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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4

124화 잡음

124화 잡음

“다들 축제 준비에 한창인데 이렇게 둘이 농땡이 부려도 되는지 몰라?”

엘리샤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달빛나무 축제일. 은월섬의 모든 이들이 가장 행복해지는 날이다.

“지금이 아니면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가 없으니까요. 이유는 당신이 더 잘 알고 있겠죠, 엘리샤.”

“미안해. 나의 첫 제자가 이렇게 뛰어나다는 걸 자랑하다 보니 그만······.”

카인은 조금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엘리샤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최근 쿠훌린, 벨락, 라이칸을 비롯한 은월섬의 많은 사람이 그의 훈련을 보러 왔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존재는 스카자하였다. 스카자하의 눈빛은 카인에게는 난해한 숙제와도 같았다. 그녀는 늘 연구 대상을 관찰하는 듯한 시선으로 카인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것은 카인이 자신도 모르는 새 더욱 단단한 가면을 꺼내쓰도록 만들었다.

“아, 알았으니까 그렇게 무서운 표정 좀 하지 말······ 아악! 제, 제발 그 돌 꺼내지 마! 알았어! 알았다고! 내, 내가 적당히 둘러대서 못 오게 할 테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쿠훌린과 스카자하가 당신 말을 들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 그렇긴 한데······.”

카인은 품 안에 넣었던 손을 천천히 다시 꺼냈다. 엘리샤는 바보처럼 어리숙하게 굴지만 저것이 그녀의 본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카인은 알고 있었다. 예리하고 눈치가 빠른 여자다.

또한 카인은 은월섬에서 ‘모르가나의 돌’을 꺼내 보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 섬에는 모르가나의 혼돈을 감지할 만한 존재가 있으니까.

“내가 제국으로 갈 생각이라는 것은 알고 있죠?”

“아. 단장에게 들었어. 아르카넘 홀에 입학하고 싶다고. 그런데 왜 제국으로 가려는 거야? 그리고 아르카넘 홀은 왜.”

“당신도 함께 가줘야겠어요. 엘리샤.”

엘리샤의 눈이 커다래지며 놀란 토끼처럼 변했다.

“왜, 왜?”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빌어처먹을! 이제야 짐승 새끼한테서 해방되는가 했는데! 드디어 자유를 쟁취하는구나 싶었는데 왜애애애······! 아, 미안. 그냥 혼자 중얼거린 거야.”

머리를 쥐어뜯으며 발광하던 엘리샤는 카인의 사나운 눈빛을 보자마자 태세를 전환했다.

“그런데 나도 함께 가자는 건······ 서, 설마 나도 아르카넘 홀에 입학하라고?”

“그럴 리가요. 당신 나이면 학생이 아니라 학부모가 더 어울릴 텐데요.”

엘리샤가 쩌억 입을 벌렸다.

“하, 학부모라니!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카인 너, 너 설마 내가 몇 살인 줄 알고······!”

“라이칸보다 연상 아니에요?”

“그게 무슨 소리야! 그 겉늙은 인간보다 내가 연상으로 보여? 노, 농담하는 거지? 그치? 제발 그렇다고 해 줘······.”

“당신은 제국에 머무르며 나를 위해 움직여줘야겠어요. 아무래도 나는 학교에 묶인 몸이니 행동에 제약이 있을 테죠. 방학 기간이 아니면 먼 거리를 움직이지도 못할 거고요.”

제국은 넓지만 폐쇄적이다. 제국 신민이 아닌 자는 절대로 허가 없이 제국 땅을 밟을 수 없다.

실제로 카인은 모르가나의 마법진을 빠져나온 후 홀로 제국을 찾아갔었고, 그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런데 그건 좀 어려울걸? 제국은 함부로 외부인을 들이지 않아. 어느 정도냐면 왕국의 귀족들도 미리 허가를 받지 않으면 문전박대당한다고 들었어.”

“아르카넘 홀의 입학 신청 기간에는 검문이 다소 느슨하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그것도 어느 정도 신분이 증명된 이들에게나 그렇지. 귀족이나 뭐, 부유한 상인 같은 자들 말이야. 그러니까 아르카넘 홀의 재학생 중 대부분이 그치들의 자식인 거고.”

“아르카넘 홀에 대해 제법 잘 알고 있는 것 같네요?”

엘리샤가 어깨를 으쓱했다.

“대륙에서 용병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이것저것 듣는 게 많은 법이지. 아, 하지만 걱정 마. 입학 신청은 단장이 어떻게든 해 줄 테니까. 입학시험 난도가 꽤 높다고 들었지만 뭐, 너라면 분명 합격이겠지.”

‘그야 이 미녀 천재 마법사 엘리샤 님의 제자니까!’ 라고 외치며 엘리샤가 깔깔 웃었다.

“아무튼 네가 말한 건 방법을 찾아볼게. 어차피 불가능하다고 해봐야 먹히지도 않을 테고. 흠, 제국에서 활동할 방법이라. 어떻게 해야 하지? 가짜 신분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방법을 찾는 건 당신의 일이에요. 나는 결과만 보고 이후의 행동을 결정할 테니까.”

카인이 다시 품에 손을 넣는 시늉을 하자 엘리샤가 기겁했다.

“으으······! 알았어. 알고 있다고!”

두 손을 내저으며 신음하던 엘리샤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루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니?”

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너는 못 느꼈어? 루나가 엄청 기분 좋아 보이던데? 간밤에 무슨 행복한 일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글쎄요. 루나는 늘 웃는 얼굴이니까.”

“아니야. 분명 뭔가가 있어. 냄새가 난다니까? 내 코가 무언갈 감지했다고. 킁킁.”

***

세실은 당황했다.

“케. 케일라. 왜.”

조금 전, 세실은 트리스탄과 케일라에게 자신의 성별을 밝혔다. 트리스탄의 반응은 충격과 경악이었다. 그는 놀란 얼굴로 큰 소리를 지르다가 새빨갛게 얼굴을 붉혔고, 이후 세실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나 케일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세실을 빤히 바라보며 묘한 흥미를 드러냈다.

“케일라.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면 세실이 어색해하잖니.”

루나의 말에 케일라는 살짝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다.

세실은 친구들과 함께 축제에 필요한 물건들을 달빛나무 언덕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이제 우리도 성년이야! 당당히 한 사람 몫을 해낼 수 있다고! 아하하하!”

루나는 오늘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왜일까. 어제 카인과 단둘이 나눈 이야기 때문에?

궁금증이 인 세실은 슬쩍 루나에게 물어봤다. 루나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웃으며, 나중에 이야기해 주겠다고 했다.

사실 이유는 아무래도 좋았다. 세실은 루나가 즐거워 보여서 기뻤다. 며칠 전, 세실이 제국으로 떠나겠다고 했을 때 루나의 표정은 일순 굳어졌었다. 데미안이 말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가겠어. 제국으로.’

데미안의 제국행 결정은 세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긍정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세실은 루나가 신경 쓰였다. 루나는 우리의 결정을 어떻게 생각할까. 제국으로 떠나겠다고 말한 나를 원망하지는 않을까.

그러나 지금의 루나는 그저 순수한 행복에 빠져 있는 소녀처럼 보였다.

“앗! 디네베. 너 왜 그렇게 많이 들고 있어? 이리 줘. 그런 건 이 힘센 언니가 들어줄게!”

“키만 보면 디네베가 언니 같은데. 아니, 정신연령도.”

“야! 트리스탄!”

루나가 손에 든 긴 막대기를 붕붕 휘둘렀다. 트리스탄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잽싸게 도망쳤다.

“너 거기 안 서!”

“서면 때릴 거잖아!”

아웅다웅하는 두 친구를 보며 세실은 웃었다. 그러다가 묘한 느낌이 들어 옆을 돌아봤고, 케일라와 눈이 마주쳤다.

케일라는 또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왜인지 한기가 느껴진 세실은 꼬옥 앞섶을 오므렸다. 그러자 케일라가 칫! 혀를 찼다.

“카인 녀석. 이제 오네.”

데미안의 말대로, 저만치에서 카인이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야 카인. 너 일부러 농땡이 피운 거지. 일하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니야 데미안. 정말로 엘리샤와 급히 할 이야기가 있었어.”

싱긋 웃은 카인이 적당히 짐을 나눠 들었다.

“디네베. 그거 이리 줘. 루나도.”

.

.

.

달빛나무 언덕에서는 행복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올해는 리아논의 건강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은은하게 빛나는 달빛나무 주위에는 다양한 먹거리가 가득했고, 루나는 디네베의 손을 꼭 잡고 쉴 새 없이 뛰어다녔다.

그 사이, 세실은 자신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루나를 따라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오늘따라 데미안보다 루나가 더 신경 쓰였다. 세실은 잠시 디네베 쪽으로 눈을 돌렸다. 트리스탄의 말대로 디네베가 언니처럼 보인다. 불과 일 년 사이에 어떻게 저렇게 성숙해질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케일라는 트리스탄을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세실과 눈이 마주치자 츄릅,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밤이 찾아왔다.

“곧 시작이야!”

루나의 목소리가 언덕 위의 공기를 울렸다.

세실은 데미안, 루나, 디네베, 카인, 트리스탄, 케일라와 함께 모여 앉아 있었다. 그중에서도 세실은 루나의 옆자리였다. 루나가 계약을 들먹이며 자기 곁에 있으라고 말했기 때문인데, 마침 세실도 루나가 신경 쓰였기에 순순히 그 말을 따랐다.

‘달이 평소보다 커 보여.’

‘맞아 데미안. 오늘이 일 년 중 달이 가장 크게 뜨는 날이야. 그래서 달빛나무도 평소보다 환하게 빛나는 거고.’

작년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보름달이 천천히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달빛나무 언덕에 모인 모든 이들이 기대에 찬 눈으로 밤하늘을 바라봤다. 달이 높이 오를수록 달빛나무의 은빛은 더욱 강렬해졌다.

‘루나. 저기 매달린 게 달빛나무 열매야?’

‘저건 달빛누에의 집이야. 달빛누에는 탈태할 시기가 다가오면 입에서 실을 뽑아 집을 지은 뒤 그 안에 숨거든.’

‘탈태?’

‘응, 탈태. 껍질을 벗고 다시 태어나는 거야. 지금 고치 안에는 달빛누에가 잠자고 있어. 머지않아 깨어날 거야.’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세실은 조금 놀랐었다.

언젠가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것을 탈태라고 불렀지.’

밤하늘에 피어오르는 뽀얀 빛은 꿈속의 풍경처럼 신비로웠다. 고치에서 빛이 터져 나오자 주변이 함성과 감탄으로 가득 찼다. 조용히 소원을 비는 부드러운 목소리도 들렸다.

루나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푸르르······. 푸르르르······.

달빛누에나방들이 날개를 활짝 펼치며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밤하늘에 펼쳐진 축제의 향연이 머리 위의 세상을 밝혔다. 나방들의 날갯짓에 맞춰 다시 한번 함성이 울렸고, 루나의 웃음소리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그리고, 세실은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명확히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루나의 웃음소리에 어떤 묘한 파동이 잡음처럼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달빛누에나방의 빛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하늘도 어두워졌다.

그리고.

푸르르! 푸르르르르르······!

수많은 광채가 하늘을 밝혔다. 탈태를 마친 나방들이 허공 위로 환상적인 자줏빛 무늬를 그렸다. 세실은 그 아름다운 광경에 몰입했다.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저 하늘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루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하얀 손과, 찬란한 은빛 머리카락과, 투명한 복숭앗빛 입술 위로 자줏빛 가루가 춤추듯 내려앉았다.

“와아······!”

루나의 입에서 경탄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목소리에는 순수한 기쁨과 경이, 그리고 다른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세실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루나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다. 그런데 왜, 루나는 울고 있는 것일까.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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