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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0

120화 추궁

120화 추궁

잠시 정적이 흘렀다.

고요를 깨뜨린 이는 쿠훌린이었다.

“확실한 정보인가. 라이칸.”

“제법 유능한 올빼미를 통해 얻은 정보이니 신뢰성은 높습니다.”

올빼미는 대륙 전역에 퍼져 있는 암영의 끄나풀을 가리킨다.

그중 일부는 은월의 이중 첩자다.

“일루산은 어떻게 됐지?”

“행방불명입니다. 아울러 베타와 감마도 사라졌습니다. 정황상 네몬의 짓으로 여겨집니다.”

“일루산이 그리 쉽게 당할 리는 없을 텐데.”

쿠훌린은 일루산과 여러 차례 검을 겨뤘다. 그는 네몬보다 약하지 않다. 게다가 크쉬와 미스트는 일루산과 네몬 다음가는 강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고?

쿠훌린은 마지막으로 일루산을 마주했던 날을 상기했다. 데미안, 세실, 카인을 데리고 은월섬을 향하던 중, 일루산은 그의 앞에 단신으로 나타났었다.

‘빨간 눈깔이 그새 달려가서 이른 거냐?’

쿠훌린은 의구심을 느꼈다. 일루산의 목적을 유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노렸다면 보다 유리한 상황에서 기습했을 것이다. 혹은 아이 중 하나를 인질로 삼았겠지.

하지만 일루산은 그러지 않았다. 살수답지 않게, 마치 결투라도 하듯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검을 부딪치며 쿠훌린은 느꼈다. 일루산의 목적은 전투가 아니다.

‘너를 죽이려면, 나도 각오를 해야겠지.’

말과 달리 일루산은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같은 날카로운 눈으로 세 아이를 차례로 바라봤을 뿐이다.

그 후 일루산의 얼굴을 다시 마주했을 때, 쿠훌린은 그의 눈 속에 담긴 어떤 이질적인 감정을 포착했다.

‘지금은 물러나지. 궁금증은 해소되었다.’

쿠훌린은 확신했다. 일루산과 세실 사이에는 속사정이 있다. 일루산은 세실을 죽일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왜 찾아왔을까.

당시 쿠훌린이 생각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이유는 데미안과 카인. 미스트의 습격으로 두 소년은 소서러의 능력을 발현했었다. 그 내용은 어떤 방식으로든 일루산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고, 그는 소서러의 존재를 확인하러 왔다.

두 번째 이유는 세실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일루산의 묘한 행동을 납득할 수 있다. 일루산은 세실의 안전을 확인하러 왔다.

“믿기 어려운 소식은 또 있습니다.”

“말해 봐.”

“쿼드가 10인 이상으로 늘어났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일루산이 행방불명되었다는 것보다 더욱 놀라운 이야기였다.

쿼드 블레이드는 소드마스터 급의 초절정 살수다.

그런 쿼드가 열 명 이상이라고?

“뭐라고? 그게 말이 돼? 소드마스터를 열 명 이상 보유한 국가는 제국을 제외하면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열 명이 넘는 쿼드라니. 라이칸 너 어디서 헛소문 듣고 온 거 아니야? 아아, 이래서 내가 대륙에 있었어야 했는데. 역시 너는 이 엘리샤 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니까.”

자신의 자랑으로 끝나는 엘리샤의 말에 라이칸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나 역시 믿기지 않아. 그러나 대비할 필요는 있겠지.”

“대비고 뭐고 네 말대로 정말 열 명이 넘는 쿼드가 존재한다면 균형은 이미 산산조각으로 깨진 셈이야! 아니, 사실 이전에도 우리가 한참 불리했지. 그동안 은월에는 단장과 부단장, 두 명의 소드마스터밖에 없었잖아! 스카자하는 늙어서 힘을 잃었······ 아, 죄, 죄송해요. 그러니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지 좀 말아요. 진짜 오줌쌀 것 같다고요······! 아, 아무튼 라이칸. 암영에는 이전부터 5인의 쿼드가 있었어. 그런데 두 명의 소드마스터밖에 없었던 우리가 어떻게 그간 균형 비스름한 상태를 유지했는 줄 알아? 바로 나! 이 미녀 천재 마법사인 엘리샤 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아하하하!”

“단장. 엘리샤가 헛소리를 시작했으니 내보내야 할 듯합니다.”

발끈한 엘리샤가 라이칸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라이칸은 엘리샤의 볼을 꼬집어 당겼고, 그러자 엘리샤가 오리처럼 꽥꽥대며 라이칸을 걷어찼다.

“너희들은 대체 언제 철이 들려는 게냐! 계속 싸울 거면 당장 나가거라!”

스카자하의 불호령에 둘은 즉각 다툼을 멈췄다.

늘어난 볼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던 엘리샤가 쿠훌린에게 말했다.

“아, 맞다 단장. 지난번의 그 시체들 말인데요. 그리 오래 보존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은월섬에는 하센베르크의 가주인 빌헬름과, 그의 후계자로 추정되는 자의 시체가 보관되어 있다.

‘카인 하센베르크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라이칸의 조사 결과는 쿠훌린의 의구심을 증폭시켰다. 신녀의 힘을 빌린다면 두 시체를 확인해 의문을 해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후로 일 년이 더 지났건만 새로운 신녀는 등장하지 않았다.

“얼마나 더 보존이 가능하지? 엘리샤.”

“제 마법으로는 앞으로 일 년 정도가 한계일 것 같아요. 그리고 보존 마법의 효과가 사라지면 부패는 더 빨라질 거예요.”

“마법을 중첩할 수는 없는 건가.”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 이럴 때 스승님이 계시면 좋을 텐데. 죄송해요 단장.”

“역시 미녀도 아니고 천재도 아닌 그냥 얼뜨기 마법사였군.”

“라이칸! 너어!”

결국 라이칸과 엘리샤는 집무실에서 쫓겨났다.

***

침대에 누워있던 세실은 흠칫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부끄러운 꿈을 꾼 것 같았다. 그런데 눈을 뜨자마자 잘게 부서져 사라졌다.

창밖에는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던 세실은 낮은 신음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머리 아파.

“으······.”

관자놀이를 매만지던 세실은 테이블 위의 술병이 말끔히 비워진 것을 발견했다.

그러자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리아논을 찾아가고, 데미안을 만나러 갔다가 방으로 돌아와 술을 마시고, 다시 데미안을 만나러······.

‘디네베.’

세실은 데미안의 방으로 들어가던 디네베를 기억해 냈다. 이후 세실은 옳지 않은 행동을 했다. 방문에 귀를 대고 엿들으려 했으니까.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세실은 한동안 그곳을 서성이다가 방으로 돌아왔고, 엉엉 울었다. 그러다가 울음을 그친 뒤 반쯤 남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다음이 기억나지 않는다.

‘바지.’

세실은 바지를 입은 제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원피스를 벗은 후 상의만 걸친 채로 술을 마신 것 같았는데.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그 순간 세실의 머릿속에 어떤 기억의 편린이 떠올랐다. 문을 열자 보였던 데미안의 얼굴. 그래서 그의 손을 잡아끌고, 침대로 밀치고, 그의 몸 위로 올라가서······.

“일어났니 세실? 어라?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

방문을 연 루나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와 동시에, 흐릿하게 이어지던 머릿속 기억이 멈췄다. 세실은 당황했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됐지?

세실은 다시 침대로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썼다. 루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지난밤에 꾸었던 꿈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어서 빨리 다시 잠들어야 한다. 어쩌면 꿈을 이어서 꿀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

나는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1층으로 내려갔다.

나를 깨운 것은 루나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세실의 방에 있는 듯했고, 어떻게 혼자서 술을 다 마실 수 있느냐며 화내고 있었다. 아니, 화를 낸다기보다는 토라진 자신을 어서 달래라는 것처럼 들렸다.

루나와 세실을 동시에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에 나는 방에서 기다렸다. 머지않아 루나가 헤헤 웃으며 달려와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곧 내려갈 테니 먼저 식당으로 가라고 말했다.

“잘 잤니? 데미안.”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루나가 싱긋 웃으며 나를 반겼다. 리아논과 디네베도 비슷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반면 쿠훌린과 카인은 만면에 기분 나쁜 기색이 가득했다.

그리고 세실은.

“잘. 잤어? 데미안.”

평소와 다르지 않다. 가슴의 붕대도. 말을 더듬는 것도.

다만 조금 수줍어하는 것 같은데. 아쉬워하는 것 같기도.

나는 침착한 척 그들에게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당신. 언제까지 그런 표정으로 있을 거예요?”

리아논의 말에 쿠훌린이 푸욱, 한숨을 쉬었다. 루나가 키득키득 웃으며 내게 말했다. 아저씨가 아껴둔 술을 우리가 몰래 마셔서 잔뜩 심통이 났다고.

‘우리’라고 말하며 세실을 보호하는 것을 보니, 루나와 세실 사이에 모종의 계약이 성립된 모양이다. 아마 일정 기간 루나가 원할 때마다 세실이 껴안아 준다던가, 볼을 문질러 준다던가 뭐 그런 거겠지.

그런데 카인은 왜 저렇게 똥 씹은 표정이지? 그러고 보니 녀석은 어제도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카인. 무슨 일 있니?”

식사를 마치고 성을 나서자마자 루나가 물었다. 식당에서는 모르는 체하고 있더니, 역시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카인은 루나가 아닌 세실을 돌아봤다.

“세실. 할 말이 있다.”

“으. 응.”

카인과 세실이 저만치 앞서나갔다. 카인의 표정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분위기를 감지한 세실의 얼굴도 창백해졌다.

“따라가 보자. 데미안.”

루나가 속삭였다. 나도 카인이 왜 저러는지 궁금했다.

또한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나와 세실은 모르가나의 마법진에서 그동안 몰랐던 진실의 일부를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카인에게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었는지 모른다. 예를 들어 세실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든지.

“가자. 루나.”

루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카인에게 모르가나의 마법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은 적이 있다. 그때 카인은 어둠의 군대를 만나 싸웠다고 답했다. 하지만 아니었던 걸까. 그렇다면 카인은 왜 이제 와서 세실을.

“······데미안. 아파.”

“아. 미안.”

나도 모르게 루나의 손을 너무 꽉 쥐었던 모양이다.

루나의 얼굴이 붉다.

“저기야 데미안. 나무 아래에 있어.”

우리는 풀숲 사이로 몸을 숨겼다. 그러고는 낮은 포복으로 두 사람에게 접근했다.

“왜, 왜, 왜 이렇게 달라붙니?”

“쉿. 가만히 있어.”

나는 루나와 몸을 밀착했다. 세계수의 혼돈을 이용해 우리 둘의 기척을 한꺼번에 지우기 위해서였다.

“······바, 바람둥이. 늘 이렇게 갑자기 막.”

루나의 말은 무시했다. 사실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카인은 무서운 눈으로 세실을 보고 있었다. 세실은 그런 카인을 마주 보지 못하고 바르르 어깨를 떨었다.

‘카인. 저 자식이.’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달려가 세실을 데려오고 싶었다.

하지만 카인이 세실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무, 무슨 일일까 데미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여.”

루나가 내 얼굴에 볼을 맞댔다.

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두 사람을 응시했다.

카인은 화가 난 얼굴로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지만 말로 내뱉지는 못하고 있었다. 평소의 카인답지 않은 행동. 나는 점점 더 마음이 불안해졌다.

“내 물음에 사실대로 답하는 것이 좋을 거다. 세실.”

마침내 카인이 입을 열었다. 에일 듯이 차가운 목소리에 세실은 겁먹은 동물처럼 몸을 떨었다. 지금 당장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카인의 눈빛이 포식자처럼 사나워졌다.

“내 알몸을 봤나? 사하룬 사막에서.”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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