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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2

122화 이야기 (2)

122화 이야기 (2)

나는 멍하니 카인을 바라봤다.

마치 그날, 달빛나무 위에서의 상황이 재현된 것 같았다.

“지금 대답해 달라는 것은 아니야. 당연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카, 카인. 나한테는 왜 안 물어봐?”

루나가 당황한 눈을 깜빡이며 카인을 돌아봤다. 이후 루나와 카인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모르겠다. 카인이 한 말에 대해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카인은 모르가나를 만났다고 말했다. 그리고 암영을 통해 하센베르크 가문을 멸망시킨 존재에 대한 단서를 발견했다고 했다.

‘그 단서가 제국에 있어. 그래서 나는 제국으로 가야 해.’

그 존재란 분명 ‘그림자 군주’를 말하는 것이다.

단서는 모르가나가 제공했겠지.

그렇다는 것은 모르가나도 군주에 대해 알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아르카넘 홀에 입학할 거야. 그곳에서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어.’

아르카넘 홀.

정식 명칭은 ‘블레이드 앤 아르카넘 홀(Blade & Arcanum Hall)’. 이름 그대로 검과 마법을 가르치는 제국 최고의 명문 학교다.

학교명이 길기도 하고, 또 전통적으로 검술보다는 마법의 위세가 강한 곳이기에 대부분의 사람은 ‘아르카넘 홀’이라 줄여 부른다. 미성년은 입학할 수 없는, 지구의 대학교와 유사한 교육기관으로 보면 된다.

‘아리엘.’

카인이 아르카넘 홀을 언급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이름은 아리엘이었다.

아리엘라 플랑브아즈.

웹소설 무한회귀의 두 번째 히로인이자, 세실과는 다른 방식으로 카인에게 충성했던 인물.

설마 카인이 아르카넘 홀에서 만나야 한다는 사람이 아리엘인가?

‘아리엘이 카인과 만나는 것은 좋지 않아. 더구나 이제 막 성년이 된 나이라면.’

세실이 카인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에게 충성했다면, 아리엘은 카인을 향한 사랑으로 움직인 인물이다. 아리엘은 제 목숨보다도 카인을 사랑했다. 그래서 그의 말이라면 맹목적으로 따랐다.

이 세계의 아리엘도 카인을 만나면 사랑에 빠질 것이다. 아리엘은 겉보기와 달리 순수한 면이 많다. 따라서 소설에서보다 어린 나이에 카인을 만나면 더욱 깊이 빠져들 공산이 크다. 즉, 훗날 카인이 흑화한다면 아리엘은 내게 대단히 까다로운 적이 될 것이다.

물론 이 세계의 카인은 소설 속 모습과 다르다. 아리엘이 카인을 사랑하고, 그 결과로 그에게 충성하더라도 카인이 악인이 되지 않는다면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늘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너무해.”

루나의 목소리가 나를 생각에서 끌어냈다.

“······아무리 그래도 물어봐 줄 수는 있잖아. 나한테도.”

루나가 미련이 남은 얼굴로 카인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카인은 어색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루나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화가 많이 났는데 카인의 과거 이야기를 들은 지라 대놓고 발산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 루나가 부담스러웠는지 카인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데미안. 너라면 아르카넘 홀에 대해 알고 있겠지. 나는 마법학부를 선택할 거야.”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그제야 나는 카인이 그간 엘리샤에게 마법을 배운 이유를 깨달았다.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 카인이 마법학부에 입학한다면 아리엘과 더 빠르게 가까워질 테니까. 게다가 소설 속의 카인은 아르카넘 홀에 입학하지 않았고, 마법도 배우지 않았다. 그런데 이 세계의 아리엘이 카인과 그런 공통의 소속감마저 갖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제 나는 완전히 무시하는 거니? 너무해!”

결국 루나가 폭발했다.

이잇······! 이를 악물며 루나가 카인의 가슴을 두 손으로 밀쳤다. 그러나 카인은 딱히 뒤로 밀리지 않았고, 그 모습에 더욱 화가 난 루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벌컥벌컥 술을 들이켜더니, 검을 뽑아 바닥에 내팽개쳤다.

“이, 이런 검······. 이제 필요 없어.”

그러고는 뒤돌아 성을 향해 달렸다.

지면에 나동그라진 그녀의 검 위로 이슬이 흩어져 있었다.

.

.

.

저녁 식사 자리에서 루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카인이 몇 번인가 말을 걸었지만 루나는 무시했다. 당연히 분위기는 전에 없이 서늘해졌고, 쿠훌린과 리아논이 무슨 일이냐는 듯 나와 세실을 돌아봤다.

루나의 검은 세실이 챙겨왔다. 나는 세실에게 루나를 부탁했다. 카인이 루나가 원하는 말을 하지 않는 이상, 그녀의 기분을 풀어지게 할 적임자는 나보다는 세실이다.

‘카, 카인. 나한테는 왜 안 물어봐?’

세실에게 듣기로, 루나의 물음에 카인은 끝내 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나는 점차 카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루나는 누구보다 은월섬과 섬의 사람들을 사랑하니까. 게다가 이곳에는 그녀의 가족도 있다.

그런 루나에게 섬을 떠나자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루나 또한 그래서 섣불리 카인과 함께 가겠다고 말하지 못한 거겠지. 더욱이 카인은 무려 십 년이라는 기간을 입에 담았다. 그래서 루나는 내심 기다린 거다. 카인이 강하게 말해주기를.

“쿠훌린.”

카인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다가올 겨울이 끝나기 전에 대륙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식사를 마치지도 않았는데 루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개미 같은 목소리로 ‘잘 먹었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식당을 뛰쳐나갔다.

콩콩콩, 계단을 뛰어오르는 루나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상황을 짐작한 쿠훌린과 리아논이 깊은 한숨을 뱉었다.

“대륙으로 돌아가려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니? 카인.”

리아논의 물음에 카인은 덤덤한 얼굴로 답했다.

제국의 ‘아르카넘 홀’에 입학하고 싶다고.

그곳에서 마법을 더욱 소상히 배우고 싶다고.

“루나에게 함께 가자고 말해 보았니?”

카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혹시 우리가 반대할 거로 생각한 거니?”

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리아논이 나와 세실에게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너희들도 카인과 함께 떠날 생각이냐고.

“아. 아직. 잘······.”

세실이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나도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그래. 그렇구나.”

리아논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듣고만 있던 쿠훌린이 말했다.

“엘리샤에게 배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거냐? 카인.”

“그런 건 아니에요. 엘리샤가 뛰어난 마법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사실 친구들에게는 말했지만, 제가 아르카넘 홀에 가려는 이유는 마법을 배우기 위해서만은 아니에요.”

쿠훌린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저 씩 어금니를 드러내어 웃으며 카인의 머리를 헝클었다.

“그래. 네 생각은 알겠다. 그러지 않아도 엘리샤가 말하더구나. 네가 마법에 대단한 소질을 갖고 있다고. 출항에 관해서라면 걱정하지 말거라. 겨울이 끝나기 전에 은월호를 움직일 수 있도록 조치하마.”

***

세실은 루나의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루. 루나. 나야. 세실.”

평소의 루나라면 호다닥, 발소리와 함께 환히 웃는 얼굴로 세실을 반겼을 것이다.

그러나 방 안에서는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드. 들어가도. 돼?”

“······안 돼.”

루나의 목소리는 먹먹했고, 물기에 젖어 있었다.

분명 이불 속에서 울고있는 것이겠지.

‘카인의 이야기는 신경 쓰지 마, 세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저녁 식사 전, 데미안은 그렇게 말해 주었다.

언젠가 쿠훌린도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세실.

세실은 데미안이 고마웠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직감했다. 그럼에도 나는 카인에게 빚이 있고, 이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을 거라고.

“세실.”

세실은 흠칫 놀라 옆을 돌아봤다.

디네베가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서 있었던 것처럼.

“루나는 잠시 혼자 있게 두는 편이 나을 거야.”

디네베가 세실의 귀에 속삭였다. 그러고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미소 지었다.

세실은 멍한 얼굴로 디네베를 바라봤다.

“디. 디네베.”

“응?”

“······할. 말이.”

두 사람은 디네베의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할 말이 뭔데? 세실.”

“어. 어젯밤에.”

“어젯밤?”

“데미안의. 방에서······.”

디네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야 세실?”

세실은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어젯밤에 디네베가 데미안의 방을 찾은 이유를 알고 싶다고.

평소의 세실이라면 묻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세실은 카인의 이야기를 듣고 평상심을 잃은 상태였고, 적지 않은 술도 마셨다.

“내가 어젯밤에 데미안의 방에 갔다고?”

디네베가 새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세실. 내, 내가 어떻게 한밤중에 데미안의 방에······.”

세실은 혼란스러웠다. 디네베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것도 꿈이었던 건가? 사실 나는 루나가 가져다 둔 술을 마시다가, 그대로 옷을 갈아입고 잠들었던 건가?

“내가 어떻게······, 내가 어떻게 그런······.”

디네베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늘 우아하고 차분한 디네베가 저렇게 당황한 모습을 보이다니. 세실은 디네베에게 사과한 후 제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머지않아 확신했다. 그래. 전부 꿈이었던 거야.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서일까, 문득 들판에서 루나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루나는 왕족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공주처럼 예뻤구나. 그도 그럴 것이, 진짜 공주였으니까. 디네베가 성숙한 기품을 지닌 이유도 납득이 됐다. 루나와 디네베는 공주였어. 나와는 태생부터 다른.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와 동시에 세실의 머릿속에 데미안의 얼굴이 스쳤다.

‘이따가 잠시 네 방으로 가도 될까? 할 이야기가 있어.’

아.

왜 잊고 있었지?

세실은 서둘러 머리매무새를 정돈했다. 그러고는 방문 앞으로 달려간 뒤, 심호흡했다.

“후우······.”

가슴이 두근거렸다. 데미안이 하려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제국에 관한 이야기일까? 아르카넘 홀은 검과 마법을 배우는 학교라고 들었다. 데미안은 어떤 선택을 할까. 루나를 좋아하니 섬에 남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데미안과 카인 중 누구를 따라야 하지?

세실은 데미안과 헤어지기 싫었다. 쿠훌린, 리아논, 루나, 디네베와도 헤어지기 싫었다. 트리스탄과 케일라도. 세실은 새삼 깨달았다. 나는 은월섬을 사랑하고 있어. 이곳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어.

꿀꺽,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각오를 다진 세실은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 너머에 서 있는 사람은 데미안이 아니었다.

“들어가도 될까? 세실.”

대답도 듣지 않고 카인은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닫힌 방문을 등진 채, 물끄러미 세실을 내려다봤다. 세실은 겁이 났다. 카인은 세실이 가장 두려워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너를 데려온 거야.’

“아까 했던 약속, 기억하고 있지?”

“야. 약속?”

“벌써 잊은 거야? 나의 부탁 하나를 들어주기로 했잖아. 무조건으로.”

세실의 눈이 커졌다. 언젠가 들었던 카인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귀를 울렸다.

‘데미안이 내 물음에 답하지 않았거든.’

맹수 같은 눈동자가 위협하듯 다가왔다.

“너는 아르카넘 홀로 가는 거야. 나와 함께.”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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