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12

#8 연애게임

어제저녁에 비가 내려서 그런지 오늘은 하늘도 맑고 먼지 하나 없이 공기도 깨끗했다. 푸른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둥둥 떠다녔다. 경수는 모처럼 좋은 날씨에 신나 창을 열어보았다.

“…콜록, 으, 추워.”

경수는 잔기침을 하며 조용히 다시 문을 닫았다. 땅에는 새순이 돋아나고 나뭇가지에도 꽃봉오리가 맺혔지만 추위는 여전했다. 어젯밤에도 추워서 중간에 일어나 옷을 한 겹 더 껴입었다.

그래도 이런 날에 밖에 나가지 않는 것은 좀 아까웠다. 분명 천노을을 포함한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때문에 그는 잠정적 연인 관계인 노을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수 형! 잘 잤어요?

“여보세요부터 해야지.”

-여보세요.

“그래, 잘 잤어? 지금 뭐해?”

-초코 부케 뽑으려고 재료 모아요. 형도 지금 들어오게요?

“아, 어….”

그럼 그렇지. 기대한 제가 바보였다. 경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컴퓨터부터 켠 뒤 세수를 하고 나왔다.

메인 화면부터가 게임 내 스토리의 주인공이 요리사 모자를 쓰고 초콜릿을 먹고 있는 일러스트였다. 2월 초부터 3월 말까지 진행하는 발렌타인 이벤트는 커플 캐릭터들이 이를 악물고 챙기는 이벤트 중 하나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과자로 뒤덮인 한정 패션 아이템 때문인 것도 있었으나, 이벤트 기간 안에 패션 무기 아이템인 ‘화이트 초콜릿 부케’를 들고 결혼을 하는 커플에게는 ‘쇼콜라티에의 축복’ 칭호가 주어지기 때문이었다.

[전체] ㅈi9별: ? 냥님 여기서 머 하세요

[전체] neutaaaa: ㅎㅇㅎㅇ

경수는 초코볼 이벤트 몬스터들을 자동 스킬로 때려잡다 말고 대답했다.

[전체] 냥이냥나냥: 재료 모아요….

[전체] ㅈi9별: 머 하려구?

[전체] neutaaaa: 초코룩 이미 다 뽑았다면서요?

그러게 말이다. 이미 한정 패션 아이템은 다 뽑은 지 오래였는데.

[전체] 냥이냥나냥: 누가 부케 갖고 싶대서….

그 말에 그냥 옆에서 몬스터를 잡던 모르는 사람들도 ‘ㄷㄷㄷ’라 반응했다. 모든 재료를 종류별로 999개씩 모아와야 초코 부케 아이템으로 교환할 수 있었다. 발렌타인 결혼식을 올린다고 하면 다들 경악부터 하는 게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자면 별것 없었다. 결혼식 이벤트 중, 몬스터들이 사탕 범벅인 옷을 입고 나타난다는 사소한 차이뿐이었다.

[전체] ㅈi9별: 냥님 말고 누가 그런 개 뻘짓 헛수고를?ㅋㅋ

[전체] 썬셋: ㅇㅅㅠ/

[전체] ㅈi9별: 아

[전체] ㅈi9별: 아ㅋㅋㅋ 어쩐지 냥님이 너무 열심히 뛰시더라^^ 보기 좋아요! 나도 갓템 부케 갖고 싶다;;; ㅡㅡ;;

[전체] 냥이냥나냥: 태세 전환하는 거 봐 개빡치네;

[전체] neutaaaa: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배가 자꾸 꼬르륵거렸다. 자동 스킬을 등록해둔 경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멈칫해 다시 앉았다. 오늘은 왠지 혼자 먹고 싶지 않았다.

[커플] 냥이냥나냥: 얼마나 남았어?

[커플] 썬셋: 생크림 볼이랑 젤리 슬라임은 아직 멀었고 나머지는 조금 남았어요ㅋㅋ

[커플] 썬셋: 그런데 오늘 날씨 되게 좋죠?

그렇지, 방구석에 처박혀있기는 아까울 정도다. 날씨 좋으니 나가자고? 경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커플] 냥이냥나냥: ㅇㅇ

[커플] 썬셋: 청혼하기 좋은 날이당ㅇㅅㅇ

“…….”

그놈의 결혼. 경수는 아직 노을과 게임 내에서 결혼을 할 마음이 없었다. 사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결혼이냐며 놀려댈 길드원들 때문인 것도 있었고, 너무 이르다는 생각도 들었다.

[커플] 냥이냥나냥: 아직 사귀지도 않는데 결혼은 좀 이르지 않냐

[커플] 썬셋: 전혀요?

이렇게 눈치가 없지는 않을 텐데. 평소엔 지나치게 눈치가 빠르더니 꼭 필요할 때에는 왜 이러는 건지 모른다. 경수는 조금 힌트를 줘보기로 했다.

[커플] 냥이냥나냥: 결혼보다 먼저 해야 할 게 있음.

[커플] 썬셋: ㅇㅅㅇ?

[커플] 냥이냥나냥: 힌트 줄게. 데이트가 들어가

[커플] 썬셋: 업데이트?ㅋㅋ

[커플] 냥이냥나냥: ㅆ1발 너 오늘 나한테 말 걸지 마

타이핑을 하는 손가락에 힘이 조금 과하게 들어갔지만 농담이었다.

[커플] 썬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농담이에요

[커플] 썬셋: 뭐 하고 싶은데요?

경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보통 데이트라 하면 만나서 하는 모든 게 데이트 아니던가. 만나서 산책을 하거나 영화를 보고, 또는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노래방을 가고, 또 뭘 먹으러 가는 것도 데이트였다. 그러니 그는 오늘 하고 싶은 것을 떠올렸다.

[커플] 냥이냥나냥: 그냥 산책

[커플] 썬셋: 메르헨 다리로 오세요

[커플] 냥이냥나냥: ?

그는 먼저 그곳으로 이동했다. 이벤트 NPC가 거기에도 있던가. 가까운 NPC 두고 왜 거기로…. 노을을 따라 워프해 메르헨 다리가 있는 도시로 이동했다. 도시 한가운데 있는 포탈을 타고 들어가자 긴 다리가 펼쳐졌다.

“설마….”

[커플] 썬셋: 자 걸어요ㅇㅅㅇ

노을이 다리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경수는 애완견처럼 그 뒤를 졸졸 쫓아가면서도 이 사실을 부정했다. 설마, 산책이란 말에 여길 데려온 건 아닐 거야. 아니어야지.

[커플] 썬셋: 반대쪽으로 한 번 더 걸어요

다리 끝까지 도달하자 놈이 몸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경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커플] 냥이냥나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커플] 냥이냥나냥: 지금 장난하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커플] 썬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따라 웃는 걸 보니 그냥 놀려본 것 같았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커플] 냥이냥나냥: 현피 뜨게 당장 나와

[커플] 썬셋: 네ㅎㅎ

경수는 옷부터 챙겨 입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기분이 들떴다.

*

만나서 조금 이른 점심을 먹고 한강을 거닐다, 강변 바람에 뺨을 마구 얻어맞은 둘은 어쩔 수 없이 노을의 집으로 대피했다. 노을은 경수의 빨간 귀를 손으로 감싸 쥔 채 녹여주려 노력했으나 그의 손도 마찬가지로 빨갛게 부르터 있어 별 소용은 없었다.

“나중에 더 따뜻해지면 자전거 타러 가자.”

“저 자전거 잘 못 타는데….”

생긴 것만 봐서는 잘 탈 것 같은데, 보기보다 운동신경은 없는 모양이었다. 경수는 그를 비웃듯 턱을 살짝 쳐들며 조언해주었다.

“네 발 자전거 타면 되겠다.”

“그냥 형이 뒤에 태워주세요.”

경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노을을 뒷자리에 태우고 자전거 페달을 밟는 상상을 해보았다. 허리를 붙잡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손이 그대로 있지 않고 등허리를 더듬거나 옷 사이를 파고들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로망이었던 자전거 데이트는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다.

“콜록… 큼.”

자꾸 잔기침이 나왔다. 요즘 공기가 좋지 않아서 그런 것 같은데, 아까부터 노을은 제 손으로 경수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물기를 제대로 안 닦은 건지, 비누 향이 나는 손이 축축했다. 덩달아 경수의 앞머리 일부가 젖어 들었다.

“치워, 열 안 난다고.”

“형 아무래도 감기 걸릴 것 같은데….”

“나는 감기 안 걸… 어, 어어?”

노을은 경수를 그대로 제 방 침대에 밀어 앉혔다. 또 무슨 계획을 꾸미는 건지 눈에 웃음기가 깃들어 있다.

“저한테 옮겨요. 감기는 옮기면 낫는대요.”

“……?”

노을은 옆에 걸터앉아 그를 꼭 껴안고 물었다.

“이러고 있음 옮을까요?”

“감기 아니라니까. 혹여나 감기라도 그걸 네가 왜 가져가?”

“제가 대신 아파줄게요.”

“됐어.”

허리를 감은 손을 떨어뜨려도 끈질기게 다시 끌어안았다. 싫다고 해도 갖가지 방법으로 달라붙을 놈을 굳이 떨어뜨려 둘 이유는 없었다. 침대 한가운데로 옮겨가 자리를 잡자 노을이 따라와 허벅지를 베고 드러누웠다.

노을이 손가락으로 허벅지에다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면서도 손가락이 그리는 글씨에 온 감각을 기울였다.

‘형.’

“뭐.”

짧게 대답을 해주자 화색을 하며 눈을 빛냈다. 문득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다 놈이 너무 좋아하면 기분이 더러울 것 같아 손을 내렸다.

“와, 맞췄다! 그럼 다음.”

‘왜 가방…에….’

손가락이 움직이는 자리마다 낙인이 남듯이 간지러웠다.

‘아무것…도 안 넣고 다녀요?’

가까스로 긴 문장을 다 읽어낸 경수는 그냥 모른 척을 해 버릴까 잠시 고민하다 윽박지르듯 대답했다.

“무슨 상관이야? 나만 안 갖고 다니면 이상하잖아.”

“앗.”

경수는 노을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철썩 때렸다. 발개진 이마를 두 손으로 감싸 쥔 노을은 이번엔 수식이라며, 이것도 맞춰보라고 종알거렸다.

‘7500-7000-100-400=?’

“…….”

저걸 언제 다 깎아줬더라…. 경수의 눈빛이 흔들렸다.

“정답은?”

몰라, 씨발. 경수는 시치미를 뗐다.

“……아니 못 알아먹었어…. 패스, 다음 문제 내.”

“정답은 0이에요.”

노을이 벌떡 일어나 경수를 잽싸게 잡아 눕혔다. 경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뒤집어 이불을 얼굴에 뒤집어썼다.

“씨발, 나 집에 갈래!”

“이것 봐, 알아들었으면서 뭘 모른다고…. 그리고 형 아까부터.”

“으악!”

노을의 손이 이불 사이로 불쑥 들어왔다. 얼굴만 가려서는 안 되는 거였다. 급하게 다리를 오므려도 소용없었다. 그는 옷 위로 형태를 따라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제가 글씨 하나 쓸 때마다 움찔거리던 거 제가 모를 줄 알았어요?”

“…난 몰랐는데?”

“거짓말. 이걸 어떻게 몰라요.”

진짜 몰랐다. 그러고 보니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손가락이 허벅지를 만지작거릴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었었는데, 글씨에 집중하느라 미처 자각하지 못한 것이다.

‘내가 얠 왜 좋아하는 거지…. 차라리 죽을래….’

점점 더 내기에서 승산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아찔한 감각에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자, 한 손으로 허벅지를 쥐고 있던 노을이 눈을 맞췄다. 그는 위로 올라와 눈을 예쁘게 깜빡였다.

‘지금 이 상황에 날 홀리려는 것도 아니고, 눈은 왜 저렇게 뜨고 난리야….’

경수는 심장이 쿵쿵거리는 것을 느끼며 침을 꼴깍 삼켰다. 콜록, 눈치도 없이 튀어나온 잔기침에 노을이 푸하, 하고 웃었다. 경수는 노을을 노려보다 물었다.

“그래, 씨발. 뭐 어떻게 하는 건데?”

‘기껏해야 입술이나 좀 쪽쪽거리다가 말겠지, 뭐.’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았다. 어차피 할 수 있는 방법도 굉장히 한정적이지 않나. 둘을 맞잡아 흔든다거나, 더 변태적으로 하려면 눈을 가리든가 자세를 달리하든가 하겠지. 하지만 노을은 그 예상을 빗나가 예상도 못 한 곳을 짚었다.

“여기로 한대요.”

“……?”

엉덩이? 아니, 아니다. 놈의 손이 두 개의 둔덕,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정확히 닿지는 않았지만 금세 알아차렸다. 경수는 손이 정확한 부위를 짚기 전에 재빨리 노을의 손목을 잡아 가져오며 고개를 잘게 저었다.

“……거기 아니야. 잘못 찾아봤나 보네. 내가 다시 찾아볼게.”

“맞는데요? 찾아보다가 영상도 봤는데… 우와! 되더라고요!”

“되더라고요가 아니잖아! 그럴 리가 없어!”

경수는 일단 진정하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곧 기침이 튀어나와 효과는 없었다. 거기에 좆이 들어간다 치더라도, 분명 다칠 텐데. 아무리 천노을이 얄밉다 해도 그가 우는 것은 마음이 좋지 않을 게 분명하다. 사실 우는 것도 조금 보고 싶긴 했지만….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노을아, 진정하고 들어봐.”

“네, 듣고 있어요.”

“내가 볼 때, 네 생각은 별로 안 좋은 것 같아. 아무리 생각해도 거긴 너무…. 난 너 아프게 하는 거 싫다. 알겠지?”

“걱정해주셔서 감사하지만 전 괜찮아요. 충분히 풀어주면 돼요. 제가 형 안 다치게 조심히 할게요.”

“……내가 왜 다쳐?”

노을이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넣는 쪽은 놈이 아니라 내가 되어야 하는데.

“다치는 건 너야. 정신 차려.”

“아시잖아요. 저 뭐든 금방 배우는 거.”

“씨발놈아, 개소리하지 마. 넣는 건 나야.”

“저랑 하는 것 자체는 싫지 않은 거죠? 이럴 줄 알았어. 역시 형도 절….”

“닥쳐!”

경수는 큰 소리로 소리치며 고개를 저었다.

“넣는 거 나라고. 알겠다고 해. 빨리!”

“꿈이 크시네요. 읏, 보기 좋아요.”

경수는 하지 않겠다고 놈을 설득하던 것은 까맣게 잊은 채로 제가 넣는 쪽이라며 우기기 시작했다. 노을도 지지만은 않았고, 결국 설전 끝에 가위바위보로 결정하기로 했다. 경수는 한쪽 눈을 질끈 감은 채 주먹을 내밀었다.

신은 제 편이 아니었다.

“역시 오늘 당장은 좀 이르죠?”

“…….”

보자기로 손쉽게 이겨 넣는 포지션을 가져간 노을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뻣뻣하게 굳은 경수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 몸 여기저기를 더듬던 손길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으읏….”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또 혀를 섞고 있었다. 경수는 움찔거리며 입술을 떼어 말했다.

“게, 게임은 삼 세 판….”

“세 번, 흣, 다 제가 이기면… 지금 당장 할래요.”

“흑…. 아니야 미안, 계속해….”

노을은 경수의 목덜미에 코를 박은 채 숨을 가쁘게 쉬었다. 목덜미에도 질척하게 입을 맞추며 턱을 타고 올라와 입술에 쪽 하고 입술을 가져다댔다. 경수는 노을의 목덜미에 팔을 감은 채 눈을 슬쩍 떠보았다.

거기로 어떻게 해, 씨발. 제정신이냐? …좆됐다. 진짜 좆됐는데….

“아, 읏… 경수 형….”

귓가에서 앓는 소리를 내는 목소리가, 조금만 시선을 돌려도 보이는 노을의 옆태가, 그리고 청량한 향에 섞인 미미한 땀 냄새가 경수의 정신을 쥐고 뒤흔들었다. 묘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경수는 억눌린 신음을 내뱉으면서도 속으로 몇 번이고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노을은 웬일인지 순순히 경수를 놔주었고, 경수는 집에 돌아와서 씻는 도중 천노을이 발간 입술을 꽉 문 채로 눈가를 붉히는 모습을 떠올리다 흠칫거렸다. 따뜻한 물을 맞으며 한참 샤워를 하다 욕실을 나왔다.

“…….”

열에 들떴던 머리가 식었다. 씨발 이제 내 인생은 끝났어! 그는 발버둥을 치다 제풀에 지쳐 쓰러지듯 잠들었다.

*

그리고 월요일 아침.

「노을: ㅠㅠ 저 감기 걸렸어요」

“…….”

잔기침까지 깨끗하게 사라진 경수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아침부터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던 비는 4교시가 시작하던 시점부터는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투두둑, 나뭇잎에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종이 끝을 구부렸다 펴며 손장난을 치던 경수는 고민 끝에 책상 밑으로 휴대폰을 숨기고 몰래 화면을 확인했다.

「나: 병원 같이 가줄까?」

아침에 보냈던 메시지인데도 노을은 아직까지 답이 없었다. 심지어 읽지도 않았다. 4교시가 끝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경수는 노을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몇 번 울리지 않아 전화를 받던 놈인데, 오늘은 평소보다 대기시간이 길어졌다. 이러다 부재중 전화로 넘어가겠다 싶을 때쯤 그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들려온 것은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하지만 틀림없는 천노을의 목소리다.

“뭐야. 너 목소리가 왜 그래?”

-형? 저… 자다 깨서….

“학교에선 안 잔다며.”

-열나서… 조퇴하고 병원 갔다가…. 으음, 그래서 지금은 집이에요.

아직 잠에서 덜 깨 허우적거리고 있는지 평소보다 말이 느렸다. 잔기침도 간간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오늘은 오지 마세요. 옮을라….

몸이 약한가. 고작 감기 가지고 이렇게 골골거리는 걸 보면 놈의 면역력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말 안 해도 안 가. 푹 쉬어.”

-네에. 형도 잘 자요….

“……어.”

넌 몰라도 난 지금 학교라고. 잘 자라니, 제가 무슨 말을 한 건지는 아는 걸까. 경수는 전화가 끊어지고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

종례가 끝나자마자 경수는 학교 앞 죽집에서 야채죽을 포장해 노을의 집으로 향했다. 혼자 사는 노을을 챙겨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니 발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258789, 노을이 알려줬던 비밀번호를 입력해보았으나 언제 바꾼 건지 경보음이 짧게 울렸다. 자는 애를 깨우는 건 조금 미안한데. 문 앞에 죽만 놓고 갈까 고민하던 중, 문이 벌컥 열렸다.

“형?”

머리가 여기저기로 뻗치고 이마가 왜인지 축축하게 젖어있던 노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경수는 손을 들어 노을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엄청나게 뜨겁지는 않지만 분명히 열은 있었다.

“추우니까 들어가.”

“…의사 선생님이 저 독감이래요.”

“괜찮아. 안 옮을 자신 있어.”

“콜록, 그래 보여요…. 중무장까지 하고 왔잖아요.”

경수는 열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노을을 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약국에서 급하게 사 온 마스크 두 겹을 고쳐 쓰며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집 안 공기가 바깥과 다름없이 싸늘했다. 이런 집에서 저렇게 얇게 입고 있으니 감기가 더 심해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경수는 노을을 식탁 앞에 앉히고 외투를 벗어 그의 어깨에 살포시 얹어두었다. 노을이 감동받은 듯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프다고 밥도 안 먹고 있을 것 같아서 온 거야. 다 먹는 것만 보면 집에 갈게.”

“형은요?”

“난 됐어.”

“같이 먹었으면 좋았을걸….”

노을이 멍하게 중얼거리며 숟가락을 들었다. 경수는 침실 온도를 조금 올려 설정해 두었다. 침대 옆에 물수건이 떨어져 있었다. 아까 전, 놈의 이마가 축축했던 이유가 이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그럴듯하게 수건을 이마에 얹은 채 쿨쿨 잤을 놈을 생각하니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조금 흐트러진 침대 이외에는 여전히 깔끔했다. 책상 위에는 책과 공책이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전에는 못 보던 액자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생일 축하해, 나’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놈의 생일날 쓰다 말았던 쪽지였다. 이게 뭐라고 액자에까지….

방바닥에 온기가 조금 돈다 싶었을 때 방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한눈을 판 사이, 죽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노을이 컴퓨터 본체 전원 앞으로 이동해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노을은 잠시 망설이다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저 이제 괜찮아요!”

이제 몸이 좀 괜찮으니 컴퓨터 앞에 앉겠다는 소리였다.

“죽을래?”

“…슬라임 볼 300개만 더 모으면 화이트 초코 부케… 아야.”

“뒤질래?”

“아뇨….”

경수는 노을의 볼을 잡아 늘인 채 마구 흔들었다. 그러자 노을은 눈꼬리에 눈물을 찔끔 매단 채 대답했다.

“형, 저 환잔데….”

“환자면 환자답게 다시 가서 누워.”

그러자 노을은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친 채 변명하듯 대꾸했다.

“하지만 발렌타인 이벤트는 내일까지란 말이에요. 내일 결혼해야 하는데….”

“누우라고.”

“넵.”

경수는 노을을 침대 위에다 구기듯 밀어놓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놓았다. 그 안에서 꿈틀거리던 노을은 이불 밖으로 머리를 쏙 내민 채 눈을 휘어 웃었다. 왜 웃느냐고 물어봐도 고개를 작게 저으며 헤실거리기만 했다.

“사실은 형이 올 것 같았어요. 그래서 아까 전부터 계속 자다 깨다 했거든요. 문 열어줘야 하니까….”

“뭐? 오지 말라며?”

“제가 그렇게 말해도 올 거잖아요. 그래서… 조금 기뻐요.”

노을의 주절거림을 대충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기쁘다고 말해주니 괜히 민망해져 헛기침을 했다. 덩달아 좀 기쁜 것 같기도 했다.

“저 아플 때 옆에 누가 있어 준 거 되게 오랜만인데….”

“안 물어봤거든.”

놈의 앞머리를 쓸어 올려주며 불퉁하게 대답했다. 노을은 눈을 살포시 감고 경수의 손에 얼굴을 기대며 말했다.

“그게 형이라서 더 좋은 것 같아요.”

“…….”

좋은 거면 좋은 거지, 좋은 것 같다는 건 또 뭐야. 투덜거리면서도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알아, 알겠으니까 눈 감아.”

손바닥으로 눈을 덮었다. 잠시 뒤 손을 떼어내자, 얌전히 눈을 감은 채로 노을이 중얼거렸다.

“나 맨날 아팠으면 좋겠다….”

철없는 소리. 부스스한 머리를 넘겨주며 피식 웃었다. 그때, 도어록을 누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몸을 일으키려는 노을을 그대로 두고 나와 현관문을 열었다.

“……뭐야. 누구세요.”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다짜고짜 누구냐고 묻는 탓에 경수는 적잖이 당황했다.

“예?”

“혹시 여기 살던 사람 이사 갔나요?”

이사? 천노을 아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전에 살던 사람이 아는 사람?

“노을이 얜 왜 나나 아버지한테 말도 안 하고 이사를 가….”

익숙한 이름에 경수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러고 보니 전에 형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직까지 그의 차 키를 돌려주지 않아, 지금도 식탁 귀퉁이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어, 노을이? 혹시 천노을 형이세요?”

“…노을이 친구니? 그럼 노을이도 아직 여기 살고?”

친구? 친구…. 대답을 망설이던 경수는 어설프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노을이가 친구가 있구나!”

“……?”

피 하나 섞이지 않았으니 당연한 소리지만, 그의 형은 노을과 닮지 않았다. 언짢은 기색을 보이던 그는 노을의 이름이 경수의 입에서 나오자 분위기가 딴판으로 바뀌었다. 성격이 나빠 친구도 없을 줄 알았다며 눈물까지 훔치는 그에 경수는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형?”

방에서 나온 노을은 현관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인상을 구겼다.

“신문 안 봐요.”

“……?”

대놓고 잡상인 취급을 하는 노을에, 잠깐 놀랐으나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잇는 남자 덕에 그 걱정은 금세 사라졌다.

“노을아 오랜만이야! 그새 키가 또 컸나? 사춘기라 그런지 쑥쑥 크네.”

“안 사요.”

“으이구, 또 그런다. 비밀번호는 언제 바꿨어? 형한테는 알려줘야지.”

“아, 진짜…. 경수 형, 문 왜 열어줬어요….”

울상을 짓는 노을에 죽을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경수는 저도 모르게 미안하다고 엎드려 사과할 뻔했다.

“그런데 교복 디자인이 바꼈어?”

“……?”

“뭐, 예전이랑 비슷하긴 한데 왜 바꿨대? 어울리긴 하겠다. 그래도 바뀌었으면 바뀌었다고 말을 했어야지 노을아. 네 용돈으로 산 거야?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닌데 밥은 잘 먹고 다니고? 용돈 필요해?”

몰아치는 질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노을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경수도 덩달아 기를 쪽쪽 빨리는 기분에 넋을 놓고 말았다.

“노을이 친구는 집에 가니?”

노을이 제발 가지 말라는 듯한 표정으로 애절하게 경수를 바라보았다. 경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러자 노을의 형은 잘 됐다는 듯 활짝 웃으며 손에 들고 있는 종이가방을 들어 보였다. 그에 천노을은 밥을 먹었다고 얘기하려던 경수는, 노을이 손을 슬쩍 잡으며 귓가에 속삭인 말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그냥 둬요. 말 걸면 더 시끄러워….”

“…….”

그 말대로 노을의 형은 말이 정말 많았다. 노을도 곧잘 조잘거리고는 하지만, 남자만큼 시도 때도 없이 말을 내뱉고, 혼자 답하고, 스스로의 말에 심취해 깔깔 웃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노을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 탓에, 노을이 새 형이 귀찮다고 칭얼거릴 만도 했다. 형이 말하는 주제가 경수로 돌려지기가 무섭게 노을은 언짢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 차 키 돌려줄 테니까 빨리 가요. 나 머리 아파요.”

“너 머리 아파?”

“…….”

고개를 홱 돌려 이마를 짚는 경수의 손길에 조금 기분이 풀어지나 싶다가도, 맞은편에 앉아 경수의 성적을 예상하는 형 때문에 노을은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그토록 소리를 지르고 정강이를 걷어차도 아랑곳하지도 않던 노을이 동요하는 걸 보니 낯설었다.

“얘보다 한 살 많으면 이제 고3일 텐데….”

“경수 형한테 공부 못한다고 하지 마요!”

노을은 제 형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졸지에 공부 못하는 놈이 된 경수는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뭐, 나?”

“안 하는 거지, 못 하는 게 아니라고! 그리고 다 생각이 있겠지…. 그쵸, 형?”

“…….”

별생각이 없었던 경수는 눈만 멍하게 깜빡였다. 애초에 제 성적을 어떻게 안다고 저런 소리를 지껄이는지 몰랐다. 안 봐도 공부는 못 할 것 같다, 이건가?

노을은 훔쳤던 차 키를 형의 손에다 쥐여준 채 그를 일으켜 신발장으로 몰아냈다. 쫓겨나는 와중에도 입을 멈추지 않고 놀리던 그는 경수에게도 다음에 보자고 인사를 하며 문을 나섰다. 한바탕 노을의 형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침묵만이 남았다. 경수는 넋이 나간 채 숨만 쌕쌕 내쉬었다.

“저 잠 다 깼는데 초코 부케만 교환하고 자면 안 돼요? 진짜 한 시간만 하면 되는데….”

“…….”

얼굴은 하나도 안 닮았는데 말에 휘말려 들게 하는 것은 형제끼리 비슷했다. 갑작스러운 만남이었으나 그 때문에 생각이 많아졌다. 노을은 경수의 손을 잡으며 다시 한번 그를 보챘다.

“형, 내일 저희 결혼식….”

“내일 결혼 안 해. 지금 그게 우선이 아닌 것 같아.”

우선이라는 말을 입안에서 몇 번 곱씹어 보던 노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자신과 결혼을 하지 않느냐며 펄펄 뛸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갔다.

“우선 순서가 중요하다는 거죠? 혹시 형도 저랑 같은 생각 하는 거예요?”

“뭐라는 거야.”

“저도 그 말에 찬성해요. 역시 형은 생각이 깊은 것 같아요.”

“……? 아무튼 결혼 같은 거 안 해. 나… 공부할 거야….”

적어도 노을이 자신을 ‘안 봐도 공부는 못하는 놈’으로 생각하지 않게 인식을 바꿔놓아야 할 것 같았다. 지금껏 놈이 저를 바보 멍청이로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앞이 아찔했다. 그는 노을에게 나름대로 믿음직하고 멋있는 형으로 보이고 싶었다. 당당하게 성적을 보여주면 놈이 놀라 자빠지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 내일부터는 수업도 열심히 듣고 게임도 하루 두 시간으로 줄여야지….

“그럼 형도 열심히 공부하시고… 이번 주말 어때요…?”

평일에 열심히 하면 주말엔 노을과 놀아줄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말은… 그래 좋아.”

그는 활짝 웃으며 휴대폰 화면을 눌렀다. 그러자 방금 전에 했던 말이 되풀이되었다.

‘주말은… 그래 좋아.’

“……?”

“녹음했어요. 저 감기도 금방 나을게요!”

노을은 알 수 없는 소리와 함께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여전히 열에 들떠 발간 눈가가 문득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

종이 울리자마자 책상에 쓰러지듯 엎드려 눈을 감았다.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5교시 문학은 정말 답이 없었다. 단조로운 선생님의 목소리와 식곤증이 겹쳐 누구라도 잠이 오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팔을 베고 엎드린 채 숨을 크게 들이쉬고 한 번에 내쉬었다.

평소의 경수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광경에, 친구들은 조심스레 걱정을 해주거나 대놓고 놀렸다.

“평소 안 하던 짓을 하니까 그러지. 김경수 일어나 봐, 나 필기 좀 베끼자.”

경수는 어깨를 흔드는 손에 퀭한 눈으로 일어났다.

“…내 거 베껴서 뭐해? 너도 잤냐?”

읊조리듯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자 일어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부반장이 반을 나가며 교실 불을 무심히 꺼주기도 했다.

“경수 너랑 부반장 빼고 다 잤는데…. 그런데 넌 대학도 안 간다는 애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공부를 해? 대학 가려고?”

“…아니. 그냥 심심하니까.”

심심해서 듣지도 않던 수업을 듣는다니, 제가 들어도 이상한 말이었다. 하지만 태열은 별 의심 없이 필기를 베끼는 일에만 열중해 있었다.

“이건 뭐야. 영어야?”

그의 손가락이 경수의 글씨를 가리키고 있었다. 문학 시간인데 웬 영어. 경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해주었다.

“아니, 딱 봐도 ‘저녁 노을’인데.”

“상형문자야 뭐야….”

“…….”

몰려오는 졸음 때문에 머리는 멍하고,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 기분은 나른했다. 제대로 수업도 듣고 가방에 복습할 책을 들고 하교하는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사흘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다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천노을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평소 놈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생각할지가 걸린 일이다. 지금의 경수에게는 이 문제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래로 내킬 때만 수업을 듣고, 싫어하는 과목엔 손도 대지 않았더니 이 꼴이 나 있었다. 부모님도 공부를 강요하는 분들은 아니라 가능한 일이었다. 졸업을 하고 나면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내려가 가게 일이나 도울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걔가 뭐라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경수는 노을을 떠올려보다 다시 책상에 엎드려 생각에 잠겼다. 사실 공부 같은 거 하지 않아도 노을은 자신을 무시하거나 편견을 갖고 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자신도 그러했다. 노을의 성적에 관계없이, 솔직하고 되바라진 데다 상냥한 그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노을에게 당당하고 멋진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자신은 바뀔 필요가 있었다.

「노을: 저 심심한데ㅠ 형 뭐해요?」

책상이 울리는 소리에 서랍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휴대폰을 확인해보았다. 노을이 보낸 메시지였다.

「나: 공부」

「노을: 아ㅎㅎㅎ 학교 아니에요?」

노을은 제가 공부를 한다는 말만 보면 저렇게 웃고는 했다. 그리고 가끔은 ‘나도 하러 가야지!’란 말까지 덧붙였다. 형이 하니 저도 따라 한다는 말 같았다.

「노을: 형 되게 시도 때도 없으시네요ㅎㅎ!!」

「나: 그런가?」

「노을: 그래도 전 그런 것도 좋다고 생각했어요ㅇㅅㅇ」

시도 때도 없이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자기면서. 경수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눈에 힘을 준 채로 히죽 웃었다.

“귀…여…운…새…끼…!”

“뭐래냐, 음침한 새끼.”

필기 복사를 무사히 마친 태열은 책을 휙 밀어 놓은 뒤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경수는 다음 시간 종이 울리기 전까지 노을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웃음을 참느라 입술이 새하얘졌다.

*

금요일 오후, 연속 접속 보상을 받기 위해, 10분 동안만 켜두고 나갈 생각이었다. 무심코 친구 창을 열어보니 민재가 접속해있었다. 마침 잘 됐다고 생각해 귓속말을 걸었다.

[귓속말] 냥이냥나냥: 지금 있어?

[귓속말] 스페이드퀸: ?

[귓속말] 냥이냥나냥: 천노을 반에서 몇 등 정도 해?ㅋㅋ

목표를 설정하기 위해서였다. 경수는 중위권 정도를 예상하고 있었다. 일 년 넘게 게임에 접속만 해도 친구 창에 매일같이 보이던 놈이었으니까, 당연히 자신과 비슷하거나 더 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귓속말] 스페이드퀸: ㅋㅋ….

[귓속말] 냥이냥나냥: 많이 낮아?ㅠ

[귓속말] 스페이드퀸: ? 아뇨???? 우리 학교가 전교 20등 안에 들면 점심시간이나 이럴 때 공부하라고 따로 독서실 책상 같은 거 내주는데요

[귓속말] 스페이드퀸: 걔도 거기 자리 있어여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전교 20등?

[귓속말] 냥이냥나냥: 구라

[귓속말] 스페이드퀸: 진짠뎀

말도 안 된다. 맨날 밥 먹고 자는 시간 빼면 게임만 하던 게 아니었단 말인가.

[귓속말] 냥이냥나냥: 왜…?

[귓속말] 스페이드퀸: 몰라요 ㅅ1발ㅠㅠ

[귓속말] 냥이냥나냥: ????

[귓속말] 스페이드퀸: 물어보면 ‘교과서 위주로 수업 열심히 들었어!^^’하니까 물어보지 마세요ㅋ 그거 듣고 혈압 올라 죽을 뻔ㅋㅋㅋ

[귓속말] 스페이드퀸: 모르시는 게 나아요~

[귓속말] 냥이냥나냥: 네가 지금 말해줬잖아

[귓속말] 스페이드퀸: ㅋㅋㅈㅅㅈㅅ

‘접속하신 지 10분이 지났습니다. 보상을 수령해주세요!’

접속 보상을 받고 게임을 끈 경수는 곧바로 공부를 하기는커녕, 전원이 꺼져 까매진 모니터를 바라보며 10분가량 멍하게 앉아만 있었다. 노을이 전교권에서 놀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에 비해 자신은 아무리 지금부터 열심히 해봐도 전교권은커녕, 중위권으로 올라가는 것조차 힘들 게 분명하다.

“…그래, 공부 잘하는 게 걔 잘못은 아니니까.”

괜히 노을이를 책망할 필요는 없었다. 놈을 목표로 잡는다는 건 별로 좋지 않은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학교도, 학년도 다른데 목표를 노을로 잡아서 무얼 하겠는가. 겨우 정신을 다잡은 경수는 책상 앞에 앉았다.

책을 꺼내 글씨를 읽어보아도 머릿속에 전혀 들어오지가 않았다. 주말에는 천노을이랑 놀아주기로 약속했는데, 오늘 이러면 안 되는데…. 억지로 글을 꾸역꾸역 읽다 보니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거의 엎드리다시피 해 샤프 끝을 물고 멍을 때리고 있을 때, 충전기에 연결시켜 둔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경수는 반쯤 감았던 눈을 뜨고 후다닥 일어났다.

‘노을 님으로부터 영상통화가 왔어요!’

웬 영상통화. 경수는 재빨리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졸았다는 걸 들키지 않도록 눈도 똑바로 뜨고, 머리를 다듬었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누르자, 화면 가득 노을의 얼굴이 떠올랐다.

“왜.”

-형, 여보세요부터 해야죠.

노을은 핀잔을 주듯 말했다.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가 있었다. 그새 제 말을 배워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다. 경수는 피식 웃으며 놈이 원하는 대로 말해주었다.

“…그래, 여보세요?”

-네, 여보예요.

“지랄 마.”

노을은 캄캄한 밤길을 걷고 있었다. 가로등에서 멀어지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고, 다시 새 가로등을 지나면 선명하게 보였다. 보기만 해도 새벽 공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봉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보고 싶어서요.

“그래. 왜 아직도 밖이야?”

-뭐 좀 사러 나갔다 왔어요. 형은 뭐 하고 있었어요?

“공부.”

-아….

노을은 눈을 깜빡이다 배시시 웃으며 손등으로 뺨의 열을 식혔다. 어쩐지 쑥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도 말이다. 손목에 걸려있는 까만 봉투에 눈이 갔다.

“그거 뭐야?”

화면을 가리키며 물었다. 노을은 경수와 봉투를 번갈아 보더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궁금하냔 말에 오기로 아니라고 대답했더니 맑은 웃음소리까지 내며 짧게 웃었다. 그리고 부스럭 소리를 내며 봉투에 들어있던 것을 슬쩍 꺼내어 보여주었다.

“……?”

졸음이 완전히 달아났다. 풀어져 있던 경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

-표정이 왜 그래요?

경수는 기가 막혀 입만 벙긋거렸다. 그의 손에 바스락거리는 물체가 들려있었다. 그가 알기로는 세상의 그 어떤 과자나 사탕도 저런 모양새를 하고 있지는 않았다.

“……노을아. 그건 왜….”

-왜긴요. 형도 공부 열심히 해서 아실 것 같은데.

“씨발, 공부만 한 내가 그걸 왜 알아!”

-아, 안 쓰는 거로만 보셨어요?

“……뭘?”

-밖이라서 더는 못 말해요.

노을이 붉어진 뺨을 감싸며 배시시 웃었다. 경수는 마치 암호를 해독하는 것처럼 노을의 말을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다시 굴려보기를 반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였다.

“……씨발….”

경수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어쩐지 별것도 아닌 말을 녹음까지 하더라니. 공부라는 말에 지나치게 좋아하더라니, 아무래도 노을이 말하는 공부와 제 공부의 정의가 다른 것 같았다.

그런 쪽의 공부였다니! 어떡하지, 하나도 안 했는데!

-내일 보는 거죠? 몇 시에 오실 거예요?

이걸 말을 해줘야 하나. 그럼 실망하는 건 아닐까. 저렇게 콘…돔까지 사 왔는데. 기대감에 잔뜩 부푼 노을을 실망시킬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아니면 제가 그쪽으로 갈까요?

우리 집에 저 악마를 들여서는 안 된다. 경수는 침을 꼴깍 삼키고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일요일에 보자!”

-…일요일이요? 자고 가라고 하려 했는데. …그냥 내일도 보면 안 돼요?

“아냐! 일요일에 갈아입을 옷도 가져갈게! 나 내일은 엄청 바빠!”

-…왜 엄청 바쁜데요?

“공부!”

-아, 네…!

노을은 제 말에 납득했는지 결국 기분 좋게 웃고 말았다. 하지만 경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정말 그 공부 맞나 봐, 씨발 어떡해! 수십 번은 더 공부한다고 했는데, 심지어 학교에서도. 노을이 자신을 학교에서 이상한 걸 찾아보는 사람으로 인지했을 걸 생각하면 머리가 아팠다. 경수는 온갖 욕을 속으로 주절거리며 노을이 집에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봤다.

하마터면 당장 내일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인생의 종지부를 찍을 뻔했다. 가까스로 하루의 유예기간을 번 경수는 전화를 끊자마자 허겁지겁 컴퓨터 앞으로 달려갔다. 전원이 켜지는 동안에도 별의별 생각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하지만… 설마 죽기라도 하겠어? 별거 없겠지. 평온을 가장하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려다 실패했다. 불안과 초조함에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었다.

*

“…….”

차라리 월요일까지 쭉 자버렸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저절로 눈이 떠졌다. 시계를 보니 아직 오전 아홉 시밖에 되지 않았다.

인터넷은 정말 정보의 바다였다. 없는 게 없었다. 사람들은 온갖 기묘한 자세로 쾌락을 즐겼다.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았다. 다만 그게 남녀가 아니라 남남이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신의 장난인지 오늘은 3월의 마지막 날이고, 하필이면 내일이 제 생일이었다. 생일 전날 죽으면 너무 억울해서 어떻게 하지. 별생각이 다 들었다. 경수는 심호흡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벌써부터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정말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몸은 정직했다. 어제 하루 종일 해당 공부에 대한 벼락치기를 한 탓인지 눈앞에 살색 형체가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휴대폰 화면이 반짝하고 켜졌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보지 않아도 천노을일 게 뻔했다. 경수는 당장 답장을 하지 않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고민했다.

‘그냥 튈까. 그때 가위바위보만 안 졌었더라도 부담이 훨씬 덜했을 텐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후에 있을 일에 대해 생각만 하는데도 한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그 짧은 시간 안에 경수는 수많은 심리 변화를 겪었다. 불안, 초조, 호흡곤란, 집중력 저하, 긴장, 두려움, 과도한 심장 두근거림…. 기대감도 조금 있었으나 경수는 애써 그를 부정했다. 천노을이 보고 싶으면서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냥 모른 척 잡아 떼볼까. 억지를 부리면 노을도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러갔다. 딩동, 딩동, 딩동. 초인종을 연달아 세 번 누른 경수는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치켜들었다. 비밀번호를 아는데도 불구하고 직접 도어록을 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며 노을이 경수를 반겼다.

“긴장돼요, 형?”

“응? 뭐가?”

노을의 머리카락이 약간 젖어있었다. 방금 막 샤워를 마친 모양인지 비누냄새가 풍겼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요.”

“엥? 긴장? 그럴 리가! 나 청심환도 먹었어. 지금 완전 멀쩡한데.”

“……?”

막상 노을의 얼굴을 보니 기껏 먹은 약이 별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분명 오는 내내 심장박동이 멀쩡했기에 역시 약의 효과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말이다. 그냥 때리고 튈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그동안 얼굴을 본 정이 있으니 그건 참아보기로 했다.

“형은 정말… 만반의 준비를 하셨네요.”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벌써부터 기쁜 얼굴로 눈가를 붉히는 게 우스웠다. 경수는 마주 웃어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영화 좋아하지?”

“…네?”

“오늘 너랑 영화 볼 거거든.”

“무슨 영화요?”

사실대로 말하면 당장 달려들어 USB를 쓰레기통에 버려버릴 것 같으니, 애매하게 돌려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아주 좋은 걸로 가져왔어….”

경수는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며 은근하게 속삭였다. 노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더니, 곧 ‘아!’하는 감탄사를 내며 묘하게 웃었다.

“전… 좋아요!”

“응, 다행이네.”

별점이 꽤 높은 영화니까, 당연히 좋아해야지. 다만 피도 좀 튀고 깜짝 놀래키는 장면도 잦은 만큼, 분위기를 잡을 틈도 나지 않을 것이다.

‘이건 공포영화니까.’

혹은 지루해하다가 먼저 잠에 들어도 좋고. 경수는 정말 노을의 말대로 만반의 준비를 마친 터였다. 경수는 메고 있던 가방을 노을의 방 안에 내려놓았다. 노을은 노트북을 꺼내며 들뜬 듯 어깨를 들썩였다.

“그렇게 좋아?”

“네, 좋아요!”

“그럼 나랑 약속 하나 하자. 영화 끝나기 전엔 아무것도 하기 없이.”

“…….”

“천노을, 대답.”

“…….”

노을은 입을 다문 채로 모른 척 눈만 깜빡거렸다. 이럴 줄 알고 준비해온 게 있지. 경수는 가방 속을 이리저리 뒤지다 지난번 사촌형이 두고 간 넥타이를 꺼냈다.

“노을아, 그럼 손 내밀어봐.”

“싫어요. 형 뭐해요? 저한테 대체 뭘…!”

“너랑 아주 좋은 거 하려고 그래.”

“거짓말! 거짓말이잖아요!”

“나 거짓말 같은 거 못 해. 너 이거 몰라?”

경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넥타이를 들어 보였다. 노을은 영 내키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저흰 처음인데 그건 좀. 형 변태 같아요. 처음은 원래 좀 평범하게….”

“뭘 모르네. 묶이는 게 처음이니까 더 특별한 거지. 너 바보야?”

“…그런가….”

역시 통할 줄 알았다. ‘처음’이라는 단어는 아주 특별한 단어니까.

“그래. 첫 키스와 마찬가지야.”

“……아닌데.”

아니라고 하면서 두 손을 얌전히 내미는 것은 또 무엇인가. 손이라도 묶어두면 영화를 보는 내내 이상한 짓을 하지는 못할 테니까 괜찮을 것이다. 넥타이 안쪽은 부드러우니 천노을이 다칠 일도 없을 거다. 얌전히 굴어주니 더 사랑스러운 것 같았다. 경수는 어젯밤 내내 찾아보고 연습까지 단단히 한 ‘스스로 못 풀게 손목 묶는 법’을 노을에게 시험했다.

“됐다. 예쁘게 잘 묶였어!”

“…아, 예.”

시간은 좀 걸렸지만, 묶인 모양새가 깔끔했다. 다 묶은 뒤 매듭을 위로 가게 해 양손을 잡고 팽팽하게 당겨보았다. 정말 인터넷에서 말한 대로 매듭은 잘 풀리지 않았다. 움직임에 제약이 생긴 노을은 짜증이 단단히 난 듯 눈가를 씰룩거렸다. 경수는 그를 달래듯 이마에 짧게 입을 몇 번 맞췄다. 그러자 노을의 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것 봐, 금방 좋아할 거면서 빼기는. 경수는 전원이 들어온 노트북에 USB를 끼워 넣었다.

“영화 짧아요?”

“짧아.”

“알았어요….”

인생에 비하면 뭐든 짧지. 경수는 파일명 ‘♨아주 좋은 것♨ (노을이 취향일 듯ㅎ♨)’을 클릭했다. 엔터키를 눌러 동영상을 재생하기 직전, 노을이 중얼거리는 말이 귓가에 들려왔다.

“형,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제 생각 하시는구나….”

“…….”

아니라고 하면 또 어떻게 돌발행위를 할지 모르니, 대답하지 않는 게 좋겠다. 동영상을 재생시킨 뒤 곧바로 재생시간 ‘3시간 52분’을 보지 못하게 마우스를 위로 숨긴 경수는 노을을 밀어 침대 위에 앉혔다.

청아한 오르골 소리와 함께 음산한 분위기의 집이 등장했다. 멀뚱히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노을의 눈이 찌푸려졌다.

“작년에 저거 예고편 봤는데요.”

“그렇구나. 나는 안 봤어.”

“장난해요? 저거 공포영화잖아요!”

“알아.”

“이런 게 어디 있어. 형이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되죠, 19금 영화 아니었어요?”

“미안한데 나 아직 나이가 안 돼…. 그건 불법이야.”

“아, 그렇구나….”

노을은 그새 납득을 한 건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넥타이로 묶인 두 손이 처량해 보였다. 그는 영화의 도입부가 지나가는 내내 불편한 듯 손을 꼼지락거리다, 팔을 휙 들어 올려 경수의 목을 끌어안고 쓰러지듯 누웠다.

“야, 천노을.”

“저… 너무 무서우니까 형이랑 안고 볼래요.”

아랫입술을 꼭 개무는 노을에 잠시 마음이 약해졌다. 기대했을 텐데, 그 기대감을 깬 건 나니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

그래, 이 정도쯤이야.

“…그럼 괜찮을 것 같아?”

“네에….”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시선을 맞춘 노을은 처량하게 눈썹을 휘었다. 사실 무서운 것은 경수도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지. 그럼 적어도 앉아서 보자.”

그 말에 노을은 끙끙거리며 경수와 함께 일어나 앉았다. 그의 무릎 사이에 앉은 채 뒤에서는 끌어안긴, 누가 보면 아주 다정한 자세로 둘은 차가운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귀신이 갑자기 튀어나올 때마다 경수는 숨을 집어삼켰다. 그때마다 자신을 끌어안은 노을이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이러면 진정이 된다는 개소리를 저지하기엔 영화가 너무 무서웠다. 노을은 무섭다고 말한 것치고는 굉장히 태연했다.

“…너 무섭다며.”

아무리 봐도 저건 무서워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 경수는 쿵쿵거리는 가슴께를 누르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뒤를 돌아보았다. 노을은 뻔뻔하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너무너무 무섭다.”

국어책을 읽는 것 같은 말투였다.

“이, 씨발…!”

그때, 귀신들을 피해 도망을 다니던 두 남녀 주인공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 피어오른 사랑을 겉으로 표출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 클레어, 오 마리안, 하고 입술을 맞추던 둘은 침대 위에 쓰러진 채로 입술을 맞대며 핑크빛 기류를 꽃피웠다.

“…….”

“…….”

15세 영화 치고는 의외로 수위가…. 경수는 착잡하게 숨을 참으며 어서 빨리 이 장면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남자 주인공이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아까 전까지는 무척 음산하던 분위기가 금세 이상해졌다. 남자 주인공의 허벅지를 더듬는 여자의 손이 클로즈업되는 것과 동시에 노을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이럴 줄 알았어! 전 처음부터 형을 믿었어요.”

“아, 아니. 아깐 분명….”

안 믿는다며?

경수가 의아해함과 동시에, 노을은 고개를 살짝 숙여 경수의 입꼬리에 입맞춤을 내렸다. 짜증을 내며 밀어내려던 경수는 등에 맞닿은 노을의 가슴이 거세게 뛰고 있는 것을 느꼈다. 한 번 의식하고 나니 계속 신경이 쓰였다. 영화 음량은 충분히 컸는데, 그 소리는 전혀 들어오지 않을 만큼 심장박동이 거셌다. 덩달아 제 가슴까지 조금 빠르게 뛰는 느낌이 들었다.

‘착각일 거야.’

난 청심환까지 먹었다고. 경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노을이 제 어깨에 턱을 얹은 채 옆을 힐끔대는 게 느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그는 곧 경수 형, 하고 자신을 불렀다.

“왜?”

“형….”

이거…. 노을이 묶인 손을 꼼지락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내내 마찰된 탓인지 손목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경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슬쩍 돌려 노을을 뒤돌아보았다.

“아파?”

“조금….”

노을이 살포시 눈을 내리깔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그 사이의 옅은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곧이어 조금은 차가운 듯한 입술이 내려와 이번엔 정확히 제 입술에 맞닿았다.

묶인 손을 불편해하는 듯 꼼지락거리면서도 노을은 제게서 입술을 떼지 않았다. 경수도 마찬가지였다. 묘한 분위기가 걷히고 다시 노트북에서는 사람 뼈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둘은 그에 대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약간 싸늘하고 건조한 공기, 그 속에 들리는 것은 서로의 움직임과 심장박동소리 뿐이었다. 쪽 소리를 내며 아랫입술을 물던 노을이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댄 채 살짝 웃었다. 웃는 얼굴에 심장이 또 한 번 덜컥 움직였다.

“…돈 버렸네.”

“네? 뭐가요…?”

“효과가 하나도 없잖아.”

개 좆같은 청삼환. 나랑 안 맞나 봐…. 경수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노을은 살짝 웃으며 다시 입을 맞췄다. 둘은 자연스레 침대 위로 눕듯이 쓰러졌다. 시간은 둘을 기다려주지 않아 영화는 계속 재생되고 있었다. 세 시간이나 되는 영화가 끝나고 노트북 화면이 까만 보호 화면으로 넘어갈 때까지, 둘은 내내 침대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

경수는 오늘따라 안고 자는 베개가 따뜻하다고 느끼며 떠지지 않는 눈을 가까스로 떴다. 오늘은 노을이 자신을 끌어안고 잠을 자고 있었다. 그나저나 잘못된 자세로 잔 건지, 밤새 뒤에서 자신을 안은 노을이 잘못인 건지, 허리가 온통 뻐근했다. 그는 허리를 손으로 문지르며 제 연인을 내려다보았다.

“…노을아.”

조그맣게 속삭인 소리에 노을은 쉬이 깨지 않았다. 경수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커튼이 열려있어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살이 노을의 뺨에 한줄기 닿아있었다. 옅은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짝였다. 예쁘다. 경수는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어젠 때려죽여도 모자랄 놈처럼 느껴졌는데, 또 곤히 자는 걸 보니 화가 좀 가셨다. 분명 예전까지는 그런 적 없었는데, 은근히 얼굴에 약한 편이었나 보다, 내가. 멍하게 노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히죽거리던 경수는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헉!”

“으응….”

노을이 뒤척였다. 경수는 그를 흔들어 눈을 뜨는 것까지 확인한 뒤 소리쳤다.

“천노을! 당장 일어나! 나 늦었어!”

하필이면 노을의 집에서 자서, 지금 당장 달려가지 않으면 지각이었다. 한 번만 더 지각하면 꼼짝없이 교내봉사였다. 경수는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를 발로 걷어차며 의자에 걸린 교복을 주워 입고 가방을 들었다.

“야! 나 먼저 간다!”

“…네에.”

노을은 졸린 눈을 부비며 부스스하게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현관문을 닫고 나가는 경수의 뒷모습을 보며, 저 형은 왜 제 교복을 입고 가나 잠깐 혼란에 빠졌다.

미친 듯이 달려 겨우 교문에 다다른 경수는 숨을 몰아쉬며 당당히 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자신을 보는 수학 선생님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너 이노무 새끼, 니는 3학년이 돼가지고 이런 장난이나 치고 싶나. 아무리 만우절이라 캐도….”

또 어떤 놈이야. 경수는 피식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자신밖에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스스로를 가리키며 “저요?”하고 묻자, 선생님이 하, 하며 실소를 터뜨렸다.

“모른 척하시겠다?”

“…뭐가요.”

불만스럽게 답하며 제 차림을 내려다본 경수는 그 말의 뜻을 깨달았다. 노을의 학교와 디테일을 제외하고 색 배치가 비슷한 탓에 놈의 옷을 잘못 주워 입고 온 것이었다. 어쩐지 오는 내내 바지가 좀 질질 끌린다 했는데, 어제 내내 잠을 못 잔 탓에 살이 빠진 줄 알았다.

“김경수 쟤야! 이 새끼 만우절이라고 교복 대여까지 했어!”

“인생은 경수처럼 살아야 한다. 스케일이 남달라….”

“아깐 수학 한테 지 생일이라고 구라도 치더라, 미친놈.”

“…….”

경수는 만우절의 영웅이라 불리며 구경거리가 되었다.

*

학교가 끝나자마자 경수는 허겁지겁 노을의 집으로 달려갔다. 비밀번호를 못 들어 먼저 들어가지는 못해 그 앞에서 10분 정도 기다리니 노을이 뒤늦게 걸어왔다. 그는 제 교복을 입은 경수를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너, 너 뭐야? 넌 왜….”

노을은 제 교복을 입기는커녕 늘 보던 차림 그대로였다. 분명 노을의 옷을 입고 있는 게 확실한데 아침에 급하게 새로 샀을 리도 만무하고 말이다. 놈의 옷차림을 가리키며 말을 더듬자 노을은 눈을 휘며 대답했다.

“저 교복 세 벌 있어요.”

“…….”

경수는 하루 종일 남들의 웃음을 위해 희생한 자신을 생각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체육복으로 갈아입으려 하면 옷을 빼앗아 도망가고 여자애들은 사진까지 찍어갔다. 그 고통을 자신만 겪었다니 억울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노을의 방에 가지런히 개어진 제 옷으로 갈아입은 경수는 곧바로 다시 가방을 메고 신발장에 발을 디뎠다. 그러자 노을은 어리둥절하게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형, 어디 가요?”

“집.”

“왜요?”

전원이 켜진 컴퓨터가 눈에 들어왔다. 당연히 집에 오는 이유가 게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 요즘 공부해.”

“……왜요?”

“그 공부 말고…. 진짜 공부.”

“그러니까, 왜요?”

노을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정말 순수하게 묻는 듯했다. 게임은 같이 했는데 천노을은 자신과는 다르게 전교권에서 놀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물으면….

“곧 중간고사야.”

“학교에서 수업 듣잖아요?”

민재의 말대로 혈압이 올랐다. 꽉 쥔 주먹을 들어 보이자 노을이 제 손바닥을 펼쳐 주먹을 감쌌다.

“안 돼, 잡지 마. 진짜 공부할 거야.”

천노을은 성적도 괜찮을 테니 당연히 대학에 가겠지. 그에 비하면 자신은 수학 이외엔 정말 답이 없었다. 손을 놓아주지 않고 말갛게 눈을 깜빡이는 노을을 마주 보던 경수는 스스로를 수렁에 빠뜨릴 말을 내뱉고 말았다.

“…어, 나도 대학은 가야 할 것 아니야.”

빨리 집에 가기 위해 홧김에 내뱉은 말이었다. 그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노을이 물었다.

“그럼 같이 다닐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

“저 형이랑 같이 등교하고 밥도 맨날 같이 먹고 싶었어요! 보니까 형네 학교로 전학은 못 가더라구요. 안 보내준대요.”

“…전학 오려고 했어?”

“그런데 안 된다고 교장실 불려갔어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놈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었다. 가끔 보면 천노을은 생각하는 게 상상 이상으로 괴상했다. 그리고 실행력도 한 몫 했다.

“그런데 전 하향지원 할 생각은 없는데요?”

“…누가 하래? 그러니까 돕지는 못할망정 방해는 하지 마.”

“왜 못 도와요? 공부만 하게 도와줄 수는 있어요!”

“응, 그래.”

네가 무슨 수로 날 도와. 경수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그날 저녁, 노을이 무슨 소리를 하려던 건지 알아버리고 말았다.

「ㅈi9별: [속보] 썬셋, 냥님한테 또다시 상금 걸어! 다만 죽이면 가만있지 않을 것….」

「포세이돈대장: ??」

「ㅈi9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할로윈가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ㅅㅂ개웃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ㅈi9별: 이번 이벤트는 위치 제보 말고 자리에만 잡아두래요 거래나 디버프걸어서ㅋㅋㅋㅋ」

「박휘벌래: 머임ㅋㅋㅋㅋㅋㅋ」

「ㅈi9별: 부부 싸움ㅋ」

「나: ㅗ」

「ㅈi9별: 이제 익숙한 거? 냥님 반응이 담백해졌네요ㅋㅋㅋㅋㅋㅋㅋㅋ」

「포세이돈대장: 음… 냥님 공부한댔으니까 마침 잘 된 것 같기도 하고…?」

그 말대로 게임에 들어가기만 하면 수십 명이 동시에 달려들어 말을 걸고 파티 초대나 거래 신청 창을 띄우는 통에 도저히 게임 진행을 할 수가 없었다. 맵을 넘어가는 것조차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경수는 그렇게 몇 달간 강제로 게임을 끊게 되어버렸다.

*

공부도 어떻게 보면 습관이었다. 습관처럼 책을 꺼내 들고 공부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집중을 할 수 있는 부류가 있었다. 경수는 후자에 속했다. 그래도 노력하는 만큼 성적이 느는 것은 맞는지, 기말고사와 6월 모의고사에서는 등급이 꽤 많이 올라있었다.

그래도 한순간에 게임을 끊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경수는 가끔 머리를 식힐 겸 게임에 접속하고는 했는데, 천노을 그 망할 자식이 걸어 놓은 현상금 때문에 제대로 진행을 할 수가 없었다. 부캐로 접속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자신을 위한답시고 한 행위니 무르라고 할 수도 없었고, 막상 놈의 얼굴을 마주하면 한 대 쥐어박으려던 마음도 씻은 듯이 사라지고는 했다.

그리고 오늘, 열람실에 앉아 두 시간째 집중을 못 하던 경수는 벌떡 일어나 지갑과 휴대폰만 들고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스트레스를 풀 곳이 없어 머리가 과열된 상태였다. 방학이라 그런지 PC방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조금 더 걸어서 자리가 남은 곳을 찾은 경수는 습관적으로 일루전 게임 아이콘을 더블 클릭하려다 고개를 저었다.

보나 마나 다음 맵으로 넘어가지도 못할 거고, 새 캐릭터를 만들 슬롯을 살 정도로 간절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접속했을 때 노을이 먼저 들어와 있다면, ‘형 여기서 뭐 해요ㅇㅅㅇ’라며 당장 나갈 것을 은근히 종용하기도 했다.

“천노을 개새끼….”

경수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는 그냥 친구들과 함께하던 FPS 슈팅 게임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게임에 접속하기 전, 홈페이지에 들어가 닉네임을 재설정했다.

‘계정의 닉네임을 설정해주세요.’

마우스를 손가락으로 탁탁 두드리며 잠시 고민하던 경수는 닉네임을 ‘천노을’로 설정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함이니 총을 연사해 상대를 죽이는 것과 더불어, 욕을 먹어도 천노을의 이름으로 욕을 먹는다면 스트레스를 두 배로 효율적으로 풀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게임에서는 유저들을 등급으로 나누어, 실력 대에 맞는 유저끼리 랜덤 매칭 게임을 붙여주고는 했다. 낮은 순대로 ‘브론즈, 실버, 골드, 플래티넘, 다이아, 마스터, 그랜드 마스터’였는데, 가끔 친구들을 돕는 용으로만 사용해서 그런지 플래티넘 등급에 머물러있었다.

한참 열심히 할 때는 마스터에도 올라봤었는데…. 그는 과거를 추억하며 랜덤 매칭 버튼을 클릭했다.

그동안 새로운 캐릭터도 많이 나왔는지 못 보던 캐릭터만 여섯 개였다. 그중, 커다란 바주카포를 들고 있는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다. 해당 캐릭터를 선택하니 팀 채팅에서 누군가 말을 꺼냈다.

[레드오션: 썬레기 아웃;]

[천노을: ? 님 저 아세요??]

[레드오션: 내가 님을 어떻게 암ㅋㅋㅋㅋ 왜 시작부터 던져요]

썬레기라는 말에 경수는 노을의 닉네임인 ‘썬셋’부터 떠올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놈이 썬셋을 아는 것은 아닌 듯했다. 뒤늦게 제가 선택한 캐릭터의 이름이 ‘썬더’인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뿅망치쾅쾅: 아 왜 아무도 힐러 안 해; 누구 힐러 좀;;]

[천노을: 찾지 말고 니가 해]

[뿅망치쾅쾅: 천노을아 닥1쳐]

닥치는 것은 제가 아니라 노을이니 타격이 전혀 없었다. 경수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뿅망치쾅쾅의 말을 무시해버렸다. 이 캐릭터가 그렇게 나쁜 캐릭터인가. 경수는 게임이 시작되기 전, 대기실 구석에서 공격을 시험했다. 스피드는 느리지만 바주카를 쏠 때 타격감이 마음에 들었다.

[ACHOO: ㅋㅋ나도 던짐]

[뿅망치쾅쾅: 아;;;]

경수를 따라 덩달아 다른 팀원들이 캐릭터를 변경하기 시작했다.

‘출입구가 개방되었습니다. 전장으로 돌격하세요!’

다행히도 맵은 익숙한 맵이었다. 경수는 먼저 튀어 나가는 레드오션의 뒤를 따라가며 팀보이스를 켜고 헤드셋을 머리에 썼다.

-으, 우리 팀에 썬더 꼈어.

-야 빨리 바꿔! 데스매치에서 누가 썬레기를 골라, 씹.

-천노을아 뒤져.

어차피 경쟁전도 아닌데 저들의 말을 들을 이유는 없었다. 점령전도, 거점전도 아니고 팀 데스매치니 중요한 건 죽지 않고 상대를 많이 죽이는 것이었다.

[천노을: 안 죽으면 되잖아;]

[레드오션: 너 에임 잘함? 썬더 잘 다루는 놈 1도 못 밧는대]

[천노을: 아니 첨 해보는데ㅋㅋ]

-아하핰, 우리 노을이가 처음 해본댄다.

-죽어! 방해하지 말고 죽어!

[천노을: 왜 해보지도 않고 죽으라고 해?]

[뿅망치쾅쾅: 천노을아 그냥 게임 끄고 한강에서 프리다이빙 추천할게ㅋㅋ]

[레드오션: ㅋㅑ 더운데 잘 됐네ㅋ]

원거리 피격을 주로 하는 캐릭터인 것은 알겠는데, 공격 속도가 너무 느렸다. 결국 팀원들의 소원대로 죽은 뒤 대기실에서 부활한 경수는 이쯤 되니 정말 캐릭터를 바꿔야 하나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 천노을 씹새끼야, 힐러 부족해! 힐러로 바꿔오라고!

[천노을: ㅗ]

스트레스가 풀리기는커녕 더 쌓이고 있었다. 천노을 이름이 저들 입에서 나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경수는 뒤늦게 후회했다. …닉네임을 바꾸는 게 아니었다. 괜히 죄 없는 노을이만 욕먹고.

그때 경수는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상대 팀을 발견했다. 다행히 아직 경수를 발견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경수는 재빨리 건물 안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간 뒤 궁을 충전하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캐릭터의 머리를 조준하고 충전된 궁을 쏘아 올렸다. 펑 소리와 함께 폭탄이 상대방을 향해 날아갔다.

‘뻘뻘뻘 처치(+100)’

‘POLIG 처치(+93)’

그는 위치가 발각되기 전에 위에서 뛰어내려 장애물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스킬을 시험해보기 시작했다. 속도는 느리지만 공격이 묵직한 만큼 조준만 제대로 한다면 그리 나쁘지 않은 직업인 것 같았다.

‘ALL 케이 처치(+100)’

[천노을: ㅅㅅ]

-뭐야, 너 처음이라며….

-수풀 사이에 쿨러 있음!

팀원 도합 50킬을 내면 승리하는 데스매치에서, 연속으로 혼자 9킬을 달성한 경수는 위치가 발각되고 나서 죽고 말았다. 그 뒤로 팀원들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천노을의 이름을 부르며 패드립까지 치던 놈들도 경수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적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하지만 경수는 더 이상 캐릭터 썬더를 선택하지 않고 힐러를 선택했다. 일루전의 문페어리와 비슷하게 허공을 날아다니며 힐을 주는 직업이었다. 그는 들어오는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며 팀원들의 체력을 채워주었다.

-야 힐 좀!

[뿅망치쾅쾅: 야 힐 좀]

[뿅망치쾅쾅: 딸ㄹ피임]

[천노을: ㅗ]

[뿅망치쾅쾅: ??왜?]

[천노을: 니가 노을이 욕했잖아]

[레드오션: 노을이?]

[뿅망치쾅쾅: 으 3인칭 극혐;;;;;;;;]

천노을에게 욕을 했던 놈들만 빼고 말이다. 이기는 것 따위에는 관심 없었다. 팀원 중 절반에게만 힐을 주고 나머지 절반은 놓아버리니 데스매치에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먼저 50킬을 달성한 상대편의 승리로 돌아갔다.

경수는 경기가 끝나자마자 패드립을 한 놈들을 모조리 신고한 뒤 의자에 기대었다. 노을이 욕먹으면 기분이 좋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불쾌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노을을 개새끼라고 욕하다가도, 남들이 거들어 욕을 하니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지는 것이었다. 갑자기 노을이 보고 싶었다.

“더운데 공부도 걔 방에서 할까….”

그는 생각보다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다른 게임의 닉네임이 ‘천노을’임을 알게 된 노을이 눈을 빛내며 달려들게 되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었다.

*

수능을 앞둔 학교의 분위기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잘 보면 좋은 거고, 못 봐도 크게 연연할 이유가 없던 경수만이 여유로웠다. 안색이 창백해져 가는 아이들 사이에서 유독 혈색이 좋은 경수를 다들 아니꼬워하며 괴롭히기도 했다. 웬일인지 작년까지만 해도 공부는 시험 기간에만 하던 권태열도 눈에 불을 켜고 단어를 외우고 문제를 풀었다.

노을과의 1년짜리 내기는 벌써 몇 달이나 만기일이 지나있었다. 하지만 노을도, 경수도 그 일에 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평일에는 메시지만 주고받고, 주말에는 함께 도서관에 가거나 노을의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문제가 있으면, 노을이 조건을 걸고 슬쩍 힌트를 던져주기도 했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기에 거절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경수의 3학년은 단조롭고 평화롭기까지 했다.

다만 가끔씩 이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노을과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기는 하지만. 놈과 자신은 둘 다 생물학적으로, 정신적으로도 남자였다. 노을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가끔 몸을 겹칠 때마다 하는 생각이었다.

“수능 끝나고 고백하든가. 지금 사귀어서 뭐 하려고.”

“내가 고백을 왜 해? 걔가 하게 해야지.”

경수는 조용한 반의 뒤쪽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들으며 볼을 긁적였다. 그리고 턱을 괸 채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따지자면 우린 아직 사귀는 것도 아니잖아.’

물론 갈수록 더 정이 들고 좋아지는 것 같기는 한데, 또 다르게 생각하면 수험 스트레스 때문에 이러는지도 몰랐다. 스트레스 때문에 정이 필요해서, 욕구 풀 곳이 필요해서 그런 것 아닐까. 타인에 비해 월등하게 스트레스를 덜 받고 있는 경수는 그 나름대로 크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그는 체육 창고 안에서 그의 친구 둘이 입을 맞추는 것을 발견했다.

‘미친, 한도영이랑 권태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남자끼리 붙어서 키스하는 놈들이 우리 이외에도 또 있었다고? 심지어 이렇게 가까이?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셋이 있을 때도 전혀 그런 기류가 없었는데! 둘은 소꿉친구였다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눈앞의 광경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던 경수는, 별안간 한도영과 눈이 마주쳤다.

“…….”

“…….”

니넨 왜 여기서 그래, 누가 보면 어쩌려고….

경수는 창고 문을 닫아준 채로 뒷걸음질을 쳐 쏜살같이 도망쳤다.

그 뒤, 도영은 먼저 제게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가끔 반을 기웃거리며 눈치를 보는 것 같기는 했다. 경수도 먼저 태열과 도영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친구였던 둘이 그런 관계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걔네도 나처럼 수험 스트레스에 미쳐서 그런 건가? 심심하면 키스도 하고, 눈 맞으면 섹스까지 하는? 수험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착각하고 있는 경수는 심각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부모님의 잠자리를 목격한 것과 같은 기분이 들어 영 찜찜했다. 그래서 자세히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는 며칠 뒤 도영을 불러내 넌지시 둘이 사귀느냐고 물었다.

“아니면 안 사귀고 그, 그것만 하는 거냐?”

담담하게 경수를 바라보던 도영은 사귄다고 대답했다. 경수는 입을 쩍 벌렸다.

뭐, 벌써 사귀어? 진도도 우리보다 빠르다는 거야?

“…언제부터?”

“키스만 하는 건 무슨 사이야? 존나 이상해.”

“…….”

경수는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덩달아 노을도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역시, 이상한 거였다. 사귀지도 않으면서 키스하는 거.

첫 키스를 한 날, 자신을 처음 만난 날, 처음 맞은 날, 그리고 처음 사랑을 나눈 날까지 모조리 기록해 틈틈이 기념일을 챙기는 놈과 함께 있다 보니 정상인의 개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노을의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은 빨간 글씨로 빼곡했다.

“…….”

수능을 앞두고 사귀는 건 좀 그렇지? 공부에 방해될 테니까! 경수는 수능이 끝나자마자 노을에게 내기에서 졌음을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다.

*

말을 할 때마다 하얗게 입김이 나왔다. 싸늘하다 못해 온몸이 얼어붙을 것 같은 날이 하필이면 수능 날이었다.

“사인펜 챙겼어요? 수험표는요?”

“챙겼어.”

“그냥 사인펜은 안 돼요. 컴퓨터용 맞아요? 어디 한 번 봐요.”

“당연하지, 내가 멍청이냐?”

“그리고 또… 이건 나중에 추우면 덮으라고, …담요.”

경수는 노을이 건넨 하늘색 담요를 받아들었다. 정작 시험을 보는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노을이 일주일 전부터 안절부절못했다. 대신 시험을 봐줄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는 여전히 무언가 빠지지 않았을까 걱정하며 불안한 듯 눈을 굴렸다. 경수는 손을 뻗어 노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노을은 경수의 교복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긴장 안 돼요? 청심환이라도….”

“싫어. 나 청심환 안 맞아.”

개좆같은 청심환.

그날 밤을 떠올리며 입술을 잘근 씹던 경수는, 곧 노을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며 씩 웃었다. 긴장한 기색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경수에 노을은 그제야 조금 마음을 놓은 듯했다. 경수는 목에 감은 목도리를 풀어 노을의 목에 감아주며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노을은 경수의 손을 덥석 잡더니 한결 긴장이 풀린 표정으로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경수 형, 기다릴게요.”

잘 보고 오라는 말보다 기다린다는 말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경수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응.”

“제 부적을 드리려 했는데, 그건 형이 준 거라서 안 가져왔어요. 찢어질까 봐.”

“뭔데…?”

“편지요!”

“아, 그거? 필요 없어.”

경수는 몇 달 뒤 노을의 생일에는 ‘생일 축하해, 나’ 같은 것 말고 제대로 된 편지를 써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제 일주일 치 운도 전부 드릴게요. 찍은 거 다 맞으라고!”

“왜 일주일이야? 한 달 치 줘.”

“……안 돼요. 다음 주엔 크리스마스 확률 상자 뽑아야 해서 좀….”

이 새끼가. 빈말이라도 해주지, 짜증 나게.

경수는 피식 웃으며 노을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노을은 맞고도 뭐가 그리 좋은지 헤헤 웃고만 있었다. 추위에 뺨이 새빨갰다. 경수는 목도리를 조금 더 올려주며 말했다.

“집에 가 있어. 게임하고 있어도 돼.”

“네?”

“아니다, 게임하고 있어. 안 하면 죽는다.”

“…형 화났어요? 갑자기 왜 그러지?”

화 같은 거 안 났는데.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짓는 노을 탓에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오려는 것을 꾹 눌러 참았다.

“끝나면 제일 먼저 전화할게.”

“네에! 제일 먼저!”

금세 표정이 풀린 노을이 하얀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고 손을 흔들었다. 경수는 아쉬운 발걸음을 옮기며 교문을 통과하는 학생들 틈에 섞여 들어갔다.

*

전혀 긴장되지 않았는데, 감독 선생님이 배정 교실로 들어오자마자 손끝이 딱딱하게 굳었다. 펼친 책의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사진을 찍듯 책을 활짝 펼쳐 나온 페이지의 내용을 달달 외웠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시험지에 죄다 직전에 외운 내용만 나오기 시작했다. 모르는 것은 답의 수를 세어보고 부족한 번호로 찍었다.

“김경수 잘 봤냐?”

“몰라.”

일단 아는 건 다 풀었는데, 답을 맞춰 보지는 않아서 찍은 게 얼마나 맞느냐에 달렸다.

“집에 가? 같이 가자.”

“아니, 난 가볼 곳 있어. 먼저 가.”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 경수는 노을의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버스는 밀릴 테고, 걸어서 30분이면 되는 데다 가는 길 중간에 PC방도 있었다. 그는 노을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PC방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가방 속에서 수험표를 꺼냈다. 그리고 노을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됐냐? 너한테 제일 먼저 걸었어.”

그러자 노을이 간지럽게 웃었다. 경수는 휴대폰을 어깨에 낀 채 PDF 파일을 다운받아 수능 답안을 채점하기 시작했다.

-지금 어디예요?

“…….”

-형?

“…나 국어 다 맞았어.”

-헉, …형이요? 거짓말.

비문학 지문 한 개는 통째로 찍었는데…. 시험을 볼 때보다 더 긴장되기 시작했다. 경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컴퓨터 화면과 수험표 뒤쪽을 번갈아 보았다.

“…….”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푼 건 틀렸는데 찍은 거 다 맞았어. 경수는 눈을 멍청하게 끔뻑거렸다.

‘제 일주일 치 운도 전부 드릴게요. 찍은 거 다 맞으라고!’

설마…. 갑자기 팔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는 몸서리를 치며 숨을 내쉬었다.

-형?

경수는 전화를 툭 끊고 게임 아이콘을 클릭해 로그인을 했다. 대기화면이 크리스마스 시즌의 새 일러스트로 바뀌어있었다.

‘냥이냥나냥 님께서 게임에 접속하셨습니다.’

[길드] ㅈi9별: 헐 냥님!!!! 시험 잘 봣음???????

[길드] 포세이돈대장: 냥님 오랜만이에요ㅠ

[길드] 완두완댜: 냥님 진짜 오랜만ㅠㅠㅠ

[커플] 썬셋: ?????????형 어디예요ㅠㅠㅠ 집?

[길드] 할로윈가지: 냥 ㅎㅇㅎㅇ~!~!~!!!!

[길드] neutaaaa: 하이하이

[길드] 박휘벌래: 아니 님아ㅋㅋㅋㅋㅋㅋ 먼 복귀가 이렇게 빨라욬ㅋㅋㅋㅋㅋ 시험 끝났다고 바로 들어오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ㅈi9별: 그래서 조은대요 머ㅋ 불만 이씀?

[길드] 박휘벌래: 업씀ㅋ

[길드] 할로윈가지: 은하수 가실 분ㅋ

[길드] ㅈi9별: 길마님이요ㅎㅎ

[길드] 포세이돈대장: 아 싫어요…. 냥님 간대요.

[길드] 냥이냥나냥: 저기요;

[길드] 할로윈가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원들의 반기는 말에 채팅창이 정신없이 올라갔다. 올라오는 말을 다 읽지도 못할 만큼 속도가 빨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체] 햄스터: 헐 돈이다ㅋㅋ

[전체] 강태공의축복: 먼대???

[전체] 햄스터: ㅋㅋㅋㅋㅋㅋㅋ님 진짜 오랜만~ㅋㅋㅋㅋㅋ

[전체] 설영: 대애박

[전체] 설영: 냥님ㅋㅋㅋㅋㅋㅋㅋ ㅎㅇㅎㅇ

‘햄스터 님께서 파티에 초청하셨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거절하셨습니다.’

‘사과맛쿠키 님께서 파티에 초청하셨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거절하셨습니다.’

‘설영 님께서 일대일 격투(PVP)를 신청하셨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거절하셨습니다.’

‘사과맛쿠키 님께서 파티에 초청하셨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거절하셨습니다.’

[커플] 냥이냥나냥: 아 ㅅㅂ 야 상금 취소해

[커플] 썬셋: ㅇㅅㅇ!!!

경수는 계속해서 떠오르는 신청 창들을 거절하느라 마우스를 계속 클릭해야 했다. 노을은 상금을 취소하는 대신에 직접 경수가 있는 길드존으로 이동해와 주위에 무기를 마구 휘둘렀다.

[전체] 썬셋: 니네 머야! 냥님 괴롭히지 마ㅇㅅ;ㅇ;;

기똥차게 자신만 피해서 들어가는 공격에 경수는 실소를 터뜨렸다. 순식간에 주위에 몰려들었던 낯익은 유저들이 물러났다.

[전체] 햄스터: ?

[전체] 설영: 뭐지 도라인가…?

[전체] 아슬렌: 치매인 듯ㅋㅋ

[전체] anamato: 치맼ㅋㅋㅋㅋㅋㅋㅋ

[전체] 사과맛쿠키: 뭐야 이제 상금 안 줘?ㅡㅡ

마법사 캐릭터인 사과맛쿠키가 주위를 깔짝거리다 경수에게 실수로 무기를 휘둘렀다. 다행히 miss가 떴으나, 노을은 데미지가 얼마가 떴다는 것은 보지도 않은 듯했다. 그는 순식간에 사과맛쿠키를 때려눕히고 덧붙여 말했다.

[전체] 썬셋: 조의금은 줄 수 있어ㅇㅅㅇ

노을은 그렇게 말하고 돈 뿌리기 스킬로 주위에 돈을 흩뿌렸다.

[전체] 사과맛쿠키: ㅋㅋㅋ또 인성질 시작이다 개1새;; 쿨타임 돌아왔냐ㄷㄷ

[서버] 설영: 얘두라,,, 썬셋 이벤트 3탄 종료래 ‘_ㅠ ~!!

[길드] 할로윈가지: 헐ㅠㅠ

[길드] ㅈi9별: 아 안돼ㅠ

[길드] 냥이냥나냥: ? 죄송한데 죽고 싶냐요?ㅠ

[길드] ㅈi9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녀 ㄷㄷ

[길드] neutaaaa: 죽고 싶냐요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박휘벌래: ㅋㅋㅋㅋㅋㅋㅋ반존대도 오랜만

경수는 커플 창을 열어보았다. 이미 결혼식은 오래전부터 올릴 수 있었는데 그동안 미뤄왔었다. 그는 고민도 하지 않고 하트 모양의 ‘청혼’ 버튼을 클릭했다.

‘사랑을 담아 청혼 멘트를 입력해주세요!’

청혼 멘트? 경수는 망설이지 않고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곧 캐릭터 냥이냥나냥이 썬셋에게 다가가 앞에 무릎을 꿇었다.

♡ 냥이냥나냥: 천노을ㅋ 내가 졌어 결혼하자ㅋ ♡

[전체] 햄스터: 저 님 해킹 당햇나 봄ㄷㄷ

[길드] 포세이돈대장: 말도 안 돼!!!!!!!!!!!!!!!!!!!!!!!!

[길드] 할로윈가지: 길마님 목소리 좀만 작게

[길드] 포세이돈대장: ㅠㅠ 냥님 제 정신ㅠㅠ????

[길드] 박휘벌래: 수험 스트레스로 드디어 미쳐버린 냥,,,

[길드] ㅈi9별: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할로윈가지: ㅆㅂ 저 결혼식 가려고 메이크업숍 가요 초롱 눈으로 바꿀 거임!!!!

[길드] ㅈi9별: 그래봤자 초롱초롱한 대머리

[길드] 할로윈가지: 빡빡><

얼마 지나지 않아 청혼을 승낙한 노을도 메시지를 띄웠다.

♡ 썬셋: ㅇ//ㅅ/ㅇ ♡

‘30분 뒤 이시스 왕궁에서 결혼식이 시작됩니다!’

[전체] 사과맛쿠키: 면상 붉히는 꼬라지;

[귓속말] 햄스터: 님 진짜 해킹인가요?

[전체] 설영: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아슬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ㅅㅂㅋㅋㅋㅋ아 미쳨ㅋㅋㅋㅋㅋ

[전체] anamato: ㅋㅋㅋㅋㅋㅋㅋㅋ먼가 웃기다 개웃기닼ㅋㅋㅋㅋ

[커플] 냥이냥나냥: 끝나면 집 앞으로 갈게

[커플] 썬셋: ㅠㅠㅠㅠ혀유ㅠㅠㅠㅠ

[서버] 냥이냥나냥: 현피 뜨자

“……아.”

길드 채팅을 잠시 끄려다 또 실수로 채팅 탭을 잘못 눌렀다.

[서버] 썬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네ㅇㅅㅇ

거기에 또 서버 마이크로 대답하는 놈이 어디에 있어…. 경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미묘한 표정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길드] 포세이돈대장: ㅠㅠ

[길드] 박휘벌래: 으앜 드디어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완두완댜: 이번엔 진짜 현피 떠주셈 ㅈㅂ 전처럼 까먹으면 가만 안 둬요ㅠ

[길드] 냥이냥나냥: 실수예요ㅠㅠ

[길드] 할로윈가지: ㅋㅋ거짓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ㅈi9별: 현피 뜨면서 방송해주시면 안 돼요? 후원 십만 원 쏠 준비 중!

[길드] 할로윈가지: 전 20ㅋ

[길드] 완두완댜: 30ㅎㅎ

[길드] 박휘벌래: 전 거지라 구경만ㅜ

[길드] 포세이돈대장: 그게 뭐야ㅠ 축의금?ㅠㅠ

[길드] neutaaaa: 아 축의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경수는 노을과 함께 왕궁 결혼식장으로 이동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선율과 포세이돈의 길드원들이 얌전히 하객석에서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버프를 받기 위해 온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지나가다 몇 번 본 듯한 유저들도 있었다.

[커플] 썬셋: 형 저희 이제 진짜 사귀는 거예요!!!

[커플] 냥이냥나냥: 알았어ㅋㅋ

[커플] 썬셋: 내가 이겼다ㅇㅅㅇ!

[커플] 냥이냥나냥: ㅊㅋㅊㅋ

결혼식은 다사다난했다. 결혼을 반대한다며 무리가 난입한 것은 일루전 결혼식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노을은 일반 맵이나 결혼식장에도 PVP를 도입하도록 문의를 넣겠다고 이를 갈았다.

노을과 엮이면 일이 늘 순탄치가 않았다. 수많은 사건을 다 제하더라도 천노을만으로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시끄럽고, 고집도 세고, 막무가내인 데다 귀찮고, 또 …귀엽고. 경수는 그새를 못 참고 들떠 전화를 건 노을에, 그만 못 참고 웃음을 터뜨렸다. 앞으로가 막막하기는 했으나 그 막막함을 다 감수할 만큼은 그가 사랑스러웠다.

연애 게임 본편 완결.


           


The Dark Mage’s Return to Enlistment

The Dark Mage’s Return to Enlistment

gwihwanhaessneunde ibdae jeonnal-ida I returned, but it was the day before enlistment. 귀환했는데 입대 전날이다
Score 3.3
Status: Ongoing Native Language: Korean

Kim Minjun, who was a normal high school senior in South Korea, was suddenly summoned to another world and became a dark magician.

Minjun, who persevered through all sorts of hardships with the single-minded goal of returning home, saved this other world with his dark magic.

Casting aside a life as a hero and guaranteed riches, he returned to Earth.

Just when he was about to fully enjoy his life, a problem arose. A dungeon break occurred, and monsters began pouring out. Not only did this threaten the peaceful Earth life that Minjun had just returned to… But on his very first day back, he was also ordered to enlist in the military!?!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