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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9

129화 라이온하트(2)

레온 드라고니아 라이온하트의 치세 63년. 제국 수도에 군주급 악마 말루스 소환.

레온왕 62년 성물 호송임무 중 전멸한 꿈과 죽음의 성배기사 제레아를 제외한 열한 명의 성배기사, 신관장들을 이끌고 혼돈의 군세를 공격.

레온왕 62년에서 66년에 이르는 전쟁 끝에 혼돈의 군주 말루스 격파.

혼돈의 악마군단 133만 및 제국 13선제후 산하 악마추종자 98만 격멸.

바다와 파도의 성배기사 마난 승천.

생명과 풍요의 성배기사 킬리안 승천.

14개 왕국 기사단 약 3천여명 전사.

편력기사 일만여명 및 왕국군 27만 전사.

제국인 및 왕국인 2,270만 명 사망.

레온왕 66년 겨울.

악마군단 2차 대규모 침공 개시.

지혜와 탐구의 악마군주 카라카엘.

쾌락과 타락의 악마군주 도트라돈.

살육과 파괴의 악마군주 스카블러드.

산하 악마군 천삼백만. 악마 추종자 및 짐승신의 이교도 오백만 이상.

제국 소멸.

엘프 숲 전소.

드워프 산맥 전멸.

동방 하늘왕국 멸망.

라이온하트 왕국 영토 십분지 구 황폐화.

레온왕 85년.

왕국은 멸망을 앞에 두고 있었다.

* * * *

연합군이 주둔한 도시 만신전은 어딜 가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병사들은 수시로 군영 주변을 경계하며 평민 경기병들이 수시로 정찰임무를 나가며 무력개입이 필요한 곳에서 왕국 기사단을 호출하는 신호탄을 터뜨렸다.

신관들은 저마다의 성법을 이용해 작물을 자라나게 하거나 병장기를 만들었고, 피난민들도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거들었다.

참호를 만들고, 둔전을 경작하고, 병사훈련을 받는다.

20년이 넘어가는 악마와의 전쟁 속에서 그들은 일치단결하여 전쟁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잔존병들을 합류시키러 남부로 가셨네. 곧 돌아오실 테니 대기하고 있게.”

성배기사 길링엄은 베아트리체 일행을 군영에 임시배속하고 제 임무를 찾아 떠났다.

그동안 일행들은 저마다 할 일을 찾았다.

베아트리체는 당초 목적이었던 군라르의 모종에 대해 찾기 위해 숲의 현자들을 찾았고, 야피도 정보정찰을 위해 미니멀 사이즈의 본체로 주변을 나다니기 시작했다.

남은 건 하리와 재혁 그리고 수호와 소연.

네 명의 기사들은 한동안 갈팡질팡하다가 군영의 잡일을 돕기로 했다.

“바다와 파도의 신녀시라고요?”

“저, 전쟁과 불꽃신님도 모시고 있어요!”

하리의 말에 놀라워하는 병사장. 그는 하리의 이국적인 차림을 보며 왕국에서도 변방 중의 변방 출신으로 추측했다.

“그럼 신전으로 가 신도들을 보살펴주셨으면 합니다.”

“아, 옛! 근데 저… 전투가 전문인데…….”

“그렇습니까? 음, 신전 소속은 저희 관할이 아닌지라. 일단 이사벨 신관장님이나 아냑 대성녀님을 뵙고 말씀드려주십시오.”

하리도 당장 할 것도 없었기에 병사장이 지정한 곳으로 향했다.

“음, 신전이라고 했으니까…….”

이곳의 지명이 만신전이듯 만신전의 위치는 누가 보아도 도시의 정중앙이다.

도시 어디에서나 보이는 거대 랜드마크를 향하던 하리는 수천 개나 되는 계단 앞에 압도되고 말았다.

“와… 이걸 언제 다 올라가지?”

이럴 줄 알았으면 말이라도 타고 올 걸 그랬나?

하지만 정말로 말을 타고 올라갔다간 불경한 자로 낙인찍힐지도 모른다. 보아하니 주변의 신자들도 걸어서 올라가는 듯하고.

-끙차! 끄응차!

그렇게 얼마나 올라갔을까? 3분의 1쯤 다가왔을 때였다.

다그닥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접근하며 힘겹게 계단을 올라가는 하리 앞에 멈춰서는 마차.

“자매님, 마차를 두고 어째서 걸어가시나요?”

“엇. 어엇?”

마차 ‘창문이 열리며’ 드러낸 목소리의 주인공은 주인공은 갈색머리의 수도자였다.

하리는 갑작스레 불린 것보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찬연한 기운에 화들짝 놀랐다.

‘어, 엄청난 성력이야… 폐하하고도 비교되는 수준인데?’

성배기사들도 만만찮았지만, 그녀의 성력은 가히 사자심왕과 필적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 물론 그것은 지구의 레온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곤 해도 이토록 끝을 알 수 없는 성력을 지닌 존재라니?

“갑자기 불러 놀라셨군요. 미안해요. 괜찮으시다면 함께 가시겠어요?”

“가, 감사합니다.”

마차… 타도 되는 거였어?!

그러고 보면 드문드문 신전의 꼭대기를 향해 마차가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리는 냉큼 마차에 올라탔다.

“만신전에 처음 오시는 형제님들이 흔히 착각하시는 부분이죠. 업무용 마차로가 있으니 앞으로는 그쪽을 이용하시면 된답니다.”

“가,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성직자용 길이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하리가 고개를 꾸벅이자 상대 쪽도 고개를 젖히며 인사해왔다.

“반가워요, 저는 아냑 프로테시아. 아리아나 님의 미천한 여인이랍니다.”

“바, 반갑습니다. 한하리예요.”

“…….”

“……?”

아, 하리가 부언을 붙였다.

“페토스 님과 포마 님의 신녀입니다.”

“흐음?”

아냑이라 밝힌 여인은 하리를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두 신을 동시에 모시다니 독특한 분이시군요.”

아냑은 하리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하리에게 깃든 강력한 두 신의 성력을 감지하곤 놀라운 듯했다.

“하지만 그 포마 님과 페토스 님의 신녀라니…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아, 알아주시는군요?”

하리는 제게 공감해주는 아냑에게 감동했다.

사나운 전쟁군주인 페토스는 허구헌 날 전공을 올려야 하느니 쪼아대지, 포마는 종종 만신전 내 거북이에 깃들어 성희롱을 한다.

신과 연결되었다는 것은 처음에는 신기하고 신비로운 경험이지만, 그것도 신 나름이다.

“아는 분께서 두 신의 열렬한 총애를 받으시거든요. 뭐, 성격은 서로 맞아서 큰 고생은 안 하는 모양이지만…….”

“그 두 분하고 성격이 맞다니, 성격 파탄자 아닌가요?”

“으음… 관점에 따라서요. 밀수선을 붙잡았을 때, 여자 해적을 부정 탄다고 뱃머리에 매단 것은 참…….”

“아앗! 세상에 그런 인간이 또 있을 줄이야!”

“설마 신녀님도?”

하리의 끄덕이는 고개에는 말 없는 회한이 담겨있었다.

아냑과의 대화를 나누다 보니 아냑이 생각보다 높으신 분이라는 걸 짐작했다.

하리는 인간의 것을 벗어난 카리스마를 지닌 이들을 안다.

사자심왕 레온과 마술사 여왕 베아트리체.

레온이 숭고함을 지닌 날 것 그대로의 폭력성과 권위를 지닌 존재라면 베아트리체는 너무나 강렬하고 화려한 마력을 지닌 존재.

둘 모두 ‘왕’이라는 신분에 걸맞은 강렬한 존재감을 지닌 이들.

반면 아냑은 완전히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그저 무한한 사랑과 녹아들게 만들 정도로 따뜻한 기운. 왕은 아니나 종교계의 거두 같은 자애로운 분위기.

그리고 그런 하리의 추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대성녀님, 오셨습니까.”

“대, 대성녀님?!”

하리는 자신의 추측이 들어맞은 것과는 별개로 이 여성이 엄청난 권위를 가진 인물이란 걸 깨달았다.

안 그래도 레온 옆에 있으면서 계급주의의 끝판왕을 나날이 체감한 하리다. 그녀는 넙죽 엎드리며 외쳤다.

“망극하옵나이드아! 성하!”

하리의 얼치기 사극말투에 잠시 침묵하는 대성녀 아냑. 그녀는 훗훗, 하고 웃더니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지 마세요, 자매님. 신들 앞에서 저희는 평등하답니다.”

“예, 옛? 어음… 폐하께서는…….”

무심코 레온이 한 말을 인용하려다 입을 막는 하리. 아냑이 고개를 기웃거렸다.

“폐하를 만나본 적이 있으시다니, 제법 큰 신전의 신녀셨나요? 제가 모르는 신녀가 있었다니.”

“아, 아니, 그게… 우연히요. 폐하께선… 계급을 중시하시는 분이었던 기억이 있어서요.”

“그분은 사자심왕이시니까요.”

인간 사회의 계급을 초월한 존재. 이 세계에서 사자심왕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다.

“사람의 몸으로 신에 이른 반신이 어찌 우리들 같은 평신도와 같을까요.”

“그, 그렇군요.”

“그나저나 마침 잘 됐군요, 자매님. 자매님에게서 강력한 성력이 느껴지는데,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어…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요.”

하리는 경솔하게도 아냑의 제안을 냉큼 수락하고 말았다.

* * * *

“대성녀님, 오셨습니까.”

“대성녀님.”

“대성녀님…….”

아냑의 등장에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신전의 신관들.

‘역시 되게 높은 사람이었어.’

하리가 알기로 만신전에서는 사자심왕이 정점. 성배기사와 신관장이 그 다음 서열인 것으로 알고 있다.

성녀라는 게 잘은 몰라도 대성녀라 불릴 정도면 성배기사나 신관장과 동급 또는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이사벨 신관장님은 어디 계시죠?”

“달의 기운을 흡수하고 계십니다.”

“저는 먼저 대축성의 의식을 준비할 테니 이사벨 신관장님도 내려와 달라 전해주세요.”

“……!”

대성녀의 말에 화색이 도는 신관들. 그들은 대성녀의 말에 무언가를 추론한 모양이었다.

“폐하께서 승전하여 돌아오시는군요!”

“악종들의 피로 젖으셨을 테니 정신적으로 피로하실 겁니다. 서두르지요.”

폐하. 즉 당대의 사자심왕 레온을 말함이다.

하리는 이곳에서도 레온이 절대적인 지지와 숭상을 받는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아니, 오히려 지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숭배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레온 폐하가…….”

과연, 자신이 아는 레온 폐하일까? 게이트에서 함께 입장했으나 사라진 것을 보아 제레아 때처럼 따로따로 떨어진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마 높은 확률로 이 게이트의 레온을 구현한 NPC겠지. 그럴 것임을 알았어도 하리는 두근거릴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폐하는 어떤 분이셨을까?’

-콰릉!

비가 내린다. 천둥벼락을 동반한 폭우는 성배기사가 의도적으로 벌인 것이라 예고 받았기에 하리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라이온하트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번잡스럽게 움직이는 신전 내부. 한 신관이 외친 말과 동시에 벼락이 내리치며 소리를 앗아간다.

잠시간 밝게 빛난 세상 속, 차갑게 식은 갑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

그것은 하리에게도 낯선 모습이었다.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 괴리를 일으키는 잔혹한 현실.

찐득하게 들러붙은 검은 피들이 폭우 속에서도 씻겨나지 않은 채, 투구의 바이저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안광.

쏟아지는 빗줄기를 통과한 갑주의 기사는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신전 안으로 들어선다.

평소처럼 권위적이되 경쾌한 만신전의 레온 폐하는 온데간데없고, 검게 칠한 피비린내만이 가득한… 죽음의 사도.

“흐읍…!”

들이키려던 숨을 양손으로 막는다.

하리는 그것이 무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었다.

두려움. 인간의 형상을 한 죽음 앞에서 피부가 오싹거리고 심장이 쿵쾅 거린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 신관들에게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들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살벌하시군, 폐하. 애들 잡겠어.”

“”……!!””

모두가 그 불경함에 경악했다. 평소 자신들이 알던 사자심왕이라면 몰라도, 저토록 이질적인 반신을 상대로 감히 누가 가벼이 말을 걸 수 있단 말인가?

“이사벨.”

바이저 속에서 들려오는 둔탁한 목소리. 푸른 안광이 향한 곳에는 다른 신관들보다 좀 더 개방적인 복장의 검은머리 신관이 있었다.

“달의 신관장님… 어전입니다.”

그 불경함에 어렵사리 지적하는 한 신관. 그러나 검은머리의 신관장은 입꼬리를 비틀며 그것을 무시했다.

“내 살아서는 왕의 처형이고 죽어서는 디나 님의 첫 번째 사냥꾼인데, 뭘 새삼.”

달과 순결의 여신 디나의 신관장은 스스로가 무소불위임을 주장하며 죽음 앞에서 패악을 계속했다.

“폐하, 거기서 쓸데없이 무게잡지 말고 얼른 오쇼. 대성녀가 기다리고 있으니.”

“지금 가지.”

하지만 그것이 효과는 있었던 모양이다. 사자심왕의 갑주에서 느껴지는 난폭함이 옅어져 가고 질퍽거리며 신전을 걷는 그를 따라 검은머리 신관장이 따라나선다.

“아, 대축성 의식에 참여할 이들은 알아서 따라오도록 해.”

“…….”

하리는 저토록 두려운 존재를 감히 따라나설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의외로 신관들은 군말 없이 그를 따라나선다.

절대적인 신뢰가 있는 것이다. 나라의 왕이자 신전의 정점에 있는 사자심왕이 결코 자신들을 해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하리는 서둘러 레온의 뒤를 따랐다.

* * * *

대축성 의식이 벌어지는 곳은 거대한 욕탕이었다. 정확히는 성수를 가득 부어 채운 신성한 공간.

하리는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공기를 가득 채운 성력에 감탄했을 정도다.

“어서 오세요, 폐하. 60일 만의 복귀시군요.”

그곳에서 다른 신관들과 대기하고 있던 대성녀 아냑이 레온을 반긴다.

“록슬리 경과 길두스 경이 함께했다고 들었습니다. 결과는 어떠셨는지요.”

“별거 없었다. 놈들의 군세를 30만은 깨뜨렸지.”

“승전이로군요. 모두가 기뻐할 겁니다.”

아냑의 말에 레온은 시니컬하게 반응했다.

“국지전에서의 전술적 승리일 뿐이다. 빼앗긴 왕도를 되찾는 건 불가해 보이더군.”

“그래도 승전은 승전이지요. 갑옷을 벗으시지요. 씻겨드리겠습니다.”

레온은 이에 투구를 벗었다. 그러자 갑옷 내부의 열기가 일순이지만 연기와 함께 증발한다.

투구 내부의 얼굴에는 검은 얼룩이 가득했다.

-치이익!

신관들의 도움을 받아 벗은 갑옷은 더욱 심했다. 들끓는 용암 속이라도 걸었던 건지 검은 얼룩은 실시간으로 사자심왕의 육체를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폐하…….”

대성녀가 측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사자심왕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며 손짓으로 부정한다.

“추악한 탐구의 악마를 산 채로 찢어발긴 덕이다. 놈의 고통과 비명이 저주로 몸에 들러붙었으나 감히 본왕을 해하지는 못하지.”

“겁나 아파 보이는구만, 폐하.”

“이사벨 신관장님…….”

왕에 대한 무례에 슬쩍 시선을 주는 아냑. 하지만 레온은 개의치 않았다.

“되었다. 달의 신관장의 무례야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무엇보다 순결의 여신께는 짐이 진 죄가 크다.”

“헤헹~ 그렇다네. 자자, 정화해줄 테니 성수 안으로 들어가셔.”

레온은 갑주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검은 얼룩이 진 육신을 성수에 담갔다. 그러자 치이익, 하고 부글부글 끓는 얼룩들.

그것이 고통스러울 법도 한데도 레온은 꿈쩍도 안고 대성녀와 달의 신관장의 손길을 기다릴 뿐이다.

“정화토록 하겠습니다. 이사벨 신관장님, 한하리 신녀님도 이리로.”

“엇? 예, 예!”

하리는 이사벨과 함께 잠길 정도로 가득 찬 성수 안에 들어가 레온 앞에 섰다.

이성이 실오라기 하나 없이 눈앞에 있는데도 하리의 눈빛에 실린 건 부끄러움이 아닌 안타까움.

필시 자신이 상상도 못할 전투를 치르고 왔을 그가 겪고 있는 피로에 공감한다.

“이 얼룩들은 대악마… 아니, 대공급이로군요.”

“쳐죽인 악마 놈들 계급을 일일이 신경 쓴 적은 없다만, 지혜의 대공인가 뭔가 하는 새대가리긴 했지.”

무려 대공급 악마가 죽어가면서 남긴 저주. 지금부터 이 세 사람이 정화해야 할 저주이기도 했다.

“하리 신녀님은 신성한 불꽃으로 얼룩을 태워주세요. 저는 빛의 권능으로 정화하겠습니다.”

“난 가장 순결하지 못한 놈에게 순결의 축복을 내려야겠고.”

이사벨이 히죽거리며 레온의 등에 달라붙은 얼룩에 손바닥을 가져다댔다. 치이익! 하고 이사벨의 손바닥이 타들어갔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달과 순결의 여신이시여. 여기 당신의 순결한 처녀이나 첫 번째 사냥꾼이 기도드리옵니다.”

레온이 출전한 순간부터 매일 밤마다 달의 기운을 축적한 그녀의 성력이 단번에 쏟아졌다.

달과 순결의 여신이 가진 권능을 행사하기 위해선 순결한 처녀일 것, 사냥의 신이기도 한 그녀에게 바칠만한 충분한 공물이 있을 것.

“순결함에 가장 대칭되는 사악한 존재를 소멸시켰으니 그 어떤 사냥감보다 크다 이를 수 있겠지요.”

이사벨은 레온이 이룬 업적을 언급하며 그것을 대신했다.

“하여, 세상의 순결함을 관장하시는 자여. 당신의 처녀들을 수호하는 가장 위대한 전사를 축복하소서.”

레온의 가장 얼룩진 부분이 씻겨져 나갔다. 그리고 그건 대성녀 쪽도 마찬가지. 양손으로 성수를 담아 레온의 정수리에 부으며 아냑의 입술이 이마에 닿는다.

“세상을 비추는 광명이시자 누구보다도 의기로우신 정의의 여신이시여. 당신의 첫 번째 기사의 고통을 이 미천한 몸에게 분담하소서.”

신관장과 대성녀. 두 사람의 축성의식은 황홀할 정도로 신성하여 하리는 넋을 놓고 그것을 지켜봤다.

이것이 라이온하트의 정점에 있던 성직자들의 힘.

베아트리체나 야크트 스피너조차 진실로 믿음에서 오는 신성함은 없었다.

그 둘은 그저 신들의 힘을 대행하는 자들일 뿐. 하지만 눈앞의 두 사람은 진정 신들과 통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도… 될까?’

나름 신들이 선택한 신녀라면… 하리는 전쟁과 불꽃의 신성 페토스의 힘이라면 이 저주를 태워버리는 것도 가능 할지도.

‘페토스 님…….’

평소처럼 신들을 찾는다. 현실의 만신전을 품은 레온이 없는 지금, 이곳에서 그녀의 기도를 받는 이는 누구일까.

[……누구냐, 넌.]

항상 듣던 격렬한 전쟁 신의 음성. 하지만 그 음성에는 하리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하리는 자신에게 내려진 신의 축복과 연결성을 망설임 없이 끌어올렸다. 그러자 강렬한 불꽃이 피어오르고 그것이 레온에게 달라붙은 얼룩을 태운다.

“돼, 됐…?!”

시선이 마주쳤다.

푸르른 벽안이 꿰뚫듯이 하리를 응시한다.

왕족을 뻔히 쳐다보는 것은 무례라며 한소리 들었던 하리지만, 이렇게 레온이 스스로 자신을 응시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질 않는다.

“넌 누구──”

레온의 의문이 하리를 향하던 그때, 바깥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각하! 안 됩니다!”

“대축성 의식 중입니다!”

만류하는 신관들을 헤치고 축성의 의식장에 난입하는 누군가.

그것은 강렬한 검은색을 지닌 여인이었다.

흑단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에 아쿠아마린처럼 푸르른 벽안. 드레스보단 현재의 피 묻은 제복이 더 어울리는 강렬한 인상의 여자.

“카리나, 어쩐 일이더냐.”

카리나라 불린 여인은 성수에 몸을 담근 레온을 향해 멈춤 없이 다가오더니 경례와 함께 허리를 숙였다.

“승전 축하드립니다, 라이온하트 폐하.”

“……그래, 드라고니아 대공. 무슨 용건으로 짐을 찾아왔는가.”

카리나 드라고니아 대공. 현 사자심왕 레온 드라고니아 라이온하트의 후계.

그녀는 아버지를 향해 지극히 사무적인 시선으로 말했다.

“저희 북부군은 현시점으로 연합을 탈퇴할 것을 선언합니다.”


           


The Knight King Who Returned with a God

The Knight King Who Returned with a God

singwahamkke dol-aon gisawangnim, The King of Knights Returns with the Gods, 신과함께 돌아온 기사왕님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I returned to Earth as the invincible Knight King. But the Gods came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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