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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7

127화 군라르의 모종

“외, 왼쪽 비어요! 그쪽으로 파고드세요!”

“오, 오긴 왔는데 여기서 뭘 어쩌죠?”

“다리라도 붙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뭔 개소리──!?”

-뿌직!

-거인 상대로 공격력이 20.0556% 상승합니다.

한하리 잔존 농노 88명. 성공

“빨리빨리 달려! 곤봉 정도는 알아서 잘 피하란 말이야!”

“으아아아악! 이 개샛끼야!”

“어어, 방금 욕한 새끼, 지금부터 거인 부랄을 뜯는다 실시!”

-거인 상대로 공격력이 20.0934% 상승합니다.

김재혁 잔존 농노 32명. 성공.

“어어! 쓰러진다!”

“허, 허억…! 어, 엄마아… 나 살았어!”

-거인 상대로 공격력이 20.1432% 상승합니다.

한수호 잔존 농노 2명. 성공.

아비규환이었다. 거인 사냥을 위해 기사단장 후보들은 눈물의 똥꼬쇼를 벌이며 농노들을 밀어 넣었다.

결과는 어찌어찌 전원 성공. 마지막으로 천소연만 남았다.

“앞에 사람 죽었네요? 뒤에 사람 복수할 거죠?”

“어, 음…….”

“복수한다고 해.”

“하, 하겠습니다! 으아악! 세르게이! 네 복수를 하겠다!”

“──라네요.”

[크큭, 이제 네 영혼은 내 것이다.]

[복수대상 지정. 영혼을 소모하여 강화됩니다.]

천소연은 복수의 신 벤타시스를 중개해주면서 농노병들을 강화시켰다. 덕분에 영혼을 갉아먹으며 강해진 농노들은 거인에게도 유효타를 먹였고.

천소연 잔존 농노 154명.

가장 적은 346명의 희생으로 거인을 잡을 수 있었다.

“흠, 좋군. 훌륭했다.”

하리 휘하의 농노들은 두 신의 버프를 받으면서 어찌어찌 스펙업을 했고, 재혁은 공격적인 운용으로 거인을 당황케 했다.

수호는 상성이 나빴는데, 정의의 여신인 아리아나의 버프는 악종인 농노병들에게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천소연. 네가 기사단장직을 맡도록.”

“……네.”

천소연은 자신의 성력과 계약한 신을 적극적으로 운용했다.

앞의 노예가 뒤지면 뒤의 노예가 대신 복수해준다. 벤타시스가 널널한 계약조건을 가진 악신이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농노에 대한 명령권을 이용해 복수의 계약을 중개하다니. 실로 효율적인 판단이었다.”

“……잘했나요?”

“그렇다. 짐이 보기에도 감탄스러운 부분이었느니라.”

“……네.”

소연은 배시시 얼굴을 붉히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한하리, 너는 타고난 것이 있어 농노들에게 적절한 가호를 주었지만, 운용에 있어 과감함이 부족했다. 농노는 소모품이니 목적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소진토록 하라.”

“으음… 네에…….”

하리 다음은 재혁이었다.

“김재혁, 너는 처음 치곤 아주 과감한 움직임이 인상적이었다. 허나, 명령에 쓸모없는 부분이 많아 농노들을 우왕좌왕한 것이 있다.”

“크흠… 좀 실수가 많았습죠.”

“뭐, 그러면서 배우는 것이다. 죽을 농노야 앞으로도 계속 구하면 되니 아낌없이 연습하도록 해라.”

-개, 개새끼…….

살아남은 농노들이 부아에 치밀었지만, 레온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돼지가 꿀꿀거리는 말을 뭣 하러 신경 쓰겠는가.

“한수호.”

“예, 예에…….”

수호는 아슬아슬했다. 잔존 농노 두 명. 거인이 과다출혈로 쓰러지지 않았다면 실패했을 것이다.

“너는 상성이 좋지 않았을 뿐이다. 빛의 가호는 농노를 운용하기에 적합한 가호는 아니지.”

“그래도 죄송──”

“하여 네게는 오백 명의 농노를 더 맡기겠다!”

“……예?”

수호의 어깨를 두들기며 호탕하게 웃는 레온.

“과거, 그라타스 경이 농노 챌린지를 계획한 것은 썩어 넘치는 농노들의 숫자를 효율적으로 줄이기 위함이었다. 주변의 몬스터들을 처리해 치안을 강화하면서 밥버러지 농노들을 묻기 위함이었지.”

“예에에…….”

“네게는 농노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재주가 있구나! 앞으로도 정진하도록!”

“…….”

수호는 생각했다.

이분은 사실 악마가 아닐까?

* * * *

나주평야의 한복판.

추수기가 다가오는 드넓은 황금벌판의 한가운데에 레온은 한 그루의 묘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 자라질 않는군.”

레온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자신의 오랜 친구 숲의 현자 군라르가 제게 넘긴 ‘모종’.

레온은 그것을 나주평야에서 키워내고자 심었지만, 도통 자라질 않았다.

물론 이 묘목이 손쉽게 자라나는 종자가 아니란 걸 알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역시 이국의 땅에서 트리맨들의 모종을 키워내는 건 쉽지 않구나.]

목소리의 주인은 볏 인형에 깃든 대지와 풍요의 여신 데메라였다.

그녀는 레온과 직접 전언을 전할 수 있었으나 최근에는 이렇게 볏 인형에 깃드는 걸 즐기는 듯했다. 신들 또한 소소한 취미생활은 있기에 레온은 그녀의 편의를 봐주었고.

“토양의 질이 좋지 않기 때문이겠습니까?”

[그렇지 않단다. 이미 이곳은 나의 축복이 깃든 곳이니까.]

“그렇다면…….”

[이곳과 라이온하트가 다른 점은 결국 세상에 충만한 성력의 차이겠지.]

만신전의 교세는 나날이 세상에 퍼져나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라이온하트와 비교하자면 결코 비교를 점할 수준이 아니다.

사교도와 악마 추종자들을 제외하고 만백성이 신앙하던 세계와 컬트적인 인기로 교세를 확장해나가는 신흥종교가 감히 비교될 리 없으니까.

“흐음…….”

레온은 묘목 수준으로 자란 트리맨 군라르의 모종에 손바닥을 대었다. 그리고 퍼부어지는 막대한 성력.

그러자 묘목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레온의 성력을 흡수하며 단숨에 레온의 허리춤까지 올 정도로 자란 것이다.

이것만으로 대단한 성장이지만…….

[많이 부족하구나.]

“성력이 부족한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아마 이건 성질의 문제겠지.]

데메라는 레온과 함께 묘목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가는 누구보다도 강대한 성력을 품고 있으나 그것은 순수하지 못하단다. 아가는 너무 많은 신들의 힘을 품고 있어.]

“…….”

[나의 성배기사라도 있다면 몰라도… 아무래도 그건 요행에 맡긴 일이겠지.]

데메라는 게오브릭의 망치를 떠올렸다. 자신이 잃어버렸던 소중한 아이의 망치.

그리고 그가 남긴 위대한 힘은 아직 진정한 후계를 찾지 못했다. 그나마 구대성이란 아이가 약간의 인정을 받았지만.

“모종을 자라게 할 방법을 찾아봐야겠습니다. 가장 편리한 것은 낙원으로 돌아가 친우를 찾는 것입니다만.”

[그러지 마렴.]

데메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산자가 죽은 자들의 세계에 머무는 건 결코 좋지 못하단다. 네가 아무리 강인한 존재라 할지라도.]

“저는 능히 견뎌낼 수 있습니다.”

[카스티야가 하룻밤만 함께하자고 해도?]

“…….”

익숙한 이름이 언급되자 레온은 침묵했다. 데메라는 계속해서 이름들을 언급했다.

[제레아가 함께 술을 마시자고 해도? 길링엄이 너와 함께 마상시합을 하고 싶다고 해도? 록슬리가 생전에 못다 한 승부를 끝내자고 해도?]

데메라는 볏인형의 팔로 레온을 토닥이며 자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 너의 초월적인 의지와 고결함을 신들 모두가 안단다. 하지만 반은 신이되 반은 인간인 네가 정녕 네 삶을 차지한 추억들을 마냥 지나칠 수 있겠니?]

찰나의 망설임, 찰나의 어울림조차 산자에게는 독이다. 데메라는 레온이 가진 모든 추억과 즐거움이 낙원에 있는 이들과 함께했다는 걸 안다.

우정도, 사랑도… 그 모든 기억을 함께한 이들이 낙원에 묻혀있다.

[처음에는 잠깐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두 번째에는 좀 더 길어질 거란다. 세 번째에는 이곳에 더 있고 싶다고 생각하겠지.]

레온은 데메라의 추측을 반론하지 못했다.

[아가. 비록 너에게만은 허락된 낙원에의 입장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삼가는 게 좋겠다고 이 어미는 생각한단다.]

“위대한 어머님의 말씀을 새겨듣겠습니다.”

레온은 순수한 걱정에서 비롯된 데메라의 만류를 저버릴 수 없었다.

* * * *

돌아오는 길, 레온은 마침 산책을 나왔던 베아트리체와 마주쳤다.

“폐하, 산책이라도 다녀오셨나요?”

“흠, 묘목을 좀 살피고 왔네.”

“요즘 들어 자주 살피시는군요. 그것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기에 그리 키우려 하시는 건가요?”

베아트리체의 의문에 레온은 자신이 이 모종에 대해 설명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 모종은 짐의 오랜 친구이자 숲의 현자인 군라르의 모종일세. 숲의 현자들은 평생에 걸쳐 숲의 중심이 될 세인트 트리의 모종을 준비하지.”

오롯이 자연의 존재인 트리맨들이 번성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설명하자 베아트리체는 고개를 기웃거렸다.

“폐하께선 친우의 종족이 이 땅에서 번성하길 원하시는 건가요?”

“그것도 있네만, 세인트 트리는 숲과 나무의 신성 이르민을 강림시키는 신전의 주춧돌이기도 하네.”

“숲과 나무의 신성… 교리에서 들어본 적은 있지만, 만나뵌 적은 없군요.”

베아트리체는 꿈과 죽음의 신관장으로서 여러 신을 야피와 함께 만나보고 인사드렸다.

그중에서 숲과 나무의 신성을 만나본 바가 없다.

“그분은 숲의 종족들을 위한 신이기 때문이지. 덧붙여 세인트 트리가 없으면 깨어나지 못하네.”

레온의 세계에서는 종족신이라는 신성들이 있었다. 그들은 신들 중에서도 협소한 종족만을 가호하기에 하위 신에 속했고, 그만큼 제약이 있다.

“그 빌어먹을 오크놈들이나 짐승놈들의 악신들이 만신전에 들어오지 못한 이유기도 하지.”

그렇다고 그들 신이 약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당장 오크 신들만 해도 신들 중에서는 가장 강력한 힘을 자랑했으니까.

“그렇다면 이르민 님을 강림시켜야 할 이유가 있나요?”

“있네. 그분께서 이 땅 위의 강림하시는 순간, 아마 이 한반도 주변은 어지간한 악마들은 살아남을 수 없는 신성이 피어날 것이야.”

한 나라를… 아니, 그 이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강력한 신성의 힘이라니?

신들의 힘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아는 베아트리체가 의문을 품었다.

“신들의 힘은 신앙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게 아니었나요? 어째서 그분만… 아.”

베아트리체는 비상한 두뇌로 곧장 이르민이 다른 신들과 다른 이유를 깨달았다.

“종족신… 신성의 메커니즘이 다른 신들과 다른 거군요.”

“세인트 트리는 짐에게 이식된 사자심장과 같이 스스로 성력을 생성해내는 중계기일세. 삿된 것들을 정화하는 힘이 있기에 세인트 트리 주변은 악마들이 접근하질 못하는 거지.”

과연, 그만한 힘을 가진 모종이라면 반드시 키워낼 필요가 있다.

당장 베아트리체만 해도 도시에 숨어든 악마들의 사보타주로 얼마나 많은 백성을 잃고 타락자들을 놓쳤는가.

“그렇다면 폐하. 제게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베아트리체의 묘수.

그것은 모종 그 자체를 게이트의 좌표로 삼는 것이었다.

* * * *

베아트리체의 제안은 다음과 같다.

모종 그 자체를 게이트의 좌표로 삼음으로써 트리맨들이 있는 게이트로 도약한다.

그곳에서라면 모종에 대해 알아볼 방법이 있지 않겠는가였다.

“마정석은 저쪽에 쌓아주세요. 주변 300m 내의 민간인들은 대피토록 해주시고요.”

만신전 병영 한가운데에 차곡차곡 쌓이는 마정석들. 훈련을 겸해 게이트를 물불 가리지 않고 클리어하는 만신전에 마정석은 항상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더미처럼 쌓인 마정석의 양은 보는 이로 하여금 질려버리게 할 정도.

“폐하, 한가운데에 모종을 놓아주시겠어요?”

레온은 나주평야에 심었던 모종을 가져와 마술진의 한가운데에 놓았다.

군라르가 자신에게 남긴 모종. 이것을 통해 게이트를 연다면 군라르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조금은 기대가 됐다.

“비체. 게이트를 열어주시겠소?”

“알겠답니다.”

베아트리체는 게이트를 열었다. 요동치는 마술진이 산더미처럼 쌓인 마정석을 집어삼키며 공간에 균열을 일으킨다.

-콰아아아아아아!!

시시각각 사라지는 마정석들. 연기처럼 화한 마정석의 기운이 균열을 더욱 가속화한다. 이만한 대마도 베아트리체 정도 되는 마술사가 아니면 시전조차 불가하겠지.

─────────

그렇게 열린 게이트는 ‘무색’이었다.

“무색?”

“처음 보는 게이트예요!”

기존의 흑색, 적색, 주황, 노랑과는 다른 색이 없는 게이트. 레온조차도 이 게이트 내부에서 위협을 느꼈다.

“이번 게이트는 신중하게 임할 필요가 있겠군.”

“네, 일단 정찰대로 소수의 정예만 보내는 게 나을성싶네요.”

본래라면 기사단과 맨앳암즈를 대동해 착실하게 게이트를 공략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게이트 내부에서 느껴지는 막대한 기운이 레온에게 신중함을 요구했다.

“이번 게이트는 짐을 포함해 소수 정예로 정찰부터 시행하겠다. 왕국기사급 이하의 전투원은 대기하도록 해라.”

공략보다는 정찰과 획득, 신속한 후퇴를 목표로 삼는다. 레온의 이러한 판단은 지극히 이성적이다.

“그럼 입장하지. 다들 조심하시게.”

레온을 선두로 만신전의 정예들이 차례차례 입장한다. 그렇게 야피가 마지막으로 입장했을 때였다.

-쾅!

게이트에서 쏟아진 굉음과 함께 무언가가 튕겨 나왔다.

“큭…!”

“폐하?!”

게이트에서 튕겨 나온 인물은 다름 아닌 레온.

[중복된 인물을 발견하였습니다. 게이트에 입장할 수 없습니다.]

게이트 내부. 그것은 레온을 거부하며 광대한 성력을 흘려보냈다.


           


Chapter 127

Chapter 127

127화 군라르의 모종

"외, 왼쪽 비어요! 그쪽으로 파고드세요!"

"오, 오긴 왔는데 여기서 뭘 어쩌죠?"

"다리라도 붙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뭔 개소리──!?"

-뿌직!

-거인 상대로 공격력이 20.0556% 상승합니다.

한하리 잔존 농노 88명. 성공

"빨리빨리 달려! 곤봉 정도는 알아서 잘 피하란 말이야!"

"으아아아악! 이 개샛끼야!"

"어어, 방금 욕한 새끼, 지금부터 거인 부랄을 뜯는다 실시!"

-거인 상대로 공격력이 20.0934% 상승합니다.

김재혁 잔존 농노 32명. 성공.

"어어! 쓰러진다!"

"허, 허억…! 어, 엄마아… 나 살았어!"

-거인 상대로 공격력이 20.1432% 상승합니다.

한수호 잔존 농노 2명. 성공.

아비규환이었다. 거인 사냥을 위해 기사단장 후보들은 눈물의 똥꼬쇼를 벌이며 농노들을 밀어 넣었다.

결과는 어찌어찌 전원 성공. 마지막으로 천소연만 남았다.

"앞에 사람 죽었네요? 뒤에 사람 복수할 거죠?"

"어, 음……."

"복수한다고 해."

"하, 하겠습니다! 으아악! 세르게이! 네 복수를 하겠다!"

"──라네요."

[크큭, 이제 네 영혼은 내 것이다.]

[복수대상 지정. 영혼을 소모하여 강화됩니다.]

천소연은 복수의 신 벤타시스를 중개해주면서 농노병들을 강화시켰다. 덕분에 영혼을 갉아먹으며 강해진 농노들은 거인에게도 유효타를 먹였고.

천소연 잔존 농노 154명.

가장 적은 346명의 희생으로 거인을 잡을 수 있었다.

"흠, 좋군. 훌륭했다."

하리 휘하의 농노들은 두 신의 버프를 받으면서 어찌어찌 스펙업을 했고, 재혁은 공격적인 운용으로 거인을 당황케 했다.

수호는 상성이 나빴는데, 정의의 여신인 아리아나의 버프는 악종인 농노병들에게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천소연. 네가 기사단장직을 맡도록."

"……네."

천소연은 자신의 성력과 계약한 신을 적극적으로 운용했다.

앞의 노예가 뒤지면 뒤의 노예가 대신 복수해준다. 벤타시스가 널널한 계약조건을 가진 악신이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농노에 대한 명령권을 이용해 복수의 계약을 중개하다니. 실로 효율적인 판단이었다."

"……잘했나요?"

"그렇다. 짐이 보기에도 감탄스러운 부분이었느니라."

"……네."

소연은 배시시 얼굴을 붉히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한하리, 너는 타고난 것이 있어 농노들에게 적절한 가호를 주었지만, 운용에 있어 과감함이 부족했다. 농노는 소모품이니 목적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소진토록 하라."

"으음… 네에……."

하리 다음은 재혁이었다.

"김재혁, 너는 처음 치곤 아주 과감한 움직임이 인상적이었다. 허나, 명령에 쓸모없는 부분이 많아 농노들을 우왕좌왕한 것이 있다."

"크흠… 좀 실수가 많았습죠."

"뭐, 그러면서 배우는 것이다. 죽을 농노야 앞으로도 계속 구하면 되니 아낌없이 연습하도록 해라."

-개, 개새끼…….

살아남은 농노들이 부아에 치밀었지만, 레온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돼지가 꿀꿀거리는 말을 뭣 하러 신경 쓰겠는가.

"한수호."

"예, 예에……."

수호는 아슬아슬했다. 잔존 농노 두 명. 거인이 과다출혈로 쓰러지지 않았다면 실패했을 것이다.

"너는 상성이 좋지 않았을 뿐이다. 빛의 가호는 농노를 운용하기에 적합한 가호는 아니지."

"그래도 죄송──"

"하여 네게는 오백 명의 농노를 더 맡기겠다!"

"……예?"

수호의 어깨를 두들기며 호탕하게 웃는 레온.

"과거, 그라타스 경이 농노 챌린지를 계획한 것은 썩어 넘치는 농노들의 숫자를 효율적으로 줄이기 위함이었다. 주변의 몬스터들을 처리해 치안을 강화하면서 밥버러지 농노들을 묻기 위함이었지."

"예에에……."

"네게는 농노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재주가 있구나! 앞으로도 정진하도록!"

"……."

수호는 생각했다.

이분은 사실 악마가 아닐까?

* * * *

나주평야의 한복판.

추수기가 다가오는 드넓은 황금벌판의 한가운데에 레온은 한 그루의 묘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 자라질 않는군."

레온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자신의 오랜 친구 숲의 현자 군라르가 제게 넘긴 '모종'.

레온은 그것을 나주평야에서 키워내고자 심었지만, 도통 자라질 않았다.

물론 이 묘목이 손쉽게 자라나는 종자가 아니란 걸 알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역시 이국의 땅에서 트리맨들의 모종을 키워내는 건 쉽지 않구나.]

목소리의 주인은 볏 인형에 깃든 대지와 풍요의 여신 데메라였다.

그녀는 레온과 직접 전언을 전할 수 있었으나 최근에는 이렇게 볏 인형에 깃드는 걸 즐기는 듯했다. 신들 또한 소소한 취미생활은 있기에 레온은 그녀의 편의를 봐주었고.

"토양의 질이 좋지 않기 때문이겠습니까?"

[그렇지 않단다. 이미 이곳은 나의 축복이 깃든 곳이니까.]

"그렇다면……."

[이곳과 라이온하트가 다른 점은 결국 세상에 충만한 성력의 차이겠지.]

만신전의 교세는 나날이 세상에 퍼져나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라이온하트와 비교하자면 결코 비교를 점할 수준이 아니다.

사교도와 악마 추종자들을 제외하고 만백성이 신앙하던 세계와 컬트적인 인기로 교세를 확장해나가는 신흥종교가 감히 비교될 리 없으니까.

"흐음……."

레온은 묘목 수준으로 자란 트리맨 군라르의 모종에 손바닥을 대었다. 그리고 퍼부어지는 막대한 성력.

그러자 묘목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레온의 성력을 흡수하며 단숨에 레온의 허리춤까지 올 정도로 자란 것이다.

이것만으로 대단한 성장이지만…….

[많이 부족하구나.]

"성력이 부족한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아마 이건 성질의 문제겠지.]

데메라는 레온과 함께 묘목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가는 누구보다도 강대한 성력을 품고 있으나 그것은 순수하지 못하단다. 아가는 너무 많은 신들의 힘을 품고 있어.]

"……."

[나의 성배기사라도 있다면 몰라도… 아무래도 그건 요행에 맡긴 일이겠지.]

데메라는 게오브릭의 망치를 떠올렸다. 자신이 잃어버렸던 소중한 아이의 망치.

그리고 그가 남긴 위대한 힘은 아직 진정한 후계를 찾지 못했다. 그나마 구대성이란 아이가 약간의 인정을 받았지만.

"모종을 자라게 할 방법을 찾아봐야겠습니다. 가장 편리한 것은 낙원으로 돌아가 친우를 찾는 것입니다만."

[그러지 마렴.]

데메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산자가 죽은 자들의 세계에 머무는 건 결코 좋지 못하단다. 네가 아무리 강인한 존재라 할지라도.]

"저는 능히 견뎌낼 수 있습니다."

[카스티야가 하룻밤만 함께하자고 해도?]

"……."

익숙한 이름이 언급되자 레온은 침묵했다. 데메라는 계속해서 이름들을 언급했다.

[제레아가 함께 술을 마시자고 해도? 길링엄이 너와 함께 마상시합을 하고 싶다고 해도? 록슬리가 생전에 못다 한 승부를 끝내자고 해도?]

데메라는 볏인형의 팔로 레온을 토닥이며 자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 너의 초월적인 의지와 고결함을 신들 모두가 안단다. 하지만 반은 신이되 반은 인간인 네가 정녕 네 삶을 차지한 추억들을 마냥 지나칠 수 있겠니?]

찰나의 망설임, 찰나의 어울림조차 산자에게는 독이다. 데메라는 레온이 가진 모든 추억과 즐거움이 낙원에 있는 이들과 함께했다는 걸 안다.

우정도, 사랑도… 그 모든 기억을 함께한 이들이 낙원에 묻혀있다.

[처음에는 잠깐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두 번째에는 좀 더 길어질 거란다. 세 번째에는 이곳에 더 있고 싶다고 생각하겠지.]

레온은 데메라의 추측을 반론하지 못했다.

[아가. 비록 너에게만은 허락된 낙원에의 입장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삼가는 게 좋겠다고 이 어미는 생각한단다.]

"위대한 어머님의 말씀을 새겨듣겠습니다."

레온은 순수한 걱정에서 비롯된 데메라의 만류를 저버릴 수 없었다.

* * * *

돌아오는 길, 레온은 마침 산책을 나왔던 베아트리체와 마주쳤다.

"폐하, 산책이라도 다녀오셨나요?"

"흠, 묘목을 좀 살피고 왔네."

"요즘 들어 자주 살피시는군요. 그것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기에 그리 키우려 하시는 건가요?"

베아트리체의 의문에 레온은 자신이 이 모종에 대해 설명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 모종은 짐의 오랜 친구이자 숲의 현자인 군라르의 모종일세. 숲의 현자들은 평생에 걸쳐 숲의 중심이 될 세인트 트리의 모종을 준비하지."

오롯이 자연의 존재인 트리맨들이 번성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설명하자 베아트리체는 고개를 기웃거렸다.

"폐하께선 친우의 종족이 이 땅에서 번성하길 원하시는 건가요?"

"그것도 있네만, 세인트 트리는 숲과 나무의 신성 이르민을 강림시키는 신전의 주춧돌이기도 하네."

"숲과 나무의 신성… 교리에서 들어본 적은 있지만, 만나뵌 적은 없군요."

베아트리체는 꿈과 죽음의 신관장으로서 여러 신을 야피와 함께 만나보고 인사드렸다.

그중에서 숲과 나무의 신성을 만나본 바가 없다.

"그분은 숲의 종족들을 위한 신이기 때문이지. 덧붙여 세인트 트리가 없으면 깨어나지 못하네."

레온의 세계에서는 종족신이라는 신성들이 있었다. 그들은 신들 중에서도 협소한 종족만을 가호하기에 하위 신에 속했고, 그만큼 제약이 있다.

"그 빌어먹을 오크놈들이나 짐승놈들의 악신들이 만신전에 들어오지 못한 이유기도 하지."

그렇다고 그들 신이 약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당장 오크 신들만 해도 신들 중에서는 가장 강력한 힘을 자랑했으니까.

"그렇다면 이르민 님을 강림시켜야 할 이유가 있나요?"

"있네. 그분께서 이 땅 위의 강림하시는 순간, 아마 이 한반도 주변은 어지간한 악마들은 살아남을 수 없는 신성이 피어날 것이야."

한 나라를… 아니, 그 이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강력한 신성의 힘이라니?

신들의 힘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아는 베아트리체가 의문을 품었다.

"신들의 힘은 신앙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게 아니었나요? 어째서 그분만… 아."

베아트리체는 비상한 두뇌로 곧장 이르민이 다른 신들과 다른 이유를 깨달았다.

"종족신… 신성의 메커니즘이 다른 신들과 다른 거군요."

"세인트 트리는 짐에게 이식된 사자심장과 같이 스스로 성력을 생성해내는 중계기일세. 삿된 것들을 정화하는 힘이 있기에 세인트 트리 주변은 악마들이 접근하질 못하는 거지."

과연, 그만한 힘을 가진 모종이라면 반드시 키워낼 필요가 있다.

당장 베아트리체만 해도 도시에 숨어든 악마들의 사보타주로 얼마나 많은 백성을 잃고 타락자들을 놓쳤는가.

"그렇다면 폐하. 제게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베아트리체의 묘수.

그것은 모종 그 자체를 게이트의 좌표로 삼는 것이었다.

* * * *

베아트리체의 제안은 다음과 같다.

모종 그 자체를 게이트의 좌표로 삼음으로써 트리맨들이 있는 게이트로 도약한다.

그곳에서라면 모종에 대해 알아볼 방법이 있지 않겠는가였다.

"마정석은 저쪽에 쌓아주세요. 주변 300m 내의 민간인들은 대피토록 해주시고요."

만신전 병영 한가운데에 차곡차곡 쌓이는 마정석들. 훈련을 겸해 게이트를 물불 가리지 않고 클리어하는 만신전에 마정석은 항상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더미처럼 쌓인 마정석의 양은 보는 이로 하여금 질려버리게 할 정도.

"폐하, 한가운데에 모종을 놓아주시겠어요?"

레온은 나주평야에 심었던 모종을 가져와 마술진의 한가운데에 놓았다.

군라르가 자신에게 남긴 모종. 이것을 통해 게이트를 연다면 군라르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조금은 기대가 됐다.

"비체. 게이트를 열어주시겠소?"

"알겠답니다."

베아트리체는 게이트를 열었다. 요동치는 마술진이 산더미처럼 쌓인 마정석을 집어삼키며 공간에 균열을 일으킨다.

-콰아아아아아아!!

시시각각 사라지는 마정석들. 연기처럼 화한 마정석의 기운이 균열을 더욱 가속화한다. 이만한 대마도 베아트리체 정도 되는 마술사가 아니면 시전조차 불가하겠지.

─────────

그렇게 열린 게이트는 '무색'이었다.

"무색?"

"처음 보는 게이트예요!"

기존의 흑색, 적색, 주황, 노랑과는 다른 색이 없는 게이트. 레온조차도 이 게이트 내부에서 위협을 느꼈다.

"이번 게이트는 신중하게 임할 필요가 있겠군."

"네, 일단 정찰대로 소수의 정예만 보내는 게 나을성싶네요."

본래라면 기사단과 맨앳암즈를 대동해 착실하게 게이트를 공략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게이트 내부에서 느껴지는 막대한 기운이 레온에게 신중함을 요구했다.

"이번 게이트는 짐을 포함해 소수 정예로 정찰부터 시행하겠다. 왕국기사급 이하의 전투원은 대기하도록 해라."

공략보다는 정찰과 획득, 신속한 후퇴를 목표로 삼는다. 레온의 이러한 판단은 지극히 이성적이다.

"그럼 입장하지. 다들 조심하시게."

레온을 선두로 만신전의 정예들이 차례차례 입장한다. 그렇게 야피가 마지막으로 입장했을 때였다.

-쾅!

게이트에서 쏟아진 굉음과 함께 무언가가 튕겨 나왔다.

"큭…!"

"폐하?!"

게이트에서 튕겨 나온 인물은 다름 아닌 레온.

[중복된 인물을 발견하였습니다. 게이트에 입장할 수 없습니다.]

게이트 내부. 그것은 레온을 거부하며 광대한 성력을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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