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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5

125화 잊고 싶지 않은 이름

125화 잊고 싶지 않은 이름

겨울이 찾아왔다.

나는 요즘 마법을 훈련하고 있다.

기왕 아르카넘 홀에 입학하기로 했으니, 아예 마법학부로 들어가 아리엘과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볼 의도에서였다. 뭐, 그래봐야 아리엘은 카인을 사랑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은 해볼 생각이다. 아리엘은 시건방진 공주 이미지로 가득한 인물이지만 속마음은 순수하고 여린 구석이 많으니까.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금발. 아무래도 너는 마법에 재능이 없는 것 같아.”

엘리샤가 깔깔대며 나를 놀렸다. 금발은 마법 고자래요. 금마고자래요. 아하하하.

다분히 중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합성어를 만든 엘리샤였지만 그녀는 내게 마법을 가르치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엘리샤의 말대로 나는 ‘금마고자’ 수준의 폐급은 아니었다. 아마도 카인과 비교되어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이겠지.

“데미안. 마음을 조급하게 갖지 말고, 내가 하는 걸 봐봐. 이렇게.”

“오 뭐야. 짐승 꼬마에게 이런 상냥한 면이 있었어?”

그러던 어느 날, 엘리샤는 쿠훌린과 함께 섬을 떠났다.

“이 미녀 스승님이 안 계시는 동안 연습 제대로 해놓으라고! 알겠어? 제1 제자! 금마고자!”

“입학 신청은 걱정 말거라! 이 금패 용병님이 알아서 잘해놓을 테니까! 하하하하!”

나와 카인, 세실, 루나, 디네베는 오랜만에 해안에 모여 은월호를 배웅했다. 마을로 돌아가는 길에는 루나가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언제 들어도 귀가 씻기는 기분이다.

루나는 끝내 아르카넘 홀에 가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의외로 케일라가 아르카넘 홀에 관심을 보였지만 루나가 섬에 남고, 그 영향으로 트리스탄도 섬에 남을 것 같아지자 아쉬운 얼굴로 제 입술을 핥았다.

세실은 루나와 함께하지 못해 슬퍼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안도하는 모습이었는데, 케일라 때문인 듯하다. 언젠가부터 케일라는 세실을 너무 빤히 쳐다보니까. 묘하게 입맛도 다시고.

‘루나프레나가 많이 힘들어하고 있단다.’

달빛나무 축제일 밤에 디네베가 내 방을 찾아왔었다. 예상한 일이었다. 달빛나무 축제일은 일 년 중 달의 힘이 가장 강한 날이니까.

‘저 아이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편치 않구나. 그러니 데미안. 네가 루나프레나를 신경 써주려무나.’

디네베가 다녀간 후 나는 틈틈이 루나에게 관심을 쏟았다. 내가 보기에 루나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신녀의 말이 거짓일 리는 없으니까.

루나는 처음에는 어색하게 대응했으나, 곧 내게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끔은 잠시만 이대로 있어 달라며 나를 끌어안기도 했다.

‘······안아 줘 데미안. 아무것도 묻지 말고.’

품에 안긴 루나는 가늘게 어깨를 떨었다. 나는 루나가 울음을 참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실에게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 몇 번인가 세실의 방을 찾았지만, 그때마다 세실은 미안하다며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했다. 일부러 나를 피하는 것이냐고 물은 적도 있었다. 그러자 세실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나는 아직도 입술에서 세실의 감촉을 느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나는 다시 루나와 세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

마차 바퀴가 도로 위를 힘차게 굴렀다.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본 이들이 길가로 물러서 고개를 숙였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빼꼼 고개를 드는 아이들도 있었다.

화려한 무늬로 장식된 붉은색 마차였다.

앞바퀴 둘은 작고, 뒷바퀴 둘은 그보다 크다.

한눈에 봐도 지체가 높은 이가 탈법한 마차였다.

“길을 어쩜 이렇게 울퉁불퉁하게 깔았담.”

마차 창문이 열리며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른의 말투를 흉내 내는 소녀 같은 음성.

“도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예요!”

그녀의 짜증 섞인 외침에 마부는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앞으로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할 겁니다. 아리엘라 아가씨.”

“한 시간이나 남았다고요?”

그녀, 아리엘라가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자 길에서 탄성이 울려 퍼졌다. 시선이 집중된 것을 느낀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움직였다.

비단결처럼 윤기가 흐르는 긴 금발.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얀 피부.

촉촉하게 젖은 입술은 붉은 꽃잎 같았다.

“흥. 몰래 훔쳐보기는.”

오만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아리엘라는 마차 안으로 얼굴을 숨겼다. 그러자 길가를 울리던 탄성은 아쉬움의 탄식으로 변했다.

아리엘라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창밖을 스치는 풍경을 바라봤다. 하늘은 높고 맑다. 이불솜 같은 구름이 나무 위를 뭉게뭉게 떠다니고 있었다.

“학교라니······.”

얼마 전 열여섯 살이 된 플랑브아즈 공작가의 외동딸, 아리엘라 플랑브아즈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을 억지로 향하는 중이었다.

저택에서의 생활은 부족함 없이 행복했다. 수많은 귀족이 아리엘라의 재능과 아름다움을 칭송했고, 명망 있는 집안의 젊은 사내들은 하늘의 별을 따오는 시늉까지 하며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애썼다.

아리엘라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마법이라면 가정 교사와 어머니의 지도로 충분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빼어난 마법 잠재력을 드러냈고, 배우는 내용을 누구보다 빠르게 흡수했다. 게다가 아리엘라는 황실 수호 마법사단 ‘센티널(Sentinel)’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익······! 가기 싫어······! 가기 싫다고!”

아리엘라는 맞은편 의자를 쿵쿵 발로 찼다. 마음 같아서는 마부에게 당장 말머리를 돌려 저택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명은 절대적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불타는 교육열을 막아줄 이는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집을 떠나 어떻게 4년이나 버틴담······.”

아리엘라는 푸욱, 한숨을 쉬었다.

며칠 전, 최후의 수단으로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울고불고 난리를 쳤건만 어머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것이다.

“칫. 4년 동안 앙투안이나 실컷 괴롭히며 화풀이해야겠어.”

창밖의 풍경이 서서히 바뀌었다. 봄 기운이 완연한 나무들은 더욱 풍성해진 잎새를 자랑했다.

무언가를 발견한 아리엘라가 창을 열었다.

“와, 예뻐라.”

호수가 보였다.

보석을 뿌려놓은 것처럼 반짝이는 길쭉한 호수 곳곳에는 포물선 모양의 다리가 놓여 있었다. 아리엘라가 탄 마차는 그중 하나를 향해 달리는 중이었다.

다리의 경사면을 오르며 마차가 아주 살짝 흔들렸다. 호수에 정신이 팔려있던 아리엘라가 불쑥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깜짝 놀랐잖아요!”

또다시 머리를 굽신대며 죄송하다는 말을 연발하는 마부를 보며 아리엘라는 비죽 입술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다리의 정교한 난간 장식을 보며 다시 탄성을 질렀다.

“와아······!”

철없는 어린아이 같으면서도 매혹적인 성숙함이 공존하는 그녀의 옆얼굴을 보며 마부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다리를 건너자 저 멀리 커다란 건물들이 세워진 것이 보였다. 제국 최고의 명문 학교 아르카넘 홀이었다.

“예뻐······! 동화 속 궁전 같아······!”

아리엘라가 아르카넘 홀의 풍경에 넋을 놓는 동안 마차 소리는 점차 잦아들었다.

마부는 아르카넘 홀의 경비병에게 입학시험 관련 서류를 보여주었다.

대귀족인 플랑브아즈 가문이라고 해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였다. 아르카넘 홀에서 신분은 무의미하다. 물론 입학시험 당일에 이 정문을 지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신분을 암시하는 일이기는 했지만.

“들어가십시오.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마차는 미끄러지듯 학교 부지로 들어갔다. 아리엘라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창밖을 내다봤다. 태어나 한 번도 공작령을 떠나본 일이 없는 그녀에게 아르카넘 홀은 낯설고 신기한 장소였다.

“도착했습니다. 아리엘라 아가씨.”

아리엘라는 꿀꺽 침을 삼켰다. 이 낯선 곳에서 어머니도, 하녀들도 없이 생활할 생각을 하니 덜컥 겁이 났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두려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아리엘라는 도도하게 눈을 내리깔며 우아한 발걸음으로 지면에 내려섰다. 굽 높은 구두를 신었기에 주의가 필요했다. 플랑브아즈 가문의 아가씨에게 하이힐은 상징과도 같다고 들었지만, 아리엘라에게는 아직 불편하기만 했다.

“저쪽에 마차를 세우고 기다리겠습니다. 여기, 입학 원서입니다. 아가씨의 짐은 기숙사가 정해지는대로 옮기겠습니다.”

고개 숙인 마부가 다시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아리엘라는 소리 없이 숨을 삼키며, 입학시험이 예정된 건물을 바라봤다. 여러 방향으로 물줄기를 뿜어대는 화려한 분수대가 눈에 띄었다.

‘구두를 갈아신을 걸 그랬나.’

발이 아팠다. 원치 않는 건물로 들어갈 생각을 하니 더욱 그런 것 같았다. 옆을 돌아봤지만 마차는 이미 저만큼이나 멀어져 있었다.

아리엘라는 하이힐에서 한쪽 발을 빼냈다. 다시 신으면 조금 덜 아플까 해서였는데, 익숙지 않은 행동에 그만 몸의 중심을 잃고 말았다.

‘어? 어어······?’

아리엘라는 당황했다. 자신의 몸이 지면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상황이 낯설었다. 저택이었다면 하녀들이 잡아주었겠지만, 당연하게도 이곳은 플랑브아즈 저택이 아니었다.

그때, 누군가가 아리엘라의 손과 어깨를 붙잡았다. 아리엘라는 상대가 남자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녀의 미간이 구겨졌다.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다니.

물론 그러지 않았다면 아리엘라는 바닥에 넘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런 생각을 떠올릴 틈이 없었다.

“너, 너, 감히······!”

아리엘라는 분노로 입술을 떨며 뒤를 돌아봤다. 그 순간, 그녀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아리엘라는 자신의 몸을 안아든 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세를 낮췄다. 이어 바닥에 떨어진 하이힐을 손에 들고, 아리엘라의 발에 신겨 주었다.

“입학시험을 치르러 온 거야?”

“으, 으응.”

아리엘라의 대답에 그는 씩 웃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앞으로도 볼 수 없을 것 같은 아름다운 미소였다.

“나도야. 내 이름은 카인. 카인 시니야카.”

“아리엘······ 플랑브아즈.”

그의 옆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인, 늦겠어. 얼른 가자.”

“응. 데미안.”

고개 돌려 대답한 그가 다시 아리엘라를 바라봤다.

“반가워 아리엘. 꼭 합격했으면 좋겠다.”

“······으응.”

그의 손이 아리엘에게서 떨어졌다.

순간 안타까운 감정이 그녀의 가슴속으로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안 오면 우리끼리 간다. 카인.”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는 아리엘의 곁을 스치며 멀어졌다.

아리엘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조금 전까지 쥐고 있던 손. 아직도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아리엘은 살포시 손을 오므리며 뒤를 돌아봤다.

친구들을 향해 달리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흑청색 머리카락. 따스하게 자신을 마주하던 호박색 눈동자.

아리엘의 입술에서 엷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토록 오고 싶지 않았던 학교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입술을 달싹이며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잊고 싶지 않은 이름을 중얼거렸다.

카인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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