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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37

137화 악마, 그리고 악마 (1)

137화 악마, 그리고 악마 (1)

식당 앞에 있던 루나와 세실이 나를 보자마자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데미안! 너 얼굴이 왜 그래!”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긴! 얼굴이 이렇게 부었는데! 어라? 왼팔은 또 왜 이래!”

“아. 이건.”

세실이 덥석 내 손목을 잡았다.

“치유실. 가야 해.”

“이 정도는 그냥 둬도 금세 나아.”

“가야 해.”

세실이 울 것 같은 얼굴이었기에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환히 웃은 세실이 싸늘하게 표정을 바꾸며 아리엘과 미아를 돌아봤다.

세실의 의도를 깨달은 내가 말했다.

“혼자 다녀올게. 너희들 식사해야 하잖아.”

“같이. 가야 해.”

이런 별것도 아닌 상처에 우르르 몰려가는 것이 조금 창피했지만 세실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미아는 식당 앞에 남았다. 카인을 만나면 함께 치유실로 오겠다며. 아아. 카인까지 데려오겠다니.

“데미안 너, 혹시 누구에게 맞은 거야? 불량한 선배들? 나한테 말만 해! 내가 다시는 그런 못된 짓을 할 수 없게 두 팔을 뽑아버릴 거야!”

아리엘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루나를 돌아봤다.

루나는 화가 나면 저런 무서운 말을 서슴없이 한다. 언젠가 은월섬에서는 나를 쿠훌린이 숨겨둔 자식으로 오해하고 정말 소름 끼치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

‘이, 이 씨뿌리기 대왕 수염 괴물! 즉시 처단해 주겠어! 확 단검으로 자르고 터뜨려 버릴 거야!’

그때를 떠올리니 저절로 아랫도리에 힘이 빠졌다.

그래서 약간 비틀거리자 세실이 화들짝 놀라며 나를 부축했다.

“나한테. 기대.”

그렇게 말한 세실이 무서운 눈으로 아리엘을 노려봤다. 아리엘도 지지 않고 세실을 마주 노려봤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세실과 아리엘의 관계를 좀 풀어내야 할 듯하다. 소설에서는 둘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은 편이었다. 이유는 달랐지만 두 사람은 카인에게 충성했고, 또 ‘루나’라는 공통의 적이 있었으니까.

아리엘은 카인이 자신보다 루나를 바라보는 것 같아서, 세실은 루나가 카인의 의견에 수시로 반대 의사를 표해서 싫어했다. 원래 공통의 적을 지닌 이들은 같은 편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이 세계에서는 세실과 아리엘이 앙숙인 한편, 루나와는 가깝게 지내고 있다.

“세실리아.”

내가 부르자 세실은 금세 표정을 되돌리며 나를 올려다봤다.

아무래도 분위기를 살짝 바꿔야 할 듯하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너는 치마가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진심이었다. 세실은 늘씬하게 키가 크고, 또 다리가 길고 곧아서 치마를 입으면 무척 매력적이었다. 참고로 무한회귀 설정집에 적힌 그녀의 키는 169센티미터다.

“······고. 고마워.”

“그런데 치마를 입고 실습하면 조금 위험하지 않아?”

내가 말을 꺼내 놓고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빌어먹을. 왜 여태 생각하지 못했지? 치마를 입은 채 격투라니. 검술학부의 시커먼 사내놈들이 다 볼 것 같은데.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데미안. 세실리아는 실습 시간에는 늘 나처럼 반바지를 입거든. 아니지. ‘누구’를 만나러 갈 때만 치마를 입는다고 말하는 게 맞으려나?”

“루. 루나······!”

이후 세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었고, 더는 아리엘을 노려보지 않았다.

머리카락 사이로 빼꼼 드러난 귀가 붉다.

***

“어머, 아리엘라. 또 과식한 거니?”

비비안 교수의 말을 듣자마자 아리엘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맞아. 다시는 치유실에 오지 않으려 했는데!

“과, 과식이라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아마도 다른 환자와 착각하신 것 같은데, 지난번에는 식수가 몸에 맞지 않아 가벼운 복통을 일으킨 것뿐······!”

“본능을 이겨내렴 아리엘라. 과식하는 습관은 좋지 않아. 그 날씬한 몸매가 망가질지도 모른단다?”

“아니라니까요!”

빽 소리친 아리엘은 치유실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면서 후회했다. 이런 품위 없는 모습을 보이다니.

“여우엘라.”

아리엘은 처음에는 자신을 부르는 것인지 몰랐다. 그런데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엘은 등 뒤를 돌아보고는 흠칫 놀랐다. 세실리아의 살기 가득한 눈동자 때문이었다.

“데미안. 누가. 저랬어.”

아리엘은 허리를 꼿꼿이 펴며 턱을 들어 올렸다. 아리엘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그렇게 두 여인의 시선이 첨예하게 부딪쳤다.

“그걸 제가 왜 말해야 하죠?”

그 순간, 세실리아의 눈동자가 극적으로 가까워지며 아리엘을 습격했다. 쿵! 엷은 소음이 일었고, 세실의 손에 밀려난 아리엘은 복도의 벽에 등을 기댄 채 서 있었다.

“말해.”

시야를 가득 메운 세실리아의 눈이 짐승처럼 번들거렸다.

아리엘도 사납게 눈을 빛내며 세실리아를 노려봤다.

“지금 해보자는 건가요? 세실리아 크라소타.”

그때였다.

“세실리아!”

복도 저편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득, 어금니를 악다문 세실리아가 뒤로 물러났다. 카인의 시선이 스치듯 아리엘을 바라봤고, 그는 세실리아와 함께 치유실로 들어갔다. 미아가 아리엘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하지만 아리엘이 대답하지 않자 안절부절못하며 치유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카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무슨 일이 있었지? 아리엘.”

아리엘은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일진이 사나운 날이다. 난생처음 ‘애첩’이라는 자존심 상하는 말을 들은 데다가, 데미안을 돕기 위해 애쓴 자신을 세실리아 크라소타는 마치 범인 대하듯 추궁했다. 거기에 더해 뭐? 여우엘라?

“아리엘.”

카인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아리엘은 오늘의 일에 대해 말할 생각이 없었다. 데미안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실리아에게도 입을 다물었다. 물론 데미안의 부탁이 아니었더라도 저런 무례한 여자에게 해줄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지만.

아리엘은 카인에게 서운했다. 그도 세실리아 크라소타처럼 데미안만을 걱정하고 있다.

“세실리아와 무슨 일이 있었어? 다친 곳은 없는 거야?”

아리엘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흔들리는 눈으로 카인을 바라봤다.

“세실리아가 무례하게 굴었다면 내가 대신 사과할게.”

“아, 아니······ 나는······.”

카인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눈빛으로 아리엘을 보고 있었다.

“미안해 아리엘. 내가 있었으면 그런 일은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세실리아에게도 분명히 말해둘게. 다시는 너에게 그런 거친 행동을 하지 말라고.”

아리엘은 카인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카인의 눈을 홀린 듯이 바라봤다. 저 아름다운 눈동자는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어. 나는 그에게 소중한 사람인 거야.

“세실리아 때문에 많이 놀랐을 테니 오늘은 둘이서 식사하자. 데미안은 괜찮을 거야. 비비안 교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으, 응. 다행이야.”

“그럼 가자. 아, 미아도 데려가야 할까? 요즘 너와 가까워 보이던데.”

“아니야! 아, 아니, 조금 친해진 것은 맞는데······! 그, 그래. 미아는 데미안을 걱정할 테니까, 그러니까 우리 둘이 식사하러 가도 이해해 줄 거야!”

아리엘은 아주 약간 죄책감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미아는 카시우스의 채찍을 대신 맞으려 뛰어들었으니까. 분명 나와 데미안을 걱정했기 때문이겠지.

“응. 아리엘.”

두 사람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리엘은 카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또 과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즐겁게 식사했다. 그녀는 행복했다. 일진이 사나운 날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횡재수가 들어온 날이었다.

“그런데 아리엘. 데미안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래서 아리엘은 카인의 물음에 저도 모르게 대답해 버렸다.

***

어둠에 물든 기숙사 근처의 숲에는 카시우스 일당이 모여있었다.

“카, 카시우스. 정말 괜찮을까? 그 녀석 보통내기가 아니었잖아.”

“멍청한 소리는 그만둬. 그래봤자 마법학부의 약골일 뿐이지.”

“하지만 약골이라기에는 제대로 단련한 놈이었어. 너도 녀석의 주먹을 맞고 쓰러졌잖아.”

카시우스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너는 정말 병신이냐? 마법사는 육체를 단련하지 않아. 그러면 마법을 발현할 때 무언가 저항이 생긴다더군. 그때 우리가 당한 건 방심했기 때문이야. 그 미아인지 뭔지 하는 여자가 갑자기 달려들어서 당황하기도 했고.”

“그건 그렇지만······.”

“우리는 훈련용 검까지 들고 왔다. 설령 녀석이 정말로 몸을 단련했다 해도 무기를 쥔 우리를 이길 수는 없어.”

그 말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검사는 맨손일 때와 검을 들었을 때의 전투력이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게다가 그들 모두는 평범한 인간과는 궤를 달리하는 기사급 실력자였다.

“잠자코 복수할 준비나 해. 2학년에서 가장 예쁘다는 여자를 미끼로 던졌으니, 녀석도 사내라면 입을 헤벌리며 뛰어나오겠지.”

“하긴. 그런 여자가 갑자기 고백하며 유혹하면 안 넘어올 사내놈은 없어.”

카시우스의 부하들이 낄낄거렸다.

잠시 후, 기숙사에서 후드를 눌러쓴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왜 혼자지? 여자는 어딜 간 거야.”

“너는 진짜로 병신 새끼가 맞구나. 먼저 가라고 말했겠지. 자기는 상황을 살핀 후 뒤따라오겠다고 하고.”

카시우스는 저 멀리 다가오는 그림자를 보며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를 갈았다. 데미안 시니야카. 감히 황족인 내게 주먹을 휘둘러?

카시우스는 1학년, 그것도 마법학부의 학생에게 당한 것이 견딜 수 없이 창피했다. 그는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의식적으로 무시했다. 치유실에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는 분노와 모욕의 감정이 짙게 배어있었다.

숲의 어둠으로 진입한 녀석이 주위를 둘러봤다. 한시라도 빨리 여자를 취하고 싶은 사내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모습. 카시우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신호를 보냈고, 그와 동시에 여러 개의 그림자가 놈을 습격했다.

“크헉······!”

녀석이 쓰러졌다.

아니, 쓰러진 건 이쪽이었다. 카시우스의 부하들이 차례로 땅바닥에 나동그라졌고, 놀랄 틈도 없이 망토 속에서 뻗어 나온 손이 카시우스의 얼굴을 틀어쥐었다.

“너, 너는 누구······!”

카시우스는 두 눈을 부릅떴다.

데미안 시니야카가 아니다.

“카시우스 발로리우스.”

목소리를 낸 후드 속 눈동자에서 무시무시한 포악성이 느껴졌다.

인간의 눈빛이 아니었다.

악마다.

“다시 한번, 단 한 번이라도 데미안을 건드린다면, 너는 후회하게 될 거다.”

목소리의 경고는 비수처럼 날카로웠고, 카시우스의 영혼까지 파고들었다. 카시우스는 아랫도리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태어나 처음으로 경험하는 극도의 공포였다. 그는 두려움에 떨며 바지에 오줌을 지렸다.

카시우스의 두 무릎이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그는 한동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이윽고 카시우스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

.

.

부하들을 돌아보는 카시우스의 눈동자는 피처럼 붉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그래. 악마를 죽이려면 그보다 더한 악마를 데려와야겠지.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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