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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3

123화 단풍이 흩날리던 날

123화 단풍이 흩날리던 날

세실의 방을 찾기 전에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나는 세실에게 지난밤의 이야기를 할 셈이다. 그녀와 입맞춤했던.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에 가깝다. 그러나 나의 무의식은 알고 있다. 나는 세실이 내게 하려는 행동을 짐작했었고, 어떻게든 거부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눈을 떠 데미안. 나를 봐줘.’

세실의 목소리를 떠올리자 다시금 심장이 뛰었다. 사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세실이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애써 무시했다. 왜였을까. 루나 때문에?

‘······그러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거야.’

입술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구에서 나는 이성과 입맞춤한 적이 없었다. 아니, 실은 확신하지 못한다. 지구에서의 기억이 하루가 다르게 옅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제는 어디에서 살았는지, 몇 살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기억의 손실이 시작된 시점은 흑기사를 처음 만났던 날, 다시 말해 아스트레아의 천칭이 오른(현실)쪽으로 완전히 기운 후부터인 것 같다. 그때부터 천천히, 그러나 점차 빠르게 나는 지구에서의 기억을 잃어갔다.

이러다가 종래에는 김우진이라는 이름마저 잊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나는 점점 더 16세의 ‘데미안 라플라스’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세실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이대로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다.

.

.

.

“······미. 미안해. 데미안.”

문틈으로 보이는 세실의 얼굴은 어두웠다.

“······몸이. 좋지. 않아서.”

“아프다고? 어디가?”

“미안. 이야기는. 나중에.”

그렇게 말한 세실이 도망치듯 방문을 닫았다.

나는 잠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방금은 평소의 세실 같지 않았다.

카인의 과거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기 때문일까. 그러지 않아도 카인의 이야기를 들은 후로 세실은 줄곧 평상심을 잃은 모습이었다.

한심하구나 데미안 라플라스. 고작 몇 마디 위로의 말로 세실의 아픔이 사라질 리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면서.

***

“잘 잤니? 데미안.”

이튿날 아침, 루나는 평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내 방을 찾아왔다.

“나 어제 너무 일찍 잠들었나 봐. 엄청 오래 자니까 막 등이 아파. 헤헤헤.”

다크서클이 짙은데.

“얼른 식사하러 가자! 카인과 세실은 벌써 일어났어!”

루나가 나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문밖으로 나서자마자 우리는 카인과 마주쳤다.

루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잘 잤니? 카인.”

그러고는 저만치 보이는 세실에게 달려가 냅다 팔짱을 꼈다.

“헤헤 세실. 어제는 미안했어. 화난 거 아니지? 기분 나빴다면 용서해 줘. 응?”

.

.

.

마을은 활기가 넘쳤다.

어제는 워낙 정신이 없어 눈치채지 못했는데, 대륙에 남았던 단원들이 섬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라이칸!”

라이칸을 발견한 루나가 손을 흔들었다. 라이칸은 언제나 그렇듯 입꼬리만을 올리며 웃었고, 옆에 있던 트리스탄이 우리를 보고 달려왔다. 케일라도 함께였다.

“트리스탄. 어제 일은 정말 미안해. 그리고 네가 준 술 맛있더라. 고마워!”

“아, 아니야 루나! 나는 벌써 다 잊었는걸!”

우리와 잠시 이야기하던 트리스탄과 케일라가 라이칸에게 돌아갔다.

루나는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웃으며 인사했다. 그들도 우리의 성년을 축하하며 웃었다. 루나의 허리에는 다시 검이 채워져 있었다. 성공했구나. 세실.

“······저기. 할. 이야기가.”

더 이상 인사를 나눌 사람이 없어질 즈음, 세실이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너른 들판으로 나갔다.

바람이 많이 차가워졌다.

겨울이 오고 있다.

“할 이야기가 뭔데? 세실.”

루나의 물음에, 세실이 카인의 눈치를 살피며 작게 말했다.

“······나. 제국. 가려고.”

세실이 슬쩍 눈동자를 굴려 나를 돌아봤다. 그러나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카인의 과거 이야기가 나의 예상보다 더욱 세실을 괴롭혔던 모양이다. 지난밤에 대화를 피한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나는 내심 세실이 카인보다는 나와 함께할 것으로 기대했었다.

하지만 아니었구나.

“······아. 그렇구나.”

루나의 목소리에서 별다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사실 어젯밤에 나는 많이 고민했다. 카인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 두 선택지에는 나름의 장단이 있었으니까.

먼저, 카인을 따라간다는 선택지의 가장 큰 장점은 가까운 곳에서 그를 지켜볼 수 있다는 거다. 나는 늘 카인의 흑화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다. 게다가 아르카넘 홀에 가면 아리엘과 친분을 쌓을 수 있다.

‘아리엘과 가까워지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내게 도움이 된다.’

또한 나는 아르테미스 왕국의 멸망에 암영이 관여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일루산에게 그림자 군주에 관해 들었을 때, 그가 제국의 인물일 가능성을 염두에 뒀었다. 아울러 아르카넘 홀의 학생 신분은 제국의 영토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해준다.

카인이 아르카넘 홀에 입학하려는 것에는 분명 그 이유가 포함돼 있을 것이다. 카인은 그림자 군주를 추적할 생각이니까.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일루산의 말에 의하면 그림자 군주는 카인에게 큰 관심을 두고 있고, 세실을 ‘어떤 목적’에 이용하려 한다.

‘은월이 상처 입은 지금, 네가 세실을 지켜줄 거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반면 카인을 따라가지 않는 선택지를 고른다면 나는 세력을 키우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 더욱이 은월의 단에는 카인의 가장 강력한 대항마인 루나가 있다. 쿠훌린, 벨락, 라이칸으로 이어지는 3인의 소드마스터와, 엘리샤도 있다.

머지않아 루나와 트리스탄이 소드마스터로 성장한다면 은월은 무려 5인의 소드마스터를 보유한 무력 집단이 된다. 그때쯤이면 세실도 쿼드 블레이드가 되어있겠지. 그야말로 왕국 하나를 전멸시키고도 남을 전력이다.

‘이제는 사실상 상단으로 전환하는 시점이지. 전쟁의 피해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번 전쟁으로 더욱 덩치를 키울 수 있을 것 같다.’

지난번에 테오가 말했듯 랑베르 잡화점은 상단으로 전환 중이다. 당연히 수입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테고, 나는 한층 풍족해진 자본의 힘으로 더 강하고 안정적인 세력을 일굴 수 있겠지. 족제비의 활쏘기 실력은 덤이고.

물론 나 역시 소드마스터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소서러의 능력도 더욱 발전시킬 것이다. 그 힘을 토대로 나는 은월에 소속된 일개 단원이 아닌, 나만의 세력을 이끄는 자가 될 것이다. 그래야만 흑화한 카인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세실이 카인을 따라가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고를 선택지는 하나다.

‘아리엘과 세실 모두를 카인에게 빼앗길 수는 없어.’

소설에서 카인, 아리엘, 세실의 협공은 무시무시했다. 세 사람은 함께 움직일 때 극강의 상승효과(Synergy)를 발휘했다. 거의 무적에 가까운.

이대로면 두 사람 다 카인의 손에 떨어진다. 그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아리엘은 몰라도, 세실은 아직 희망이 있다. 그러려면 나는 세실과 함께해야 한다.

‘그건 알 수 없어. 일이 년에 그칠 수도 있고, 어쩌면 십 년 이상 머물러야 할 수도 있겠지.’

어제 카인은 ‘일이 년’이라는 기간을 언급했다. 그 말은 즉, 카인은 아르카넘 홀을 졸업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거다. 아르카넘 홀은 4년제 학교니까.

다시 말해 카인이 아르카넘 홀에서의 목적을 단기간에 달성한다면 우리의 제국 생활은 생각보다 빠르게 끝날 수도 있다. 게다가 아르카넘 홀의 학생 신분을 이용해 틈틈이 군주의 흔적을 찾아볼 수도 있겠지. 그뿐 아니라 방학 기간을 활용해 페르디나로 가서 상단의 상황을 확인할 수도 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렇다면 이 선택지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것에 집중하자.

“나도 가겠어. 제국으로.”

루나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아쉽지만.

***

“카인. 잠깐만.”

달빛나무 축제일을 하루 앞둔 날, 평소처럼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성을 나서는 카인의 팔을 루나가 붙잡았다.

“······할 이야기가 있어. 여기서는 말고.”

카인은 물끄러미 루나를 돌아봤다.

그녀답지 않게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이 흔들린다.

“응. 루나.”

카인의 대답에, 루나는 따라오라는 듯 앞장서서 걸었다.

카인은 데미안과 세실을 돌아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루나의 발자취를 쫓았다.

그래. 오늘의 루나는 평소와 달랐구나. 식사하는 내내 한 번도 웃지 않았고, 의도적으로 시선이 닿는 것을 피했다. 사실 카인도 느끼고 있었다. 애써 마음에 두지 않으려 했을 뿐.

루나는 빠른 걸음으로 마을을 벗어났다. 늘 느끼지만 요정이 걷는 것 같다. 늦가을의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살랑거리게 했고, 들풀은 발밑에서 사각거렸다. 눈에 띄는 나무들은 모두 불그스름한 옷을 입고 있었다.

바슷. 바스슷.

루나의 곧은 다리가 풀잎을 헤치며 나아갔다. 카인은 그 자취를 따라 걸었다. 둘 사이의 침묵은 깊었고, 서로의 발자국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어느덧 둘은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카인은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이 언덕을 찾는 이가 많지 않은지 들풀의 키는 유독 높았고, 무거운 바람 소리를 냈다.

언덕 정상에 오른 루나는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앞에 멈춰 섰다.

“카인.”

카인의 발걸음도 루나의 한 걸음 뒤에서 멈췄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루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긴 은빛 머리카락. 그 사이로 희고 긴 목이 매끄러운 선을 그리며 내려온다. 하늘거리는 망토 너머의 동그란 어깨. 그 아래로 보이는 것은 작고 섬세한 손.

손을 내밀려다, 멈칫했다.

카인은 본능을 억눌렀다.

그러나 의지를 거스르듯 손이 떨렸다.

그대로 내밀고 싶다.

그리고, 저 손을.

휘릭.

옷깃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루나의 은빛 망토가 부드럽게 회전했다. 이어 또 다른 은빛의 물결이 헤아릴 수 없는 곡선을 그리며 허공에 흩어졌다. 그 순간, 카인과 루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는 별처럼 빛났고, 카인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지금까지 보아온 모든 아름다운 것을 합쳐도 눈앞의 별빛을 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반짝이는 한 쌍의 별빛은 카인을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동안 수없이 보아온 눈동자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처음 보는 듯이 생소했다.

사락.

붉은 잎이 떨어져 내렸다.

갑작스럽게 불어온 열풍이 루나 너머의 커다란 나무를 흔들었다. 그 여파로 가지에서 분리된 수십, 수백의 단풍이 두 사람을 공전하듯 흩날렸다.

사라라라라락.

그녀의 눈과, 코와, 뺨과 입술을 스치며 붉은 잎새가 춤을 추었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마치 꿈을 타고 넘어온 붉은 옷의 요정들이 그녀의 주위를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카인. 나······.”

투명한 복숭앗빛 입술이 사르르 열렸다. 그녀의 음성은 카인이 지닌 그 어떤 혼돈으로도 막을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 같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드러난 이는 눈꽃처럼 희었다.

“나, 네가 좋아.”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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