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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33

133화 신입생들 (3)

133화 신입생들 (3)

“감지. 흡수. 정제. 발현.”

에스틸리아 교수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했다.

나에게는 익숙한 용어들이었다.

은월섬에서 엘리샤에게 마법을 배웠을 때도 같은 설명을 들었으니까.

“마법 발현의 네 단계. 원칙적으로는 앞으로 한 달간 여러분에게 기초 마법 이론을 설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에스틸리아 교수가 무심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아르카넘 홀의 입학시험을 통과한 여러분에게 기초 마법 이론 수업은 시간 낭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지금부터 훈련장으로 장소를 옮겨, 바로 실습에 들어갈 것입니다.”

“네?”

나는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내게는 달갑지 않은 이야기였다.

다른 신입생들과 달리 나는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했다. 뒤늦게 입학시험을 준비하느라 엘리샤에게 속성으로 마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금발. 마법은 원래 이렇게 막 배우면 안 되는 거 알지? 앞으로도 마법을 발현하다가 싸한 기분이 들면 즉시 중단해. 자칫 잘못해서 마력의 역류라도 발생하면 조금 다치는 선에서 안 끝나. 목숨을 잃거나, 평생 장애를 갖고 살아가야 할 수도 있어.’

그 말을 하던 엘리샤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아주 진지했다.

‘뭐, 네가 마법학부에 입학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울 거야. 하지만 만약 합격한다면 기초부터 다시 배우도록 해. 아르카넘 홀에는 분명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이 있겠지. 그때가 되면 나에게 배웠던 것은 잠시 잊어도 괜찮아.’

“할 말이 있습니까? 데미안 시니야카.”

에스틸리아 교수가 내게 물었다.

“그냥 기존의 커리큘럼대로 수업을 진행하면 안 될까요?”

“이유는?”

“제가 기초가 부족해서.”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교실 안이 웅성거렸다. 주위의 신입생들이 놀란 표정이 되었고, 특히 아리엘은 휘둥그렇게 눈을 뜨며 나를 돌아봤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맞아. 나는 입학시험에서 무려 ‘고위 마법’을 발현한 존재였지.

고위 마법을 발현하려면 ‘표준 마법’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를 갖추려면 기초 마법 이론을 철저히 알고 있어야 한다. 즉, 고위 마법을 발현한 나는 이 교실의 학생들이 보기에 기초 마법 이론을 배울 필요가 없는 인물이다.

어딘가에서 ‘기만자’라는 속삭임이 들렸다.

탁탁 교탁을 두드려 학생들의 주의를 집중시킨 에스틸리아 교수가 나를 향해 말했다.

“알겠습니다. 데미안 시니야카.”

.

.

.

“다른 학생들은 신경 쓰지 마 데미안. 실은 나도 아르카넘 홀에 입학하면 마법의 기초부터 다시 다지고 싶었거든.”

수업을 마치고 건물을 나서는데 카인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수업 분위기는 다소 긴장감이 감돌았다. 에스틸리아 교수의 무감정한 목소리도 한몫했지만, 학생 중 일부가 나에게 불만을 가진 것 같았다.

“너도 알잖아 데미안. 엘리샤는 뛰어난 마법사지만 누구를 가르치는 데는 다소 서투르다는 거. 네가 말하지 않았으면 내가 에스틸리아 교수에게 건의했을걸?”

오늘따라 카인 녀석이 착해 보인다.

루나와 세실이 곁에 없어서인지, 아니면 마법학부 신입생들 사이에서 따돌림당할 것 같은 불길함 때문인지.

“가자. 다음 수업에서는 루나와 세실을 만날 수 있어.”

카인의 말대로 다음 수업은 ‘제국의 역사’, 즉 공통 수업이었다.

나의 머릿속에 치유실 앞에서 내 품에 안겨있던 루나와, 교복 치마를 입고 단상에서 부끄러워하던 세실이 떠올랐다. 누구의 얼굴이 먼저 생각났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아. 먼저 가 데미안. 기숙사에 책을 두고 왔네.”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카인이 뒤돌아 달려갔다.

녀석답지 않은 실수.

그래. 너도 사람이긴 하구나.

“데미안 시니야카.”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아리엘이 나를 보며 서 있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역시 나에게는 존대하는구나.

하긴, 아리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다.

“무엇을 묻고 싶은데.”

“걸으면서 이야기해도 될까요?”

나는 아리엘과 함께 다음 수업이 있는 건물을 향해 걸었다. 주위를 지나는 학생들이 우리를 돌아봤다. 그들의 시선은 대부분 아리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나는 망토의 색으로 그들의 학년을 가늠했다.

주변이 조금 한적해질 즈음,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왜 그런 말을 한 거죠?”

나는 그녀의 질문을 이해했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되물었다.

“무슨 말?”

“당신에게 기초 마법 이론 수업은 필요 없을 텐데요. 데미안 시니야카.”

“그냥 데미안이라고 불러.”

“알겠어요. 그러니 이제 내 물음에 답해줘요, 데미안.”

아리엘과 대화하며 나는 새삼 실감했다.

루나와 세실과 더불어, 아리엘은 무한회귀 세계관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되는 인물이 맞다.

“듣고 있나요? 데미안.”

“아.”

“설마 지금 내 앞에서 다른 생각을 한 건가요?”

아리엘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지금껏 아리엘이 만난 그 어떤 사람도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까.

“아리엘.”

내가 말하자 아리엘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는 실수를 깨달았다.

무한회귀의 독자 입장에서는 ‘아리엘’이라는 애칭이 익숙하지만, 그녀 앞에서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이름이다.

“······당신. 감히 그 이름을.”

하지만 ‘감히’라니.

아리엘의 귀족적인 오만함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나는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너는 카인에게 ‘아리엘 플랑브아즈’라고 네 이름을 소개했잖아.”

아리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 그러니까······. 아리엘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거였구나. 미안해 아리엘라. 카인에게도 그렇게 전해둘게. 아리엘라는 ‘아리엘’이라고 불리는 걸 싫어한다고. ‘감히’ 소리 듣고 싶지 않다면 절대로 ‘아리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아리엘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변했다.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나를 카인과 아주 가까운 사이인 것으로 알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시니야카’라는 같은 성씨를 쓰고 있다.

“왜 수업에서 그런 말을 했느냐고? 당연한 일이지. 나에겐 아르카넘 홀의 커리큘럼에 따라 수업받을 권리가 있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든, 모르는 내용이든 상관없이. 또, 마법의 기초 이론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을 거야. 나는 어떤 분야에서든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고 믿어. 이건 나의 신념이기도 해. 아리엘. 아니, ‘아리엘라’ 플랑브아즈 아가씨.”

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 단순히 기분이 상해서만은 아니었다.

사실 내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나는 마법학부에 입학한 이유를 상기했다.

‘나는 아리엘과 가까워져야 한다.’

물론 내가 입학시험에서 고위 마법을 선보이고, 또 의도치 않게 식당에서 그녀의 관심을 끌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리엘은 이미 카인에게 빠져들었다. 그래서 나는 카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아리엘에게 접근할 생각이다.

아리엘은 레나르 보호령에서 왕 못지않은 권세를 누리는 플랑브아즈 공작 가문의 후계자다. 아무리 아르카넘 홀에서 신분이 무의미하다고 해도, 영향이 없을 리는 만무하다. 어차피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학생 신분은 사라지니까.

이곳의 학생 중 아리엘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어 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아리엘도 그것을 안다. 나는 그 점을 공략할 것이다. 플랑브아즈 가문의 위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이는 내가 아리엘의 숨겨진 성격을 알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아, 아니······.”

난생처음으로 겪는 상황에 아리엘은 입만 뻐끔거렸다.

“그럼 이만. 수업이 있어서.”

나는 빠른 걸음으로 아리엘에게서 벗어났다. 아리엘의 놀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다짐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예쁜 여자란 정말 위험하다.

***

“세실. 치마를 입었네?”

“으. 응.”

“그래서 기숙사에 다녀오겠다고 했구나? 반바지를 치마로 갈아입으려고. 흐응, 왜일까? 누구에게 예뻐 보이려고?”

“나. 나는. 그냥······.”

루나는 꺄아! 소리치며,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는 세실을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세실의 얼굴에 볼을 비비며 말했다.

“아아 세실······. 세실리아······. 넌 내 꺼야. 내 꺼라고······.”

루나와 세실은 공통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이었다. 그래서 루나는 기분이 좋았다. 카인과 데미안을 만날 수 있으니까.

문득 치유실 앞에서의 일이 떠오른 루나는 끄히잉······! 소리를 내며 세실을 꼭 끌어안았다. 그때의 일만 떠올리면 부끄러워 미칠 것 같았다. 왜 그랬을까. 분위기에 휩쓸려서? 하지만 데미안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래도 같았을까?

‘자, 가시죠. 루나프레나 공주님.’

데미안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루나프레나.

아주 어릴 때만 사용했고, 언젠가부터는 너무 귀족적인 느낌이 들어 피하게 되었던 이름. 물론 루나는 ‘루나프레나’라는 이름이 좋았다. 다만 그 이름으로 불리면 조금 부끄러워질 뿐.

지금의 루나가 루나프레나라고 불리는 상황은 정해져 있었다. 예를 들면 은월의 단원으로서 중요한 명령을 하달받을 때라든지.

그런데 데미안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 이름을 꺼냈다. 심지어 ‘공주님’이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거기에 더해 정말로 공주님을 안듯 루나를 안아 들었다. 처음이었다.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그 정도로 또렷이 자각했던 순간은.

‘······바람둥이.’

못된 데미안.

오빠인 척하더니.

또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어.

이게 다 데미안 때문이야!

“루나. 숨. 막혀······.”

“아앗! 앗! 미안해 세실! 아니, 세실리아!”

루나는 세실에게 사과하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루나는 세실이 데미안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세실이 교복을 치마로 갈아입은 이유도 데미안 때문일 테지.

루나는 세실에게 미안했다. 분위기에 휩쓸리기는 했지만, 또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없기는 했지만 루나는 치유실 앞에서 데미안에게 완전히 마음의 문을 열었었다.

루나는 문득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카인에게 고백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아직도 카인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했으면서. 하지만 데미안이 신경 쓰여.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어. 나는 나쁜 아이인 걸까.

“쟤들이 루나 크라소타와 세실리아 크라소타?”

“소문대로 정말 인형 같군.”

“사귀는 남자가 있을까?”

주위를 지나가는 학생들이 루나와 세실을 돌아보며 속삭였다.

망토의 색상을 보니, 이제는 선배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듯했다.

“예쁜 건 알아가지고. 그치 세실. 헤헤헤.”

루나는 가볍게 웃으며 주변의 반응을 무심코 넘겼다.

하지만 세실은 이런 관심이 많이 부담스러운 듯했다. 특히 여학생들 사이에서도 세실의 인기는 상당했다.

“저분이 세실리아······.”

“너무 멋져······.”

“나의 왕자님······!”

조금 질투심이 인 루나는 세실에게 턱짓했다. 그러자 세실이 고개를 끄덕이며 루나에게 팔짱을 꼈고, 루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추켜올렸다.

주위에서 여학생들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곧 루나와 세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어? 저기 데미안이다.”

루나는 멀리서 걸어오는 데미안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데미안!”

그때, 데미안의 뒤를 쫓아 달려온 누군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간곡한 표정과 몸짓으로 데미안에게 무어라 사정하는 그녀는 아리엘라 플랑브아즈였다.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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