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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7

126. 소꿉친구 – 두 추기경

“네. 콘라드 왕실에서 보내준 기사단을 이끌고 왔습니다. 미하에르 추기경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보고를 올리려 합니다.”

“이쪽입니다. 안내해드리죠.”

오필리아 사제는 베르크 추기경과 나란히 걸으면서 잠시 한담을 나누었다.

오필리아 사제에게 베르크 추기경은 단순한 상급자가 아니었다. 그녀가 사제가 아닌 수습생이었을 무렵, 베르크는 교육기관의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당시 베르크 사제는 성전사였다가 사제가 된, 매우 독특하고 이례적인 이력을 가진 선생님이었다.

훤칠한 풍채와 보기 드문 은발 머리카락 덕분에 그는 ‘닭의 무리 가운데 한 마리 학(群鷄一鶴)’처럼 돋보였고, 수습생이었던 오필리아는 그를 존경했다.

시원하고 훌륭한 강의가 인상 깊기도 했거니와 치열하게 자신의 연구에 몰두하는 모습이 멋있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오필리아가 사제가 되기도 전에 그 학은 ‘이 세상 모든 이들은 사제가 될 수 있다’는 [만인사제설]을 발표하면서 일약 슈퍼스타로 등극해 버린다. 지금까지도 최고의 신학자로 꼽히는 미하에르 추기경과 대등한 신학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하지만 [만인사제설]은 교회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기강을 흔드는 급진적인 이론이었다.

베르크 사제는 미하에르 추기경과 설전을 벌인 뒤, 이를 인정하듯 신분제를 옹호하는 논문들을 추가로 발표하고, 콘라드 왕국의 추기경으로 발탁되어 교단을 떠났다.

오필리아는 베르크 추기경이 마지막 수업을 끝내며 남긴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의 과거에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허나 신께서는 죄를 지었느냐 짓지 않았느냐로 인간을 구별하지 않으십니다. 감히 추측하건대 신께서는 그 시련을 통해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끌어내려 하심이 아니셨을까… 생각합니다. 그럼 모두에게 의미 있는 시련과 극복이 있기를 바라며, 이상 ‘피조물의 책임’ 수업을 마치겠습니다.”

“정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오시는 길이 녹록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과거를 떠올리던 오필리아가 베르크 추기경의 초췌한 몰골을 언급했다.

근 이십 년 만의 해우였지만,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그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베르크 추기경은 언제나 새하얀 사제복을 입는 깔끔한 선생님이었다.

한데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옷은 언제 갈아입었는지 흙먼지가 잔뜩 묻어있었고, 얼굴과 백발 머리는 문지르거든 때가 밀려 나올 것처럼 푸석푸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도가 등장했다는 소식을 듣고 베르크 추기경은 콘라드 왕국에서 예까지 쉼 없이 달려온 것이었다.

“이런 큰 난리가 났는데 고생이랄 것이 있겠습니까. 먼저 씻고 싶기는 하지만 조금 미루어야겠군요. 악신의 사도는… 으음, 곧 도착할 것 같군요.”

베르크 추기경이 힐끗 남쪽을 바라보곤 말했다. 오필리아도 한층 더 붉어진 산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으나 곁에 있는 베르크 추기경이 더욱 듬직하게 느껴졌다.

이윽고 베르크 추기경과 오필리아 사제는 미하에르 추기경의 막사에 당도했다.

그런데 그들은 추기경의 막사에 들어갈 수 없었다.

미하에르 추기경은 십자교회 전체를 통틀어 가장 높은 직위를 차지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작은 텐트를 쓰기를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맹물만을 마시고, 보라색 숄도 두르지 않으며, 남루한 사제복을 아껴 입는 그는 모든 성직자의 귀감이었다.

그래도 직위가 직위인지라 그의 텐트 앞에는 커다란 탁자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곳에는 이미 손님이 와 있었다.

적갈색 머릿결을 날리는 클레오 드 프레데릭 왕자였다.

그는 베르크 추기경의 어깨에 걸린 보라색 숄을 알아보곤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추기경님이시지요?”

본래 왕족은 자신을 스스로 소개하는 법이 없었으나, 왕자는 개의치 않고 먼저 이름을 밝혔다. 베르크 추기경도 고아한 예법으로 너그러운 왕족을 칭송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할 일을 다 한 오필리아가 돌아가고, 베르크는 미하에르 추기경에게도 인사했는데, 아무래도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숙적인지라 조금은 어색한 인사말이 오갔다.

베르크 추기경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콘라드 왕국의 제2, 제3 기사단과 루티나 교회의 모든 성전사들을 데려왔습니다. 인원은 기사 이백 명, 성전사 오십 명입니다.”

“오! 콘라드 왕국에서 힘써주었군요. 벨리타 왕국과 아스틴 왕국은 전쟁 중이라며 기사를 보내주지 않았는데… 베르크 추기경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왕자의 치하에 베르크는 잠시 겸양을 떨었고, 미하에르 추기경도 기쁘게 웃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백오십 명이면… 따로 막사를 꾸리지 않아도 괜찮겠군요. 군영 오른편에 자리를 마련해드리겠습니다. 마침 악신의 사도를 상대할 때 기사들을 어찌 배치해야 할지 의논 중이었습니다.”

주제가 빠르게 넘어가려 하자, 베르크 추기경이 손을 들었다.

“그 외에도 보고드릴 실인원이 더 있습니다. 대략 육백 명 정도…”

“병사들을 데려오셨습니까? 악신의 사도를 토벌하는데 병사들은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모두에게 축복을 내려주어야 해서 솔직히 득보다는 실이 더 큽니다. 아쉽겠지만 그들은 돌려보내심이 좋겠습니다.”

베르크 추기경은 잠시 주저했다.

이런 식으로 밝히고 싶지 않았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병사들이 아닙니다. 모두가 신력을 품은 이들입니다.”

“방금 육백 명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콘라드 왕국의 사제들을 모아 오셨나 보군요.”

‘그 촉박한 시간에 애썼구나’ ─ 생각하는데 베르크 추기경은 그의 기대를 깨뜨렸다.

“아니요. 제가 키운 아이들입니다. 그들은… 수도교회에서 교육받지 않았습니다.”

“뭐, 뭐라고요?”

미하에르 추기경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허!” 탄식하고야 말았다. 이 인간이 언제고 사고를 칠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육백 명?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다니.

그는 왕자 앞이라 화를 내지는 못하고, 나지막이 추궁했다.

“비인가된 사제들을 키우셨군요. 그런 짓을 보고도 없이 멋대로 하시다니, 대체 교회의 의식을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베르크 추기경은 잠시 답하지 않았다. 역겨움이 목에 걸려서.

그는 오래전부터 미하에르 추기경의 선민의식(選民意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하에르 추기경은 자신과 사제들이 신의 선택을 받았다 여기며 선택받지 못한 수도사들을 차별했는데, 이는 베르크에게 참을 수 없이 눈꼴 사나운 행위였다.

예로부터 교회의 의식을 통과한 사제를 신께 간택 받은 사람으로 여기는 풍조가 있는 건 사실이었다.

해서 의식에 탈락한 수도사들에겐 잡다한 업무가 할당되고, 사제들에겐 제사를 올린다거나, 감찰 명목으로 순례를 다녀오는 등의 중요한 일이 전담되는 경향이 있었다.

허나 이런 차별을 노골적으로 언급하는 건 큰 실례였다.

신을 모심에 있어서 신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사제와 수도사 모두 같은 성직자로서 서로를 존중했다.

그런데 미하에르 추기경은 그렇지 않았다.

은근히 수도사를 깔보았고, 그가 추기경이 된 이후, 수도사가 각 마을의 교회를 맡거나 고위 성직자로 임명되는 경우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니 [만인사제설]을 주창한 베르크와 미하에르 추기경은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더해, 사람들이 잘 모르는 비밀 하나를 베르크는 알고 있었다. 대사제와 추기경들만 알음알음 아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비밀이었는데, 미하에르 추기경은 왕족이었다.

그것도 정통 왕위 계승권자.

미하에르 추기경의 본명은 ‘크메안 드 타탈리아’. 따지자면 현재 벨리타 왕국의 왕인 ‘카로만 드 타탈리아’의 큰할아버지였다.

젊을 적, 미하에르는 후계자로 선택받지 못했다. 한참 어린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겼고, 크게 실망한 그는 교회에 투신했다.

이름을 미하에르라 고쳐 지은 그는 십자교회의 일개 수습생이 되어 왕위에 오르지 못한 자신의 한스러운 과거를 지워버렸다.

그런 미하에르였으니 사제와 수도사를 가르는 의식의 순간, 성녀님께 올린 질문으로 신의 관심을 받았을 때 받은 안도감이란… 범인이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허나 베르크는 이에 전혀 공감할 수가 없었다.

아마 자격지심 때문이겠지만, 그저 역겹게 느껴질 뿐이었다.

베르크 추기경은 서자였다.

귀족도 평민도 아닌, 난잡한 신분으로 태어나 차별받았고, 가문에서 쫓겨난 그의 본명은…

“자자, 비인가된 사제님들이라도 지금은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때, 클레오 드 프레데릭 왕자가 끼어들었다. 짝! 손뼉 쳐 냉랭해지려는 분위기를 수습한 그는 두 추기경을 살피며 슬며시 미소지었다.

“저희 왕실 기사단 군영 옆에 자리가 남았습니다. 도합 팔백 명 정도이지요? 그만하면 공간이 충분할 겁니다. 텐트나 수통 같은 군용품이 부족하시다면 지원해드리겠습니다. 준기사들까지 데려와서, 군용품을 넉넉하게 챙겨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급히 달려오느라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실례지만 보급관을 소개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물론입니다. 아낌없이 지원하라 이르겠습니다. 악신의 사도를 토벌하는 대업을 앞두고 저희끼리 물자를 아껴서야 되겠습니까.”

왕자는 찡긋, 윙크하며 미하에르 추기경을 향해서 살짝 손을 벌렸다.

그러면서도 다른 손 검지와 중지로 탁자를 지그시 짚은, 자신이 본의 아니게 주도권을 잡은 걸 양해해 달라는 몸짓이었다.

십자교회에 종속된 프레데릭 왕가의 왕자 따위가 추기경의 질문을 가로막았으니 마땅히 보여야 할 행동이기도 했다.

그러나 클레오 드 프레데릭의 행동은 다분히 가식적인 면이 있었다.

그는 미하에르 추기경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이 두 추기경의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걸 눈여겨보았다.

미하에르 추기경은 팔짱을 꼈다.

왕자와 베르크 추기경의 대화를 방관하며 차차 화를 가라앉혔다.

‘그래. 당장은 악신의 사도를 처리하는 게 더 급해. 하지만 육백 명이라니.. 그렇게 마구잡이로 신력을 나눠 받은 자들이 도움이 되긴 할까? 쯧.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그는 당면한 문제를 먼저 해결할 생각이었다. 베르크 추기경을 실각시키는 건 차후에 고민할 일이다. 타 왕국의 귀족들을 끌어모으고 있는 저 왕자의 처리와 마찬가지로…

“기사단의 편제를 수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당장 합이 맞지 않더라도 기사와 성전사를 분리하기보다는 조금씩 섞는 게 더 나은 효과를 발휘하리라 생각합니다.”

“축복은 전투 직전에 내리기보다는 미리 내리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래야…”

“그럼 준기사들은…”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세 사람은 미하에르 추기경의 작은 텐트 앞에서 악신의 사도를 어찌 토벌해야 할 것인지 밤새도록 토론했다. 그리고 며칠 뒤, 토벌대는 악신의 사도를 마주하였다.

새까만 흑마를 타고, 산과 넓은 초원을 붉게 물들이며 다가온 사도. 그는 예상과 달리 가이단 후작이 아니라, 웬 무표정한 청년이었다.

고작 성년이 됐을까 싶을 정도로 어린…

– 푸르르르르르륵.

반테가 길게 투레질했다.

인간을 짓밟고 싶다는 듯 땅을 긁어내는 그 흑마의 눈동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텅 비어버린 하얀 동공에는 오직 굵은 혈관들이 그물처럼 촘촘하게 솟아 있었는데, 그것에서 이전의 약삭빠르지만 순박했던 눈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레브는 눈앞의 군대를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무려 오천 명의, 그것도 기사와 준기사, 사제와 성전사로만 이루어진 강력한 군대였으나 그는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가자.”

반테는 주인의 명에 복종했다.

섬전과도 같은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하자 토벌대의 기사들과 성전사들도 말 등에 올라 돌격 대형을 갖췄다.

그때, 토벌대의 가장 후열에 자리 잡은 일단의 무리가 합창했다.

“거룩한 주신의 아들딸이 여기에 있나이다!”

사제복이 아닌 평복을 입은 그들은 베르크 추기경의 ‘그라니아 보육원’에서 자라난 청년들이었다.

서른 살이 조금 못 되는 청년들부터 어린 소년, 소녀들까지 골고루 섞여 있었는데, 그들의 꾀꼬리 같은 음색이 드넓은 평원에 거룩히 울려 퍼졌다.

그들은 신성 주문을 배우지 못했다.

신성 주문은 분명 주신의 신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수단임이 틀림없었으나, 문법이 대단히 어려운 고대어를 배워야 했기에 베르크는 목소리에 신력을 담아 뱉어내는, 다소 원시적인 방법을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옵소서.”

레브는 기분이 아주 나빠졌다. 노랫가락에 담긴 주신의 신력이 여과 없이 그의 뇌리에 파고들었을 뿐만 아니라, 마차를 타고 떠나는 레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레나를 떠올리면 이상하게 머리가 어지러웠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 하는 의문도 의문이지만, 아버지를 죽여버렸을 때처럼 견디기 힘든 죄책감이 뜬금없이 쏟아져 그를 괴롭혔다.

“꿋꿋이 이겨내어 당신의 자랑이 되고,”

결국, 레브는 “입 닥쳐라!” 외치며 검을 뽑았다. 저 시끄러운 종자들을 침묵시키고자 반테의 배를 험하게 걷어차며 재촉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삶을 증명하겠나이다.”

대형을 갖춘 성전사와 기사들도 말을 타고 돌진했다.

천 필이 넘는 기마대가 세 갈래로 나뉘어 다그닥 다그닥, 지축을 흔들었고, 준기사들도 함성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그들의 뒤에서는 도합 천 오백이 넘어가는 사제들이 축복을 아낌없이 내려주고 있었다.

“그러니 신이시어! 지켜봐 주소서. 당신의 아들딸이 싸우는 모습을!”

그렇게 일 대 오천이라는 터무니없는 회전(會戰)의 막이 올랐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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