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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9

119화 성년의 밤 (4)

119화 성년의 밤 (4)

“아.”

세실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세실은 지금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실감하지 못했다.

달칵, 걸쇠 잠기는 소리가 세실의 정신을 깨웠다. 부릅 눈에 힘을 주며 달려간 세실은 살짝 문손잡이를 돌려 보았다. 잠겨있다.

“아. 아아······.”

세실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세실은 방문에 귀를 가져가다가 흠칫 놀랐다. 아니야. 이러면 안 돼. 옳지 않은 일이야.

그러나 마음속 생각과 달리 세실은 방문에 귀를 붙이고 있었다. 세실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자신이 부끄럽고 화가 났다.

그럼에도 세실은 문에서 얼굴을 떼지 못했다. 안에서 디네베의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렸다. 데미안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무어라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귓속에 구름이라도 가득 낀 것처럼 세실은 그들의 대화를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

.

.

울음을 그친 세실은 자리에서 일어나 전신거울을 돌아봤다.

‘어때. 정말 예쁘지 않니?’

리아논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세실은 다시 울상이 됐다. 미안해요 리아논. 저 같은 아이에게 신경 써주셨는데.

스륵, 세실의 원피스가 발목 아래로 흘러내렸다. 세실은 거울에 비친 제 몸을 봤다. 짙은 머리색과 대비되는 창백한 피부. 가슴에 붕대를 두르지 않아 무게감이 느껴진다. 전투에 방해되는 요소다.

성년이 되었기 때문일까, 세실은 오늘따라 자신의 몸이 달라 보이는 것을 느꼈다. 지금껏 세실은 제 몸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육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후부터.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란다 세실리아. 조금도 염려할 것 없어.’

어머니는 그렇게 말해 주었지만 세실의 생각은 달랐다.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두려웠다. 그래서 강박적으로 가슴에 붕대를 감고 다녔다. 여자아이임을 숨겨야 하는 처지였기에 피할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러나 몸의 변화는 가슴뿐만이 아니었다. 하체도 무거워졌다. 그렇게 점점 신체 일부의 살집이 도드라질수록 세실은 제 몸을 제어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다.

살수의 전투는 기본적으로 기습이다.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살상 능력을 발휘해야 하기에, 살수는 늘 자신의 육체를 능숙하게 제어해야 한다.

‘몸이 굼떠졌다 세실. 형편없군.’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한층 혹독하게 세실을 훈련시켰다. 그러나 세실의 몸은 점점 더 빠르게 변해갔고, 그에 비례해 훈련 강도도 높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세실은 자신이 남자아이처럼 근육을 발달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그 간극을 메꾸기 위해 훈련은 더욱 지독해졌다. 세실은 자신을 저주했다. 왜 나는 여자아이로 태어났을까. 남자아이로 태어났으면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

세실은 거울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러면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리아논이 해준 말 때문일까, 아니면 술을 마셨기 때문일까. 세실은 처음으로 자신의 몸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와아, 부러워 세실. 어떻게 몸이 그럴 수 있어? 대체 뭘 먹으면 그렇게 되는 거니? 정말 네가 마음만 먹으면 갖지 못할 남자는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을 거야.’

루나와 처음 함께 몸을 씻으며 들었던 말이었다. 이전까지 세실이 해왔던 생각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말이기도 했다.

그동안 세실은 제 몸에 단점만 가득하다고 여겼다. 전투에 방해됐으니까. 그래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더욱 고되게 훈련해야 했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던 걸까? 이런 내 몸에도 장점이 있는 걸까? 데미안에게 보여주면 어떻게 생각할까. 좋아해 줄까? 그랬으면 좋겠어.

‘세실. 얼굴이 빨개! 너 엉큼한 생각 했구나. 그치?’

화끈, 세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세실은 서둘러 상의를 걸쳐 제 몸을 가렸다. 그러고는 구김이 가지 않도록 조심조심 원피스를 접었다. 그러자 디네베가 떠올랐다.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디네베는 정말로 예뻤다. 데미안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 나를 돌아보며 미소 짓던 눈동자도.

세실은 테이블 앞에 앉아 술병을 손에 쥐었다. 아직 절반가량이 남았다.

이걸 다 마시면 죽은 듯이 잠들 수 있지 않을까.

***

디네베가 방을 떠난 후, 나는 방문을 열고 복도를 둘러봤다. 조금 전에 나간 디네베는 유령처럼 모습을 감췄다. 세실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세계수의 혼돈을 이용해 기척을 죽이며 복도를 걸었다. 이어 세실의 방 앞에서 작게 방문을 두드렸다.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세실의 연녹색 눈동자가 보였고, 바람에 부푼 돛처럼 커다래졌다.

세실이 나의 손을 잡은 순간, 나는 빨려들듯 방으로 끌려갔다. 빙글빙글 회전하는 놀이기구라도 탄 것처럼 방 안의 풍경이 눈앞을 스쳤고, 어느새 나는 세실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를 보러 와 준 거야? 데미안.”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갑작스럽게 방 안으로 끌려와 침대에 던져졌기 때문도, 그런 내 위로 세실이 올라탔기 때문도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놀랄 일이긴 했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방금, 세실은 말을 더듬지 않았다.

“하아······.”

얼굴에 닿는 세실의 숨결이 뜨거웠다.

달큰한 술 냄새가 났다.

다시 취하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디네베와 무얼 했어?”

세실의 눈빛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그 안에는 어떤 강렬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나에게도 해줘. 데미안.”

“······무엇을.”

“너와 디네베가 한 것. 전부 다.”

세실이 살짝 상체를 일으켰다.

그제야 나는 세실이 가슴에 붕대를 두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루나처럼 예쁘지 않지만.”

세실이 제 앞섶으로 손을 가져갔다.

“디네베처럼 우아하지 않지만.”

세실이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지금까지 세실에게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종류의 미소였다.

“그런 나에게도, 네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있어.”

툭, 앞섶을 여민 끈이 풀리며 세실의 목덜미와 쇄골이 훤히 드러났다. 그 순간 나는 세실이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세실의 손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세실이 두 다리로 나의 양팔을 구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살갗의 감촉. 나는 기절할 것처럼 놀랐다. 세실은 하의를 입고 있지 않았다.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 데미안.”

사륵, 옷깃이 내려앉는 소리와 동시에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어떻게든 세실을 밀어내려면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이후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내가 밀어내면 세실은 뒤로 넘어갈 것이고, 지금의 세실은 하의를 입지 않았으니까.

“눈을 떠 데미안. 나를 봐줘.”

정말로 나는 눈을 뜰 뻔했다.

그 정도로 세실의 목소리는 유혹적이었다.

부드럽고, 가늘고, 또 더듬지 않고 매끄럽게 이어지는 세실의 음성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매력을 발산했다.

“······봐주지 않을 거야?”

세실의 목소리가 엷게 흔들렸다.

“······그러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거야.”

나는 세실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달뜬 숨결이 느껴진다. 길게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이 이마와 귀를 간지럽힌다. 그리고, 내 입술에 부드럽고 촉촉한 것이 닿았다.

“······!”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내려앉은 세실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지 않았다면 시간이 멈춘 것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나의 입술 위로 세실의 입술이 포개어져 있다.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거워졌다.

님피엘과 리아논도 내게 입맞춤한 적이 있다. 그러나 뺨과 이마였다. 이렇게 입술과 입술이 맞닿은 적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 안에 담긴 것이 달랐다. 세실의 감정이 느껴졌다. 그것이 평소에도 가졌던 마음인지, 아니면 술을 마셨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스르륵.

세실의 몸이 옆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당황한 눈으로 세실을 돌아봤다. 세실은 색색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세실의 머리카락은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곡선으로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었다. 그것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자 예술품처럼 아름다운 옆얼굴이 드러났다.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그녀의 이마는 열병이라도 난 것처럼 뜨거웠고, 두 볼에는 짙은 홍조가 드리워져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은 이슬에 젖은 장미 같았다.

나는 홀린 듯이 세실을 바라봤다. 이렇게 자세히 그녀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던가. 이전에도 느꼈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실히 체감됐다. 세실은 예쁘다. 더욱이 술에 취해 잠든 지금의 모습은 숨 막힐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저도 모르게 세실에게 얼굴을 가져가던 나는 흠칫 놀라 고개를 흔들었다. 의식이 없는 세실에게 할 행동이 아니다. 게다가 내 머릿속에 일순 루나가 떠올랐다.

“후우······.”

이대로 세실과 함께 잠들고 싶다는 욕구를 애써 억누른 나는 알몸에 가까운 그녀를 보지 않으려 애쓰며 옷을 입혔다. 그 후 침대에 똑바로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푹 자. 세실.”

나는 침대 옆에서 물끄러미 세실을 내려다봤다. 내일 어떻게 세실의 얼굴을 마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루나를 보는 것도 겁이 났다.

혼란스럽다. 쿠훌린의 이야기를 들은 후, 나는 루나에게 운명적인 끌림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세실이 뒤흔들었다. 아니, 어쩌면 나는 세실에게도 루나 못지않은 끌림을 느껴왔던 것은 아닐까.

쉬이 잠이 들 것 같지 않다. 마침 테이블 위로 술병이 보였다. 남은 양은 얼마 되지 않는다. 나는 단숨에 그것을 목 안으로 털어 넣었다.

······지독하게 쓰다.

***

깊은 밤, 쿠훌린은 스카자하의 집무실에 있었다.

그는 회의를 마치면 그간 아껴두었던 술을 마실 생각에 들떠 있었다. 사실 그전부터 마시고 싶었지만 스스로의 몸 상태를 알기에 자제했다. 그러나 오늘은 사랑하는 큰 공주가 성년이 된 날. 어찌 마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루나가 성년이 되어 기쁘신 모양입니다. 단장.”

스카자하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조그맣던 아이가 벌써 성년이라니. 이 손으로 루나와 데미안을 받아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말입니다.”

“그때는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스카자하.”

집무실 문이 열리며 세 사람이 들어왔다.

지금 막 은월섬으로 돌아온 라이칸과, 그를 마중 나갔던 엘리샤와 벨락이었다.

라이칸이 평소처럼 입꼬리만을 올리며 웃었다.

“무사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단장.”

“다른 이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루나가 성년이 된 날이군요.”

“그래. 다른 세 녀석도 말이지.”

머지않아 은월섬에는 달빛나무 축제가 열린다.

그러나 라이칸의 귀환은 예년보다 한참 빨랐다.

“흰 새를 보고 놀랐다. 이렇게 갑자기 돌아오다니, 대륙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게냐.”

스카자하는 오늘 밤 은월호가 귀환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섬의 일부 특별한 힘을 지닌 이들은 흰 새를 통해 은월호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다.

라이칸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믿기 어려운 소식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네몬 블레오파드가 암영의 수장이 된 듯합니다.”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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