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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7

117화 성년의 밤 (2)

117화 성년의 밤 (2)

리아논은 그 뒤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흑기사가 쿠훌린을 습격한 것도, 루나에게 위해를 가하려 한 것도, 그리고 흑기사에게 당한 쿠훌린이 일 년 가까이 생사를 넘나드는 투병 생활을 해야 했던 것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리아논은 따스한 시선과 손길로 나를 어루만졌다. ‘언어’라는 형태는 없었지만 나는 그녀의 마음이 고스란히 내게 전달되는 것을 느꼈다. 그건 네 탓이 아니란다. 그러니 마음의 짐을 털어내렴. 데미안.

소리 없는 그녀의 음성이 나의 내면을 잠식하던 죄책감을 허물었다.

“조금만 쉬다가 돌아오려무나. 성년의 날에는 가족 모두가 함께하는 거란다. 루나도, 세실도, 카인도 너를 기다리고 있어.”

리아논이 나의 이마에 입맞춤했다.

당황한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리아논이 보기 드문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방을 떠났다.

잠시 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데미안 뭐해? 얼른 와. 다들 기다리고 있다고.”

열린 문틈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 루나가 내게 손짓했다. 그녀의 머리 위로 세실의 얼굴이, 그 위로 카인의 얼굴이 신호등처럼 나타났다.

나는 피식 웃으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

.

.

“우웩······. 이게 술이라는 거야? 맛없어!”

루나가 주욱 입꼬리를 내리며 중얼거렸다.

해 저문 창밖에는 둥근 달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세실. 너는 괜찮니? 맛있어?”

이제 막 술 한 모금을 마신 세실이 고개를 갸웃하며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생각보다 괜찮은 맛이라고.

“정말? 진심이야?”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세실을 보던 루나가 다시 꼴깍꼴깍 술을 마시더니, 아까보다 더욱 아래로 입꼬리를 내렸다.

“으으······. 이상한 맛.”

예상대로 카인은 여유로운 얼굴로 술을 마셨다.

소설에서 카인은 상당히 주량이 강한 인물로 나온다.

“와아, 카인 엄청 잘 마신다. 진짜 어른 같아. 데미안도.”

루나가 동경하는 눈빛으로 나와 카인을 봤다. 나야 뭐, 술이라면 익숙하니까.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에서는 16세를 성인으로 인정하지만 지구에서라면 고작 고등학교 1학년의 나이다. 실제로 카인과 세실과 루나는 고등학생처럼 보였다. 아니, 루나는 중학생. 오히려 디네베가 더 고등학생 같다.

나는 그들이 교복을 입은 모습을 상상해 봤다. 카인은 최고급 소재로 맞춤 제작한 구김살 하나 없는 교복을 입을 것 같다. 루나는 몸에 꼭 맞는 흰 셔츠에 짤막한 교복 치마. 디네베는 하늘하늘 우아한 스타일. 그리고 세실은······.

세실을 떠올리자 사고가 멈췄다. 여학생 교복을 입은 세실의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학생 교복을 입은 모습은 더욱 상상되지 않는다.

“저. 저기.”

세실이 슬쩍 손을 들며 말했다.

그사이 술을 꽤 마셨는지, 두 뺨 위에 홍조가 깃들었다.

“할 말이 있는 거니? 세실.”

리아논의 물음에 세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바들바들 입술을 떨며 주저했다. 그러다가 돌연, 술을 병째로 들어 꿀꺽꿀꺽 삼켰다.

우리는 깜짝 놀라 세실을 봤다. 워낙 갑작스러워서 말릴 생각도 못 했다. 잠시 후, 우체통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세실이 입술을 열었다.

***

세실은 생각보다 술맛이 좋았다. 달콤한 과일 향도 좋았고, 특히 목으로 넘길 때의 묘한 따뜻함이 좋았다.

그러면서 세실은 술을 마실수록 보다 편안하게 타인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말문이 막 트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세실은 주위를 관찰했다.

슬금슬금 술병에 손을 가져가다가 리아논에게 들킨 쿠훌린.

경쟁하듯 서로를 의식하며 술을 들이켜는 데미안과 카인.

맛없다고 하면서도 계속 술잔을 홀짝이는 루나.

아까부터 데미안만 바라보는 디네베.

“······.”

세실은 디네베가 신경 쓰였다.

데미안과 루나는 몰랐던 듯하지만, 세실은 은월섬으로 돌아온 날 디네베를 보자마자 알았다.

디네베는 어른처럼 변해 있었다. 병색이 짙은 모습이었으나 그럼에도 가려지지 않는 성숙한 아름다움. 심지어 인간을 벗어난 듯한 신비로움마저 느껴졌다. 마치 님피엘처럼.

‘······데미안.’

‘응?’

‘······디네베. 봤어?’

그래서 데미안에게 물었다. 그러나 데미안은 대답 없이 피식 미소 지었고, 그제야 세실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디네베는 환자였다. 그것도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던. 그런데도 나는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세실은 자신에게 혐오감마저 느꼈다.

완치된 디네베를 다시 봤을 때는 기뻤다. 그런데 디네베는 그 후로 데미안에게 은근히 호감을 보였다. 아마 세실이 디네베를 신경 쓰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제, 데미안이 음식 준비를 도와주겠다고 말하자 디네베는 누가 봐도 확연한 감정의 변화를 드러냈다.

그리고 오늘은 저렇게 데미안만 바라보고 있다.

평소라면 혼자 마음 졸이며 아파했겠지. 그러나 술을 마셨기 때문일까, 세실은 하나의 강렬한 감정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빼앗기고 싶지 않아. 루나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아니, 지금은 루나에게도.

그래서 공언했다.

“······저. 여자예요.”

생각만큼 멋지게 말하지는 못했지만.

***

세실의 고백에 나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놀란 척해야 하나? 그래야겠지. 내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카인에게 들켜봐야 좋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 루나가 초를 쳤다.

“오. 오오. 저. 정말이니 세실? 정말로 너. 여자아이야?”

아니 대체 왜 갑자기 세실처럼 말하는 건데.

저럴 거면 그냥 가만히 있지.

“와아. 기쁘다. 나는 늘. 세실이. 여자아이였으면. 했어.”

루나는 짝짝, 어색하게 손뼉까지 쳤다.

“그치? 데미안. 너도 깜짝. 놀랐지? 나도.”

“······.”

누가 봐도 괴상한 이 분위기를 정리한 것은 리아논이었다. 리아논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말하며 세실을 꼭 안아주었다. 그러고는 좋은 생각이 났다며 2층으로 올라갔다.

리아논이 사라지자마자 쿠훌린은 기다렸다는 듯 입 안에 술을 들이부었다. 그 광경을 보고 정신을 차린 루나가 빽빽 소리치며 엄마를 찾았다.

“세실. 네게 주는 선물이란다. 입어 보렴.”

식당으로 돌아온 리아논이 세실에게 건넨 것은 우아한 하늘색 원피스였다.

그것을 본 세실의 얼굴이 직전보다 더욱 붉어졌다. 리아논은 소녀처럼 웃었다.

“그래 세실! 얼른 입어 봐! 지금 나랑 같이 방으로 갈까?”

루나는 세실어에서 탈피했다.

“나. 나중에······.”

세실은 원피스로 얼굴을 가리며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새빨개진 귀까지 가리지는 못했다.

문득 무언갈 떠올린 루나가 휙, 리아논을 돌아봤다.

“엄마 나는? 나도 원피스 줘.”

리아논의 눈이 동그래졌다.

“루나는 저런 옷 안 좋아하지 않았니? 엄마가 그렇게 입어보라고 해도 늘 바지만 입었잖니.”

“그, 그때는 그랬지만······.”

“게다가 네 몸에 맞는 옷은 지금 없단다. 세실에게 선물한 원피스는 엄마가 처녀 때 입었던 옷인데, 너는 체구가 작잖니.”

“나, 나도 금방 클 거야!”

루나가 발끈해 외쳤다.

나는 살짝 루나를 놀리고 싶어졌다.

“루나는 앞으로 디네베가 입던 옷을 물려받으면 되잖아.”

“뭐라곳!”

루나가 도끼눈을 뜨며 나를 돌아봤다.

그러고는 진심으로 나를 때리려 했다.

“너! 너! 너 지금 말 다 했니? 그 건방진 입을 다시는 열지 못하게 만들어버릴 거야!”

날뛰는 루나를 멈추게 한 것은 리아논의 목소리였다.

리아논은 방에 올라가 루나에게 맞는 옷이 있는지 찾아보겠다고 했고, 그제야 루나는 헤헤 웃는 낯으로 돌아왔다.

“세실. 나도 그런 옷 입으면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니? 그치.”

“으. 응.”

그러나 리아논이 들고 온 원피스 중 루나에게 맞는 옷은 없었다.

반면 그사이 조금 더 키가 자랐는지, 디네베에게는 얼추 맞았다.

“무슨 밀가루 포대를 몸에 두른 것 같구나 큰 공주! 으하하하하!”

“뭐라고욧!”

쿠훌린이 웃겨 죽겠다는 듯 배를 잡으며 낄낄댔고, 루나는 고래고래 화를 내다가 종래에는 울음을 터뜨렸다. 자기가 제일 작다고. 사람이 아니라 땅꼬맹이 딱정벌레라고.

리아논은 숙녀가 된 첫날부터 이렇게 계속 울면 어떡하냐며 루나를 어르고 달랬다. 결국 루나는 밤에 우리끼리 방에 모여 술을 마시자는 은밀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울다 지쳐 잠들었다.

***

방에 올라온 리아논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정신없는 하루였다. 그리고 행복한 하루이기도 했다. 그 작았던 아이들이 성년이라니. 시간은 야속하게도 빠르게 흐른다.

똑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세실?”

문을 열자 보이는 사람은 세실이었다.

한눈에 알아채지는 못했다. 세실은 늘 입던 검은 옷 대신, 리아논이 준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으니까.

“가. 감사. 해서.”

리아논이 싱긋 웃으며 손짓했다.

“들어오렴. 세실.”

리아논은 세실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세실을 의자에 앉힌 리아논이 서랍장에서 빗을 꺼냈다. 이어 능숙하게 세실의 머리를 빗어 내렸다.

“정말 예쁘구나, 세실.”

세실이 당황한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빗질을 마친 리아논은 세실의 머리에 예쁜 핀도 꽂아주었다. 그러고는 세실의 손을 잡고 저만치 전신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아마 세실은 원피스를 입은 후 거울을 보지 않았을 것이다.

“아. 아으.”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자마자 세실이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리아논은 세실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잘 보렴 세실. 거울 속의 저 예쁜 아가씨를 말이야.”

리아논은 이전부터 세실이 여자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세실이 데미안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쿠훌린에게 들어 알게 된 것이 아니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자신에게 타인과는 다른 묘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간혹 미래로 여겨지는 것을 보기도 했다.

“어때. 정말 예쁘지 않니?”

세실은 원피스를 입고 데미안을 만나려 했겠지. 하지만 제 모습에 확신이 없어, 두려운 마음에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사실 리아논은 데미안이 루나와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마음이다. 또한 그녀에게 세실은 루나와 데미안 못지않게 소중한 아이였다. 게다가 루나는 데미안보다는 카인에게 더욱 끌리는 것 같았다.

“데미안도 분명 그렇게 생각할 거란다?”

흠칫 놀란 세실이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속마음을 들켜버린 부끄럼 많은 소녀처럼.

리아논은 웃었다. 어쩜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을까.

“자, 용기를 내는 거야. 세실.”

세실의 두 손을 맞잡으며 리아논이 속삭였다.

“그러지 않으면 빼앗길지도 모른단다?”

***

작게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누구지? 이렇게 늦은 밤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취기가 올라왔다. 오랜만에 기분 좋게 술을 마셨다. 그것도 꽤 많이.

방문이 열리며 사륵, 원피스 자락이 흔들렸다. 그 아래로 드러난 흰 다리가 매끄럽게 교차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나는 멍한 얼굴로 방문자를 바라봤다.

그녀의 미소와 함께 달칵, 걸쇠가 잠겼다.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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