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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5

124. 도프 비자인 외전

한 사내가 온갖 잡목으로 뒤덮인 산길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덩굴이 막아서거든 자신의 낡은 단도를 휘둘러 길을 내면서 가파른 산을 평지 걷듯 성큼성큼, 나아갔다.

아들을 독립시키고 떠나온 도프 비자인은 몇 주일에 걸친 강행군 끝에 폐허가 된 마을에 도착했다.

고향이다. 그가 태어나고,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마을이었다.

도프 비자인은 마을을 둘러보기 전에 먼저 부모님들의 묘지를 찾았다. 하지만 그곳은 아무리 많은 양해를 구하더라도 묘지라 칭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야트막하게 파인 넓은 구덩이에 풍화된 뼛조각들이 흙을 헤치고 삐죽이 나와 있었다. 빗물에 흙이 쓸려간 것이다.

도프 비자인은 한숨을 내쉬면서 뼛조각들 위로 자라난 잡목을 뽑아내었다.

이것이 부모님들을 위해 당시 우리가 할 수 있던 최선이었다. 폐허가 된 마을을 뒤져 삽을 하나 찾아낸 그는 부모님들을 흙으로 덮어드리며 ‘그날’을 떠올렸다.

+ + +

“여기 앞에 서려무나. 빨리.”

어머니가 싸움을 나간 아버지를 대신해 아들을 위한 제단을 준비했다. 황망하게 서두르는 그녀의 손놀림에는 여유가 없었다.

“바르바토스 님이시여. 여기 당신의 신도가 있나이다. 부디 이 공물을 받으시고…”

어린 도프는 불안해하면서도 어머니가 올리는 제사상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 기도가 끝나기가 무섭게 물었다.

“엄마. 전 바르바토스 님의 신도가 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의 팔에는 바르바토스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지만, 신도로 인정받는 제사는 성년에 행하는 게 비자인 부족의 관습이었다.

어머니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아들의 손을 붙들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마을은 소란스러웠다.

어디선가 불화살이 날아와 마을을 불태우고 있었고, 밖에서는 아버지들의 고함과 비명이 들려왔다. 마을의 아낙네들은 제 자식을 숨기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어머니는 장독을 찾았다. 짜디짠 간장에 사냥한 고기를 넣어 절이는 곳이었는데, 그녀는 탁자만 한, 바위로 된 장독 뚜껑을 무슨 힘이 났는지 혼자 열었다.

“엄마?”

도프가 한 말이 아니었다. 장독 안에는 이미 소년들이 숨어 있었다. 그들은 제 어미가 돌아온 줄 알고 고개를 들었다.

꼴이 가관이다.

간장에 절여져 까맣고, 간장에 동동 떠오른 얼굴에 고기 조각이 잔뜩 묻어있었다.

평소였다면 친구들의 모습에 웃었으리라. 허나 도프도 곧 그 꼴이 날 예정이었고, 소년도 이를 자각해버렸다.

“아들아, 여기 숨어 있으렴. 절대, 절대로 나오면 안 된다. 엄마가… 엄마가 열어줄게.”

도프는 장독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누가 그렇겠는가. 하지만 난장판이 된 마을과 어머니의 애절한 말투에 그는 순순히 장독에 발을 담갔다.

조금 차갑다.

땅 깊이 묻힌 장독은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장독이라 부르는 것이지 실은 커다란 바위를 깎아 만든 것이었다.

– 드르륵.

도프가 이 상황에 어찌 적응하기도 전에 뚜껑이 닫혔다. 어머니가 사라진 칠흑 같은 어둠 속, 도프는 잘못하면 여기서 익사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장독 내부에는 붙잡을 만한 것이 없었다. 바닥은 소년이 까치발을 들어도 닿지 않았다. 다행히 미끄덩거리는 고기들이 소년들을 떠받혀주었다.

“세상에, 우리 이러다가 간장에 절여져서 영영 까매지는 건 아니겠지?”

한 소년이 말했다.

어두웠지만, 목소리 덕분에 도프는 그가 ‘우반’이라는 친구임을 알아차렸다.

상황의 심각함을 인지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치기 어린 소년의 발랄함인지, 그는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음에도 계속 떠들었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그 덕분에 차가운 간장에 떠 있는 시간이 괴롭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다른 소년들도 간간이 입을 열었다.

자기가 누굴 좋아하고 있었다던가, 자기도 모르게 훔친 게 있는데 그걸 아직도 돌려주지 못하고 있다는 등의 고백이었다.

도프는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고, 나중에는 모두가 지쳐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어떤 소년이 울음을 터뜨렸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우반이었던 것 같다.

나중에는 다 같이 울어버렸으니 누가 가장 먼저 울었느냐를 따지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 드르륵.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뚜껑이 열렸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준 사람은 입술이 파랗게 질린 다섯 소년이 모르는 사람이었다.

바깥은 그새 밤이 되어 있었는데, 달빛이 비친 것인지, 그 중년 남성의 옷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뚜껑을 연 사내는 멈칫, 굳어버렸다. 간장에 새카맣게 절여진 어린 얼굴들. 다섯 쌍의 순박한 눈동자가 그를 찔렀다.

“……”

– 드륵.

잠시 장독을 내려다보던 그는 말없이 뚜껑을 닫았다. 완전히 닫지는 않고 팔이 삐져나올 정도는 남겨두었다. 이걸 닫아버리면 소년들은 저 안에서 죽어버릴 것이다.

도프와 소년들은 독 안에 든 생쥐가 되어 찍소리도 내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저자가 아버지들이 맞서 싸우러 나간 사람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때, 바깥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코린 대장님. 끝났습니다. 저항하는 이들은 모두 죽였습니다. 남은 건 부녀자들인데… 안타깝게도 모두가 그릇된 신을 섬기는 이들입니다.”

“…어쩔 수 없군요. 모두 죽이세요. 그것이 교회의 뜻이니…”

“알겠습니다. 그런데 대장님 뒤에 그것은 무엇입니까?”

“별것 아닙니다. 고기를 저장하는 장독으로 보입니다.”

“고기요? 병사들이 좋아하겠군요. 제가 병사들에게 고기들을 꺼내라고 이르겠습…”

대장이 딱 잘라 말했다.

“그러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부덕한 신을 믿는 자들이 어떤 힘을 부리는지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들이 만든 고기를 먹었다가 탈이 날까 두렵습니다.”

“그것도 그렇겠군요. 사제님과 성전사님들은 괜찮은 것 같지만 병사들은 곤혹을 치렀으니… 아직도 코피에 놀란 병사들이 많습니다. 축복을 받으니 나아지기는 했는데…”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점차 멀어져갔고, 곧이어 비명이 날아와 장독을 왱- 울렸다.

소년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참지 못하고 누가 나가려 하거든 붙잡아 말리고, 붙잡았던 소년이 울분을 터뜨리거든 다른 소년이 입을 막았다. 분노하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말렸다.

우리는 비겁했다. 자신의 비겁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장독 안에서 꼬박 하루를 보낸 소년들이 쪼글쪼글 절여지고 지친 몸으로 밖에 나왔을 때는 마을이 완전히 불탄 폐허가 되어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소년 다섯 명, 그들이 유일했다.

+ + +

도프 비자인은 봉분을 높게 쌓아 올렸다. 당시 부모님들을 묻겠다고 얼마나 애를 썼던가.

다섯 소년은 최대한 땅을 파고, 수백 구에 달하는 시체들을 옮겼으나 역부족이었다.

다 큰 성인의 몸을 옮기는 건 소년에게 중노동이어서 탈진하고 일하고를 반복하는데 설상가상, 더운 여름이라 시체가 썩기 시작했다.

부패한 시체는 잡기조차 어려웠다. 쥐거든 진물이 뚝뚝 배어 나오며 사지가 뜯어졌고, 소년들은 이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무수하게 깔린 시체들의 썩은 악취가 진동하는 가운데 소년들은 맹세했다. 부모님들을 죽인 그 하얀 악마들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놈들에게 기필코 복수하겠노라고…

“휴우.”

이제야 묘지라 부를 만한 봉분 앞에서 도프 비자인이 절을 올렸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며 마을로 돌아왔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는 엉망이 된 마을을 청소하면서 버려진 뼈가 있거든 공터로 옮겼다.

화장(火葬)하기 위해서다.

비자인 부족은 화장을 하지 않았다. 화장하는 장례 풍속은 데모스 마을에서 배운 것이었고, 당시 우리는 이걸 몰랐다.

도프 비자인은 조용히 뼛조각들을 모아나갔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부모님의 집이었을 거라 생각되는 폐가에서 아흐레를 머물다가 떠나기 직전에 불을 질렀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길을 보면서 그는 아내를 떠올렸다. 재작년에 죽은 아내도 이렇게 화장을 했다.

– “얘! 넌 누구니? 누군데 우리 마을 근처를 돌아다니는 거야?”

아내와의 첫 만남.

그녀는 어린 도프에게 구원이었다. 그녀의 싱그러운 미소가 그를 복수의 소용돌이에서 꺼내주었다.

몇 년의 시간이 흘러 청년이 된 소년들은 데모스 마을 근처의 산에 머무르며 절망에 빠져 있었다.

세상은, 정말 넓었다.

비자인 부족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대륙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고, 그들의 원수는 십자교회라는 엄청난 종교집단이었다.

야만인 청년 다섯 명이 어찌해볼 수준이 아니었다.

먹고살기도 힘들어 그들은 데모스 마을 근처의 산에 통나무집을 만들고 사냥을 했다.

사냥에 특출난 재능을 보인 도프는 은연중에 대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가끔 홀로 산에서 내려와 주변을 정탐하며 정보를 모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소녀를 만났다. 산 아래 평원에서 약초를 캐던 그녀에게 도프는 처음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소녀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녀는 짐승 가죽으로 만든 도프의 옷을 신기해했고, 낯선 이방인을 자신만의 비밀 친구로 여겼는지 마을 또래들에게는 밝히지 못할 속내를 떠들어댔다.

미소가 항시 걸려있는 그녀에겐 그늘이 없었다. 도프는 그 미소를 볼 때마다 자신의 상처가 덜어지는 느낌을 받아서 ‘정탐’하러 내려오는 경우가 잦아졌다.

“우리 엄마 아빠는 빵집을 하셔! 우리 집 빵이 얼마나 맛있는 줄 알아?”

“…빵이 뭔데?”

“뭐어? 농담하는 거지? 빵이 뭔지 모른단 말이야? …세상에. 너 잠깐만 기다려봐.”

문명의 혜택을 받은 소녀는 그에게 빵을 가져다주었다. 부드러운 식감의 음식을 난생처음 맛본 도프의 눈이 똥그래졌고, 소녀는 뿌듯하게 웃었다.

“내가 캐가는 약초가 들어간 거라 몸에도 좋아! 마을에서 제일 잘 나가는 빵이 바로 우리 집 빵이야!”

“빵집 하나밖에 없다면서.”

“…그걸 꼭 짚어야겠어? 그래서 맛없어? 맛있잖아.”

도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빵은, 눈물이 날 정도로 부드럽고 맛이 있었다.

허나 두 사람의 만남은 지속될 수 없었다. 친구들은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슬슬 이곳을 떠나 신성 왕국을 향해 가고자 했고, 도프와 달리 여전히 복수에 미쳐있었다.

“배신자!”

조악하게 지어진 통나무집에서 우반 비자인이 소리를 질렀다. 도프를 손가락질하며 다른 청년들을 선동하듯이 외쳤다.

“도프, 넌 배신자야! 우리의 맹세를 잊어버렸어? 여기에 혼자 남겠다니,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미안해.”

“미안? 네가 미안해야 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부모님이야! 우리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데, 고작 여자애 때문에… 퉷! 더러운 놈!”

도프는 뺨으로 흘러내리는 침을 닦아내며 침울하게 말했다.

“…때리고 싶으면 때려.”

“내가 못 때릴 줄 알아? 얘들아, 내가 말했지? 얘는 대장 노릇을 할 놈이 아니었다니까.”

우반이 득의양양하게 말하자 다른 세 명의 청년들은 상처받은 얼굴로 친구를 노려보았다.

도프 비자인은 구타당하면서도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

– 여자애 때문에.

우반의 말이 맞았다. 나는 그 여자애 때문에 복수를 포기한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십자교회의 신도였으므로 그에게 변명의 여지란 눈곱만큼도 없었다.

도프는 자책하며 친구들의 분노를 몸으로 받아내었다.

“꺄악! 너 얼굴이 왜 그래? 옷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그리고 다음 날, 도프는 그녀가 자주 찾아오는 초원 어귀에 처량하게 주저앉아 있었다. 통나무집에서 쫓겨나 밤새 이슬을 맞은 몸이 아침 바람에 부르르 떨렸다.

그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옷은 배가 보일 정도로 길게 찢어져 있었고, 가진 것도, 갈 곳도 없었다.

깜짝 놀란 소녀가 약초 바구니를 던져버리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녀가 얼굴을 매만지자 그제야 도프는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부모님들과 친구들에게 미안하지만, 얘를 두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

“어, 어쩌면 좋아. 기다려봐. 내가 딴 약초를 바르면 금방 나을 거야.”

소녀는 허둥지둥, 방금 던져버린 약초 바구니를 주우러 달려갔다가, 약초 찧을 것을 찾는지 바닥을 잠시 헤매었다. 눈에 들어온 돌멩이가 없어서 쓰디쓴 약초를 입에 넣고 꼭꼭 씹었다.

퉤– 하고 약초를 뱉어낸 그녀는 바짝 다가와 그의 얼굴을 매만졌고, 도프는 그런 소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반듯한 이마가 코에 닿을 정도로 가깝다. 빗질하지도 않았는데 하얗게 길이 난 정수리가 단정하고, 동그란 귓바퀴에 얇은 솜털이 뽀송뽀송하게 돋아나 있었다.

사랑스럽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근심하는 소녀의 뺨을 감쌌다. 그녀의 반듯한 이마와 푸석푸석, 제멋대로 자란 머릿결 사이에 입을 맞추었다.

이마가 빨갛게 달아오며,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너 무슨 일 있었구나?”

“아니, 아무 일도.”

두 사람은 서로의 뺨을 감싼 채 마주 보았고,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며 어린 아내를 떠올리던 장년의 도프 비자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화장이 끝났다.

그는 다시 짐을 꾸리고 폐허가 된 마을을 떠났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을 하나 끝마쳤기에 그의 걸음은 올 때보다 가벼웠다.

북서쪽, 제롬 신성왕국을 향해 꾸준히 걸어가면서 그는 아들을 생각했다.

아내가 남긴 보물은 정말 잘 자라주었다. 불우한 가정환경에서도 아들은 반듯하게 자랐고, 그건 레나라는 여자애 덕분이었다.

아내는, 자살했다.

마을 사제의 반대를 뚫고 어찌어찌 결혼한 두 사람은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친구들이 통나무집을 떠나고 없었기에 한동안은 아내와 함께 그곳에서 살았다. 엉성한 통나무집을 산장으로 개조해가면서.

결혼한 이듬해, 아내가 임신했다.

임산부가 외딴 산장에 있을 수는 없었으므로 그는 가죽들을 팔아 데모스 마을에 집을 마련했다. 아들을 낳은 아내는 아들에게 ‘레브(Lev)’ ─ ‘마음’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행복한 나날이었다. 단 하루도 행복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아들이 배냇짓하고, 몸을 처음으로 뒤집고, 기고, 걷는 모습을 모두 보았다. 소년이 되어가는 아들에게 방을 마련해주고자 아비는 더욱 열심히 사냥했고, 이런 나날이 계속되기를 바라며 사냥감의 심장과 머리를 묻으며 기도했다.

“…바치나이다. 부디 이 공물을 받으시고 우리 가족이 바르바토스 님의 은총 아래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그런데 언제부턴가 아내가 조금씩 이상해졌다. 그녀는 아침마다 땀에 흠뻑 젖어 일어났다.

“무, 무서운 꿈을 꾸었어요.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소름 끼치는 형상으로 나타나 제 귀에 무어라고 속삭였어요.”

그 이후로 아내는 교회에 자주 나갔다. 전에는 주말에만 가던 것을 이제는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아내가 그가 모시는 바르바토스 님에 대해 뭐라고 하지 않듯이, 도프도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원망스러운 십자교회를 용서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소스라치게 놀라며 새벽에 깨어나기를 일 년, 삼 년, 십 년이 반복되면서 그녀는 집안일을 내팽개치고 교회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고, 그러던 어느 날, 사냥하고 돌아온 도프는 아들이 가난한 레나네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아내가 하나뿐인 아들에게 밥도 해주지 않는 것이다.

“당신!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도프는 처음으로 아내에게 소리쳤으나 그녀는 차분하게 말했다.

“여보, 전 깨달았어요. 밤마다 들려오는 목소리… 그건 신의 음성이었어요. 제가, 제가 성녀가 된 게 분명해요!”

말투는 차분했으나 그녀의 눈동자에는 광기가 깃들어 있었다.

도프는 없는 말솜씨로 간절하게 설득했지만 아내는 교회에 나가기를 멈추지 않았다.

사태는 점차 심각해졌다. 그녀는 자신이 성녀라 부르짖기 시작했다. 마을 교회에 비치된 신물 앞을 어슬렁거리며 떠나려 하지 않아서 교회의 제사를 방해하기 일쑤였다.

마을 사람들이 억지로 떼어내려 하거든 공포에 질려 발버둥 쳤다. 신물을 붙들곤 “제게 왜 이러시는 거예요!”라며 조금 제정신인 얼굴로 울어버렸다.

아내는 결국 미친년 취급을 받으며 교회 출입이 금지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더욱 빠르게 폐인이 되어, 나중에는 산발한 머리로 “내가 성녀다! 내가 성녀라고!” 외치며 교회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 모습에서 싱그러운 미소를 가진 빵집 소녀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행히 아들은 건강하게 자랐다. 소꿉친구인 레나가 그의 손을 꼬옥 붙잡고 이리저리 먹거리를 구하러 다닌 덕분이었다. 하지만 자신처럼 말수가 없어지는 아들을 보면 도프는 가슴이 아팠다.

“…바르바토스 님, 제발, 제발 우리 가족을 구원해주소서.”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자살했다. 그녀는 남편이 만들어둔 올무를 가져다가 교회 앞에서 목을 매달았다.

딱딱하게 굳은 아내는 어쩐지 서글피 웃는 얼굴이었다. 손에는 그가 선물한 손거울이 쥐여져 있었다.

– “내가 예쁘다고? 헤헤… 고맙긴 한데, 너는 여자 보는 눈이 없구나.”

이 말에 반박해주려고 큰맘 먹고 사준 거울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예쁜지, 미소가 얼마나 싱그러운지 알려주려고 사준 선물이다.

“아아.. 아아아악! 이 개자식들아! 이게 네놈들의 신이 하는 짓이냐!”

도프가 교회를 향해 외쳤다. 몰려든 마을 사람들과 놀라서 달려온 사제, 수도사들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데, 아들이 보였다. 레나와 함께 교회로 달려온 아들은 어머니의 시신을 보고 얼어붙었다.

“가자! 이런 더러운 곳에 두 번 다시 오지 않겠다!”

도프는 나란히 선 레나에게서 아들을 떼어냈다. 아내의 시신을 수습해 집으로 돌아온 부자(父子)는 말이 없었다.

다음 날 밤, 기어이 산장까지 아내를 업고 올라온 그는 그녀를 화장했다. 아들을 침대에 눕히고 문신을 새겼다.

울분이 맺힌 그는 말없이 자신과 똑같은 문신을 아들의 팔에 새겨넣었고, 바르바토스 님을 섬기는 제사상까지 마련하려고 했다.

그때, 아들이 말했다. 문신을 새기면서도 신음 한 번 뱉지 않던 아들이 작게 고백했다.

“…전 레나를 좋아해요.”

“……”

많은 뜻이 담겨있는 말이 도프를 강타했다.

미친 어머니를 둔 아들의 삶도 지옥 같았을 터였다. 그리고 그걸 구원해준 사람이 레나였음을 아비에게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나도 네 어머니를 사랑한단다.”

아내도, 지금 바깥에서 타닥타닥 타오르고 있는 아내도 그를 지옥에서 꺼내준 사람이었다. 최근 수년간 그와 아들에게 고통만을 주었지만, 그녀를 미워할 수 없었다.

결국, 도프는 들었던 양초를 도로 서랍에 집어넣었고, 부인과 어미를 잃은 부자가 타오르는 불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것이 재작년에 있었던 일이다.

도프 비자인과 레브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허나 아내가 사라진 일상은 전과 같을 수 없어서 도프는 그렇지 않아도 없는 말수를 더욱 줄였다. 아들도 집에서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도프는 아들에게 사냥을 가르쳤다. 전에는 따라오고 싶으면 따라오라는 듯이 내버려 두었지만, 이제는 은근히 같이 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난 이제 떠날 테니까. 저버렸던 친구들과의 맹세를 이행할 때가 왔다. 내 모든 것을 앗아간 십자교회에게 어떻게든 복수하지 않고서는 속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도프는 아들이 혼자서도 먹고살 만큼 자라거든 떠날 생각이었는데, 어느 날, 아들이 갑자기 산장에 왔다. 어딘가 슬픈 얼굴로 사냥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사냥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두 달간 아들을 관찰한 끝에 일찍 떠나도 좋겠다는 판단이 선 도프가 물었다.

“바르바토스 님을 어떻게 생각하니?”

아들이 싫다고 하면, 강요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레나라는 아이와 행복하게 살기를 빌며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사냥꾼이라면 마땅히 섬겨야 할 분이시죠.”

“…?”

아들은 마치 과거를 잊어버렸다는 듯, 묘한 맥락으로 이야기했다.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아들이 사냥꾼으로 살기로 마음먹은 것 같아서 기쁘게 제사상을 차려주었다.

애지중지 가지고 다니던 아내의 유품을 공양물로 삼았는데, 놀랍게도 신께서 응답하셨다.

손거울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되려 이제 다 잊어버리고 떠나라는, 신의 계시로 느껴졌다.

그는 아들이 육포를 잘 팔 수 있는지까지 확인한 뒤에, “잘 살아야 한다.” 말하고 여행을 떠났다.

근 이십 년 만에 고향에 들러 부모님들의 유골을 수습한 뒤, 제롬 신성왕국을 향했다. 죽으러 가는 길이나 다름없었지만, 그의 걸음에는 미련이 없었다.

신성왕국 국경에 거의 당도했을 무렵, 동행하던 상단주에게서 어디까지 가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신성왕국으로 넘어갈 계획이라고 하자, 자신들도 그럴 계획이니 계속 함께 가자고 하며 상단주가 허가증이 있느냐고 물었다.

관문을 통과할 허가증.

그가 깜박 잊어버린 것이 있었다. 도프는 야만인이지만, 데모스 마을의 처자와 결혼하면서 가이단 변경백의 영주민으로 편입되었다. 영주민이 허가 없이 관문을 넘지 못한다는 걸 잊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관문에 가서 “나는 야만인이라 신분증이 없소.”라고 말해봐야 통과시켜줄 턱이 없었다.

도프는 함께 가던 상단과 결별했다. 이대로는 관문을 넘지 못할 게 분명했으므로, 다시 데모스 마을로 돌아가 허가증을 받아와야 했다.

‘거기까지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는걸… 네비스로 가야겠다.’

모르긴 몰라도 수도에 가면 허가증을 받을 방법이 있을 터였다. 가이단 변경백이라는 귀족을 찾아가면 되겠지.

도프는 일단 근처의 산으로 들어갔다. 이미 추운 겨울이었고, 네비스까지 왔다 갔다 하려면 여비가 더 필요했으므로 작은 움집을 마련하고 겨우내 사냥을 했다.

봄이 찾아오자 그간 사냥한 육포와 가죽들을 팔았고, 초여름이 되어서야 네비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네비스는 이상한 곳이었다.

수도가 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곳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마치 사방에 덫이 깔린 듯한 위화감… 도프는 특히 성문을 통과하기가 정말 어려웠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드나드는 시민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게 뭐지?’

대로에서도 지그재그, 그는 누가 보면 혼자 미로를 걷는 사람으로 여길 정도로 조심스럽게 걸었다. 어렵사리 숙소를 찾아 실내에 들어서고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거기서 간단히 저녁을 챙겨 먹으며 내일 후계자 수여식인 ‘아키네’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숙소 주인장도, 숙박하는 상인들도 모두 들뜬 표정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키네를 구경하러 광장에 나온 도프는 끔찍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아수라장이라는 말조차 부족할 참극이 벌어졌고, 믿기지는 않지만 멀리 아들이 보였다.

“레, 레브야!”

거대한 검을 휘두르는, 민간인들을 학살하며 비릿하게 미소짓는 아들을 본 순간, 도프는 깨달았다.

저건 내 아들이 아니다. 레브임이 분명하지만, 전혀 다른 무언가에 씌어 있었고, 도프는 그게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창공에 거대한 나팔 문양이 새겨지고, 사방에 사람들이 덫에 걸린 듯 발버둥 치고 있었으니 알아차리지 못할 수가 없었다.

바르바토스 님이다.

신께서는 신도가 있음을 알리는 제사상에서 거울만 가져가신 게 아니었다. 내 아들도 가져가신 게 틀림없었다.

도프는 자기도 모르게 레브를 향해 달렸다. 아들이 사람을 죽일 때마다 짓는 미소가 똑똑히 보였고, 아버지의 가슴이 찢어졌다.

‘내, 내가 잘못된 신을 섬겼구나…’

자책하며 달려가던 그는 깜박, 덫을 밟았다. 무언가가 그의 머리를 강타해 기절했다가 일어나보니 광장에는 즐비한 시체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도프는 곧장 아들을 찾아다녔다.

중간에 덫에 걸린 사람이 있거든 도와주면서 사방을 돌아다니던 그의 눈에 아들이 보였다.

피에 절어 터벅터벅 걸어가는 아들. 도프는 아들을, 아니, 신(神)을 조용히 뒤따르다 이를 악물었다.

아들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 수많은 죽음에 책임져야 한다.

도프 비자인, 그로서는 생각나는 방법이 없었다. 미쳐버린 아내는 뭐라고 말해도 듣지 않았다.

그녀의 광기를 해소해준 건…

도프는 목매달아 죽은 아내가 지은 웃음이 떠올랐다. 그녀는 죽어서야 서글프게나마 미소지었다.

도프가 단검을 꺼냈다. 낮게 심호흡한 뒤 펄쩍 뛰어 아들의 목을 찔렀으나, 알고 있었다는 듯, 레브가 섬전같이 돌아서며 그의 팔과 가슴을 베었다. 아들이 무어라 말했으나, 쓰러진 도프에게는 어떤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기도를 올렸다.

“시, 신이시여. 아들을… 내 아들을 놓아주…”

소서.

도프 비자인의 삶이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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