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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34

133. 약혼관계 – 장터

“어서 옵쇼! 이쪽입니다! 보고 가세요! 수도 바르나울에서 온 물건들입니다!”

“‘토트르’로 담근 술 팔아요! 술! 집에서 직접 담갔어요! 안주도 있어요!”

평소 아이나르 부족이 도축을 하던 공터에 장(場)이 열렸다.

작은 규모의 상단이었지만, 상인들은 마차에 싣고 온 물건들을 넓게 늘어놓고 호객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에이브릴 성의 주민들 상당수도 이때다 싶어 노점을 열면서 장터가 요란하게 커졌고, 아이나르 부족 사람들은 오랜만에 열린 장을 반가워하며 필요한 물건들을 분주히 골라 담았다.

번잡함 속에서 레나 아이나르가 물었다.

“얼마나 가지고 왔어?”

그녀는 한겨울임에도 가벼운 옷차림이었는데, 솔직히 옷이 예쁘지는 않았다.

털가죽으로 투박하게 만들어진 상의에 그녀가 자주 입는 색이 바랜 두꺼운 면바지. 그녀의 외모를 받쳐줄 장신구도 없다.

레나 아이나르는 항상 이런 꼴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외모를 꾸미는 데에 관심이 없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물론, 레오도 그녀의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은화 두 개를 꺼내 보이고는 팔꿈치를 내밀었다. 레나는 눈썹을 치켜들며 “흐음~?” 잠시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그의 팔을 사양하지 않았다.

덩치가 큰 레오 덱스터와 마찬가지로 체격이 좋은 레나 아이나르가 팔짱을 끼고 나란히 장터를 걸었다. 값을 깎으려 하는 손님과 덤을 주겠다는 상인의 흥정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평화롭다.

“어디부터 갈래? 사고 싶다는 게 뭐야? 뭐든지 다 사줄게. 말만 해.”

“어쭈? 고작 은화 두 개 가지고 허세는.”

피식, 레나가 웃었다.

곁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레오를 직시했다.

붉은 입술, 반듯한 코와 곧은 눈썹이 예쁘다.

레오는 그 얼굴을 하염없이 보고 싶었지만, 레나가 이내 고개를 돌리며 손가락질했다.

“저쪽으로 가자. 어제 봐 둔 게 있어. 앗! 안녕! 너도 왔네.”

한 부족의 전사가 레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레나는 이곳 아이나르 부족에서 인기가 좋았다. 열 걸음을 걷기도 전에 말을 거는 사람이 한 명씩은 나타나서 그들은 자주 멈췄다.

부족원이 아닌지라 그들과 다소 데면데면한 레오 덱스터는 그때마다 멀뚱히 딴청을 피웠다.

“응! 나도 다음 사냥에 나갈 거야. 며칠 뒤면 성년이니까, 두고 봐! 다들 내가 사냥을 못 할 거라 그러는데… 내 실력을 몰라도 한참 모른다니깐.”

레나의 철없는 자신감에 레오는 웃어버렸다. 사냥을 검으로 하는 줄 아는 그녀는 첫 사냥을 나가서 매우 당황하게 된다.

그녀에게 말을 붙인 전사도 히죽 웃으며, “그러엄~ 잘하겠지. 그렇고말고.”라면서 예정된 미래를 기대하는 듯했다. 그때,

“함께 대전사의 시련을 치르실 분을 찾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지자 머쓱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레오의 눈에 한 자매가 들어왔다. 건장한 체구의 여전사 두 명이 멀리서 소리를 치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과 그걸 묶은 독특한 매듭들.

매듭에는 진하게 염색된 깃털들이 화려하게 달려서 그들은 누가 보더라도 다른 부족의 전사들이었다.

‘이 상단도 그렇고, 저 여자들도 그렇고… 왜 이렇게 처음 보는 게 많지?’

레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태껏 반복된 회차들에서는 이랬던 적이 없었다.

레나가 상단이 도무지 오지를 않는다면서 투정한 적은 있다.

하지만 이 에이브릴 성이 워낙 군사적인 목적이 강한, 주민이라곤 아이나르 부족 사람이 대부분인 성이라 상인들이 잘 찾아오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이나르 부족은 농경과 사냥으로 거의 자급자족을 했고, 성에 파견된 병사와 그들의 가족들에겐 보급이 들어왔다.

‘지난 소꿉친구 시나리오의 영향이 여기까지 미친 걸까? 시간이 맞지 않는데…?’

바르바토스의 사도가 된 레브가 사고를 치는 건 내년, 봄이 끝날 무렵이다. 지금쯤 그는 학살을 준비하며 네비스 곳곳에 ‘덫’을 깔고 있을 터였다.

네비스의 대형 패밀리 두 개를 몰살하기는 했으나 그까짓 게 여기까지 영향을 미쳤을 리 없었다.

‘민서였으면 뭘 알아차렸을까?’

레오 덱스터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다. 시나리오고 자시고 나는 여기서 레나와 행복하게 살 거다.

“레오! 오래 기다렸지? 미안해. 빨리 가자.”

상념에 빠진 그를 레나가 툭 건드렸다. 다시 팔짱을 꽉 끼면서

“쟤 이상하게 내가 말하면 실실 웃는다? 내가 눈치가 없는 줄 아나 본데, 두고 보자. 사냥 나가서 아주 그냥…”

– 라고 말했고, 레오는 그녀를 꿀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보다 이내 씁쓸해졌다.

내 이름은 레오가 아니야. 네 이름도 아마 레나가 아닐 거야…

번잡한 갈등에 휩싸인 레오와 투덜투덜, 으름장을 늘어놓는 레나는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녀가 레오를 이끈 곳은 근사한 장신구들을 파는 상점도, 하늘하늘한 옷이나 군것질거리를 파는 곳도 아니었다. 구슬땀을 흘리며 부단히 일하던 상인이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요. 뭐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아니면 가죽을 팔거나 맡기러 오셨나요?”

기름이 묻어 여기저기 하얗게 응고된 앞치마를 입은 상인.

레나가 찾아온 곳은 가죽을 사고파는 노점이었다.

이 상인은 무두질도 하는지 기다란 앞치마에는 기름때가 묻은 연장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고, 노점에는 가죽을 거는 틀이 무작위로 쌓여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가죽을 사러 왔어요. 어제 봐둔 게 있는데, 그…”

레나가 주문을 하는 사이에 레오 덱스터는 습관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노점 한쪽에 놓인 작은 솥에서 부글부글, 텁텁한 냄새와 하얀 증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중앙에는 소의 등처럼 원만한 곡선을 이루는 탁자가 있었는데, 한창 작업 중이었는지 피와 비계가 덕지덕지 묻은 가죽이 뒤집어 펴져 있었다.

그리 생소한 풍경은 아니었다.

레오는 무두질을 할 줄 알았고, 또 많이 해 보았다. 다만 처음 맡아보는 냄새가 그의 관심을 끌었다.

‘이게 무슨 냄새지?’

무두질은 피(皮)를 혁(革)으로, 동물의 껍데기를 우리가 아는 가죽으로 바꾸는 과정이다.

사냥을 하는 아이나르 부족에서도, 도프 비자인의 산장에서도 무두질이 이루어졌는데(무두질하지 않은 가죽은 쉽게 썩거나 햇볕을 받으면 부스러졌다), 아이나르 부족의 무두질과 소꿉친구 시나리오의 사냥꾼 아버지가 하는 무두질은 달랐다.

가죽이 오래 가려면 유분(油分, 기름기)이 필요했다.

해서 그 유분을 공급하고자 아이나르 부족에서는 사냥감의 뇌를 끓여 가죽에 바르고 씻어내기를 반복했다. 먹지 않는 지방 덩어리인 뇌를 활용하는 방법이다.

반면 바르바토스를 섬기는 도프 비자인은 매번 사냥감의 머리를 제물로 바쳤으므로 다른 방식을 택했다. 비곗덩어리를 가죽에 문지른 뒤, 연기에 그을리는 훈제 무두질이다.

그의 아들이자, 손재주가 좋은 레브는 육포를 만들면서 이 작업도 함께 했었다.

그런데 이 상인의 방법은 또 다른 것 같았다.

레오는 냄새의 근원지로 보이는 솥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웬 풀뿌리가 거품이 가득한 표면 위로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다.

‘식물에서 뭘 추출하는 건가? 무슨 식물이지?’

“어허. 남의 비법을 훔쳐보려 하면 안 되지요.”

레나와 쑥덕쑥덕 이야기하던 상인이 냉큼 다가와 솥뚜껑을 덮었다.

레오가 어깨를 으쓱여 그럴 의도가 아니었음을 알렸지만, 상인의 눈총을 피하기엔 늦은 모양이었다.

“야! 너 잠깐 나가 있어!”

결국, 쫓겨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레나는 레오를 떠밀었고, 그는 투덜거리며 바깥을 서성거렸다.

“젠장. 나도 모르게…”

이리저리 눈치를 굴리지 않으면 된통 박살이 나는 ‘게임’을 진행하다 보니 실수를 했다.

습관이 이래서 무섭다.

과거 내 삶의 기억은 없고, 머릿속엔 사소한 실수로 끔찍한 결말을 맞았던 기억들 투성이라 생소한 냄새를 경계해 절로 몸이 움직였다.

레오 덱스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레나와 나들이를 나온 덕분일까, 그의 마음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민서. 그 녀석의 처지를 아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절박하겠지.

이성적으로는 그리 생각한다. 허나 감정적으로는 이 상황과 민서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레오… 레오… 레오… 제발…”

등을 때리던 레나.

그녀는 모질게 돌아누운 남자의 마음을 돌리려 옷을 벗었다. 그녀의 자존심은 처량하게 내팽개쳐졌고, 간절한 애원과 맥아리 없는 주먹질은 둔탁한 진동이 되어 남았다.

오른쪽 등 날갯죽지가 쓰라리다.

레오 덱스터는 불편하게 헛기침하며 어깨를 돌렸다. 쓰라린 어깨를 풀다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소름 끼치게도 그의 손바닥에는 나팔 문양이 박혀 있었다.

[ 업적 : 바르바토스(Barbatos)의 사도 – 공양을 올린 만큼 바르바토스의 힘을 빌릴 수 있습니다. 다른 아신을 섬길 수 없습니다. ]

문신은 아니었다. 강제적으로 주입되는 업적으로 인해 사도의 ‘자격’이 새겨진 것이었다.

그렇다. 나는 사도다.

지난 시나리오의 실수가 내 손바닥에 그대로 찍혀버렸고, 그 모든 고통스러운 기억이 악몽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물론, 바르바토스는 나를 모를 터였다.

나는 레브처럼 ‘여기에 신도가 있음을 알리는 제사’를 올리지 않았다.

만약 제사상을 올리거든 바르바토스는 매우 당황할 터였다. 자신에게 자기도 모르는 사도가 있는 셈이니까…

휴-

레오는 문양이 떨어지기라도 바라는 듯, 오른손을 탈탈 털었다. 그러자 붉은 구슬 세 개가 달린 팔찌가 덜렁거렸다. 지난 시나리오 보상으로 받은 {바르바토스의 팔찌}였다.

이 팔찌를 민서가 넋을 놓았을 때 얻은 게 천만다행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놈이 뭔 생각을 했을지… 무섭다.

이전에 이 팔찌가 있었더라면 민서는 레나와 파혼하는 데 기어이 성공하고야 말았겠지.

울컥, 화가 난 레오가 팔찌를 벗었다. 땅바닥에 내팽개치려다 심호흡해 감정을 추슬렀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든다지만 개고생해서 얻은 보상이다. 나만의 것도 아닌 이걸 아무렇게나 ‘소모’해 버릴 수는 없다.

다시 팔찌를 찬 레오는 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상인과 숙덕숙덕, 흥정을 하는 것인지 담합을 하는 것인지 작게 떠들고 있었다.

나는 쟤를 어떻게 만났을까?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사귀었을까. 약혼은 어떻게 하게 됐을까. 레나의 진짜 이름은 뭘까. 우리는 평소에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었을까…

원통함이 밀려들었다. 나는 레나를 사랑하지만, 그녀와 관련해 아는 것이라곤 민서의 기억을 통해 간접적으로 아는 게 전부였다.

차근차근 스트레칭을 하던 레오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꺾었다.

잡념을 털어내고 기다리길 잠시 레나가 그를 불렀다.

“레오. 나 이거 사줘.”

그녀가 내민 건 긴 가죽끈이었다.

털이 깔끔하게 제거된 검은색의, 질 좋은 가죽이다.

“그래. 그런데 이런 게 왜 필요해? 무슨 용도야?”

“이걸로 검 손잡이를 감쌀 거야. 저번에 너희 아빠한테 받은 검은 좋긴 한데, 손잡이가 다 낡았더라고.”

레나가 제 허리춤의 검을 들어 가죽이 다 헤진 손잡이를 보여주었다.

아버지, 노엘 덱스터의 검이었다.

‘아아. 왜 내 검을 보고도 아무 말도 없나 했더니…’

사소한 의문이 하나 풀렸다.

지난 시나리오에서 나는 아버지께 검을 받았다.

어머니가 쓰시던 검.

검날 받침도 없고, 대단히 오래전에 만들어졌는지 얼핏 갈색이 섞인 그 검은 내게 ‘귀속’되었고, 부러워하는 레나에게 아버지는 자신의 검을 주었었다.

여기서는 그게 과거의 일로 고정이 된 모양이었다.

다른 시나리오에서는 밑도 끝도 없이 검이 나타나서 레아와 동생 레나가 이게 어디서 난 것이냐고 물어봤었다.

“그럼 나도 사야겠다. 내 것도 손잡이가 많이 낡았…”

레오는 상인에게 같은 걸 하나 더 달라고 청하려는데, 레나가 빽! 소리쳤다.

“안 돼!”

“깜짝이야. 왜?”

“이, 이거 비싸단 말이야. 두 개나 사면 남는 돈이 없어.”

“이게 비싸 봤자지. 얼마에요?”

“안 된다니까! 그, 그, 그… 아! 기사는 도구에 연연하는 게 아니라고 했어! 빨리 돈이나 드려. 은화 한 닢이야.”

“은화 한 닢? 이만한 크기의 가죽이 그렇게 비쌀 리 없는…”

뭔가를 눈치챈 레오는 입을 닫았다. 그가 솥을 들여다봤던 걸 용서했는지 빙그레 웃는 상인에게 군말없이 은화를 건네주었다.

레나는 정말이지… 검술을 빼면 뭐든 다 어설프다.

그녀는 등 뒤로 뭔가를 숨기고 있었고, 레오 덱스터는 모르는 척 속아주었다.

“히힛.”

돌아오는 길.

레나는 무엇이 그리 기쁜지 밝게 웃었고,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다정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하늘에서는 눈송이가 펑펑 날리고 있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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