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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4

124화 마무리

“놈을 숙주의 육신에서 분리해야 한다.”

공성전을 시작하기 전, 레온이 당부한 말이었다.

“놈은 정신체다. 평범한 악마들과 다르게 육신을 숙주에 의지하지.”

그렇기에 숙주와 정신체만 분리하면 숙주를 구해내는 것도 불가한 것은 아니다.

“네 아비를 구하고 싶으냐. 올바른 복수를 하고 싶더냐.”

“……네.”

소연의 대답에 레온은 그녀가 해낼 수 있는 최상의 선을, 그리고 그녀 자신이 감내해야 할 위험을 경고했다.

“먼저 마검을 쥐어야 한다. 네가 새로운 숙주가 되는 것이다.”

“그럴게요.”

“…….”

레온은 자신의 몸을 악마에게 넘겨야 한다는 말을 즉답으로 승낙한 소연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챱!

손날로 정수리부터 두드린다. 은근히 아팠는지, 소연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조금은 자신의 몸도 신경 쓰거라.”

“……네에.”

아프긴 했지만, 그것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레온 나름의 배려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귀걸이를 걸어둬라.”

“이건?”

“꿈의 권능이 담긴 별철장비랍니다. 생도들을 위한 선물로 제가 제작했지요.”

귀걸이의 정체를 알려준 건 베아트리체였다. 꿈과 죽음의 신관장인 마술사 여왕은 자신의 권능으로 축복한 별철 귀걸이에 대해 설명했다.

“본래라면 생도들의 정신방벽을 보호해주기 위한 기능이었어요. 정신에 간섭하는 악마들도 상당히 많으니까요.”

베아트리체는 숱한 악마들과 싸워오며 그들을 격퇴했었다. 특히 인간을 타락으로 이끄는 악마들은 정신적인 유혹에 특출났고.

“이건 정신을 보호함과 동시에 적을 역으로 함정에 빠뜨리는 기능이 탑재됐답니다. 과거에 타락의 악마들 상대로 제법 통했고요.”

베아트리체는 정신을 장악당한 악마를 어떻게 취급했는지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꿈의 권능을 펼치게 된 자신이 어떤 짓을 벌일 수 있는지도.

“계획은 이렇다. 먼저 네가 빈틈을 보여 놈에게 잠식된다.”

“그 순간 바로 발동하는 건가요?”

“그렇게 쉽지 않다. 약해졌다곤 해도 명색이 대공급 악마. 정면에서 발동하면 놈도 대응해낼 것이야.”

하여 레온이 놈과 박투를 벌인다. 놈의 힘을 소진시키고 지친 순간에 기습적으로 별철 귀걸이를 터뜨려 단번에 권능을 해방하는 것이다.

“실패하면 넌 악종 놈의 숙주가 될 것이야. 그렇게 되면 짐은 널 베어야겠지.”

“……그렇게 되더라도 원망하지 않을게요.”

천소연은 각오를 굳혔다. 진정한 복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목숨을 걸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제 목숨을 던지는 게 아니에요. 폐하를 믿어요. 폐하께선 승리하실 거예요.”

그 말에 레온은 씨익 웃더니 내리쳤던 소연의 정수리를 헝클 기세로 쓰다듬어주었다.

“당연한 소릴.”

전장으로 향하는 레온. 아이에게 등을 보이면서 사자심왕은 말한다.

“사자심왕의 위광을 믿고 따르라. 그리하면 짐은 어느 때나 승리를 가져올 것이니.”

그 등을 보며 천소연은 시작도 전에 확신했다.

저분은 결국 승리할 운명이라고.

* * * *

전투가 끝났다.

악마대공 아카샤가 패배한 시점에서 악마들의 저항은 무의미해졌다.

레온이 개입하면서 최상급 악마들도 줄줄이 목이 잘려나간 덕이다.

[퀘스트 완료 : 살육대공 아카샤를 쓰러뜨렸습니다.]

게이트의 클로징 조건이 완수됐다. 게이트가 클로징 되기 전, 한일 양국의 헌터들은 눈에 불이 켜져라 성을 뒤지기 시작한다.

“싹 다 털어! 돈 될만한 건 다 챙겨라 이 말이야!”

“세상에! 이게 얼마야! 하나라도 더 챙겨!”

살육대공 아카샤의 영주성. 그곳의 보물과 재화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온 세상의 보물과 보석, 귀중한 무구나 마법서 등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전리품들이었으나 베아트리체와 야크트 스피너가 이들을 제지했다.

-모든 전리품 검수 바람.

“위험한 물건이 있을지 모르니 폐하께서 정화할 거예요. 다들 협조해주시길.”

수많은 재보 중에는 물론 위험한 것들도 산더미같이 있다.

사람에게 기생하는 마검의 존재를 아는 헌터들은 그 통보에 얌전히 응했다.

“폐하, 생포한 포로들은 어떻게 할까요?”

불새 길드의 하유리가 다가왔다. 그녀는 야크트 스피너로부터 ‘인증받은’ 고위악마 수급 37개 인장을 들고 히죽거렸다.

“제법 활약했구나. 그 목들도 저기 있느냐?”

“그렇죠.”

성내 광장에는 포로로 잡힌 악마들이 한가득 이다. 개중에는 하유리처럼 목이나 상반신을 자른 악마들도 있었는데, 놀랍게도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것들이 많았다.

“죽여버리겠다, 인간 놈들!”

“너희들이 마계를 침공하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모든 군단장들이 이곳을 향해 올 것이다!”

악마들의 기세는 사나웠다. 그들 중 몇몇은 여전히 자신감이 있다. 자신들이 불멸의 존재임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활하여 너희들을 파멸로 인도하리──”

“닥쳐라, 이 악마야!”

레온이 던진 창에 온몸이 관통당한 악마는 죄 없는 후방의 악마들과 함께 꼬챙이가 되었다. 즉사였다.

-끼에에에에에에에엑!!

그리고 절명한 악마들에게서 시뻘건 무언가가 흘러나와 괴성을 내지른다.

아픔을, 고통을, 절규를 터뜨리는 것 같은 끔찍한 괴음은 성배에 흡수되기까지 계속되었다.

-서, 성법!

-성배기사!

악마들은 그를 통해 자신들의 운명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포박된 상태에서도 발악적으로 들고 일어선다.

“한하리.”

“예에… 폐하.”

레온의 지시에 하리가 손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막대한 바닷물이 허공에서 쏟아진다. 이윽고 그것은 악마들을 모조리 휘감더니 큐브 형태의 바다로 고정되었다.

-우읍! 우부붑!

-숨이…! 살려!

바닷물 안에서도 명확한 악마들의 발버둥. 하지만 다음 순간, 재혁이 창을 높게 치켜든다.

-콰르릉! 콰쾅!

하늘과 천둥의 신 울티마의 번개가 내리쳤다. 바닷물을 통해 순식간에 감전되는 악마들. 더러는 즉사였고, 더러는 살아남는다.

“나머지는 스피너 경이 처리하지.”

-존명.

강철의 기계거미가 육중한 다리를 이동하며 시체 더미의 악마들에게 향한다. 킬링머신은 살아있는 악마는 단 한 마리도 남김없이 와이어로 조각조각냈다.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악마들의 절규와 비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금발의 미청년은 그것을 음미하듯 숨을 들이킨다.

“이 얼마나 감미로운 곡소리인가.”

-……무섭다.

-솔직히 인정.

물론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혀를 내두르는 대학살일 뿐이다. 단지 상대가 악마라서 별달리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을 뿐.

“폐하.”

“다케다, 무슨 일이냐.”

“대승을 거둔 것을 감축드립니다. 성배기사분들 덕에 손실이 천 명 남짓… 아니, 오십 명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흠, 그대들 일본의 정예들도 힘 썼음이야. 너희들의 용맹을 사자심왕이 상찬하겠다.”

명백한 윗전 노릇이었지만, 다케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명목상 대등한 헌터 지휘관이니 뭐니 하는 건 순전히 국내 프로파간다 용에 불과했으니까.

“슬슬 귀환하도록 하지. 이 게이트는 마계의 일부. 우리가 저쪽에서 닫지 않는 이상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즉슨 사태를 지켜보고 지원올 다른 악마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레온은 아직 미비한 세력으로 마계정벌을 나설 생각이 없다.

방랑의 마검 상륙전으로부터 시작된 악마대공령 토벌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 * * *

4년 전 울산, 천지호는 자신의 딸을 대신해 마검을 쥐었다.

그 선택에는 조금의 후회도 없다.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만 아내도 그리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마검의 숙주가 된 이래 4년. 그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

자신을 공격하는 동료 헌터들을 죽이고, 마검의 살육본능이 이끄는 대로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했다.

그 마지막에는 자신의 딸마저 자신과 같은 꼴을 볼 뻔했다.

그 비통함을… 눈부신 황금빛의 성인께서 막아주셨다. 끔찍한 마검으로부터 해방해주셨다.

“아…….”

그리고 이렇게.

“소연아…….”

“아빠?”

제 딸을 다시 붙잡게 해주셨다.

“아빠!”

일본 도쿄의 병원. 꽃다발의 꽃내음이 나풀거리는 1인실에서 천지호는 자신의 딸을 4년 만에 안아보았다.

“아빠, 아빠… 아빠…….”

꽉 끌어안은 무게감이 4년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아이의 성장이 실감 됐고, 그 긴 세월 동안 아이와 함께해주지 못한 것이 죄스러웠다.

“다… 끝났단다. 이제, 괜찮아.”

“응… 다 끝났어.”

부녀는 한동안 서로를 부덩켜 안고 오랫동안 여운을 느꼈다.

“이제 어쩔 거야?”

“사죄할 방법을… 찾아야겠지.”

천지호는 자신의 육신이 지배당하는 동안 벌인 모든 일을 기억했다.

그 전의 역대 마인들의 비통에 찬 절규의 기억도…….

“만신전에 귀의해서… 그분을 도울 길을 찾아볼까 하구나.”

“어, 그건 안 되는데…….”

“소연아?”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은 딸의 대답에 고개를 기웃거리는 지호.

“난 이미 신의 선택을 받았어. 거스름돈으로 신의 권능을 사용하는 걸 허락받았고. 그러니까 아빠는 길드로 돌아가. 가서 길드의 후계자 자리를 다시 돌려받아야지.”

“내가 어찌…….”

“만신전에는 내가 있을게. 아빠는 가서 후계자로서 신검 길드의 지원을 끌어내 줘.”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이야 길드장인 천진수의 직계가 천소연 뿐이었으니 자연스레 후계자가 된 셈이다.

본래라면 천지호가 차기 후계자를 잇는 게 맞았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딸의 지극히 논리적인 주장에 사심이 들어간 기분이 드는 것은.

“아빠는 돌아가서 할아버지한테 후계자 수업을 들어. 난 아빠가 잘해낼 거라고 믿어.”

“그, 그래. 그런데… 그것뿐이니?”

“그것뿐이라니?”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분명 동공이 흔들렸다. 얼굴도 살짝 붉어진 것이 의아할 정도다.

‘기껏 돌아왔는데.’

4년 만에 돌아온 아빠와 헤어져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천지호는 씁쓸한 기분을 삼켜야만 했다.

* * * *

레온은 천지호의 병문 앞에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의 부녀가 해후하는 일이다. 그 자리에 끼어들 정도로 낭만이 없지는 않다.

잠시 부녀상봉을 기다리는 사이, 복도에서 한 노인이 다가왔다.

“사자심왕 폐하.”

“아들의 병문안이냐?”

“그렇소. 요 며칠 계속 이곳에 있었지.”

발걸음의 주인공은 신검 길드의 길드장 천진수. 천지호의 아버지이자 천소연의 할아버지 되는 이다.

“그러는 폐하는 어쩐 일로 왕림하셨소.”

“뒷처리가 필요해서 말이다.”

레온은 한때 마검의 숙주가 되었던 천지호를 살피러 왔다.

그의 몸속에는 마검이 새겨둔 전대 마인들의 검술과 영혼이 새겨져 있다.

영혼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만큼 마모된 넋에 가까운 존재지만, 이 세계에서는 자신 정도가 아니면 혼을 정화하기도 어려울 테지.

“과연, 다른 마검사들의 혼들도 있단 말이오.”

“적당한 사제에게 맡길 일이나, 공교롭게도 이 세계엔 혼을 인도해줄 사제가 적으니 말이야.”

덕분에 귀하신 몸이 직접 납시었다,

“…….”

천진수는 레온을 향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레온은 이 노인이 저의가 없음을 알고 내버려 두었고.

서서히.

고목 같았던 뻣뻣한 허리가 숙여진다.

“감사하오. 아들이 은혜를 입고, 손녀딸이 은혜를 입었네. 가문 전체가 폐하의 은덕을 보았소이다.”

신검 길드장.

한국제일검이자 최강의 헌터.

천진수는 그 평생의 공로로 뻣뻣하게 허리를 펴고 다니던 꼰대 중의 꼰대다.

하지만 그는 눈앞의 이 어려 보이는 청년에게 허리를 숙이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돕겠소.”

“민초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다.”

레온은 이 군인도, 기사도, 귀족도 아닌 신분의 사내에게 단 한 가지만을 바랐다.

“악의 준동이 계속되고 있으니 그것을 경계하고 증오하라. 그것이 세상을 지키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그야… 당연하지 않소.”

“그 당연한 것을 못해 숱한 세계가 멸망했다. 삿된 것들의 달콤한 유혹을 가벼이 여기지 마라.”

“…….”

살육대공 토벌전이 끝난 직후 천진수는 이 남자에 대해 모든 걸 알아보았다.

생전 보지도 않던 윱튜브도, 정부 관계자들이 정리한 정보도, 오랜 친구인 오강혁 협회장에게서도.

천진수가 알게 된 레온이라는 남자는 끝없는 전쟁의 역사였다.

홀로 세계에 남은 생존자. 수백 년 동안 악과 맞서 싸운 최후의 보루.

그의 용서 없는 손속은 그가 얼마나 처절한 싸움을 계속해왔는지에 대한 증거다.

비록 이세계의, 중세의, 판타지의 계급주의 기사왕일지라도.

악에 대한 그의 전력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좋네! 내 지금부터 폐하를 형님으로 모시겠소!”

“뭣이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천진수의 말에 레온도 조금은 당황했다.

“우리 세계에는 도원결의라 하여 대업을 위해 형제결연을 맺는 경우도 있소! 내 관우 하리다! 형님이 유비 하시오!”

“허허…….”

레온은 이 당돌한 노인네의 말이 기가 찼지만, 헛웃음이 나올 정도는 되었기에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짐과 의형제를 맺기에는 네 녀석의 신분이 미천할 진대.”

“내 이래 뵈어도 천씨 가문 37대손이오. 우리 가문이 고려 시대에는 귀족이었고 조선 시대에는 사대부였네. 양반이었다 이 말이야.”

조선시대 명문가면 중세 기준으론 귀족급은 되지 않겠느냐며 우겨대는 천진수. 그가 덧붙였다.

“앞으로 악마에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협력하겠소. 나와 형님이 힘을 합친다면 이 땅 위에 악마는 감히 침범하지 못하겠지!”

“개종하고 신앙을 받아들여라. 만신의 신앙을 가진 이들이라면 누가 되었든 짐의 형제요 자매다.”

“거 형제 범위가 좀 넓소?”

천진수가 호탕하게 가슴을 치며 말했다.

“걱정 마시오. 우리 길드원은 남김없이 죄 개종하라고 할 테니. 관련 계열사들까지 합하면 숫자가 좀 되겠군!”

좀 뜻밖의 이유로 천진수의 지원을 약속받았지만 나쁠 거야 없었다. 노쇠한 그지만, 그 강함은 어지간한 왕국 기사단장 이상.

‘퀘스트만 잘 수행해낸다면 성배기사의 자리를 노려볼 수도 있겠지.’

물론 그것은 천진수가 올바른 신앙을 깨우쳤을 때일 것이다. 레온은 그가 가지게 될 신앙을 기대하며 잠시 가족의 해후를 피해 병원을 나왔다.

────!!

그때였다. 아공간 속에서 요동치는 성물의 기운. 성검이나 성창, 성배가 아니다.

꽤나 제멋대로이며 잔혹하기까지 한 사나움을 가진 성물이라면 단 하나.

“오라.”

아공간이 열리며 그 안에서 웬 책 하나가 떨어진다.

두꺼운 장정, 잘 무두질 된 고급 가죽은 수제작의 흔적이 돋보인다.

그 표지의 가죽에 새겨진 제목은 이 지구에서는 단 한 명만이 읽을 수 있는 이계의 언어.

책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농노로 거인을 잡는 법」


           


Chapter 124

Chapter 124

124화 마무리

"놈을 숙주의 육신에서 분리해야 한다."

공성전을 시작하기 전, 레온이 당부한 말이었다.

"놈은 정신체다. 평범한 악마들과 다르게 육신을 숙주에 의지하지."

그렇기에 숙주와 정신체만 분리하면 숙주를 구해내는 것도 불가한 것은 아니다.

"네 아비를 구하고 싶으냐. 올바른 복수를 하고 싶더냐."

"……네."

소연의 대답에 레온은 그녀가 해낼 수 있는 최상의 선을, 그리고 그녀 자신이 감내해야 할 위험을 경고했다.

"먼저 마검을 쥐어야 한다. 네가 새로운 숙주가 되는 것이다."

"그럴게요."

"……."

레온은 자신의 몸을 악마에게 넘겨야 한다는 말을 즉답으로 승낙한 소연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챱!

손날로 정수리부터 두드린다. 은근히 아팠는지, 소연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조금은 자신의 몸도 신경 쓰거라."

"……네에."

아프긴 했지만, 그것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레온 나름의 배려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귀걸이를 걸어둬라."

"이건?"

"꿈의 권능이 담긴 별철장비랍니다. 생도들을 위한 선물로 제가 제작했지요."

귀걸이의 정체를 알려준 건 베아트리체였다. 꿈과 죽음의 신관장인 마술사 여왕은 자신의 권능으로 축복한 별철 귀걸이에 대해 설명했다.

"본래라면 생도들의 정신방벽을 보호해주기 위한 기능이었어요. 정신에 간섭하는 악마들도 상당히 많으니까요."

베아트리체는 숱한 악마들과 싸워오며 그들을 격퇴했었다. 특히 인간을 타락으로 이끄는 악마들은 정신적인 유혹에 특출났고.

"이건 정신을 보호함과 동시에 적을 역으로 함정에 빠뜨리는 기능이 탑재됐답니다. 과거에 타락의 악마들 상대로 제법 통했고요."

베아트리체는 정신을 장악당한 악마를 어떻게 취급했는지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꿈의 권능을 펼치게 된 자신이 어떤 짓을 벌일 수 있는지도.

"계획은 이렇다. 먼저 네가 빈틈을 보여 놈에게 잠식된다."

"그 순간 바로 발동하는 건가요?"

"그렇게 쉽지 않다. 약해졌다곤 해도 명색이 대공급 악마. 정면에서 발동하면 놈도 대응해낼 것이야."

하여 레온이 놈과 박투를 벌인다. 놈의 힘을 소진시키고 지친 순간에 기습적으로 별철 귀걸이를 터뜨려 단번에 권능을 해방하는 것이다.

"실패하면 넌 악종 놈의 숙주가 될 것이야. 그렇게 되면 짐은 널 베어야겠지."

"……그렇게 되더라도 원망하지 않을게요."

천소연은 각오를 굳혔다. 진정한 복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목숨을 걸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제 목숨을 던지는 게 아니에요. 폐하를 믿어요. 폐하께선 승리하실 거예요."

그 말에 레온은 씨익 웃더니 내리쳤던 소연의 정수리를 헝클 기세로 쓰다듬어주었다.

"당연한 소릴."

전장으로 향하는 레온. 아이에게 등을 보이면서 사자심왕은 말한다.

"사자심왕의 위광을 믿고 따르라. 그리하면 짐은 어느 때나 승리를 가져올 것이니."

그 등을 보며 천소연은 시작도 전에 확신했다.

저분은 결국 승리할 운명이라고.

* * * *

전투가 끝났다.

악마대공 아카샤가 패배한 시점에서 악마들의 저항은 무의미해졌다.

레온이 개입하면서 최상급 악마들도 줄줄이 목이 잘려나간 덕이다.

[퀘스트 완료 : 살육대공 아카샤를 쓰러뜨렸습니다.]

게이트의 클로징 조건이 완수됐다. 게이트가 클로징 되기 전, 한일 양국의 헌터들은 눈에 불이 켜져라 성을 뒤지기 시작한다.

"싹 다 털어! 돈 될만한 건 다 챙겨라 이 말이야!"

"세상에! 이게 얼마야! 하나라도 더 챙겨!"

살육대공 아카샤의 영주성. 그곳의 보물과 재화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온 세상의 보물과 보석, 귀중한 무구나 마법서 등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전리품들이었으나 베아트리체와 야크트 스피너가 이들을 제지했다.

-모든 전리품 검수 바람.

"위험한 물건이 있을지 모르니 폐하께서 정화할 거예요. 다들 협조해주시길."

수많은 재보 중에는 물론 위험한 것들도 산더미같이 있다.

사람에게 기생하는 마검의 존재를 아는 헌터들은 그 통보에 얌전히 응했다.

"폐하, 생포한 포로들은 어떻게 할까요?"

불새 길드의 하유리가 다가왔다. 그녀는 야크트 스피너로부터 '인증받은' 고위악마 수급 37개 인장을 들고 히죽거렸다.

"제법 활약했구나. 그 목들도 저기 있느냐?"

"그렇죠."

성내 광장에는 포로로 잡힌 악마들이 한가득 이다. 개중에는 하유리처럼 목이나 상반신을 자른 악마들도 있었는데, 놀랍게도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것들이 많았다.

"죽여버리겠다, 인간 놈들!"

"너희들이 마계를 침공하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모든 군단장들이 이곳을 향해 올 것이다!"

악마들의 기세는 사나웠다. 그들 중 몇몇은 여전히 자신감이 있다. 자신들이 불멸의 존재임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활하여 너희들을 파멸로 인도하리──"

"닥쳐라, 이 악마야!"

레온이 던진 창에 온몸이 관통당한 악마는 죄 없는 후방의 악마들과 함께 꼬챙이가 되었다. 즉사였다.

-끼에에에에에에에엑!!

그리고 절명한 악마들에게서 시뻘건 무언가가 흘러나와 괴성을 내지른다.

아픔을, 고통을, 절규를 터뜨리는 것 같은 끔찍한 괴음은 성배에 흡수되기까지 계속되었다.

-서, 성법!

-성배기사!

악마들은 그를 통해 자신들의 운명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포박된 상태에서도 발악적으로 들고 일어선다.

"한하리."

"예에… 폐하."

레온의 지시에 하리가 손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막대한 바닷물이 허공에서 쏟아진다. 이윽고 그것은 악마들을 모조리 휘감더니 큐브 형태의 바다로 고정되었다.

-우읍! 우부붑!

-숨이…! 살려!

바닷물 안에서도 명확한 악마들의 발버둥. 하지만 다음 순간, 재혁이 창을 높게 치켜든다.

-콰르릉! 콰쾅!

하늘과 천둥의 신 울티마의 번개가 내리쳤다. 바닷물을 통해 순식간에 감전되는 악마들. 더러는 즉사였고, 더러는 살아남는다.

"나머지는 스피너 경이 처리하지."

-존명.

강철의 기계거미가 육중한 다리를 이동하며 시체 더미의 악마들에게 향한다. 킬링머신은 살아있는 악마는 단 한 마리도 남김없이 와이어로 조각조각냈다.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악마들의 절규와 비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금발의 미청년은 그것을 음미하듯 숨을 들이킨다.

"이 얼마나 감미로운 곡소리인가."

-……무섭다.

-솔직히 인정.

물론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혀를 내두르는 대학살일 뿐이다. 단지 상대가 악마라서 별달리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을 뿐.

"폐하."

"다케다, 무슨 일이냐."

"대승을 거둔 것을 감축드립니다. 성배기사분들 덕에 손실이 천 명 남짓… 아니, 오십 명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흠, 그대들 일본의 정예들도 힘 썼음이야. 너희들의 용맹을 사자심왕이 상찬하겠다."

명백한 윗전 노릇이었지만, 다케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명목상 대등한 헌터 지휘관이니 뭐니 하는 건 순전히 국내 프로파간다 용에 불과했으니까.

"슬슬 귀환하도록 하지. 이 게이트는 마계의 일부. 우리가 저쪽에서 닫지 않는 이상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즉슨 사태를 지켜보고 지원올 다른 악마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레온은 아직 미비한 세력으로 마계정벌을 나설 생각이 없다.

방랑의 마검 상륙전으로부터 시작된 악마대공령 토벌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 * * *

4년 전 울산, 천지호는 자신의 딸을 대신해 마검을 쥐었다.

그 선택에는 조금의 후회도 없다.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만 아내도 그리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마검의 숙주가 된 이래 4년. 그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

자신을 공격하는 동료 헌터들을 죽이고, 마검의 살육본능이 이끄는 대로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했다.

그 마지막에는 자신의 딸마저 자신과 같은 꼴을 볼 뻔했다.

그 비통함을… 눈부신 황금빛의 성인께서 막아주셨다. 끔찍한 마검으로부터 해방해주셨다.

"아……."

그리고 이렇게.

"소연아……."

"아빠?"

제 딸을 다시 붙잡게 해주셨다.

"아빠!"

일본 도쿄의 병원. 꽃다발의 꽃내음이 나풀거리는 1인실에서 천지호는 자신의 딸을 4년 만에 안아보았다.

"아빠, 아빠… 아빠……."

꽉 끌어안은 무게감이 4년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아이의 성장이 실감 됐고, 그 긴 세월 동안 아이와 함께해주지 못한 것이 죄스러웠다.

"다… 끝났단다. 이제, 괜찮아."

"응… 다 끝났어."

부녀는 한동안 서로를 부덩켜 안고 오랫동안 여운을 느꼈다.

"이제 어쩔 거야?"

"사죄할 방법을… 찾아야겠지."

천지호는 자신의 육신이 지배당하는 동안 벌인 모든 일을 기억했다.

그 전의 역대 마인들의 비통에 찬 절규의 기억도…….

"만신전에 귀의해서… 그분을 도울 길을 찾아볼까 하구나."

"어, 그건 안 되는데……."

"소연아?"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은 딸의 대답에 고개를 기웃거리는 지호.

"난 이미 신의 선택을 받았어. 거스름돈으로 신의 권능을 사용하는 걸 허락받았고. 그러니까 아빠는 길드로 돌아가. 가서 길드의 후계자 자리를 다시 돌려받아야지."

"내가 어찌……."

"만신전에는 내가 있을게. 아빠는 가서 후계자로서 신검 길드의 지원을 끌어내 줘."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이야 길드장인 천진수의 직계가 천소연 뿐이었으니 자연스레 후계자가 된 셈이다.

본래라면 천지호가 차기 후계자를 잇는 게 맞았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딸의 지극히 논리적인 주장에 사심이 들어간 기분이 드는 것은.

"아빠는 돌아가서 할아버지한테 후계자 수업을 들어. 난 아빠가 잘해낼 거라고 믿어."

"그, 그래. 그런데… 그것뿐이니?"

"그것뿐이라니?"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분명 동공이 흔들렸다. 얼굴도 살짝 붉어진 것이 의아할 정도다.

'기껏 돌아왔는데.'

4년 만에 돌아온 아빠와 헤어져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천지호는 씁쓸한 기분을 삼켜야만 했다.

* * * *

레온은 천지호의 병문 앞에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의 부녀가 해후하는 일이다. 그 자리에 끼어들 정도로 낭만이 없지는 않다.

잠시 부녀상봉을 기다리는 사이, 복도에서 한 노인이 다가왔다.

"사자심왕 폐하."

"아들의 병문안이냐?"

"그렇소. 요 며칠 계속 이곳에 있었지."

발걸음의 주인공은 신검 길드의 길드장 천진수. 천지호의 아버지이자 천소연의 할아버지 되는 이다.

"그러는 폐하는 어쩐 일로 왕림하셨소."

"뒷처리가 필요해서 말이다."

레온은 한때 마검의 숙주가 되었던 천지호를 살피러 왔다.

그의 몸속에는 마검이 새겨둔 전대 마인들의 검술과 영혼이 새겨져 있다.

영혼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만큼 마모된 넋에 가까운 존재지만, 이 세계에서는 자신 정도가 아니면 혼을 정화하기도 어려울 테지.

"과연, 다른 마검사들의 혼들도 있단 말이오."

"적당한 사제에게 맡길 일이나, 공교롭게도 이 세계엔 혼을 인도해줄 사제가 적으니 말이야."

덕분에 귀하신 몸이 직접 납시었다,

"……."

천진수는 레온을 향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레온은 이 노인이 저의가 없음을 알고 내버려 두었고.

서서히.

고목 같았던 뻣뻣한 허리가 숙여진다.

"감사하오. 아들이 은혜를 입고, 손녀딸이 은혜를 입었네. 가문 전체가 폐하의 은덕을 보았소이다."

신검 길드장.

한국제일검이자 최강의 헌터.

천진수는 그 평생의 공로로 뻣뻣하게 허리를 펴고 다니던 꼰대 중의 꼰대다.

하지만 그는 눈앞의 이 어려 보이는 청년에게 허리를 숙이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돕겠소."

"민초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다."

레온은 이 군인도, 기사도, 귀족도 아닌 신분의 사내에게 단 한 가지만을 바랐다.

"악의 준동이 계속되고 있으니 그것을 경계하고 증오하라. 그것이 세상을 지키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그야… 당연하지 않소."

"그 당연한 것을 못해 숱한 세계가 멸망했다. 삿된 것들의 달콤한 유혹을 가벼이 여기지 마라."

"……."

살육대공 토벌전이 끝난 직후 천진수는 이 남자에 대해 모든 걸 알아보았다.

생전 보지도 않던 윱튜브도, 정부 관계자들이 정리한 정보도, 오랜 친구인 오강혁 협회장에게서도.

천진수가 알게 된 레온이라는 남자는 끝없는 전쟁의 역사였다.

홀로 세계에 남은 생존자. 수백 년 동안 악과 맞서 싸운 최후의 보루.

그의 용서 없는 손속은 그가 얼마나 처절한 싸움을 계속해왔는지에 대한 증거다.

비록 이세계의, 중세의, 판타지의 계급주의 기사왕일지라도.

악에 대한 그의 전력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좋네! 내 지금부터 폐하를 형님으로 모시겠소!"

"뭣이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천진수의 말에 레온도 조금은 당황했다.

"우리 세계에는 도원결의라 하여 대업을 위해 형제결연을 맺는 경우도 있소! 내 관우 하리다! 형님이 유비 하시오!"

"허허……."

레온은 이 당돌한 노인네의 말이 기가 찼지만, 헛웃음이 나올 정도는 되었기에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짐과 의형제를 맺기에는 네 녀석의 신분이 미천할 진대."

"내 이래 뵈어도 천씨 가문 37대손이오. 우리 가문이 고려 시대에는 귀족이었고 조선 시대에는 사대부였네. 양반이었다 이 말이야."

조선시대 명문가면 중세 기준으론 귀족급은 되지 않겠느냐며 우겨대는 천진수. 그가 덧붙였다.

"앞으로 악마에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협력하겠소. 나와 형님이 힘을 합친다면 이 땅 위에 악마는 감히 침범하지 못하겠지!"

"개종하고 신앙을 받아들여라. 만신의 신앙을 가진 이들이라면 누가 되었든 짐의 형제요 자매다."

"거 형제 범위가 좀 넓소?"

천진수가 호탕하게 가슴을 치며 말했다.

"걱정 마시오. 우리 길드원은 남김없이 죄 개종하라고 할 테니. 관련 계열사들까지 합하면 숫자가 좀 되겠군!"

좀 뜻밖의 이유로 천진수의 지원을 약속받았지만 나쁠 거야 없었다. 노쇠한 그지만, 그 강함은 어지간한 왕국 기사단장 이상.

'퀘스트만 잘 수행해낸다면 성배기사의 자리를 노려볼 수도 있겠지.'

물론 그것은 천진수가 올바른 신앙을 깨우쳤을 때일 것이다. 레온은 그가 가지게 될 신앙을 기대하며 잠시 가족의 해후를 피해 병원을 나왔다.

────!!

그때였다. 아공간 속에서 요동치는 성물의 기운. 성검이나 성창, 성배가 아니다.

꽤나 제멋대로이며 잔혹하기까지 한 사나움을 가진 성물이라면 단 하나.

"오라."

아공간이 열리며 그 안에서 웬 책 하나가 떨어진다.

두꺼운 장정, 잘 무두질 된 고급 가죽은 수제작의 흔적이 돋보인다.

그 표지의 가죽에 새겨진 제목은 이 지구에서는 단 한 명만이 읽을 수 있는 이계의 언어.

책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농노로 거인을 잡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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