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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0

119. 소꿉친구 – 미하에르 추기경

다니엘의 외침에 레나와 베로니안도 벌떡 일어나 예의를 차렸다.

추기경을 대하는 자세가 사제를 대하는 예의와 딱히 다른 것은 아니어서 간단히 성호를 그으며 인사하는 정도로도 충분할 것이었으나, 미하에르 추기경은 너그럽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됐네. 자네들의 이야기가 워낙 재미있게 들려서 귀동냥했을 뿐이야. 늙은 염탐꾼에게 화를 내지 않아 준 것만으로도 과분하네.”

그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백색의 남루한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추기경을 상징하는 보라색 숄(shawl)도 걸치지 않아서 그가 추기경임을 알아보려면 다니엘처럼 교회의 사무실을 들락거린 경험이 있어야 했는데, 다행히 추기경의 뒤에는 성전사 두 명이 기립해 있어서 범인들도 그가 높은 직위에 있는 사제임을 알아보았을 것이었다.

레나는 그를 물끄러미 관찰했다.

미하에르 추기경은 겉보기에는 그렇게 나이가 들어 보이는 노인이 아니었다. 손과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것과는 달리 머리카락이 새까맣게 하나도 세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제 그의 나이를 듣는다면 기겁하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그는 수도교회에 있는 4명, 아니, 온 대륙에 존재하는 10명의 추기경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았다.

토론을 엿들었다는 말에 베로니안이 조금 눈치를 보았고, 추기경은 이해한다는 듯이 그를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말게. 화나지 않았으니까. 아주 재미있고 건설적인 토론이었어. 이렇게 열심히 수학하는 젊은이들이 있다는 건 교회의 큰 축복일세.”

“…죄송합니다. 어디서부터 들으셨습니까? 조금 무례한… 표현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추기경이 다시 한번 인자하게 웃으며 답했다.

“글쎄… ‘관료화의 꼭대기에 이른 추기경’이라는 말도 들었을 정도로 오래 있었지. 자네들은 토론에 심취해 뒤를 돌아보지도 않더군. 하하… 탓하는 것은 아닐세. 맞아, 내가 바로 그 관료화의 꼭대기에 앉은 추기경일세. 성녀님 바로 아래에 말이야. 재미난 토론을 얻어들은 대가로… 뭐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가?”

베로니안의 눈이 순간 번쩍였다. 묻고 싶은 것이라면 엄청나게 많다! 수도교회에 온 것을 다시금 뼈저리게 기뻐하며, 베로니안이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조금 전에 말씀하신 것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성녀님께서 ‘피조물의 굴레’와 ‘피조물의 책임’에 대해서 잘 답변하지 않으신다고 하셨는데, 왜 그렇습니까?”

“사실 답변을 아주 안 하시는 건 아닐세. 해주시기는 해 주셨지.”

미하에르 추기경이 자리에 앉았다.

그는 도서관에서 나오는 길이었는지 두 권의 책을 들고 있었다.

호기심이 많은 레나는 그것들이 모두 농경과 목축에 관한 책들임을 눈여겨보았고, 추기경은 자신을 호위하는 성전사에게 물을 네 잔만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흐음, 어떻게 설명하는 게 좋을까… 그냥 성녀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주는 편이 낫겠지?”

그는 옛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 + +

“성녀님, 주신께서는 인간의 운명을 정해두신 것입니까? 아니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내려주신 것입니까?”

사제가 될지 수도사가 될지를 가르는 의식의 순간. 고작 세 개의 수실이 달린 수습생이 자신에게 다가온 성녀에게 질문을 올렸다.

그 성녀는 성녀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나이가 든 여인이었다.

보통 성녀는 수십 년간 젊음을 유지하며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가 없는 미모를 뽐내지만, 죽음을 앞둔 마지막 몇 년간에 빠르게 노화했다.

또, 성녀들을 그렇게 오래 살지도 못해서 평균적으로 쉰 살 정도에 세상을 떠났다.

“어라? 당신은 당신이 사제가 될지 수도사가 될지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아닙니다. 궁금합니다. 하지만 제가 수도사가 되면 성녀님께 이렇게 질문을 드리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더 두렵습니다.”

“수도사가 되어서도 질문할 수 있을 텐데요? 절 만날 기회가 조금 줄어든다뿐이지 이곳 수도교회에 발령이 나시면 어떻게든 만날 일이 있을 거예요.”

“…고백하기 부끄럽지만, 저는 신께 선택받지 못했다는 괴로움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제야 갈림길에 선 젊은이가 할 만한 말이 나와서 성녀가 웃었다.

“저런, 알았어요. 답변해드리죠. 하지만 신력을 효율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게 신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것을 잊지 마세요.”

“…명심하겠습니다.”

나이든 성녀는 이 청년에게 어떻게 답변해주어야 할지를 잠시 망설였다.

의식을 직전에 두고 다른 질문을 한 수습생이 처음이라 놀라웠기에 답변해주겠다고 하였으나, 미하에르라는 이 수습생이 한 질문은 대단히 설명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딱 꼬집어서 말씀드리기는 어려워요. 하지만…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고 보는 편이 옳겠네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원망하는 것도, 비꼬는 것도 아니오나 저희는 신의 장기말에 불과한 것입니까?”

“아니요, 그럴 리가요. 주신께서는 저희에게 수많은 기회를 주셨답니다. 그 기회의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할지는 온전히 당신에게 달려있어요.”

“하오나 제가 어떤 선택을 할 사람인지도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피조물의 굴레’에 따르면…”

“네, 맞아요. 그래서 결정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고 말씀드린 거예요. 하지만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으면 해요. 사실은 그보다도 더 미묘한 차이가 있… 어라? 잠시만요.”

그녀는 자신이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눈동자를 위로 굴려 무언가를 ‘듣는’ 듯하더니 옅게 웃었다.

“호호, 저만 당신에게 관심을 가진 게 아니었군요. 비나르 신께서 이렇게 말씀해주라 하시네요. ‘인간은 같은 순간에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라고요. 신께서 말씀하셨으니 제가 토를 달 필요는 없겠네요.”

젊은 미하에르는 숨이 막혔다. 신께서 나의 질문에 반응해주시다니. 그는 자신의 미래에 확신을 가지면서 물었다.

“…가슴이 벅찰 정도로 감사합니다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같은 순간에 어떻게 다른 선택을 한다는 것입니까? 같은 순간이란 것이 비슷한 상황을 뜻하는 것입니까?”

“글쎄요?”

성녀가 무책임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나이가 들어 죽음을 앞둔 그녀는 성녀의 체통이라는 것에서 어깨를 으쓱일 만큼 벗어나 있었다.

“비나르 신께서는 당신에게 이렇게 전해주라고만 하셨어요. 제 생각과는 달라서 저도 이해하기 어렵네요. 비나르 신께서는 항상 이런 식이시죠. 다른 화신들에 비하면 말이 많으신 편이지만… 앗! 알겠어요. 죄송해요. 그만할게요. 흠흠… 자, 답변을 드렸으니 이제 의식을 치러볼까요?”

잠깐 딴소리를 한 성녀가 곱게 웃으며 미하에르의 머리에 손을 올렸고, 이것은 무려 칠십 년 전의 일이었다.

+ + +

“그랬었다네.”

“…그것이 전부입니까? 인간이 같은 순간에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있다고요?

“그렇네. 나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말이지. 그리고 나는 세 분의 성녀님을 모셔보았네. 지금 계시는 메리엘 성녀님을 포함해서. 그런데 다른 분들께도 질문해보았지만, 성녀님들은 ‘그대는 이미 답변을 받았군요.’라고 말씀하시곤 더는 말해주지 않으셨네.”

질문한 베로니안과 옆에서 공손하게 앉은 다니엘은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오직 레나만 뭔가 알 것 같다는 얼굴로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 같은 순간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이건 레나가 납득할 수 있는 답변이었다. 레브에게 질문을 던진 순간, 정말 미묘한 차이로 선택지가 갈리는 것을 그녀는 경험해보았다.

어쩌면 그날 밤, 화톳불이 더 따뜻했다던가 떨면서 답하는 레브의 손에 바짝 타버린 고기 조각이 들려 있지 않았더라면 바뀌었을 수도 있는 미묘한 갈림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사실을 공유하지 않았다. 그건 설명하기에는 너무 사소한 것이어서 레나는 침묵을 지켰고, 베로니안이 말했다.

“그러면 또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신께서는 어째서…”

“허허, 미안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오랫동안 답변해줄 시간이 없네. 한 사람당 하나로 하지. 실망하지 말게. 그래도 두 개의 질문이 더 남지 않았는가?”

다니엘과 레나가 서로 눈치를 보았다.

“…현재 저희 십자교회가 목표하는 바를 여쭙고 싶습니다. 그릇된 신을 믿는 야만인들을 축출하는 일은 거의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결국, 다니엘이 먼저 질문했는데, 그의 질문은 상당히 현실적인 물음이었다.

그는 올해 아슬아슬하게 의식을 놓쳤다뿐이지, 내년 가을이면 확실하게 의식을 치르고 성직자가 될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하하, 그것도 어려운 질문이로군. 어떻게 답해주어야 할까… 아직 공식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어서 답변하기 껄끄럽지만,”

미하에르 추기경의 깍지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로지 신만을 받드는 도시와 마을을 건설하는 걸 다음 목표로 삼을 것 같다고 해 두어야겠네. 단지 교회를 짓는 게 아니라…”

“왕을 받들지 않고요?”

베로니안이 불쑥 끼어들었다.

한 사람당 하나의 질문만을 받겠다고 하였으나 그의 질문에는 예리한 통찰이 담겨 있어서 미하에르 추기경은 그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베로니안 군. 좋은 질문일세. 하지만 그 질문에 답변해주기는 이르다고 생각하네. 아직은 개인적인 생각이고, 다른 추기경님들과 토의해 보아야 하거든.”

곁에 있던 다니엘은 추기경이 베로니안의 이름을 물어본 것이 부러워 자신도 어떤 질문을 던져볼까 고민했다.

그의 관심을 끌만한… ‘어차피 추기경님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겠습니까? 추기경님께서는 삼십 년 전에도 그릇된 신을 믿는 야만인들을 축출해내자는 안건을 통과시키지 않으셨습니까?’ ─ 라는 질문이 떠올랐으나, 다니엘은 그 질문을 삼켰다.

그건 어떤 의미가 있는 질문이 아니라, 그냥 아는 것을 뽐낼 뿐인 같잖은 질문이어서 삼키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다.

추기경의 눈이 마지막으로 레나를 향했다. 레나는 조금 우물쭈물하다 물었다.

“사제가 교회의 규칙을 어기지 않으면서 결혼할 방법이 있나요?”

어이고-

베로니안과 다니엘은 자신들도 모르게 나란히 혀를 찼다. 저런 질문을 추기경에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하지만 레나는 진지했다. 정말 절실하게 알고 싶은 내용이었고, 이에 명확한 답변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정말로 나는 레브와 결혼할 방법이 없는가. 수도사가 되어 고향에 내려가는 것 외에…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사제가 되는 것은 그녀의 오랜 꿈이었고, 하필이면 떠나오면서 사제가 되어 돌아오겠다고 외쳐버린 것도 있어서 그녀는 가급적 꿈을 이루어 돌아가고 싶었다.

미하에르 추기경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레나를 들여다보았다.

워낙에 터무니없는 질문이라 “없네.”라고 단답을 해주려다가, 그녀의 간절한 눈빛에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규칙을 바꿀 만한 논리가 있다면 예외를 둘 수도 있을걸세. 자, 이제 가봐야겠군. 만나서 반가웠네. 주신께서 학생들의 앞길을 인도해 주시기를.”

추기경이 벌떡 일어났다.

마지막에 얼토당토않은 질문을 받아서 즐거웠던 기분이 조금 깨어졌지만, 베로니안이라는 수습생을 만나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익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저런 수습생이 사제가 되어야지. 저 여자는…’

아무래도 고향에 연인이라도 두고 온 모양인데, 저렇게 다른 곳에 마음을 빼앗긴 자가 신의 선택을 받을 수 있겠는가.

턱도 없는 일이다.

저런 여자는 수도사로 족하다. ─ 고 생각하면서 미하에르 추기경은 서둘러 회의장을 향했고, 그의 뒤에는 의지를 불태우는 레나가 있었다.

‘규칙을 바꿀 만한 논리가 있으면 된다는 거지?’

그녀는 완곡한 부정의 의미를 필요조건으로 받아들였다.

꿈과 사랑, 레나는 두 가지 중 어떤 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굳이 골라야 한다면야 아무래도 레브의 희망이 담긴 사제가 되는 것이겠지만…

‘레브는 잘 지내고 있겠지? 기다려 줘. 내가 꼭…’

불끈, 주먹을 쥐며 굳게 다짐한 레나가 도서관으로 걸음을 돌렸다. 먼저 사제의 결혼을 금하게 된 고대의 회의록부터 살펴봐야겠다.

그리고 그때, 레브는 네비스 성벽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모자가 달린 두꺼운 로브를 걸치고, 성벽에 손바닥을 댄 채 광소를 흘리는 그는 더 이상 레나가 아는 데모스 마을의 선량한 청년이 아니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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