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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31

130. 소꿉친구 – 황동 술잔

레브가 국경을 넘어 신성왕국의 수도 루테티아에 도착했을 때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이었다.

오는 길에 두어 차례의 충돌이 있었다. 그러나 이전의 토벌대에 비하면 사제가 적고, 성전사는 거의 없다시피하고, 병사들까지 동원된 보잘것없는 군대였다.

레브는 놈들을 죄다 죽여버렸다. 죽겠다고 달려드는 적들을 살려둘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다만 마을과 도시들은 그냥 지나쳤는데, 놈들을 모조리 죽여 공양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레나 아이나르와 레오 덱스터를 죽여버린 이후로 그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내가 걔네들을 왜 죽였지?’ ─ 라는 의문이 끊임없이 솟아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바르바토스 님의 사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자꾸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또, 때때로 ‘거울’이 다 떨어져서 큰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의 의문 중 하나였다.

거울이라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바르바토스 님의 신도가 될 때, 아버지가 바친 제물이 거울이었다.

한데 이건 아깝고 자시고 할 일이 아니었다.

신께 바친 것이 뭐가 아깝다는 말인가. 심지어 그건 내 것도 아니었는데… 아니, 내 것이었는데 전부 사용해 버려서 큰일… 내가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레브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루테티아 남쪽의 작은 산에서 하루 노숙한 그는 텐트를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아- 진짜 왜 이러지. 바람을 너무 많이 쐬었나.”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다. 먼 길을 달려오느라 피로가 누적된 탓이다.

어지럽다고 생각하며 레브는 수거한 텐트를 반테의 등에 실었다.

다리가 부러졌던 반테는 기특하게도 바르바토스 님의 신력을 받자 다시 튼튼해졌다. 다리를 조금 절기는 했으나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는데, 이전에 ‘우디’라는, 앞다리가 짧은 말을 타본 덕분이었다.

레브는 산에서 내려왔다. 신성왕국의 거대한 수도, 루테티아가 멀리 있지 않았다.

– 죽여라. 제발 말 좀 들어라.

또 강한 충동이 일었다.

저기 있는 인간들을 죄다 죽여서 그간 더러운 주신의 종자들과 싸우느라 소모한 신력을 보충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하지만,

‘…그렇게 급한 일은 아닌걸. 먼저 레나를 데려온 다음에 생각하자.’

레나도 멀리 있지 않았다.

{추적술}은 루테티아 동쪽에 있는 수도교회를 가리켜 그곳에 그녀가 있음을 똑똑히 알려주었다.

희한하게도 레나를 떠올리면 공양을 올리고 싶다는 마음이 싹 사라졌다. 바르바토스 님께 죄송한 일이 아닐 수 없으나 레브는 그녀를 빨리 보고 싶었다.

이윽고 그는 수도교회의 거대한 정문에 다다랐다.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들과 새하얀 성벽. 갖가지 동상이 빼곡히 자리한 이곳에 와보기는 이번이 두 번째였다.

‘옛날 생각나네…’

엄밀히 말해 그가 경험한 일은 아니었으나, 이전에 여기에서 레나가 쫓겨났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이 성문에 매달려 펑펑 울었을 레나가 어찌나 안쓰럽던지…

허나, 이제는 그런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바르바토스 님의 사도인 내가 친히 그녀를 신도로 만들어 평생 행복하게 만들어 주…

‘그러면 레나가 슬퍼하지 않을까? 좋아하긴 할까?’

“끄윽!”

불쑥 떠오른 반론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여태까지는 레나를 떠올릴 때마다 이상하리만치 혼란스러워졌기에 가능한 한 깊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더는 회피할 수 없는 노골적인 모순(矛盾)에 직면하자 정신이 갈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나, 나는 위대한 바르바토스 님의 사도… 하지만 레나의 꿈은…’

“커어헉!”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레브가 숨을 몰아쉬는 그때, 정문을 지키던 한 젊은 수도사가 오지랖 넓게 다가왔다. 그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비틀거리는 청년의 안위를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괜찮습니다.” 또는 “갑자기 몸이 안 좋네요.” 등의 예의 바른 답변이 아니었다.

“아, 아무 일도 아니다. 내게 말을 걸지 마라. 건방진 것.”

“…네, 실례했습니다.”

귀족이구나.

수도사는 청년의 위압적인 눈빛과 은연중에 흐르는 고아한 {기품}에 놀라 주춤주춤, 본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왔다.

성전사님이 경비를 서고 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더라면 그의 권위를 등에 업고 한 마디 불평이라도 해보았을 것인데…

수도사는 비틀비틀 안으로 들어가는 오만한 귀족의 뒤통수를 쏘아보면서 내심 투덜거렸다.

아쉽게도 지금 수도교회에는 성전사님이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제님들과 함께 악신의 사도를 토벌하고자 모두 떠났기 때문이다.

루테티아의 시민들에게는 이제야 오른 왕국에서 악신의 사도가 출현했다는 소식이 드문드문 알려지는 중이었다.

개중에는 악신의 사도 같은 신화 속에나 나올 법한 괴물이 출현한 게 아니라 오른 왕국에서 내전이 벌어진 게 잘못 알려진 것이라며 반박하는 목소리도 끼어 있었다.

수도사는 다 알고 있으면서도 입을 단속하라는 교회의 명령 때문에 속으로 끙끙 앓고 있었다. 주절주절 떠들기를 좋아하는 그에겐 심한 고행이 아닐 수 없었다.

‘토벌해서 돌아오신 다음에나 말할 수 있는 건가. 죽겠네. 그나저나 저 귀족은 어딜 가는 거야? 저쪽은…’

가서 길을 잘못 찾아가고 있다고 알려줄까 했지만, 기분이 상한 수도사는 “흥! 고생 좀 해봐라. 여기서 길을 잃으면 거기가 거기 같고 저기가 거기 같아서 뱅뱅 헤매게 될 거다.” 중얼거리고선 시건방진 귀족에게서 관심을 끊었다.

* * *

“휴… 드디어 다 읽었다.”

도서관 한쪽 책상에 책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읽던 레나가 끄으응- 기지개를 켰다.

여든일곱 명에 달하는 역대 성녀님들에 관한 기록은 엄청나게 많았다. 오필리아 사제님의 조언으로 그분들의 발자취를 하나하나 짚어본 레나는 작은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어째서 교회가 사제들의 결혼을 금하게 되었는가.

이건 수차례의 회의를 통해 결정된 교회의 관례였고, 성직자는 혼인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퍼져있는 지금은 일견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이었으나, 먼 옛날엔 그렇지 않았다.

고대의 성직자들은 독신 생활을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성녀님이 대륙에 내려지기 전에는 신력은 물론, 십자교회란 게 없었을뿐더러 지금처럼 국교(國敎)로 정해지지도 않았기 때문에 고대의 성직자들은 개인적인 신앙심을 가지고 포교하는 민간인에 불과했다.

그들의 생활상도 평민들의 생활과 다를 바가 없었다.

촌민들과 함께 일하고, 한솥밥을 먹으며 지냈다. 단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선뜻 나서서 민중들을 구제하는 걸 자신의 업으로 삼았다.

그러니 독신 생활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사랑하는 이가 생기거든 아름다운 인연을 내려주신 주신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혼약을 맺었다. 현대의 성직자들과 비교했을 때 고대의 성직자들은 훨씬 자유분방했던 것이다.

그랬던 이들이 십자교회라는 거대한 조직의 구성원이 되면서 점차 갖가지 규율에 얽매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 규율들은 모두 처음에는 좋은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마냥 부정적으로 여길 것은 아니다. 허나 레나가 생각하기에 사제의 결혼을 금하는 규율은 신을 받듦에 있어서 꼭 필요해 보이는 것도 아니었고, 만들어지게 된 연유에도 외적인 영향이 있었다.

사제의 결혼이 금해진 건 아카이아 제국 중기, 티고로프 제5 성인이 추기경으로 있을 때였다.

티고로프 추기경은 수많은 저서를 남긴 위인이었다. 특히 그의 말년에 쓰여진 ‘인식존재론’은 콘스티노의 ‘피조물의 굴레’와 라자르의 ‘피조물의 책임’을 이해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철학서로 인정받으면서 그는 사후에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그렇게 위대한 저서를 남긴 티고로프였으나, 그는 대단히 방탕한 인물이었다.

세 차례의 결혼과 이혼,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게 만든 젊었을 적의 결투와 추기경이라는 직위를 악용한 패악질 때문에 그는 살아생전에 성인으로 추대받지 못했다.

위 내용은 레나도 근래에야 알게 된 것이었다. 일곱 성인의 업적을 다룬 ‘고대 신학사’ 수업에서는 티고로프의 이런 면모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왜 가르쳐 주지 않는지는 알겠다마는…

레나가 여태껏 독파한 ‘성녀실록’에는 이런 내용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티고로프는 사고를 칠 때마다 성녀에게 불려가 혼쭐이 났고, 세 번째로 이혼했을 때는 앞으로 결혼해선 안 된다는 금제를 얻어맞았다.

바로 이 금제가 사제의 혼인을 금하게 된 시발점이었다.

처음에는 티고로프에게만 주어졌던 금제가 ‘성직자는 독신 생활을 하는 편이 신을 모심에 있어서 좋다.’는 논리를 업고 점차 모든 추기경에게, 대사제와 사제들에게까지 확대 적용된 것이다.

물론, 레나의 연구는 이까짓 것을 알아낸 정도로 멈추지 않았다. 왜 확대되었는지를 밝혀내고자 당대의 기록들을 꼼꼼히 분석했고, 역대 성녀님들의 독신 생활이 이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성녀들은 결혼하지 않았다.

단 한 명도.

이건 현재의 사회 통념으로는 당연해 보이는 것이지만, 혼인이 자유롭던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레나는 다니엘의 추천으로 ‘성녀의 탄생’이라는 책도 참고하였는데, 여기에는 수명이 다소 짧지만 수십 년 동안 젊음을 유지하는 성녀가 결혼하지 않는 걸 오히려 이상하고,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당시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비로소 레나는 어째서 교회가 사제의 혼인을 금하면서도 수도사들의 혼인은 딱히 금하지 않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애당초 사제의 혼인을 금하는 규칙이 ‘신력을 지닌 성녀님께서 결혼하지 않으시니, 마찬가지로 신력을 지닌 사제도 결혼하지 않는 게 좋겠다.’라는 당대의 인식을 바탕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그래서 수도사들에게까지 금제가 확대되지 않은 것이다.

실마리를 잡은 레나는 영차영차, 여태껏 읽던 방대한 분량의 ‘성녀실록’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시작했다.

이제 원인과 이유를 알았다.

그렇지만 갈 길은 여전히 멀었다.

원인과 이유를 알았으니, 그래서? 왜 사제가 결혼해도 좋을지, 규칙을 왜 철회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입증하는 게 다음 차례였다.

‘끄응… 쉽지만은 않겠는걸.’

손에 묻은 책 먼지를 탁탁 털어낸 레나는 짐을 챙기며 고민에 빠졌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피조물의 책임’과 결부시켜야 할 것 같아. 아무래도 규율을 완화하는 일이니까, 철학으로 크게 갈라본다면 그쪽이 맞겠지? 베로니안 님께 여쭤봐야겠다. 어떤 책으로 공부를 시작하는 게 좋을지…’

퓨우-, 공부할 것이 산더미다.

앞으로 공부해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하니 피로에 젖은 레나의 얼굴에 되레 미소가 걸렸다.

공부는 그녀에게 재미없고 따분한 일이 아니었다. 데모스 마을에 있을 때는 그날그날 먹거리를 구해야 했기에 평일에 가지 못했던 것이지, 레나는 주말마다 교회에 가서 종일 책을 읽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이곳 수도교회는 얼마나 축복받은 곳인가!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곳.

최근 사제님들이 다들 어디로 파견되어 사라지면서 강의가 일부 폐강되었지만, 여전히 다양하고 우수한 수업을 원하는 만큼 들을 수 있었다.

책도 많았다.

도서관에는 평생 읽어도 다 읽지 못할 만큼 책이 쌓여있었고, 책값도 상당히 저렴했다.

레나는 레브에게 받은 돈으로 곧 의식을 치르며 졸업할 다니엘과 몇몇 수습생들에게 다수의 신학 서적을 중고로 구입했다.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지금, 그녀가 품에 꼬옥 안은 책도 도서관에서 대출받은 것이 아닌, 그녀의 소유였다.

계단을 내려오며 레나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오전 공부는 이 정도로 마치고, 빨리 점심을 먹고 어디 양지바른 곳을 찾아가서 책이나 읽어야겠다.’

식당을 향하기 전에 레나는 기도를 올리기 위해 습관처럼 ‘술잔’을 찾았다.

그런데,

“어라? 이게 어디로 갔지?”

도서관 건물, 1층 계단가에 장식품처럼 덩그러니 비치되어 있던 황동 술잔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분명 아침에 들어올 때만 해도 있었다. 오늘도 아침 기도를 그 십자교회의 문양이 새겨진 술잔에 대고 올렸으니 내가 공부하는 동안에 치워진 게 틀림없었다.

“어레레…?”

레나는 당혹스러웠다. 이곳에 온 지도 반년, 그녀는 여태껏 꾸준히 그 술잔에 기도를 올려왔다.

수도교회에는 기도를 올릴 만한 조각상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고, 조금 더 걸어서 본관에 가거들랑 수십 점의 신물과 네댓 개의 성물이 비치되어 있었지만, 레나는 구태여 거기까지 갈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도서관에 자주 들락거리는 레나였으니 아무래도 가까이 있는 물건이 좋았을뿐더러, 그녀는 어쩐지 그 술잔이 마음에 들었다.

‘이걸 왜 치웠지?’

이런 일은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는 걸까? ─ 생각하면서 걸음을 돌리는 그때,

“앗!”

레나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얼어붙었다가 이내 폭발적인 환희를 내비치며 달렸다.

“레브? 레브 맞지? 세상에! 너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도서관 정문 앞에 레브가 있었다. 레나는 후닥닥 달려가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에게 바짝 다가섰다.

“레나… 끄으윽!”

“살이 많이 빠졌네. 오느라 고생이 많았구나. 그런데 너 어디 아ㅍ…?”

레브의 앙상하게 마른 뺨에 손을 올리던 레나가 멈칫, 그대로 굳어버렸다.

– 하하하하! 고맙구나!

끔찍한 것이 들어왔다. 미끄덩거리는 육중한 무언가가 그녀의 뇌리를 휘감더니 먹음직스럽다는 듯이 혀를 내밀어 살짝 핥았다.

레나는 공포에 질려 “꺄악!”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옅은 날숨만이 새어나갔고, 그게 그녀가 자의적으로 뱉은 마지막 숨이었다. 레나의 눈동자는 그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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