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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35

134. 약혼관계 – 발자국

다음 날, 레나의 아버지인 데호르만이 돌아왔다. 사냥하고 돌아온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술잔치를 벌였는데, 요즘 산에 사냥감이 많다며 즐거워했다.

이번에도 레나는 어머니 몰래 맥주를 슬쩍해다가 내밀었고, 레오는 사양하지 않았다. 이전 어느 때보다 과음하며 즐거이 떠들었다.

푸짐한 먹거리와 붉게 타오르는 랜턴. 술. 사랑하는 레나와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들.

{전쟁}만 빼면 여긴 풍요롭고 행복한 곳이었다.

이후, 레오는 아버지와 대련했다. 전처럼 {검술.3v : 바르트류(流)}로 인정을 받아내고 종종 대장간을 드나들었다.

노구화호를 잡을 준비였다.

{초기 자금}을 몽땅 써버리지는 않았는데, 쇠꼬챙이가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사냥하는 방법도, 노구화호의 공격 패턴도 알고 있었다.

레나가 어쩌다 봉변을 당하는지도 알고 있어서, 위험하기는 매한가지지만, 이번에는 무탈히 {전쟁}을 회피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대장간과 집을 번갈아 다니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레오는 문득 미안해졌다. 집 뒤편 공터에 주저앉아 착잡하게 턱을 쓸었다.

‘나도 민서의 덕을 보긴 봤지…’

나와 레나의 운명은 원래 노구화호에게 죽는 게 아니었을까?

첫 회차, 소꿉친구 시나리오에서 얻은 {사냥} 능력이 아니었더라면, 노구화호의 발자국을 발견한 레나와 나는 아무런 대비도 없이 아래로 내려갔을 터였다.

그리고 죽었겠지.

또, 그게 아니더라도 우리는 전쟁터에서 죽는 게 거의 확정이었다. 민서가 없었더라면 카트리나, 또는 소드마스터와 만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니까 논외로 하자.

아무리 화가 나도 없는 사실까지 날조할 생각은 없다.

시나리오 직후의 분노가 다소 가라앉은 레오, 그는 이제야 좀 냉정하게 잘잘못을 따질 수 있었다.

일단 민서 놈이 잘못한 건 맞다.

백번을 양보해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녀석은 레나를 ‘클리어’를 위한 도구로 다루었고, 내 인생을 망쳤다. 새롭게 시작되면 없어지는 과거라지만, 제 인생도 아니고, 내 몸뚱이, 내 인생이 아니냐.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몸을 빼앗긴 것도 억울한데, 사랑하는 사람에게 못되게 굴도록 만들었으니 그 죄는 크다.

하지만 민서의 처지도 딱했다. 녀석도 원해서 한 행동이 아니었다.

따박따박 올라가는 사망 제한과 회차 제한에 쫓겨서 한 행동이었고, 반성했는지 놈도 그때 이후로 레나들을 이용하려 들지 않았다.

늘 그랬듯 결과는 안 좋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뭘 하긴 해야겠는데…’

민서의 덕을 보았다고 생각하니 책임감이 들었다. 왕자 레오가 했던 생각까지 떠오르자 심경이 더욱 불편해졌다.

왕자 레오는 나와는 생각이 많이 달랐다. 그는 동생과 길바닥에서 나란히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상황이 충분히 나아졌다고 생각하는지 되려 민서에게 고마워했다.

그리고 레브. 소꿉친구 시나리오의 그 촌놈은 뭔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무뚝뚝하고 말수가 없는 성격 때문인지 레브는 민서에게서 주도권을 빼앗으려 들지 않았다.

대체로 민서의 정신을 받아들이는 편이어서… 그도 민서에게 호의적이란 건 분명해 보였다.

‘그래. 나만 나쁜 놈이다.’

레오는 옅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레브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해피엔딩.

첫 회차에서 레브는 레나와 결혼해봤다. 사제가 되고자 하는 친구를 위해 마음을 숨겨왔던 그는 민서 덕분에 행복한 신혼집을 꾸며보았고, 데모스 마을에서 아들딸을 기르며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을 보았다.

기억을 공유하는지라 당시 레브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나는 안다.

마을 외곽에 버려진 나무집에서 두 사람은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꾸렸다. 레브가 지붕에 올라 신혼집을 뚝딱뚝딱 고치고 있노라면 아래에서 레아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 “레오! 빵 먹고 해! 한스 아주머니가 왕창 주셨어.”

레아는 레브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이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레브도 그녀의 손을 거리낌 없이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온 마을 사람들이 축복하는 가운데, 결혼했다.

…부럽다. 단 한 번이었지만 그런 행복을 맞본 레브가 부러워 죽겠다.

반면 나는 개 같은 결말만 봤다.

그나마 나은 결말이란 게 나는 엄지손가락을, 레나는 팔을 잃고 귀향했던 것이었다.

한손검을 던져버리고, 내 품에 안겨 펑펑 눈물을 쏟아낸 레나는 두 번 다시 공터를 찾지 않았다.

그딴 건 해피엔딩이 아니다.

레오는 입술을 깨물었다. 악문 이빨 사이로 한숨을 흘리며 결론지었다.

나도 레브처럼 제대로 살아보고 싶다. 이 에이브릴 성에서 레나와 행복하게 살아보겠다는 게, 그리도 큰 욕심인가. 14/22. 회차 제한도 하나 늘었고, 민서도 없는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

레오는 깜짝 놀라 몸을 튕겼다. 어느새 레나가 다가와 그를 말똥말똥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훈련은 다 했어?”

“음~ 이만하면 오늘분은 끝났지만… 잠깐 쉬고 다시 할 거야.”

잠시 정적이 흘렀다.

복잡한 상념에서 막 벗어난 레오는 말이 없었고, 레나는 옆에 주저앉았다. 가만히 레오를 들여다보았다.

공터에는 간만에 눈구름을 피한 북부의 누런 노을이 아름답게 내리고 있었다.

“레오.”

“왜?”

“너 말이야, 요즘 좀 달라 보이는 거 알아?”

“……어떻게?”

“글쎄? 차분해졌다고 해야 할까, 믿음직스러워졌다고 해야 할까… 분위기가 달라졌어.”

[ 퀘스트 : 귀족도살자 50/50 – {기품} 능력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

[ 퀘스트 : 반역자 10/10 – {왕의 피} 능력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

“칭찬이지?”

“그러엄~ 칭찬이지. 이만하면 어디 가서 내 약혼자라고 자랑해도 되겠는걸? 헤헤.”

레나는 레오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멈칫, 망설였다. 어쩐지 평소처럼 그를 쓰다듬으면 안 될 것 같다.

손을 거두려는데, 레오가 붙잡았다. 스스로 제 머리에 손을 대어주자 레나는 빙긋 웃으며 그를 쓰다듬었다.

“레나야.”

“왜?”

“우리 오늘 땡땡이치자.”

레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우와- 세상에. 너 레오 맞지? 살다 살다 네가 땡땡이치자고 말하는 날이 올 줄이야. 흐으으음… 미안한데 싫어. 난 바빠.”

“그러지 말고 나갔다 오자. 응? 난 시간이 없… 아니, 기왕 상단이 왔는데 그냥 보내긴 아깝잖아.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놀겠어.”

“그렇긴 하지만…”

“오늘 훈련할 건 다 했다면서. 잠깐만 나갔다 오자. 무리하는 것도 좋지 않아. 술도 팔더라.”

“끄응. 술이라… 좋지. 좋은데…”

“가자아~.”

레오 덱스터가 애교를 부렸다.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마찬가지로 단단한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레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얘가 왜 이래? 저번부터.’

며칠 전에 왈칵 울어버린 이후로 레오가 많이 달라졌다. 사춘기가 온 것일까? 그래도 항상 점잔을 빼던 레오의 달라진 모습이 싫지 않아서 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 곰 같은 녀석이 애교를 부릴 줄도 아네.’

피식 웃으며, 조금만 놀다 돌아와야지 생각했는데, 장터에서 레오가 술과 맛난 먹거리를 잔뜩 주문해 버렸다. 어디서 난 것인지 아낌없이 돈을 쓰면서 술자리가 길어졌다.

술에 취한 레오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지 옛날이야기를 많이 물어보았다. 평소보다 훨씬 살갑게 구는 그의 말투에는 묘한 탄식이 깃들어 있었다.

왠지 측은하다.

장이 닫힐 무렵에야 술자리를 파한 두 사람은 돌아오는 길에 와락, 서로를 끌어안았다.

레오가 나를 먼저 안았는지, 내가 먼저 끌어안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레나는 레오의 뺨을 감쌌다.

엄지로 눈썹을 하염없이 쓸어주는 그에게 어둠과 술기운을 빌어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닭살스럽게 속삭였고, 레오는 환하게 웃었다.

“알아. 그건 알고말고.”

어두워서 잘 모르겠지만, 레오가 그때 울었던 것 같다.

* * *

한동안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레오는 땡땡이치자는 말을 더는 하지 않았다. 애교를 부렸던 것도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원래의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가 너무 급했어.’

눈높이가 많이 낮아졌다.

평생 함께하지 못한다는 게 원통하다. 하지만, 앞으로 일이 년간 엔딩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예전에 전쟁터에서 들었다.

– “난 너랑 같이 기사가 돼서 결혼하는 게 꿈이야. 그래서 일부러 좀 미루려고 했어. 미안해. 애 엄마가 되면 기사 되기 힘들지 않겠어?”

카트리나를 죽이고, 왕자에게 준기사 작위를 얻은 뒤에 한 레나의 고백이었다. 우리는 당장 결혼해도 좋을 나이였고, 약혼했지만, 레나가 결혼을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기사 서임을 받는 게 쉬운 일인가. 어지간한 실력이 아니고서는 기사가 되기 어렵다. 레오야 {검술.3v : 바르트류(流)} 덕분에 언제든 기사 자격을 따낼 자신이 있었으나, 레나는 그렇지 못했다.

시나리오 초반의 그녀는 기사 한 명을 이기지 못했다. 끽해야 준기사가 될까 말까 한 수준이다.

다행히 레나의 실력은 부쩍부쩍, 빠르게 늘었다. 특히 지난번, 레나와 파혼하려 했던 회차에서는 엄청나게 빠르게 성장했는데, ‘나’를 따라잡기까지 고작 일 년도 걸리지 않았다.

엄청난 재능이다.

하지만 검술 하나에만 쏠린 그녀의 재능은 다른 의미에서 제약이기도 했다.

소꿉친구 시나리오의 레아가 사제가 되기까지, 거지남매 시나리오에서 에릭 드 예리엘 왕자가 즉위하기까지의 시간 제약이 있는 것처럼 여기서도 레나가 기사가 되는 순간 ‘직업 엔딩’이 뜨며 회차가 끝날 것이었다.

내심 그녀의 재능이 야속하다. 조금 느려도 괜찮을 텐데 무엇이 그리 급한지…

그러나 이 약혼관계 시나리오는 레나가 결혼을 미루고 있기에 성립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덕에 생긴 1~2년 가량의 시간.

아쉽지만 그동안만이라도 레나와 행복하게 살겠다. 나와 함께 기사가 되고자 하는 꿈이 성취될 때까지, 나는 그녀와 함께하겠다.

민서를 아주 외면하는 것도 아니었다. 기사가 되기 위해 언젠가 수도에 갈 테니까, 그때 뭘 좀 알아둘 계획이었다. 우린 아직도 아스틴 왕국의 수도, ‘바르나울’에 가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 거기서 반란을 일으키든 어쩌든 간에 정보를 수집해두면 민서에게 도움이 되겠지. 민서가 언제 제정신을 차릴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민서가 정신을 못 차리면 나야 좋지. 내가 더 이상 손해 볼 게 있나?’

없다. 이건 다른 ‘레오’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우리는 각 시나리오에서 찾아오는 직접적인 위기를 모두 알고, 쌓인 업적 덕분에 그냥 편안히 살아가겠다고 마음먹으면 어렵지 않게 성취할 수 있었다.

그 정도는 예전부터 가능했다.

다만 민서가 어떻게든 ‘클리어’란 걸 해내겠다고, 레나를 공주로 만들어 ‘진엔딩’이란 걸 달성해 탈출하겠다고 발악해왔다.

우리는 그러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다. 심지어 민서에게 호의가 있는 왕자 레오조차도 동생에게 해가 된다면 언제든 혈통을 포기할 작정이었다.

그러니 정신을 못 차리면 손해를 보는 사람은 민서뿐이었다. 우리가 그 모질이를 위해 불구덩이에 뛰어들어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지?

그렇게 레오 덱스터는 마음을 정했다. 민서도 없으니, 적당히 정보를 수집해주는 정도면 이번 회차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허나 그 안일한 계획이 산산조각 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얼마 후, 성년이 된 레나와 레오 덱스터는 데호르만이 이끄는 사냥팀에 끼어 사냥을 나갔다.

전과 동일하게, 노구화호를 잡을 쇠꼬챙이를 잔뜩 들쳐메고 산에 오른 레오는 레나와 조를 이뤄 아침 일찍 덫을 확인하러 갔는데…

“여긴 하나도 안 잡혔네. 가자.”

“어? 어어어어어?”

노구화호의 발자국이 보이질 않았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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