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136

136화 미래를 위해 남기는 것

악의 군세가 전진한다.

하늘을 드리우고 지상을 더럽히는 얼룩들.

그들은 천천히, 기세 좋게 지상의 면적을 메워간다.

대체 얼마나 많은 수가 모인 것인가.

지상을 끔찍하게 메우는 그들을 지켜보는 정찰병들이 거친 호흡소리로 천지를 진동하는 것에 무너지고 만다.

“……그야말로 세상의 종말이군.”

끔찍하다, 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적의 진군은 빈말로도 도열을 짠 군대의 진군이 아니다.

딱딱 소리를 내는 송곳니와 벌겋게 충혈된 눈은 그들의 빈궁함을 드러낸다.

지혜와 탐구의 악마들. 그들이 제조한 마법약들은 영혼조차 탁하게 만드는 극악의 마약이라던가.

허나, 그것은 놈들에게 무한한 굶주림을 주었다. 그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죽음조차 불사할 정도로.

“혼돈의 악마들의 특성이 보입니다. 20년 전, 특유의 외뿔 종족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국의 생존자. 은사자 기사단의 부장은 제국을 파멸시킨 저 끔찍한 것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이 세계에 첫 번째로 침공해온 혼돈의 악마군주와 그 군단. 그뿐만이 아니다.

“진정… 세상이 끝나는구나.”

23년 전, 자신들의 황제가 악마군주를 소환했다.

제도가 멸망했고, 제국 전역이 삽시간에 무너져내렸다.

결국 라이온하트의 사자심왕이 나타나 악마군주와 그 군세를 격멸했으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사자심왕과 함께한다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국의 생존자들을 이끄는 은사자 사단의 단장 발터는 결국 도래하고만 멸망 앞에서 의지가 꺾일 것만 같았다.

그는 신들의 기사가 아니다.

명예와 충성을 알지만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성배 수호자라는 기적의 존재가, 끝내 우리를 구원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끝없이 줄지은 악의 무리는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인류의 멸망은 확정이고, 자신들도 곧 죽게 되겠지.

사람이 죽으면 신들의 낙원으로 인도된다지만… 신앙을 바칠 인간이 한 명도 없이 죽어버린다면 과연, 그 낙원이 유지될 수 있을까?

발터는 복잡한 심경을 뒤로 한 채, 연합군이 있는 만신전으로 말머리를 옮겼다.

* * * *

성배기사 안토크가 승천했다.

성배기사의 승천과 별동대 대부분의 전사 소식은 도시 전체에 퍼져 나갔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애도했으며, 누군가는 다음 차례를 기다리며 무감각했다.

“폐하, 길두스입니다.”

왕의 천막. 긴급하게 소집령이 내려진 연합군 회의장에 노년의 기사가 들어왔고, 왕은 그를 반겼다.

“길두스 경, 갈베론 경도 함께군?”

레온은 길두스의 뒤를 따라오는 젊은 기사를 보며 반겼다.

“예, 폐하. 오랜만에 뵙사옵니다.”

“폐하는 무슨. 삼촌이라 부르게.”

“제, 제가 어찌…….”

질색하는 젊은 왕국기사. 그의 아버지 길두스가 레온을 만류했다.

“폐하, 애 버릇 나빠집니다.”

“무얼. 저치가 기저귀를 찼을 때부터 짐이 돌보았거늘. 내 저이의 대부가 아니던가.”

왕이 대부라 하여 어찌 경거망동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충의의 기사들에겐 불가한 일이다.

“아렌느 경은?”

“정찰임무 중입니다. 안토크 경의 승천 소식을 알렸지만, 맡은 임무를 저버릴 순 없다더군요.”

“제 애비를 닮아 우직하기는.”

그 우직함이 기꺼우면서도 안타깝기도 했다. 친우의 마지막을 그의 아들과도 함께하고 싶었거늘.

-쿵! 쿵!

그때, 천막의 바깥에서 무시할 수 없는 소리가 울렸다. 어딘가 화가 나 보이는 그 발걸음은 거대한 ‘나무다리’가 움직이는 소리다.

“입구가 작아.”

천막을 들추며 거대한 나무 거인이 들어왔다.

오래된 고목이 의지를 가진 종족. 트리맨의 현자는 적당한 자리를 깔고 앉았다.

“무거워진 엉덩이를 잘도 움직였군.”

길두스가 장난스레 건 말에 군라르가 대답했다.

“내겐 인간들처럼 엉덩이라 부를만한 부위가 없다네, 오랜 친구여.”

“말을 좀 적당히 해석해서 이해하게. 현자라는 자가 그리 우둔해서야.”

“오~ 술에 취해 풍차를 향해 돌진한 기사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군.”

“70년 전 일을 왜 이제 말하나! 그리고 나 혼자 꼴아박은 것도 아니고! 거기다 이겼네!”

“그걸 또 이겨 먹었나?”

레온은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오랜 추억을 상기했다.

그가 아직 햇병아리던 시절. 퀘스트를 받기 위해 떠난 수행길에 세 사람을 만났다.

수행기사 안토크와 길두스. 그리고 트리맨 군라르.

오크들의 습격을 받던 촌락을 구하던 길에 만난 인연들은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이어졌다.

이 오랜 우정은 분명 축복일 것이다.

어느 한쪽이 떠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아주 오래된 우정.

그러니까 슬퍼할 필요는 없다.

찾아올 이별이 다가온 것에 불과하니.

“안토크는 우리의 오랜 친구였다. 분명 길두스가 가장 먼저 갈 것이라 여겼는데 말이지.”

“나도 그리 생각했네.”

“어허, 자네들! 성배기사 못 됐다고 놀리나?”

왕국의 워나이트로서 잔뼈가 굵은 사령관은 너무 출세해버린 친구들 앞에서 불만을 토로했다.

레온이 전별을 이었다.

“그의 마지막은 영광과 명예 속에서 승천을 맞이했으니 이 어찌 축복이 아닐까. 그의 친구인 우리들은 사랑과 우정으로 전별을 고함이 옳다.”

길두스가 술병을 들었다.

“우리의 친구 안토크를 위하여!”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키는 길두스.

그런 아버지를 걱정하는 갈베론.

군라르는 인간들의 술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며 제 몸에 맺힌 열매를 전별주 대신으로 삼았다.

전별식은 짧았고, 충분한 애도와 사랑이 담긴 채 끝났다.

“우리는 이제 그가 남긴 유산을 이어야 하네. 군라르, 완성된 물건은 어떤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대장장이 신께서 충분히 축복하셨다.”

“숲의 의지는?”

“현자들은 의견을 통일했다. 이제 정수를 벼려내 그 안에 담을 것이야.”

“현자들의 봉사에 늘 감사하고 있네.”

레온은 슬픈 시선을 감추곤 이내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을 불러들였다.

빛의 대성녀 아냑.

성배기사 길링엄과 록슬리.

그 외에도 제국 은사자 기사단장 발터와 강철산맥의 난쟁이 생존자들을 이끄는 강철망치 대장. 트리맨들과 공존하며 숲을 가꾸는 요정족의 레인저들.

지금부터는 군의의 시간이다.

“발터 경. 악마 놈들의 군세가 진군하고 있다고?”

레온의 질문에 발터는 목례로 예의를 갖추며 대답했다.

“예… 왕성에서 튀어나온 놈들의 군세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란돌체 평야의 나태의 악마 생존자들과 짐승신의 사교도의 무리… 그리고 제국의 타락자들도 확인했습니다.”

연합의 적들이 사방팔방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예상되는 숫자는?”

“천만……. 놈들은 그야말로 모든 군대를 이끌고 이곳으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천만.

듣는 것만으로 얼이 없어지는 숫자다.

너무나 현실성이 없어 할 말을 잃을 정도이나 언젠가 맞닥뜨려야 할 현실이었다.

“슬슬 마지막이 다가오는구나. 전투를 준비하라. 곧 놈들이 들이닥칠 것이야.

인류 최후의 전투가 곧 시작된다.

* * * *

만신전은 본디 요새도시가 아니다.

대륙을 넘나드는 종교적 성지. 왕성과 함께 라이온하트의 가장 중심부에 있는 곳.

상시 성배기사급과 대성녀가 상주하는 이곳을 침공하려는 미친 작자들은 없었으니까.

애초에 성벽이 없었던 종교적 성지를 요새로 둔갑시킨 건 신들의 힘이 가장 가까운 탓이다.

만신전이라는 신들의 집합체가 신도들에게 직접적인 백업을 준다. 따라서 이곳에서 신도들은 이전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성벽에만 의지할 순 없다. 시가전을 염두해두고 항전을 준비하라.”

성배기사 길링엄과 록슬리. 그리고 각 연합의 수장들은 만신전이 내려다보는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내벽에 세워진 진지들에 투입되었다.

하리 일행들도 이 전투에 대비해야 했으나 그들은 이 전투에서 제외됐다.

“폐하, 저희들도 돕고 싶사옵니다…….”

하리가 의견을 피력했지만, 레온이 고개를 저었다.

“너희들은 본진에서 대기해라. 몸을 상할 일이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

레온은 하리 일행들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성배기사급인 베아트리체나 야피야 제 한 몸 건사할 힘이 있지만, 나머지 네 사람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폐하… 제게도 힘이 있어요. 미래의… 폐하께서도 인정해 주신걸요.”

천소연도 싸움에 나서지 못하자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하리도 소연도 거진 S급 전력이다. 어딜 가서도 공략의 주력으로 손꼽힐 전력인 것이다.

물론 레온의 판단에는 지당한 이유가 있었다.

과거를 재현했을 뿐인 레온과 달리 하리 일행들은 현실의 인간들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라도 게이트 내부에서 사망할 시 정말로 죽게 된다.

그렇기에 레온은 네 사람을 전장에서 제외한 것이다.

“너희들에게는 달리해야 할 일이 있다.”

“해야 할 일이요?”

“요양 중인 달과 순결의 신관장에게 가거라. 그녀에게는 이미 말해두었다.”

“???”

네 사람은 의아함에 고개를 기웃거렸다.

* * * *

레온의 명령으로 네 사람이 향한 곳은 만신전의 깊숙한 곳. 중상자들을 모아둔 안쪽이다.

라이온하트 왕국에서는 어지간한 상처나 병마는 축복받은 작물을 먹는 것만으로 나았기에 의사, 라고 한다면 보통 전쟁에서 중상을 입은 자들을 치료하는 외과의를 말한다.

달과 순결의 신관장 이사벨의 병실은 그런 평범한 중상과는 다른 의미였다.

“으으…….”

문을 연 순간, 공기의 흐름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작은 개인실, 나무로 짠 침대의 프레임 외에는 없이 1인실로는 크고, 2인실로는 작다.

그 안을 가득 채우는 피비린내. 하얐던 신관복이 선혈로 더럽혀진 여신관은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낸다.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만.”

“괜찮아. 폐하께서도 허락하셨고.”

어딘가 시원시원한, 하지만 특유의 건강미가 사라진 목소리.

“어서 들어와.”

목소리의 주인은 네 사람을 반기며 그들을 안으로 들인다.

“저기…….”

“왜?”

평소의 가벼운 태도조차 잊은 채 재혁은 침대에 앉은 여성을 바라본다.

여기저기 피딱지가 진 중상자. 소비된 붕대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가장 깊게 동여매진 곳은 다름 아닌 눈이다.

양 눈을 꼼꼼하게 가리며 몇 번이고 동여매진 붕대는 그녀의 시야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다.

“달의 신관장… 님이시죠?”

“그래, 나야말로 달과 순결의 여신 디나 님의 첫 번째 사냥꾼. 왕국의 사자심왕을 매부로 둔 왕국 권력서열 2위이신 이사벨님이시다.”

“젊은이들에게 거짓말 하지 마십쇼.”

여신관의 태클. 이사벨은 보이지도 않으면서 윙크하는 몸짓으로 화답한다.

“손이 비는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 폐하께서도 어쩔 수 없겠지.”

이사벨의 말에 쓴웃음을 짓는 여신관. 그것으로 여신관은 방을 나섰다.

“자, 햇병아리들아. 왜 이곳에 왔는지는 궁금할 거야.”

이사벨은 씨익 웃었다. 붕대로 가려진 눈조차도 웃는 것처럼 보였다.

“만신전에는 여러 신들이 계시지만, 그중에서도 ‘주신’이라 불리는 격이 존재하시지. 특정상황을 제외한다면 가장 강력힌 신들은 일곱으로 손꼽혀.”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아공간이 열리며 그 안에서 상자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침대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큼직한 것도 있었고, 반지 정도가 겨우 들어갈 만큼 장느 것도 있었다.

“빛과 정의의 여신 아리아나. 모든 기사들이 숭상하는 존재이자 왕국의 제1신격이시지.”

그중 가장 큰 상자를 발로 차 열어 재끼는 이사벨. 그 안에서 빛이 쏟아졌다.

“방… 패?”

수호는 그 안에서 놀라울 정도로 찬란한 빛의 힘을 느꼈다. 이사벨이 말을 잇는다.

“바다와 파도의 신 포마. 전쟁과 불꽃의 신 페토스. 하늘과 천둥의 신 울티마. 예로부터 물과 불, 벼락은 가장 두려운 자연의 분노로 여겨졌지.”

그들의 힘은 자연 그 자체를 대변하며 따라서 무엇보다도 강력하다.

푸른 아쿠아마린 보석이 박힌 팔찌가 놓여졌다.

꺼지지 않는 화염의 심장이, 닿는 것만으로 타버릴 것처럼 뇌기가 서린 창이.

이사벨이 보여준 것들의 정체를 모를 사람은 없었다.

게오브릭의 망치를 비롯해 레온의 성물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던 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이것들… 하나하나가 다 성물이에요?”

이사벨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역대 성배기사와 신관장들이 남긴 성물들이다.”

본디 성자와 성녀들은 죽음에 이르렀을 때, 낙원에 자신이 쓰던 물건들과 함께 승천한다.

하지만 왕국을 위해 자신들의 성물을 내려놓고 승천한 이들도 있다.

역동의 시대, 오크의 시대, 짐승들의 시대와 혼돈의 시대를 거치며 가장 고난했던 시절, 세상을 걱정하며 자신들의 보물을 남긴 영웅들.

“방패는 200년 전 빛과 정의의 성배기사 아말렉 경이 남긴 방패지. 이 불타는 심장은 구국의 성녀이자 오크 장의사 르노아 공작이 죽어가면서 남긴 물건이고.”

이사벨은 성물 하나하나의 여력을 설명했다. 하리가 물었다.

“저… 어째서 이런 걸 저희에게 설명하시는 건가요?”

“너희들이 이것을 계승할 것이기 때문이다.”

“……!”

네 사람은 성물들의 값어치를 알았다. 게오브릭 경의 망치가 얼마나 까다롭게 제 주인을 찾는지도.

성배기사와 신관장들의 성물들을 이렇게 쉽게 넘겨준다고?

“오해하지 마. 너희들은 이 성물들을 다룰 자격이 ‘아직’ 없어. 성물들도 너희들을 인정하지 않겠지.”

“그럼 어째서…….”

“폐하께서는 너희들이 반드시 생존할 것이라 믿는 눈치시더라고. 그러니까… 나도 미래를 너희들에게 맡겨보기로 했다.”

이사벨은 그들이 다른 세계의 존재임을 모른다.

이곳이 과거를 재현했을 뿐인 게이트 내부임도 모른다.

그녀는 그저 레온의 판단을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미래를 준비하려는 것이다.

“곧 죽을 나보다 너희들이 더 잘 써먹겠지. 너희들에게 성물을 계승시킬 거다. 성물의 인정을 받는 건 알아서들 하라고.”

이사벨은 씨익 웃으면서 태연하게 죽음을 말했다. 그리고──

“거기 너. 어둠의 기운이 짙게 느껴지는 아이야.”

“……천소연이에요.”

“그래, 너는… 내 부탁 하나 들어주지 않으련? 벤타시스 그 양반의 신도인 너만 할 수 있는 일이거등.”

“???”

이사벨이 미래의 기사들에게 성물을 계승하는 의식을 치르고, 숲의 현자들이 정수를 추출하며 악마들의 진군을 대비하는 동안.

사방에 퍼져 있던 기사단과 병사들이 귀환하기 시작했다.

최후의 전투를 위해.


           


Chapter 136

Chapter 136

136화 미래를 위해 남기는 것

악의 군세가 전진한다.

하늘을 드리우고 지상을 더럽히는 얼룩들.

그들은 천천히, 기세 좋게 지상의 면적을 메워간다.

대체 얼마나 많은 수가 모인 것인가.

지상을 끔찍하게 메우는 그들을 지켜보는 정찰병들이 거친 호흡소리로 천지를 진동하는 것에 무너지고 만다.

"……그야말로 세상의 종말이군."

끔찍하다, 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적의 진군은 빈말로도 도열을 짠 군대의 진군이 아니다.

딱딱 소리를 내는 송곳니와 벌겋게 충혈된 눈은 그들의 빈궁함을 드러낸다.

지혜와 탐구의 악마들. 그들이 제조한 마법약들은 영혼조차 탁하게 만드는 극악의 마약이라던가.

허나, 그것은 놈들에게 무한한 굶주림을 주었다. 그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죽음조차 불사할 정도로.

"혼돈의 악마들의 특성이 보입니다. 20년 전, 특유의 외뿔 종족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국의 생존자. 은사자 기사단의 부장은 제국을 파멸시킨 저 끔찍한 것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이 세계에 첫 번째로 침공해온 혼돈의 악마군주와 그 군단. 그뿐만이 아니다.

"진정… 세상이 끝나는구나."

23년 전, 자신들의 황제가 악마군주를 소환했다.

제도가 멸망했고, 제국 전역이 삽시간에 무너져내렸다.

결국 라이온하트의 사자심왕이 나타나 악마군주와 그 군세를 격멸했으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사자심왕과 함께한다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국의 생존자들을 이끄는 은사자 사단의 단장 발터는 결국 도래하고만 멸망 앞에서 의지가 꺾일 것만 같았다.

그는 신들의 기사가 아니다.

명예와 충성을 알지만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성배 수호자라는 기적의 존재가, 끝내 우리를 구원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끝없이 줄지은 악의 무리는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인류의 멸망은 확정이고, 자신들도 곧 죽게 되겠지.

사람이 죽으면 신들의 낙원으로 인도된다지만… 신앙을 바칠 인간이 한 명도 없이 죽어버린다면 과연, 그 낙원이 유지될 수 있을까?

발터는 복잡한 심경을 뒤로 한 채, 연합군이 있는 만신전으로 말머리를 옮겼다.

* * * *

성배기사 안토크가 승천했다.

성배기사의 승천과 별동대 대부분의 전사 소식은 도시 전체에 퍼져 나갔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애도했으며, 누군가는 다음 차례를 기다리며 무감각했다.

"폐하, 길두스입니다."

왕의 천막. 긴급하게 소집령이 내려진 연합군 회의장에 노년의 기사가 들어왔고, 왕은 그를 반겼다.

"길두스 경, 갈베론 경도 함께군?"

레온은 길두스의 뒤를 따라오는 젊은 기사를 보며 반겼다.

"예, 폐하. 오랜만에 뵙사옵니다."

"폐하는 무슨. 삼촌이라 부르게."

"제, 제가 어찌……."

질색하는 젊은 왕국기사. 그의 아버지 길두스가 레온을 만류했다.

"폐하, 애 버릇 나빠집니다."

"무얼. 저치가 기저귀를 찼을 때부터 짐이 돌보았거늘. 내 저이의 대부가 아니던가."

왕이 대부라 하여 어찌 경거망동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충의의 기사들에겐 불가한 일이다.

"아렌느 경은?"

"정찰임무 중입니다. 안토크 경의 승천 소식을 알렸지만, 맡은 임무를 저버릴 순 없다더군요."

"제 애비를 닮아 우직하기는."

그 우직함이 기꺼우면서도 안타깝기도 했다. 친우의 마지막을 그의 아들과도 함께하고 싶었거늘.

-쿵! 쿵!

그때, 천막의 바깥에서 무시할 수 없는 소리가 울렸다. 어딘가 화가 나 보이는 그 발걸음은 거대한 '나무다리'가 움직이는 소리다.

"입구가 작아."

천막을 들추며 거대한 나무 거인이 들어왔다.

오래된 고목이 의지를 가진 종족. 트리맨의 현자는 적당한 자리를 깔고 앉았다.

"무거워진 엉덩이를 잘도 움직였군."

길두스가 장난스레 건 말에 군라르가 대답했다.

"내겐 인간들처럼 엉덩이라 부를만한 부위가 없다네, 오랜 친구여."

"말을 좀 적당히 해석해서 이해하게. 현자라는 자가 그리 우둔해서야."

"오~ 술에 취해 풍차를 향해 돌진한 기사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군."

"70년 전 일을 왜 이제 말하나! 그리고 나 혼자 꼴아박은 것도 아니고! 거기다 이겼네!"

"그걸 또 이겨 먹었나?"

레온은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오랜 추억을 상기했다.

그가 아직 햇병아리던 시절. 퀘스트를 받기 위해 떠난 수행길에 세 사람을 만났다.

수행기사 안토크와 길두스. 그리고 트리맨 군라르.

오크들의 습격을 받던 촌락을 구하던 길에 만난 인연들은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이어졌다.

이 오랜 우정은 분명 축복일 것이다.

어느 한쪽이 떠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아주 오래된 우정.

그러니까 슬퍼할 필요는 없다.

찾아올 이별이 다가온 것에 불과하니.

"안토크는 우리의 오랜 친구였다. 분명 길두스가 가장 먼저 갈 것이라 여겼는데 말이지."

"나도 그리 생각했네."

"어허, 자네들! 성배기사 못 됐다고 놀리나?"

왕국의 워나이트로서 잔뼈가 굵은 사령관은 너무 출세해버린 친구들 앞에서 불만을 토로했다.

레온이 전별을 이었다.

"그의 마지막은 영광과 명예 속에서 승천을 맞이했으니 이 어찌 축복이 아닐까. 그의 친구인 우리들은 사랑과 우정으로 전별을 고함이 옳다."

길두스가 술병을 들었다.

"우리의 친구 안토크를 위하여!"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키는 길두스.

그런 아버지를 걱정하는 갈베론.

군라르는 인간들의 술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며 제 몸에 맺힌 열매를 전별주 대신으로 삼았다.

전별식은 짧았고, 충분한 애도와 사랑이 담긴 채 끝났다.

"우리는 이제 그가 남긴 유산을 이어야 하네. 군라르, 완성된 물건은 어떤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대장장이 신께서 충분히 축복하셨다."

"숲의 의지는?"

"현자들은 의견을 통일했다. 이제 정수를 벼려내 그 안에 담을 것이야."

"현자들의 봉사에 늘 감사하고 있네."

레온은 슬픈 시선을 감추곤 이내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을 불러들였다.

빛의 대성녀 아냑.

성배기사 길링엄과 록슬리.

그 외에도 제국 은사자 기사단장 발터와 강철산맥의 난쟁이 생존자들을 이끄는 강철망치 대장. 트리맨들과 공존하며 숲을 가꾸는 요정족의 레인저들.

지금부터는 군의의 시간이다.

"발터 경. 악마 놈들의 군세가 진군하고 있다고?"

레온의 질문에 발터는 목례로 예의를 갖추며 대답했다.

"예… 왕성에서 튀어나온 놈들의 군세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란돌체 평야의 나태의 악마 생존자들과 짐승신의 사교도의 무리… 그리고 제국의 타락자들도 확인했습니다."

연합의 적들이 사방팔방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예상되는 숫자는?"

"천만……. 놈들은 그야말로 모든 군대를 이끌고 이곳으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천만.

듣는 것만으로 얼이 없어지는 숫자다.

너무나 현실성이 없어 할 말을 잃을 정도이나 언젠가 맞닥뜨려야 할 현실이었다.

"슬슬 마지막이 다가오는구나. 전투를 준비하라. 곧 놈들이 들이닥칠 것이야.

인류 최후의 전투가 곧 시작된다.

* * * *

만신전은 본디 요새도시가 아니다.

대륙을 넘나드는 종교적 성지. 왕성과 함께 라이온하트의 가장 중심부에 있는 곳.

상시 성배기사급과 대성녀가 상주하는 이곳을 침공하려는 미친 작자들은 없었으니까.

애초에 성벽이 없었던 종교적 성지를 요새로 둔갑시킨 건 신들의 힘이 가장 가까운 탓이다.

만신전이라는 신들의 집합체가 신도들에게 직접적인 백업을 준다. 따라서 이곳에서 신도들은 이전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성벽에만 의지할 순 없다. 시가전을 염두해두고 항전을 준비하라."

성배기사 길링엄과 록슬리. 그리고 각 연합의 수장들은 만신전이 내려다보는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내벽에 세워진 진지들에 투입되었다.

하리 일행들도 이 전투에 대비해야 했으나 그들은 이 전투에서 제외됐다.

"폐하, 저희들도 돕고 싶사옵니다……."

하리가 의견을 피력했지만, 레온이 고개를 저었다.

"너희들은 본진에서 대기해라. 몸을 상할 일이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

레온은 하리 일행들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성배기사급인 베아트리체나 야피야 제 한 몸 건사할 힘이 있지만, 나머지 네 사람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폐하… 제게도 힘이 있어요. 미래의… 폐하께서도 인정해 주신걸요."

천소연도 싸움에 나서지 못하자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하리도 소연도 거진 S급 전력이다. 어딜 가서도 공략의 주력으로 손꼽힐 전력인 것이다.

물론 레온의 판단에는 지당한 이유가 있었다.

과거를 재현했을 뿐인 레온과 달리 하리 일행들은 현실의 인간들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라도 게이트 내부에서 사망할 시 정말로 죽게 된다.

그렇기에 레온은 네 사람을 전장에서 제외한 것이다.

"너희들에게는 달리해야 할 일이 있다."

"해야 할 일이요?"

"요양 중인 달과 순결의 신관장에게 가거라. 그녀에게는 이미 말해두었다."

"???"

네 사람은 의아함에 고개를 기웃거렸다.

* * * *

레온의 명령으로 네 사람이 향한 곳은 만신전의 깊숙한 곳. 중상자들을 모아둔 안쪽이다.

라이온하트 왕국에서는 어지간한 상처나 병마는 축복받은 작물을 먹는 것만으로 나았기에 의사, 라고 한다면 보통 전쟁에서 중상을 입은 자들을 치료하는 외과의를 말한다.

달과 순결의 신관장 이사벨의 병실은 그런 평범한 중상과는 다른 의미였다.

"으으……."

문을 연 순간, 공기의 흐름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작은 개인실, 나무로 짠 침대의 프레임 외에는 없이 1인실로는 크고, 2인실로는 작다.

그 안을 가득 채우는 피비린내. 하얐던 신관복이 선혈로 더럽혀진 여신관은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낸다.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만."

"괜찮아. 폐하께서도 허락하셨고."

어딘가 시원시원한, 하지만 특유의 건강미가 사라진 목소리.

"어서 들어와."

목소리의 주인은 네 사람을 반기며 그들을 안으로 들인다.

"저기……."

"왜?"

평소의 가벼운 태도조차 잊은 채 재혁은 침대에 앉은 여성을 바라본다.

여기저기 피딱지가 진 중상자. 소비된 붕대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가장 깊게 동여매진 곳은 다름 아닌 눈이다.

양 눈을 꼼꼼하게 가리며 몇 번이고 동여매진 붕대는 그녀의 시야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다.

"달의 신관장… 님이시죠?"

"그래, 나야말로 달과 순결의 여신 디나 님의 첫 번째 사냥꾼. 왕국의 사자심왕을 매부로 둔 왕국 권력서열 2위이신 이사벨님이시다."

"젊은이들에게 거짓말 하지 마십쇼."

여신관의 태클. 이사벨은 보이지도 않으면서 윙크하는 몸짓으로 화답한다.

"손이 비는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 폐하께서도 어쩔 수 없겠지."

이사벨의 말에 쓴웃음을 짓는 여신관. 그것으로 여신관은 방을 나섰다.

"자, 햇병아리들아. 왜 이곳에 왔는지는 궁금할 거야."

이사벨은 씨익 웃었다. 붕대로 가려진 눈조차도 웃는 것처럼 보였다.

"만신전에는 여러 신들이 계시지만, 그중에서도 '주신'이라 불리는 격이 존재하시지. 특정상황을 제외한다면 가장 강력힌 신들은 일곱으로 손꼽혀."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아공간이 열리며 그 안에서 상자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침대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큼직한 것도 있었고, 반지 정도가 겨우 들어갈 만큼 장느 것도 있었다.

"빛과 정의의 여신 아리아나. 모든 기사들이 숭상하는 존재이자 왕국의 제1신격이시지."

그중 가장 큰 상자를 발로 차 열어 재끼는 이사벨. 그 안에서 빛이 쏟아졌다.

"방… 패?"

수호는 그 안에서 놀라울 정도로 찬란한 빛의 힘을 느꼈다. 이사벨이 말을 잇는다.

"바다와 파도의 신 포마. 전쟁과 불꽃의 신 페토스. 하늘과 천둥의 신 울티마. 예로부터 물과 불, 벼락은 가장 두려운 자연의 분노로 여겨졌지."

그들의 힘은 자연 그 자체를 대변하며 따라서 무엇보다도 강력하다.

푸른 아쿠아마린 보석이 박힌 팔찌가 놓여졌다.

꺼지지 않는 화염의 심장이, 닿는 것만으로 타버릴 것처럼 뇌기가 서린 창이.

이사벨이 보여준 것들의 정체를 모를 사람은 없었다.

게오브릭의 망치를 비롯해 레온의 성물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던 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이것들… 하나하나가 다 성물이에요?"

이사벨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역대 성배기사와 신관장들이 남긴 성물들이다."

본디 성자와 성녀들은 죽음에 이르렀을 때, 낙원에 자신이 쓰던 물건들과 함께 승천한다.

하지만 왕국을 위해 자신들의 성물을 내려놓고 승천한 이들도 있다.

역동의 시대, 오크의 시대, 짐승들의 시대와 혼돈의 시대를 거치며 가장 고난했던 시절, 세상을 걱정하며 자신들의 보물을 남긴 영웅들.

"방패는 200년 전 빛과 정의의 성배기사 아말렉 경이 남긴 방패지. 이 불타는 심장은 구국의 성녀이자 오크 장의사 르노아 공작이 죽어가면서 남긴 물건이고."

이사벨은 성물 하나하나의 여력을 설명했다. 하리가 물었다.

"저… 어째서 이런 걸 저희에게 설명하시는 건가요?"

"너희들이 이것을 계승할 것이기 때문이다."

"……!"

네 사람은 성물들의 값어치를 알았다. 게오브릭 경의 망치가 얼마나 까다롭게 제 주인을 찾는지도.

성배기사와 신관장들의 성물들을 이렇게 쉽게 넘겨준다고?

"오해하지 마. 너희들은 이 성물들을 다룰 자격이 '아직' 없어. 성물들도 너희들을 인정하지 않겠지."

"그럼 어째서……."

"폐하께서는 너희들이 반드시 생존할 것이라 믿는 눈치시더라고. 그러니까… 나도 미래를 너희들에게 맡겨보기로 했다."

이사벨은 그들이 다른 세계의 존재임을 모른다.

이곳이 과거를 재현했을 뿐인 게이트 내부임도 모른다.

그녀는 그저 레온의 판단을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미래를 준비하려는 것이다.

"곧 죽을 나보다 너희들이 더 잘 써먹겠지. 너희들에게 성물을 계승시킬 거다. 성물의 인정을 받는 건 알아서들 하라고."

이사벨은 씨익 웃으면서 태연하게 죽음을 말했다. 그리고──

"거기 너. 어둠의 기운이 짙게 느껴지는 아이야."

"……천소연이에요."

"그래, 너는… 내 부탁 하나 들어주지 않으련? 벤타시스 그 양반의 신도인 너만 할 수 있는 일이거등."

"???"

이사벨이 미래의 기사들에게 성물을 계승하는 의식을 치르고, 숲의 현자들이 정수를 추출하며 악마들의 진군을 대비하는 동안.

사방에 퍼져 있던 기사단과 병사들이 귀환하기 시작했다.

최후의 전투를 위해.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