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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7

116. 소꿉친구 – 연회

네비스 왕성에서 연회가 열렸다.

왕성에서 연회가 벌어지는 것이야 일주일이 멀다고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규모가 대단했다.

오른 왕국의 왕이 새해를 맞아 주관한 연회였기에 왕성의 모든 인력이 총동원되었고, 모든 귀족에게 초청장이 발송되었다.

연회장으로는 왕의 집무실이자 심처인 가장 안쪽의 홀이 선택되었다.

네비스 왕성은 시원시원한 복도를 뚫어둔 대가로 각각의 홀이 다소 작은 편이어서 큰 규모의 연회가 열릴만한 장소가 그곳밖에 없었다.

홀 중간중간에 놓인 다섯 개의 계단이 다소 불편하겠으나, 한 계단에서 다음 계단까지의 거리가 충분히 멀어서(스무 걸음)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건 일종의 경계선이 되어주었다.

홀의 가장 안쪽이자 가장 높은 첫 번째 계단에는 왕과 왕비, 왕자들을 포함한 왕족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다음 계단에는 제1 왕자를 섬기는 귀족들이, 세 번째 계단에는 제2 왕자를 섬기는 귀족들이 몰려들었다.

네 번째 계단은 중앙을 넓게 비우고 주위로 악사들을 배치함으로써 젊은 귀족들이 춤을 추며 사교활동을 벌이는 무도회장이 되었고, 다섯 번째 계단에는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적인 귀족들(혹은 떨거지들)이 머쓱하게 어슬렁거렸다.

물론, 가이단 후작과 드라진 후작과 같은 거물들도 그곳에 있었기에 그렇게 초라하기만 한 장소는 아니었다.

마지막, 거대한 황동문 바로 앞의 여섯 번째 칸에는 여러 개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이곳은 귀족들이 사용할 공간이 아니었다. 이미 각 계단마다 충분한 테이블과 의자가 놓였기에 귀족들이 여기까지 내려와 휴식을 취할 이유가 없었다. 여기는 왕궁의 시녀들이 각종 음료와 음식들을 준비해놓았다가 서빙을 하기 위한 작업장으로 쓰이는 곳이었다.

뭐, 구분이 대강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지 각 계단을 넘어서는 안 될 엄격한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녀들이 위아래로 서빙하고, 춤 신청을 받은 영애들과 젊은 귀족들, 심지어 기사들까지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통에 전체적으로는 길거리의 시장통처럼 북적거렸다.

단지 각 파벌을 대표하는 주요인물들의 위치가 그러했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계단 한쪽 벽, 높은 천장에서부터 길게 드리운 커튼에 등을 기댄 드라진 후작이 물었다.

“정말 자네가 한 짓이 아닌가?”

키가 작은 그는 곁에서 술을 홀짝이는 하르베이 가이단 후작을 미심쩍게 올려다보았다.

네비스의 두 대형 패밀리가 사라졌다. 몇 안 되는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웬 미친 기사가 그들을 무차별로 도륙했다고 한다.

깡패들 따위야 죽거나 말거나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하필이면 모두 왕자들을 섬기는 귀족이 후원하는 패밀리들이었고, 드라진 후작은 ‘반란’을 언급했던 친구를 의심하고 있었다.

“아닐세. 나와는 무관한 일이야.”

가이단 후작은 내심 찔리는 구석이 있으면서도 무심한 척 발뺌했다.

드라진 후작의 추궁이 이어졌다.

“정말인가? 아직도 그… 어처구니없는 일을 꾸미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렇네. 걱정하지 말게.”

친우의 선의 어린 질문에 이렇게 답해줄 수밖에 없는 게 미안하지만, 그는 주군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의 눈동자 뒤편에서는 묘한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이 친구를 어떻게 설득한다…’

주군께서는 에브니를 설득해 반란에 동참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는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매번 “아직도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라며 선공을 취해왔기에 뭐라 말할 틈이 없었다.

“…흐음. 자네, 나한테 뭔가 숨기… 으음! 드디어 나타났구만.”

무어라고 말하려던 드라진 후작이 등으로 벽을 튕기듯 밀어내고는 성큼성큼 걸었다.

그는 황동문을 지켜보며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오거튼 백작! 오랜만이구려. 이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소. 여행은 잘 다녀오셨소?”

곱상한 학자풍의 사내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드라진 후작님. 예, 잘 다녀왔습니다. 성과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지만요.”

소아렐 데메트리 오거튼 백작.

그는 세상의 모진 풍파를 겪어본 적이 없다는 듯, 보드라운 턱선을 가진 남자였다.

풍파를 겪어보기에는 상당히 젊은 사람이기도 했는데, 그는 사십 대에 들어선 드라진 후작보다 열다섯 살은 어려서 이제야 서른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이십 대 후반은 어린 나이가 아니었고, 이를 대변하듯 오거튼 백작의 차분한 표정에는 깊이가 있었다.

보라색으로 착각할 만큼 진한 분홍색 눈동자가 바짝 마른 시선으로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에 더해 귀족이면서 마법사라는 그의 독특한 위치 때문에 그를 거만하고, 만물을 얕잡아보는 인물로 오해할지도 모르겠으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그는 겸손하고, 지식에 목마른 학자였다.

단지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았기에 그렇게 메마른 눈빛이 나왔을 뿐이었다.

“마탑에서 나오자마자 여행을 다녀오시다니… 부친께서 걱정하지는 않으시던가요?”

드라진 후작이 지나가는 시녀에게서 술잔을 받아 건네주었다. 하지만 오거튼 백작은 이를 정중히 사양하고는 달짝지근한 주스를 선택해 한 모금을 홀짝, 마셨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님께 혼이 났습니다. 가문을 내팽개치고 외국에 다녀왔다고요. 이래서 제가 가문을 물려받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백작은 솔직하게 말했다.

매우 어릴 적에 마법사의 재능을 발현한 그는 마탑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고, 그만큼 귀족답지 않은 모습으로 성장했다.

그러면서도 태생이 귀족인지라 다른 마법사들처럼 폐쇄적이지도 않아서 그는 집단을 기준으로 분류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인물이었다.

드라진 후작이 회심의 미소를 머금으며 운을 떼었다. 아무래도 귀족의 대화보다는 직접적인 게 좋겠지.

“그러고 보니 백작께서는 아드님을 이제야 보셨겠군요.”

“아… 부끄럽게도 그렇습니다.”

마탑에서 공부를 마치고 나오기가 무섭게 소아렐 데메트리는 가문을 물려받으며 결혼했다.

이십 대 초반, 많이 늦은 나이에 그보다 여섯 살이 어린 보칼리 자작가의 영애와 급히 혼례를 치렀는데, 오랜 여행 끝에 돌아와 보니 그에겐 아들이 생겨 있었다.

무려 다섯 살이나 된 아들이.

소아렐이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전 정말 못된 아버지가 될 것 같습니다. 아니, 이미 못돼먹은 아버지이지요…”

“허허, 너무 자책하지 마시지요. 이제부터라도 가까이하시면 됩니다. 그보다도 아직 아들과 관계가 어색하실 텐데… 제가 한번 손녀를 데리고 방문할까요? 이제야 걸음마를 뗀 핏덩이이긴 합니다만, 아이들은 비슷한 또래를 좋아하니까요. 그리하면 백작께서도 아드님과 가까워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아! 좋은 방법일 것 같군요. 저로서는 정말 감사할 일이지요.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폐라니요. 저도 제 손녀랑 놀 시간이 필요한 것뿐입니다. 어이쿠, 이것 죄송합니다. 폐는 따로 있었군요. 장인어른을 먼저 뵈셔야 했는데, 제가 반가움에 실례를 범했네요.”

에브니 드라진 후작이 멀리서 무료하게 앉아있는 보칼리 자작을 가리켰다. 오거튼 백작은 드라진 후작과 다음에는 저택에서 간단한 모임을 갖기로 약속하고, 자리를 비웠다.

하르베이 가이단 후작이 싱글벙글 돌아온 친우에게 물었다.

“전에는 경황이 없어서 묻지 못했는데, 자네는 저 오거튼 백작을 회유할 수 있겠나? 그는 어쨌거나 마법사일세. 마법사들은 저들의 연구에 미쳐서 다른 일을 등한시하네.”

“그렇지. 하지만 백작은 아마 한동안은 가문의 일에 집중할 거야.”

“어떻게 그리 자신하는가?”

“훗.”

드라진 후작이 말을 하기에 앞서 코웃음을 쳤다. 가이단 후작은 그가 곧 잘난척하며 너스레를 떨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의 아들 문제도 있지만… 난 오거튼 백작이 왜 여행을 떠났는지, 어딜 가서 무엇을 하다 왔는지 알고 있네. 그는 ‘마나 중첩이론’을 연구하기 위해 소드마스터들을…”

그때, 홀에서 흐르던 경쾌한 음계가 크게 내리막을 탔다.

무겁고 웅장한 음색으로 바뀌어 잡담하던 귀족들의 주의를 끌었다.

점차 노래가 잦아들고, 달그락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고요해지자 왕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마법의 도움을 받아 홀 전체를 크게 울렸다.

– 40년 전의 즉위식이 떠오르는 날이오. 그날 왕국의 모든 가문의 주인들이 내게 충성을 서약했고,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대들의 맹세에는 흔들림이 없었소. 그 명예로움에 감사하오.

늙은 왕이 주위를 둘러보며 각 가문의 수장들과 한 번씩 눈을 마주쳤다.

그 느릿함 속에서 긴장이 깔렸다.

왕은 평소에 이런 식으로 연설을 시작하지 않았다. 보통은 “친애하는 왕국의 가주들이여, 환영하노라.”와 같은 방식으로 말문을 열곤 했다.

– 오늘, 나는 다시 한번 그대들의 충성을 확인하였소. 공사다망할 가문의 가주들께서 기꺼이 참석해 이 자리를 빛내주셨고, 이는 우리 왕국이 단단하게 맺어져 있음을 증명하는 바이요.

또, 연설에서 하오체를 사용하는 경우도 처음이었기에(사적인 자리에서는 많이 사용했지만), 이는 매우 중대한 발표를 앞두고 있다는 신호였다.

역시나, 폭탄이 떨어졌다.

– 하지만 나는 늙었소.

상당수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또는 예상했다는 듯이 표정에 변화를 보이지 않았지만, 상당히 많은 귀족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놀라움을 표했다. 그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왕의 말이 이어졌다. 그는 중간에 자신의 자랑스러운 두 늦둥이 아들들을 돌아보았다.

– 이 오른 왕국에는 젊고 유능한 군주가 필요하오. 그래서 나는… 제1 왕자인 애톤 드 로그넘을 왕가를 이어갈 후계자로 선언하는 바이오. ‘아키네’는 길일(吉日)을 택해 행해질 것이며 친애하는 왕국의 고귀한 가주들께서 이를 축복해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소. 자, 새해에도- 로그넘의 영광이 함께하기를!

왕이 술잔을 들어 올리자 모든 이들이 그를 따라 “로그넘에 영광이 있기를!”이라 외쳤다.

왕이 자리에 앉자 홀이 시끄러워졌다. 귀족들은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서둘러 토론하기도, 어떤 눈치 빠른 이들은 애톤 드 로그넘에게 달려가 아부를 떨기도 했다.

하지만 애톤 드 로그넘의 옆에는 제2 왕자인 앨제어 드 로그넘이 있었기에 그들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는데… 앨제어의 반응은 시원했다.

“형님! 축하드립니다!”

“고맙다. 나는 이제 가주들께 인사를 드릴 생각인데 함께 가겠느냐?”

“물론입니다.”

두 쌍둥이 왕자는 나란히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가며 돌아다녔다. 가주들에게 “잘 부탁하겠소.” 또는 “형님을 축복해주십시오.” 등등의 인사말을 건네었다.

귀족들은 갖은 예의를 차려 왕자들의 인사를 돌려주었는데, 의아한 점은 후계자로 선택된 1 왕자보다 오히려 2 왕자가 더 기뻐 보인다는 점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가이단 후작과 드라진 후작에게도 왕자들이 다가왔다.

드라진 후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키네의 주인공이 되신 걸 경축드리옵니다.”

‘아키네’는 왕족의 후계자 수여식을 뜻하는 단어였다. 이는 아카이아 왕국을 세운 토들러 아키우넨의 성에서 따온 단어로서, 아카이아 제국 시절부터 사용된 것이었다.

즉위식은 ‘아키넨’이라 불렸다.

“고맙습니다. 부족한 몸이지만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드라진 변경백께서도 많은 도움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애톤 드 로그넘의 눈이 가이단 후작을 향했다. 바짝 예의를 갖춘 드라진 후작에 비해 그는 다소 뻣뻣한 자세로 서 있었다.

“가이단 변경백께서도 절 도와주시겠지요?”

“…물론입니다. 경축드립니다.”

묘한 기류가 흘렀다.

아마 그 이유는 여러 가지였을 것이다.

지금 보이는 가이단 후작의 뻣뻣한 태도 때문일 수도 있고, 그가 끝내 하리에를 시집보내겠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두 왕자를 뒤따라온 ‘타라딘 아뮤스 백작’과 ‘게오기스 제르민 백작’ 때문일 수도 있었는데…

그들은 하르베이 가이단 후작을 스산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을 공교롭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각각 노예 사업을 하던 도르프 패밀리와 무기 사업을 하던 테오빅 패밀리를 후원하던 귀족들이었다.

쌍둥이 왕자들은 담백하게 그를 스쳐 지나갔다. 가이단 후작을 볼 때마다 하리에를 시집보내라며 재촉하던 그들이었으나 이번에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오거튼 백작님, 오랜만입니다…”

왕자들이 오거튼 백작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사이, 하르베이 가이단 후작은 질끈, 눈을 감았다.

참을 수 없이 어지러웠기 때문에, 그리고 어디선가 자지러지는 웃음이 환청처럼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마치 주군의 웃음소리와 같은…

에브니 드라진 후작은 그의 오랜 친우를 잠시 바라보다가 무의식중에 살짝 거리를 벌렸고, 연회는 성대하게 끝이 났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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