 디네베는 상냥하게 웃으며 사양했다. 나는 디네베의 마음을 안다. 루나는 모든 손재주가 검술에만 집중된 유형이다. 다시 말해 요리를 엄청나게 못 한다는 것.

나는 농담 삼아 그러면 내가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디네베는 수줍은 얼굴로 고맙다고 말하며,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내 뒤에서 세실이 ‘아.’ 하는 소리를 냈고, 카인은 ‘호오.’ 하며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당황한 나를 구한 것은 트리스탄이었다. 트리스탄은 ‘오늘이야말로 꼭 루나케를 박살 내자’면서 성으로 나를 찾아왔다. 물론 케일라도 있었다. 케일라는 늘 강아지처럼 트리스탄을 따라다니니까.

“그리고 아저씨가 내일 술을 마시게 해준댔어!”

루나는 무척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사실 술맛이 궁금하다기보다는 한 사람의 성인으로 대접받는 기분이 좋은 듯했다.

“나는 벌써 마셔봤거든? 아버지가 깜짝 놀라셨어. 술을 그렇게 잘 마시는 걸 보니 장차 훌륭한 전사가 되겠다고.”

거짓말이다.

소설 속의 트리스탄은 술을 한 잔만 마셔도 쓰러져 잠드는 알코올 찌질이다.

“데미안. 너도 궁금하지! 술이 어떤 맛일지 말이야! 아아, 드디어 내일 나는 숙녀가 되는 거야. 이제 결혼할 수도 있는 나이라고! 헤헤헤.”

‘결혼’이라는 단어가 루나의 입에서 나오자 트리스탄이 얼굴을 붉혔다.

돌연 루나가 발뒤꿈치를 들어 케일라와 눈높이를 맞췄다. 뭘 하는 것인가 했더니, 루나는 케일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으스대고 있었다. 내일부터 언니라고 부르라고.

그러자 트리스탄이 루나는 내일이 되기 전까지는 자신을 오빠라고 불러야 한다며 주장했고, 덕분에 일대일 대전을 빙자해 응징을 집행한 루나에게 가루가 되도록 얻어터졌다.

***

“성년의 아침이다 꼬마들아! 으하하하하!”

이른 아침부터 3층으로 뛰어 올라온 쿠훌린이 차례로 방문을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한 루나는 지난밤 걸쇠를 걸어 잠그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쿠훌린은 아무렇지 않게 방문을 뜯어내 버렸다.

“아악! 뭐하는 거예요! 문이 망가졌잖아요!”

“축하한다 큰 공주! 으하하하!”

은월섬에서는 성년이 된 아이(?)들을 각자의 집에서 축하해주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이날만큼은 가족 모두가 외출을 자제하고 하루 종일 집에서 맛 좋은 술과 음식을 먹으며 함께하는 것이다.

“일어나라 데미안! 세실! 카인! 하루는 짧다! 게다가 성년식의 하루는 일평생 한 번밖에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날이다!”

저렇게 소리 지르면 리아논이 안정을 취할 수 없을 텐데, 생각하며 나는 방 밖으로 나왔다.

저만치에서 카인이 부스스한 머리로 하품하는 것이 보였다. 세실도 졸린 눈을 비비며 멍하니 쿠훌린을 보고 있었다.

“어서 세수하고 1층으로 오거라! 디네베가 새벽부터 아주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그것만이 아니다! 너희들이 깜짝 놀랄만한 기쁜 일이 기다리고 있으니 기대하도록! 으하하하하!”

폭풍처럼 우리의 얼을 쏙 빼놓은 쿠훌린이 쿵쿵대며 1층으로 사라졌다. 저러다가 언젠가 계단이 무너질 것 같은데.

세수를 마친 우리는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루나는 생기 가득한 두 눈을 깜빡이며 아기새처럼 조잘댔고, 세실도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카인은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녀석이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루나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나와 세실과 카인도 놀란 눈으로 자리에 멈춰 섰다. 수많은 음식 때문이 아니었다. 쿠훌린이 말했던, ‘너희들이 깜짝 놀랄만한 기쁜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엄마아아!”

루나가 리아논에게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리아논도 루나를 마주 안았다.

“숙녀가 된 첫날부터 울면 어쩌니.”

루나는 쉬이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따스한 목소리로 루나를 어르고 달래던 리아논이 우리를 바라봤다.

“많이 자랐구나. 데미안. 세실. 카인.”

리아논이 우리에게 손짓했다.

나는 계속 코끝이 시큰거렸다. 억지로 눈물을 참으며 다가가자, 리아논이 루나와 함께 나를 품에 안았다.

“세실. 카인. 이리 오렴.”

세실과 카인이 우리를 끌어안는 것이 느껴졌다. 세실은 울고 있었다. 카인의 몸도 엷게 떨렸다.

그런 우리를 보며 쿠훌린과 디네베가 미소 지었다.

.

.

.

오랜만에 다 함께 즐거운 아침 식사를 하고, 망가진 루나의 방문을 수리하고, 각종 간식거리를 두 손에 모아든 우리는 큰 방에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리아논의 안색은 다소 창백했지만, 얼마 전 은월섬으로 돌아왔을 때 봤던 모습에 비하면 생기가 넘쳤다.

“엄마! 그래서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냐면······!”

루나는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브란델의 노안이 심각하다는 이야기서부터, 혹한의 땅에서 만난 눈새, 검은 백합을 지키던 그림자 늑대, 카인의 용병단 푸른 매, 용장 루카스와 벨레트 단장, 바람숲의 엘프, 마운틴포지 드워프와 기계차, 살림바르 왕국의 모래사막과 바보 변태 왕자 등등등.

“그 변태 왕자가 내게 청혼하기도 했어! 뭐라고 했느냐고? 당연히 거절했지! 아하하!”

루나는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즐겁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루나는 종종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고마워.’ 하고 입 모양으로 말하며 웃었다.

그러나 나는 마냥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리아논을 보자 쿠훌린이 해줬던 과거 이야기가 떠올랐고, 어찌 됐든 나의 생물학적 아버지인 흑기사가 쿠훌린을 죽일 뻔했다는 사실이 머리를 맴돌았다.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한 일이 아닌데도. 아니, 따지고 보면 ‘김우진’과 흑기사는 아무 관련이 없는데도. 그런데 왜일까. 왜 이렇게 저들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 없는 걸까. 어쩌면 나는 이제야 처음으로 카인을 향한 세실의 마음에 공감하는지도 모른다.

“조조아킴은 정말 재밌는 녀석이었어! 근데 활쏘기 실력은 엄청났고! 진짜 백발백중이었어!”

루나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나는 생각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흑기사는 왜 쿠훌린을 공격했을까. 쿠훌린을 통해 들은 그는 독특한 면이 있었지만 악인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는 쿠훌린, 리아논, 브란델과 가족처럼 가깝게 지낸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모르가나의 흑마법에 타락한 것일까.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 쿠훌린과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의 실력자라면 그녀에게 그리 쉽게 당할 리 없다. 그렇다면 속내를 숨기고 있었던 걸까.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쿠훌린에 접근했다면?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는 왜 종종 연기처럼 모습을 감췄을까. 왜 갓 태어난 자식과 아내를 버리고 떠나야 했을까. 밤의 바다를 바라보며 형체 없는 누군가와 나눴던 대화는? 함께 섬으로 가자는 쿠훌린에게 말했던 묘한 대답은? 아르테미스도 아닌 그가 은월검을 발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데미안. 괜찮아?”

세실의 목소리가 나를 늪의 바닥에서 끌어냈다.

“땀. 흘러.”

세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주저하는 세실의 손에는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아. 고마워.”

침착을 가장하며 답한 나는 손수건을 건네받아 이마를 닦았다. 몸이 으슬으슬했다. 얼굴만이 아니라 전신에 비 오듯 땀이 흘렀다. 나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하며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내 방의 침대에 앉아 있었다.

“······.”

피식, 조소가 흘렀다.

나는 그동안 어떤 우월감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소설을 통해 읽은 이 무한회귀의 세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이 세계의 등장인물에 대해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다고.

나는 마음속 깊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세실을 답답하다고 여겼다.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 왜 죄책감을 느끼는 걸까. 왜 카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스스로의 의지가 없는 꼭두각시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인형처럼.

그러나 실상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나였다. 알고 있다고 여겼지만 무지했고, 오만했다. 디지털 화면 속을 흐르는 몇 줄의 활자 따위로 타인의 인생을 속단했다. 그들의 생각과 정의를 재단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이성적인 인간이라고 판단하며 우쭐댔다.

꼬인 실타래처럼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지구의 김우진이다. 김우진은 소설 속 등장인물이 아닌, 독자다. 이 모든 상황에 괴로워할 필요도,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는 다른 세계의 인물이다.

나는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김우진이었던 시절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이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지구에서의 기억이 흐릿하다. 빛바래 희미해져 가는 오래된 사진 속 풍경처럼. 돌연 낮은 속삭임이 머리를 울렸다. 그 시절은 정말로 내게 현실이었나?

똑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끼익, 방문이 열렸다.

나는 멍하니 그곳을 돌아봤다.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방문을 수리해야겠구나. 소음이 있어.”

다시 끼익, 방문을 닫은 리아논이 침대로 다가와 내 곁에 앉았다.

나는 리아논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려고 하지 않았지만, 나의 본능이 그렇게 만들었다.

“고맙구나 데미안. 나와 디네베의 병을 치유해 줘서. 그이를 구해줘서.”

리아논이 내 손을 잡았다.

“여행 내내 루나를 돌봐주었다지? 루나는 아직도 아이 같아서 손이 많이 갔을 텐데. 사실 그 아이는 다섯 살 이후로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것 같단다.”

리아논이 작게 웃었다.

“어떻게 이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데미안, 너는 우리 가족 모두를 구했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리아논의 손이 부드럽게 내 손등을 어루만졌다.

“그이에게 들었단다.”

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쿠훌린에게 들었다는 이야기가 무엇일지 짐작했기 때문이다.

“2년 전의 일이 떠오르더구나. 마을 앞에서 그이와 함께 온 너를 봤을 때, 나는 직감했단다. 그 아이구나. 루시엔과 이자벨의 아이, 데미안.”

포근한 것이 나를 감쌌다.

나는 리아논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녀의 손길이 나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이가 마침내 해냈구나. 데미안을 찾았구나. 그리고 이렇게 다시, 널 만나게 해주었구나.”

온화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너를 사랑한단다. 데미안.”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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