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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32

131. 소꿉친구 – 구멍

“이, 이게 대체…?”

레브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잠시 넋을 놓았다. 레나를 만나는 순간, 온몸에서 힘이 쭈욱 빠졌다. 머리가 깨끗하게 맑아지며 그간 자신이 행한 일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우욱!”

[ 업적 : 첫 살인 – 레오가 살인의 죄책감을 덜 받습니다. ]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죽였다.

아무리 ‘첫 살인’ 업적이 있다지만 수십만의 인간을 모질게 죽여버린 그는 도저히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었다.

[표적 사냥] 디버프에 걸려 피를 쏟아내는 시민들, [덫사냥]에 걸려 발버둥 치는 사람들, 가시나무에 칭칭 얽매여 발악하는 사제들.

검붉게 이글거리며 떨어지는 오러블레이드를 절망적으로 바라보다가 반으로 갈라진 성전사들, 기사들.

끝까지 마법을 난사하려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던 마법사들, 최후의 순간까지도 고귀함을 잃지 않으려 애썼으나 결국 끔찍한 꼴로 쓰러져간 귀족들과 왕족들.

그리고 가시나무 숲에 버려진 레나 아이나르와 레오 덱스터…

모두 그의 손에 죽었다.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우웨에에엑!”

레브는 결국, 풀썩 쓰러져 구토했다. 언제부턴가 뭘 굳이 먹을 필요가 없었으므로 위장은 텅 비어있어서 등을 굽힌 채 울컥울컥, 헛구역질을 반복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죄책감이 덜어지는 건 아니었다.

사냥감이 가느다랗게 이쁜 목을 가졌거든 목을 잘라버렸고, 앙증맞게 반짝이는 눈을 가졌거든 검으로 안구를 꿰뚫어 죽였다. 뿜어지는 피를 아름답다 여기며 흠뻑 뒤집어썼고, 사냥감이 공포에 질려 애원하든, 원망하며 악을 지르든, 그 반응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꺼억… 커어허…”

살 떨리는 죄악감으로 구토에 피가 섞여 나왔다.

그때, 바닥에 이마를 댄 채 몸부림치는 그의 위로 책이 떨어졌다. 꼬옥꼬옥 정성껏 눌러쓴 필체가 가득한 종이 수십 장이 흩날리는 가운데,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 생생한 감촉! 정말이지 오랜 기다림이었다.”

레나의 목소리였다.

레브가 침과 피로 얼룩진 턱을 들어 올렸다. 등을 굽히고 무릎을 꿇은 채 위를 올려다보는 그의 자세는 마치 누군가에게 경배를 올리는 듯했다.

그 꼴이 마음에 들었는지, 눈이 마주친 레나가 씨익 미소지었다. 레브는 엎어진 자세 그대로 꽁꽁 얼어붙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레나의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해맑게 호선을 그린 입술은 여전히 볼록, 곱게 튀어나왔으나, 지나치게 이를 드러낸 탓에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저건 레나가 아니다. 저렇게 웃는 사람이 레나일 리 없다.

“서, 서, 설마…”

“그래. 말을 듣지 않는 나의 사도여. 뭐, 원하는 것이라도 있느냐?”

레나가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레브를 비웃듯이 쿡쿡쿡! 웃었는데, 그 웃음소리는 레나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굵고, 잔혹했다.

그녀는 바르바토스(Barbatos).

본인이었다.

“안 돼!!”

레브가 땅을 박찼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무작정 달려들어 그녀를 넘어뜨리려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발이 움직이질 않았다. 발은 물론 땅을 짚고 있던 손도 땅에 콱 붙어버린 채로 떨어지지 않았다.

내려다보니 손발이 땅을 파고들고 있었다. 팔다리 살갗이 찢어지며 검은 뿌리가 튀어나와 단단한 돌바닥 틈새를 헤집고 들어갔다.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네놈이 더러운 신의 장난감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뭐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다 읽지는 못했다만… 어쨌든 죽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 이년과 마찬가지로. 그러니 말을 듣지 않는 사도는 나무가 되어 있으라. 이 몸은 내가 잘 사용해주겠다.”

바르바토스는 다시 쿡쿡, 웃고는 내면으로 신경을 돌렸다.

이 보잘것없는 소녀의 머릿속에는 정말이지 찬란한 영혼이 담겨 있었다. 주신의 사랑을 듬뿍 받았음이 분명한 아름다운 영혼이다.

성실과 재치, 우수한 오성(悟性), 용기와 희생정신, 낙천적인 성격, 꿈, 정의감, 재빠른 눈치와 건전한 호기심까지… 한 인간이 소유하기엔 지나치게 많고, 좋은 특성들이다.

거기에 더해 성녀라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만치 많은 주신의 은총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대부분은 뭔지도 알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신력을 쏟아부으면서까지 넘어온 보람이 있다.

– 두려워하지 말려무나.

자상하게 속삭이며, 바르바토스가 바들바들 떠는 레나의 영혼을 핥았다. 꿀떡 삼켜버리기가 너무 아까워 구석구석 음미했다.

달다. 혀가 짜르르 울릴 정도로 달콤하다.

그 맛에 감탄한 바르바토스는 자기도 모르게 육성으로 선언했다.

“레아. 너는 이제 나와 한 몸이 되리라. 사도이면서 나와 하나인 특별한 존재가 되어 영원한 축복을 누리리라.”

그리고 꿀꺽 삼키려 했는데, 돌풍이 몰아쳤다. 사방으로 터지듯 휘몰아쳤으나, 바닥에 깔린 종이 쪼가리들에는 미동조차 없는 그 바람을 레아의 육체를 차지한 바르바토스는 느낄 수 있었다.

“…?”

뭔가 변했다.

이 소녀의 정신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혜택 중 하나가 진명이 불림과 동시에 잘그락- 동작했다.

완전히 해금된 것은 아닌지 그러고 말았지만, 바르바토스는 자신이 뭔가 커다란 것을 건드렸다는 걸 알아차렸다.

뭐… 상관은 없다.

이 소녀는 절대로 죽지 않을 테니까. 영원히 내 것이니까…

“안 돼! 안 돼! 레나를 놔 줘!”

그때, 레브가 소리를 질렀다.

개처럼 엎드린 자세로, 팔다리에서는 뿌리가 흘러내리고, 등에서는 가시 돋친 줄기를 뿜어내는 모습이 괴기스럽다.

“뭐라? 네놈은 제 이름도 모르더니 소꿉친구의 이름도 모르는구나. 하기야, 제 과거조차 잊어버린 녀석이 알 도리가 없지.”

“제발! 무엇이든 하겠어. 차라리 날 데려… 아니, 데려가 주십시오! 제발 저를 사용해주세요!”

“….”

바르바토스는 답하지 않았다.

아깝긴 하다. 신의 장난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하지만 이 녀석은 도저히 사용할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녀석은 다른 놈의 소유였다.

아신은 아니었다. 그랬더라면 레브를 사도로 삼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꽤 오랜 시간을 들여 레브를 소유한 놈의 이름이 ‘민서’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렇지만 주신의 문자를 잘 읽지 못하는 바르바토스로서는 더 이상 알아낼 길이 없었다.

그 이후로 속 터지는 나날이 시작됐다.

아예 빼앗지 못하는 것이었으면 아쉬워도 포기하고 말겠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민서’라는 놈의 기척이 하루가 갈수록 줄어들었다.

딱 그만큼씩 레브의 정신을 차지할 수 있어서, 희망 고문도 그런 고문이 따로 없었다.

어쨌든 그래도 희망이 보였기에 바르바토스는 민서가 자리를 비운 공간만큼, 레브가 공양을 올릴 때마다 녀석의 정신을 차지해 나갔다.

그러나 확실한 소유권이 없으니 그 과정은 위태위태할 수밖에 없었다.

레브 녀석이 제 아버지를 죽였을 때, 그리고 다른 신의 장난감‘들’을 만났을 때는 하마터면 머릿속에서 쫓겨날 뻔했다.

만약 진명을 집요하게 청해 듣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거울’이 없었더라면 정말로 쫓겨났을 것이다.

고작 인간 따위에게 밀려 쫓겨날 뻔한 굴욕이 떠오른 바르바토스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레브의 목에 걸린 하리에 가이단의 목걸이를 뜯어내더니, 휙! 돌아서서 레아의 정신을 집어삼키는 것이었다.

“제발 레나만 놓아주… 아아아악! 야! 이 개새끼야! 고작 칠백 년도 못 산 촌구석 아신 자식아! 네까짓 놈이 그런다고… 읍! 우으읍!”

억장이 무너진 레브가 악을 질렀다. 레나를 집어삼키려는 걸 막으려고 {아신의 역사} 정보를 뒤적여 욕설을 퍼부었으나, 입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느새 턱까지 나무로 변해버렸다.

척추에서 줄기가 솟아오르고, 날카로운 가시가 달린 넝쿨들이 갈비뼈 사이로 삐져나왔다. 뿌리가 물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는지 급격하게 나무가 자라났다.

“우으으읍. 끄으윽!”

레브가 몸부림쳤다.

온몸이 찢어져 가는 고통에도 바르바토스의 신경을 분산시킬 수만 있으면 무엇이라도 할 작정이었는데…

[ 업적 : 성녀(聖女)를 만남 – 주신의 신력을 지닌 이들에게 미약한 호감을 얻음. ]

[ 업적 : 성녀의 세례(洗禮) – 레오에게 {신력 간파} 능력이 부여됩니다. ]

업적이 떠올랐다.

나무가 되어 목을 돌릴 수 없는 레브가 눈동자를 한계까지 굴렸다. 금색 숄을 걸친,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수도교회 본관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왼손에는 황동 술잔을 든 채, 오른손에 들린 큼지막한 왕홀(王笏)로 레브를 겨눈 그녀는 울적하게 슬픈 표정이었다.

레브는 새하얀 불길에 휩싸였다.

어느덧 높게 솟아오른 가시나무가 지글지글 불타올랐고, 레브의 몸도 함께 녹아내렸다.

끝이구나.

‘그래도 제발 레나만은…’

왜 이제야 왔냐는 원망이 치밀어 오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레브는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만 ‘제발, 저 성녀가 죄없는 레나를 구원해 주기를…’ 기원할 수밖에 없었는데, 바르바토스가 뒤돌아섰다. 검붉은 신력이 긴 머리칼을 따라 줄기줄기 흘러내리는 레아가 쌍심지를 켰다.

“왔구나. 더러운 주신의 창녀여! 네년은 주신을 대신해 내 신도들을 죽인 죄값을 치르게 되리… 악!”

성녀를 향해 외치던 바르바토스가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레브를 쏘아보더니 이내 으드드득, 분노에 찬 괴성을 내질렀다.

“이런 제기랄! 죽지만 않으면 되는 게 아니었잖아!”

사방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장엄한 수도교회도, 성녀도, 새하얗게 타오르는 그의 몸뚱이도 멀어져갔고, 분통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죄다 뜯어버리던 레나도 멀리 사라져버렸다.

어둠이 깔리며 엔딩 메시지가 떠올랐다.

[ 레나의 최종직업이 결정됐습니다. ]

[ 레나 키우기를 플레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 레아, 바르바토스(Barbatos) ]

[ 최종직업 : 아신(兒神) ]

[ 결혼 상대 : 미혼 ]

[ 레브 ]

[ 최종직업 : 바르바토스의 사도 ]

[ 결혼 상대 : 미혼 ]

[ 소꿉친구 엔딩 : 타락의 끝 ]

– 데모스 마을에서 태어난 레아는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비록 가난했지만, 부모님의 따뜻한 관심을 받으며 소꿉친구 레브와… (중략) …수습생이 된 레아는 자신의 논문을 완성하고자 최선을 다하던 도중, 바르바토스에게 삼켜져 아신이 되었다. 그 직후, 레아는… –

차근차근 떠오르던 엔딩 크레딧이 갑자기 뚝, 끊어졌다. 둥그런 구체가 되어 멍하니 메시지를 읽던 레브는 기겁해 비명을 질렀다.

새까만 배경에 구멍이 뚫렸다. 어두운 공간으로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제야 엔딩 크레딧이 떠오르던 어두운 무대가 어슴푸레 형상을 드러내었는데, 여기는 밀폐된 공간이었다. 원형은 아니고, 삼각형의 벽들이 차곡차곡 이어져 있는 것이… 마치 거대한 정이십면체(icosahedron)를 안에서 보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좁게 뚫린 구멍으로 수도교회와 황동 술잔을 높이 치켜든 메리엘 성녀가 보였다. 그새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 장엄했던 수도교회는 불타오르며 박살이 나 있었고, 성녀의 꼴도 말이 아니었다.

그때, 레아가 구멍으로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는 타오르는 성화(聖火)에 오른뺨과 귀가 녹아내리고, 옷이 찢어져 유방을 보란 듯이 드러낸 모습으로 소리 질렀다.

“이리 오너라! 네놈은 내게 너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바르바토스가 구멍으로 손을 길게 뻗어왔다. 꼼짝도 하지 못하는 둥근 구체를 모질게 잡더니, 험하게 쥐어뜯었다.

‘아아아아아아악!’

엔딩을 맞이하면서 민서의 정신에서 분리된 레브는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끌려갔다.

악신을 섬긴 인간의 종말이었다.

그렇게 레브가 끌려가고, 뚫렸던 구멍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건너편으로 보이던 수도교회는 무심히 자취를 감추었고, 성녀와 레아의 싸움도 어둠에 잠겼다.

엔딩 크레딧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차근차근 떠오를 뿐이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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