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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1

121화 이야기 (1)

121화 이야기 (1)

뭐라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다시 묻지. 너는 사하룬 사막에서 나의 알몸을 봤나?”

뭐야. 저걸 묻기 위해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 되었던 건가.

후우, 한숨 돌리자 카인의 마음도 이해됐다. 나라도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이성에게 알몸을 보이면 수치심이 들 테니까. 게다가 카인은 나처럼 결벽성(潔癖性)이 있다.

“누. 눈. 감고. 있······.”

세실이 더듬거렸다.

카인이 덥석, 세실의 양어깨를 잡았다.

“나를 봐라. 세실.”

머뭇거리던 세실이 카인을 마주 봤다.

파르르 입술을 떠는 세실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갰다.

“내 눈을 보고 대답해라. 다시 말하지만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거야.”

루나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루나는 안다.

당시 세실이 눈을 꼭 감고 있어서 카인의 몸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조. 조금밖에······.”

“조금? 분명하게 말해라, 세실.”

“뒤. 뒷모습. 엉덩······.”

“뭐라고오오옷!”

루나가 빼액 소리치며 풀숲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 루나를 세실과 카인이 아연한 표정으로 돌아봤고, 그래서 나도 머리를 긁적이며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

.

.

“몹시 불쾌하군. 세실.”

카인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우리는 나무 아래 들판에 모여 앉아 있었다.

“자. 잘못했······.”

“사과하면 끝날 일인가. 처음부터 네가 여자임을 밝혔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카인의 어투가 예전처럼 딱딱해졌다.

“어떻게. 하면······.”

“나의 부탁을 하나 들어줘야겠다. 무조건으로.”

“으. 응.”

저 녀석이 또 저 짓을 하네.

“그래서 세실. 카인의 엉덩이만 본 거니? 앞쪽은?”

루나의 물음에 카인이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을 본 루나가 헙! 하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아까부터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내게 불똥이 튈 수 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나는 세실이 씻는 모습을 본 적이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지난밤에도······.

“데미안. 왜 얼굴이 빨개? 설마 카인의 엉덩이를 상상하고?”

루나의 말에 카인이 두 눈을 부릅뜨며 나를 돌아봤다. 그러고는 슬슬 엉덩이를 움직여 내게서 멀어지는 것이었다.

“······데미안. 나는 그쪽은 아니다.”

“나도 아니야!”

냉랭했던 분위기는 루나의 활기 덕에 점차 풀어졌다. 사실 루나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텐데. 호감 있는 이성이 어찌 됐든 다른 여자에게 알몸을 보인 셈이니까.

그 상대가 세실이 아니었다면 루나도 지금처럼 웃어넘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때, 루나가 세실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한테 거짓말했으니 아침에 체결했던 계약 기간, 두 배로 늘리는 거다?

“으. 응.”

당연하다는 듯 세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가 세실을 향해 거만하게 턱짓했다. 그러자 세실이 재빠르게 루나에게 팔짱을 끼며 제 몸을 밀착했다. 한껏 고개를 치켜든 루나가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세실을 내려다봤다.

“흐응. 좋아. 아주 좋구나 세실.”

······저러려고 세실에게 싫은 티를 안 냈구나.

“마침 모두 모였으니, 할 말이 있어.”

카인의 말투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차분한 목소리 안에는 그만의 강인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실은 어젯밤에 우리끼리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려 했는데, 그러지 못했네.”

“아······.”

루나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나는 공교롭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도 어젯밤에 하려던 이야기가 있었고, 루나가 잠들어 무산됐으니까.

“괜찮아 루나. 지금 이야기하면 되니까.”

카인이 루나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내년이 되면, 나는 은월섬을 떠날 거야.”

솨아아, 바람이 들풀을 흔드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카인의 말에 우리는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루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 잠깐 볼일이 있어 나가겠다는 거지? 그, 그래. 푸른 매 용병단에 관련된 일로. 볼일을 마치고 나면 다시 섬으로 돌아올 거지? 그치?”

“아니. 단언할 수는 없지만, 나는 섬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어.”

카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당분간 제국에 머무를 거야.”

“제, 제국? 얼마 동안?”

“그건 알 수 없어. 일이 년에 그칠 수도 있고, 어쩌면 십 년 이상 머물러야 할 수도 있겠지.”

“시, 십 년!”

루나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이어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변했다.

“대, 대체 왜? 왜 제국으로 가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그곳에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어.”

“아, 안 가면 안 돼······?”

루나가 카인의 옷깃을 붙잡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 있었다.

“가지 마 카인······. 응?”

카인은 착잡한 표정이었다.

나는 카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소설 속에서, 루나는 카인이 유일하게 마음을 열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대상이다. 게다가 카인은 마운틴포지 터널에서 내게 루나를 향한 호감을 드러낸 적이 있다.

‘눈부시지. 루나는.’

루나를 보는 카인의 눈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카인이 긴 한숨을 뱉었다.

그러고는 주저하듯 입을 열었다.

“나의 이름은 카인 하센베르크. 슈타인탈 왕국의, 지금은 멸망해 사라진 하센베르크 백작 가문의 후계자야.”

내 눈에 힘이 들어갔다.

카인이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슈타인탈 왕국? 하센베르크······?”

루나의 혼잣말 같은 물음에 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덤덤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가족과 함께했던 백작령에서의 생활.

왕국의 자랑 하센베르크 기사단.

기사가 되기 위한 훈련.

그러던 어느 날, 성을 습격한 암영의 살수들.

사랑하던 모든 이들의 죽음.

우여곡절 끝에 마석 광산으로 도주해 나를 만난 이야기까지.

카인은 자신이 ‘무한회귀자’라는 사실만을 제외한 채, 허심탄회하게 과거를 털어놓았다.

나는 카인에게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만약 카인이 세실의 정체를 알고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 감정을 드러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나는 그에게서 평소와 다른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흑······. 흐흑······.”

루나가 흐느껴 울었다. 카인이 겪었을 괴로움을 상상하며 마음 아파하는 것이겠지. 그러나 카인은 루나의 상상보다 몇 배는 더한 고통을 겪었다. 그가 회귀자이기 때문에.

나는 세실이 신경 쓰였다. 세실은 두 주먹을 모아쥔 채 억지로 눈물을 참는 얼굴이었다. 깜빡이지 않는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얼음에 갇힌 아이처럼 입술을 떨었다.

“모르가나의 마법진에서, 나는 암영을 움직여 나의 가문을 멸망시킨 존재의 단서를 발견했어. 데미안이 물었을 때는 숨겼지만 사실 나는 그곳에서 모르가나를 만났지. 그 단서가 제국에 있어. 그래서 나는 제국으로 가야 해.”

카인이 멋쩍은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미안해 데미안. 내 의지가 보다 단단해진 뒤에 사실을 밝히고 싶었거든. 하지만 어둠의 군대를 만나 싸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야.”

카인이 순순히 사과하니 할 말이 없었다. 나도 카인에게 숨기는 것은 많으니까.

그러나 역시 이 이야기는 해주어야겠지.

“지난번에 루나를 통해 들었었지? 나와 루나와 세실이 조각난 섬으로 뒤덮인 묘한 장소에 갔었다고. 그곳에서 나는 하센베르크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천막 조각을 발견했었어.”

카인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어 그는 내게 자세한 이야기를 부탁했다. 나는 그 섬에서 만난 괴물과, 해골과, 오래된 유적에 대해 말했다. 그곳이 고대의 마법 왕국이라는 이야기는 제외하고.

이야기를 마치며 나는 예감했다.

카인은 언젠가 ‘부서진 땅’에 닿을 것이다.

“······나도. 나도 할 이야기가 있어.”

루나가 퉁퉁 부은 눈으로 한쪽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을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아르테미스 가문은 원래 대륙 남서쪽에 위치했던 ‘아르테미스 왕국’의 왕족이었는데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했다고. 그래서 살아남은 이들이 은월섬으로 피신한 거라고. 아, 어쩌면 세실은 몰랐으려나.

그때, 트리스탄이 왜 대련하러 안 오느냐고 외치며 달려왔다. 녀석의 손에는 우리의 성년을 축하하기 위한 선물인 듯 보이는 커다란 술병이 들려 있었다. 루나는 냅다 술병을 빼앗고는 트리스탄을 쫓아 버렸다.

“······헤헤. 역시 이럴 때는 술이 있어야겠지? 트리스탄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내가 나중에 사과하면 괜찮을 거야. 아, 근데 카인은 엘리샤와 마법 훈련하러 가지 않아도 돼?”

“괜찮아. 엘리샤는 오늘 쿠훌린과 볼일이 있다고 했거든.”

우리는 하나의 술병을 돌아가며 손에 들고 술을 마셨다. 묘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시원한 바람이 부는 들판에서, 목숨을 건 여정을 함께했던 동료들과 그동안 숨겨왔던 이야기를 나누며 마시는 술이라니.

나는 어젯밤에 하려던 이야기를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두려웠다.

하지만 루나라면 이해해 줄 것이다. 리아논이 그랬듯이.

“나도 할 이야기가 있어. 특히 루나에게.”

그래서 말했다. 흑기사의 이름은 루시엔 라플라스, 나의 아버지라고. 그러나 내게 그에 대한 기억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고. 아울러 나에게는 14세 이전의 기억이 없다고.

루나는 처음에는 경악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잠시 후,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루나가 쿠훌린과 엘리샤의 부상을 떠올리며 우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데미안······!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마음 아팠니······!”

루나가 와락 나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나를 걱정하고, 내 마음에 공감하며 슬퍼하고 있었다.

아무리 소설에서의 모습과 달라졌어도 루나는 루나였다.

소설 속의 루나도 차가운 겉모습과 달리 내면은 누구보다 따뜻했던 인물이었다.

정의롭고 고결한 기사.

루나 아르테미스.

“끄히잉······. 오늘은 자꾸만 우네······.”

루나가 코를 훌쩍이며 웃었다.

나도 웃었다.

루나에게서 감정의 격양이 잦아든 것을 확인한 나는 술병을 들고 세실의 곁에 앉았다. 루나의 따뜻한 마음이 고마웠지만 카인의 과거 이야기 때문에 세실이 너무 신경 쓰였다.

“마실래? 세실.”

세실은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는 술을 마셨다.

나는 세실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떨리는 입술 아래로 한줄기 투명한 액체가 새어 나온다. 내 눈에 비친 그것은 마치 그녀의 마음속 눈물처럼 보였다.

“······헤헤. 우리 모두 각자 마음속에 숨겨둔 이야기를 했네. 세실은 여자아이인 것을 밝히고, 카인과 데미안은 과거 이야기를 하고, 나도 아르테미스에 관해 말하고. 원래도 친했지만 우리 더 가까워진 것 같지 않니? 그치.”

카인이 엷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세실의 옆으로 왔기 때문인지 루나는 카인 곁에 앉아 있었다.

“처음의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나는 봄이 오기 전에 제국으로 갈 거야.”

카인이 다시 제국 이야기를 꺼내자 루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루나가 또 눈물을 흘릴 것 같았기에 서둘러 내가 물었다.

“이유가 뭔데?”

“나는 ‘아르카넘 홀’에 입학할 거야. 그곳에서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어.”

카인이 나를 돌아봤고, 그 순간 꼬리 긴 바람이 불어와 그의 머리칼을 흩트렸다. 나는 조금 눈을 크게 떴다. 왜일까, 일 년 전 달빛나무 위에서 보았던 카인과 지금의 카인이 겹쳐 보였다. 그의 얼굴 위로 달빛이 번지는 착각마저 일었다.

‘데미안. 나는 세상을 바꿀 거다.’

그날의 마법처럼 카인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와 함께 가자. 데미안.”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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