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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9

118화.

장례식장은 고인의 뜻에 따라 서울서성병원으로 결정되었다.

유족들은 최대한 조용히 장례를 치를 예정이라고 밝혔지만, 벌써부터 조문객들이 몰려들 조짐을 보였다.

당연하지만, 한국에서는 서성그룹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괜히 서성공화국이라는 말이 생겼겠는가?

재계와 정계 유력인사들이 다 참석할 테고, 여기에 각국 대사관의 대사들과 외국계 대기업들도 참석의사를 밝혔다.

조문객을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천 명이다.

이들이 한 번에 몰려올 경우 장례식장은 물론 병원 전체가 마비될 우려가 있었기에(당장 주차장이 미어터지겠지) 아예 시간별로 예약을 받기로 했다.

임일권 회장의 죽음은 우리에게 또 다른 숙제를 남겼다.

그것은 바로…….

상엽 선배가 말했다.

“우리도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으음.”

내가 평범한 대학생이었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내 직함은 OTK컴퍼니 대표. 얼마 전, 임진용 부회장마저 직접 만난 데다가, 앞으로는 서성그룹과 협력을 해나갈 예정이다.

별 이유 없이 장례식장에 불참한다면, 나중에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모른다.

어쨌거나 관혼상제는 함께하는 게 우리네 미덕 아니겠나?

문제는 정재계 인사들이 총출동한다는 것. 여기에 대통령마저 직접 조문할 예정이라고 하니, 괜히 갔다가 어색한 상황이 연출되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택규가 말했다.

“꼭 갈 필요는 없지 않아? 임진용 부회장은 너희 아버지 장례식에 안 왔잖아.”

“…….”

그땐 모르는 사이였는데, 어떻게 와? 누가 들으면 임진용 부회장이 프로불참러인 줄 알겠다.

상엽 선배가 다시 말했다.

“안 갈 거면 부조라도 해야 하지 않아?”

맞는 말이다.

직접 가지 못하면, 돈 봉투라도 보내는 게 예의지.

택규가 물었다.

“얼마나 넣어야 돼?”

사실 이게 가장 큰 문제다.

[문제] 서성그룹 회장 장례식의 조의금과, 그 금액을 내야하는 합당한 이유를 서술하시오.(10점)

“…….”

이 정도면 거의 논술 아닌가?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난 먼저 사회통념을 꺼내들었다.

“조의금이든 축의금이든 안 친하면 5만 원, 친하면 10만 원인데.”

“그럼 5만 원하면 되는 거 아니야? 별로 안 친하잖아.”

“그런데 얼마 전에 임진용 부회장을 만났잖아.”

택규는 고개를 저었다.

“얼굴 한 번 봤다고 친한 건 아니지. 그쪽에서 밥을 산 것도 아니고.”

“커피는 샀잖아.”

“그러네.”

상엽 선배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장난 하냐? OTK컴퍼니 대표가 5만 원 부조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뉴스에 나겠다.”

상엽 선배 말대로 할 일 없는 기레기들이 기사랍시고 써재낄 수도 있다.

[OTK컴퍼니 대표, 서성그룹 회장 장례식장에 고작 5만 원 부조.]

[5만원 부조. 과연 무슨 의미인가?]

[서성그룹과 안 친하다는 것을 5만 원으로 에둘러 표현.]

[5만 원은 강진후 대표 자산의 10억 분의 1에 불과.]

[요즘은 친구끼리도 이렇게 안 해.]

[강진후 대표 이러고도 인간인가?]

[양심은 어디에…….]

“…….”

요즘 방송 3사 뉴스 꼬라지 보면, 이런 기사가 나와도 이상할 게 하나 없다.

국정원 민간인 사찰 문제로 시끌시끌한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비오는 날에는 소시지빵이 맛있다는 내용을 뉴스랍시고 내보내고 있는 게 우리나라 언론사 수준이다.

어쨌거나 내 재산이 수십조라는 걸 전국민이 아는데, 5만 원만 내기는 좀 그런가?

“그럼 얼마를 넣어야 할까요?”

상엽 선배는 진지하게 의견을 제시했다.

“한 1천만 원은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많이요?”

택규가 다시 반론을 제기했다.

“그런데 그쪽 유족들 역시 만만치 않게 부자잖아요. 봉투에 10만 원을 넣으나, 1천만 원을 넣으나 별로 신경도 안 쓸 텐데.”

이것도 맞는 말이다.

의견은 계속 엇갈렸다. 5만 원만 하자는 사람(택규)과 1천만 원은 해야 한다는 사람(상엽 선배)으로.

그런데 택규가 갑자기 말을 바꿨다.

“생각해보니, 1천만 원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응? 갑자기?”

“아니, 1천만 원 내면, 나중에 너 결혼할 때 혼수품으로 서성전자 TV 하나 해주지 않겠어?”

“……내가 언제 결혼할 줄 알고?”

그런데 듣고 보니 또 맞는 말이다.

1천만 원 해주고, 3천만 원짜리 TV 한 대 받으면 남는 장사 아닌가?

난 잠시 생각하고는 결론을 내렸다.

“그냥 누나 돌아오면 물어보자.”

“아! 그게 좋겠네.”

“나도 찬성.”

두 사람은 내 말에 동의했다.

마침 일을 끝마친 현주 누나가 엘리와 함께 지사장실로 돌아왔다.

택규가 물었다.

“누나 임일권 회장 장례식장에 갈 거야?”

현주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지. 골든게이트와 서성그룹의 관계가 있으니. 이미 예약 명단 등록해놨어. 엘리는 내 수행원으로 같이 갈 거고.”

“부조는 얼마나 할 건데?”

“부조?”

“지금 부조 얼마 할지에 대해 한 시간 동안 회의 중이었거든. 우리도 누나 내는 만큼만 내게.”

현주 누나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보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부조 안 받는다는 얘기 못 들었어? 서성그룹 총수 일가가 부조 없이 장례 못 치를 사람들도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장례식장도 통째로 살 수 있는…… 아니, 애초에 서성병원이 유족들 건데.”

“아! 그래요?”

우리의 표정이 일제히 밝아졌다.

괜히 쓸데없는 걸로 고민했네.

* * *

뉴스는 임일권 회장 장례식으로 시끌시끌했다.

역시나 장례식장은 미어터졌다. 서울서성병원 앞에는 검은색 세단이 길게 줄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수십 명의 교통경찰이 교통정리와 주차안내에 투입되었고, 병원 측에서는 급하게 근처 주차장을 수배했다.

미리 예약명단에 이름을 올린 사람만 조문할 수 있고, 취재진 접근도 불가능했다

일반 조문객들을 위한 분향소는 다른 곳에 별도로 마련되었다. 그곳에서도 추모행렬이 이어졌다.

일부 진보단체와 서성 계열사 해고 노동자들은 분향소 앞에서 임일권 회장의 각종 불법행위가 적힌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항의시위를 벌였고, 그 모습을 본 보수단체들은 바로 앞에서 맞불시위를 벌였다.

추모객들의 생각도 엇갈렸다.

어떤 사람은 분향소 앞에서 울다가 실신해서 실려 갔고, 어떤 사람은 정경유착과 서민경제 파탄의 주범이라고 소리치다가 끌려 나갔다.

골든게이트 대표로는 현주 누나와 엘리가, OTK컴퍼니 대표로 상엽 선배와 헨리가 장례식장을 다녀왔다.

최후까지 갈까 말까 고민하던 나는 결국 택규와 함께 장례식 마지막 날 새벽에 서울서성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택규는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이어서 서성그룹 회장 장례식에 가게 될 줄이야.”

내가 생각해도 놀랍긴 하다.

“장례식장 예절은 숙지했지? 실수하면 안 돼.”

결혼식장에서야 좀 실수해도 웃어넘길 수 있지만, 장례식장에서는 예의를 지켜야 한다.

택규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바람상조 홈페이지까지 들어가서 확인했어.”

“아, 그래? 나도 좀 보여 줘봐.”

“넌 상주 해봐서 잘 알지 않아?”

난 고개를 저었다.

“정신없어서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도 잘 안 나.”

한 가지 확실하게 기억나는 건 택규가 사흘 내내 엄청 울었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유족으로 착각하는 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아예 돈 주고 고용한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였다.(옆 호실에서 모친상 치르던 상주가 다가와서 ‘저런 사람 쓰면 하루에 얼마에요?’ 라고 묻더라)

차는 금세 서울서성병원에 도착했다. 우리는 내려서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특실로 가는 입구에는 양복을 입고 귀에 인이어를 낀 경호원들이 서있었다.

경호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우리에게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빈소에는 미리 명단이 등록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 재계와 정계 유력인사들이 모인 만큼 경호 문제도 있고, 기자나 시위대 등이 안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난 경호팀장에게 말했다.

“OTK컴퍼니 강진후 대표와 오택규 부대표가 왔다고 전해주세요.”

그제야 경호원들은 내 얼굴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경호팀장이 안으로 들어가자 택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하지?”

“조객록만 남기고 돌아가는 거지.”

그럼 어쨌거나 성의표시는 한 셈이다.

“나 배고픈데. 조용히 육개장만 한 그릇 먹고 간다고 하면 안 될까?”

“나가서 사 먹어. 그거 얼마나 한다고.”

“안 돼. 장례식장 육개장이 맛있단 말이야.”

“…….”

너무 맞는 말이라서 반박하기가 힘들다.

경호팀장은 금방 돌아왔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예.”

특실로 들어가는 복도 양쪽에는 수많은 화환이 늘어서 있었다. 입구를 기준으로 왼쪽에는 재계에서 보낸 화한, 오른쪽에는 정계에서 보낸 화환이다.

SSK그룹 회장 채원태, 리테그룹 회장 진경호, 은성차그룹 회장 한민구, CL그룹 회장 양준모 등등.

한국가당, 새정치당, 미래국민당, 민주통합당 등등. 당대표, 원내대표, 모모 국회의원, 어디어디 장관, 차관 등등.

박시형 대통령이 보낸 화환은 특별히 잘 보이는 곳에 놓여있었다.

아마 화환을 어떤 순서로 배치할지도 꽤나 골치 아팠을 것이다.

긴 복도를 걸어 들어가자 빈소가 나타났다. 다른 곳에 비해 규모가 좀 클 뿐 딱히 엄청 화려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특실이라고 해도 웬만한 부자면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다. 장례식장이 화려하면 그것도 좀 이상할 테고.

장례식 동안 상주는 자리를 지켜야 한다. 형제가 많을 경우 돌아가며 빈소를 지킨다.

지금 시간에는 누가 있나 궁금했는데, 상복을 입은 40대 중반 정도의 여자와 30대 초반의 남자가 같이 있었다.

TV에서 여러 차례 봤기 때문에 얼굴이 익숙했다. 장녀 임수미 실론호텔 사장과 막내 임승용 서성중공업 사장이었다.

피는 못 속이는지 둘 다 임일권 회장과 임진용 부회장과 닮은 모습이었다.

“늦은 시간에 와서 죄송합니다.”

임수미 사장은 우리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 크지 않은 제단 가운데에 영장사진이 놓여있었다. 임일권 회장이 건강했을 때의 모습이다.

난 향에 불을 붙여서 향로 위에 놓은 다음 택규와 함께 제단을 향해 두 번 절했다. 그리고 상주와 맞절하고 위로의 인사를 건넸다.

“상심이 많이 크시겠습니다. 생전에 뵌 적은 없지만, 평소 고인을 많이 존경해 왔습니다.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임수미 사장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께서도 OTK컴퍼니 얘기를 접할 때마다 웃으며 즐거워 하셨습니다. 건강하게 퇴원해서 한 번 만나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렇게라도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OTK컴퍼니가 세간에 알려진 것은 L6 사태 때. 그 시점에는 이미 거동이 힘들었을 것이다.

빈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한 번 만났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꽤 많았다.

우리는 구석자리에 앉았다. 육개장과 편육, 땅콩, 귤 등이 차려졌다.

생전 임일권 회장은 화려하게 살았다. 하지만 장례식장 모습만큼은 다른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한 잔 할래?”

“장례식장은 소주지.”

경호원 겸 운전수와 함께 왔기 때문에 마셔도 상관없다.

우리는 소주잔을 채웠다. 장소가 장례식장인만큼 건배 없이 각자 마시며, 육개장에 밥을 말아먹었다.

난 소주를 마시며 임일권 회장에 대해 생각했다.

한국전쟁 이후 온갖 고생을 하며 성장한 창업주 임영철 회장과는 달리 임일권 회장은 태어날 때부터 재벌이었고, 죽는 그 순간에도 재벌이었다.

평생을 좋은 집에 살며, 좋은 음식을 먹으며, 온갖 좋은 것을 다 누리고 살았다.

그러나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삶은 똑같이 주어진다. 그 끝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그저 화려하거나 비참하거나, 길거나 짧거나의 차이일 뿐이지.

난 장례식장에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이 시간에 이 자리에 있는 걸 보면, 다들 내일 발인에 참석하는 건가?

대부분 서성그룹 사람들일 것이다. 저 사람들은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을까, 기뻐하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들에게 미칠 손익계산을 하고 있을까?

택규는 속삭이듯 물었다.

“죽은 후, 가족들끼리 서로 등을 돌릴 거라는 걸 알았을까?”

“알았겠지.”

이미 한 번 겪었던 일이다.

임일권 회장은 서성그룹에서 두 형을 내친 뒤, 평생 동안 얼굴 한 번 안 보고 살았다. 그리고 그 가족들 역시 그룹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이게 뭔 재벌그룹의 숙명이라면 너무 웃기지 않나? 지금이 무슨 왕정시대고 아니고.

우리는 고개를 숙인 채 육개장을 퍼먹었다.

“안 먹고 돌아갔으면 아쉬울 뻔했네. 한 그릇 더 먹어야겠다.”

“…….”

부조도 안 하고, 아주 뽕을 뽑는구나.

난 슬쩍 말했다.

“나도 한 그릇 더.”

그 순간, 누군가가 옆으로 다가왔다.

“잠깐 앉아도 되겠습니까?”

다름 아닌 임승용 사장이었다.


           


An Investor Who Sees The Future

An Investor Who Sees The Future

미래를 보는 투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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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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