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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38

138화 최후의 전투(2)

-카칵! 카카카카칵!

땅이 흔들린다. 지평선 너머에서 몰려오는 검은 얼룩들만 아니었다면, 지진이라 착각했을 것이다.

“아아…….”

연합에 이십만 대군이 결집했을 때, 제국군 병사 하이젠은 이토록 강력한 군대가 모였음에 승리의 희망을 품었다.

초월적인 무력으로 혼돈의 군세를 격멸하던 성배기사들과 홀로 오크들을 도륙하는 왕국 정예병들.

무엇보다 제국을 멸망시킨 악마군주 말루스를 쓰러뜨렸다던 사자심왕의 존재는 모든 이들의 희망이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천만의 대군이 일제히 걸어오는 그 모습은, 공포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지평선 끝에서 몰려오는 검은 얼룩은 만신전을 앞에 두기까지 온 세상을 새까맣게 물들었다.

[들어라.]

검은 얼룩 사이에서 한 반인반마가 걸어온다. 인류를 배신하고 악마의 노예가 되기로 자청한 추종자들. 그 메신저가 확성마법을 건 채 다가왔다.

[어리석은 필멸자들아! 지금이라도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라! 그리하면 위대하신 분들께서 너희들에게 자비를 베풀──]

“시끄럽다!!”

그 악마 추종자는 제 할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고함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날아온 창이 포물선을 그리며 그의 심장에 꽂힌 것이다.

-콰직!

악마 추종자의 심장을 꿰뚫고 바닥에 꽂힌 투창. 절명한 악마 추종자를 목격한 선두의 악마 추종자 군단이 분노로 일그러진다.

[전진-하라.]

협상은 없었다. 전 제국 선제후 출신 악마군단장 볼프하르트는 제국군 출신 악마 추종자들에게 외쳤다.

“대포 발사!!”

-쾅! 콰쾅!

-콰콰쾅!

벼락처럼 굉음을 내곤 일제히 쏟아지는 포탄들. 그것은 만신전의 성벽을 단숨에 무너뜨릴 기세였으나 도중에 보이지 않는 막에 튕겨 나갔다.

“크으… 왕국 놈들!”

라이온하트의 원거리 혐오에서 비롯된 군단성법. 만신전 여기저기에서 신관들과 기사들이 펼친 군단성법은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다.

저열한 원거리 무기 따위는 연합군의 그 무엇도 상처 입히지 못할지니.

“예상했다. 하지만 놈들에게 줄 선물은 많지!”

볼프하르트는 투석기를 준비했다. 대포알이 아니라 투석이 됐다 한들 저 장벽에 상처를 입힐 순 없겠지.

하지만 그는 전 제국 선제후였다. 제국의 사령관이었고, 왕국을 적대할 준비를 하던 작자였다.

“쏴라!”

이번에는 투석기가 당겨지며 일제히 무언가를 던진다.

“성법이 있는 한 원거리 무기는…!?”

투석기에서 던져진 것들은 장벽과 부딪치기 직전에 폭발하더니 고깃조각들을 후두둑 떨어뜨렸다.

자연스레 그것을 뒤집어 쓴 병사들은 이내 그 정체를 깨닫고 헛구역질을 한다.

“우욱…!”

“천벌받을 놈들…!”

그것은 부패한 시체였다. 썩어 문드러지거나 가스가 차 부풀어 오른… 마치 너희들도 이렇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처럼.

“어어?”

그것은 경고로 끝나지 않았다. 공중에서 터진 시체들에서 거무튀튀한 녹색 안개를 퍼뜨린 것이다.

“도, 독가스다!”

“입을 막아…!”

저주와 부패의 마법이 걸린 시체들이 성벽 여기저기서 터진다. 성 여기저기에 독안개가 퍼지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악!”

병사들이 독안개를 피해 도주했다. 성벽 위의 병사들이 아래로 내려가려 했고, 성벽 아래 병사들은 도시의 안쪽으로 달리려 했다.

“진형을 갖춰라!!”

그때, 도시 곳곳에서 기사들이 말을 타고 달린다. 워 나이트들이, 단장급의 기사들이 저마다 긴급한 곳을 찾아 독안개를 정화하고 병사들 사이에서 외쳤다.

“자리를 지켜라!”

“방벽을 사수하라!”

“생명의 신관들은 북동쪽의 가스를 우선 정화한다!”

그들은 백전노장들이다. 오랜 시간 악종들과 싸워온 기사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야전에서 즉각 판단했다.

그런 기사들을 따르는 병사들. 기사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병사들은 명령받은 바에 따라 방벽에 전열을 구축한다.

혼란을 틈타 공성추와 공성탑을 밀며 다가왔다.

“궁수들 준비! 화포반 방포 준비!”

성벽을 빼곡히 매운 연합군 궁수들과 제국 화포병들. 그들의 화살과 대포알들이 장전을 맞췄다.

“우리의 무기는 악을 꿰뚫는 정화의 빛이 되리라!”

각 성벽에서 워 나이트들이 성법으로 그들을 축복한다.

화살에는 새하얀 빛이 깃들고, 대포알에는 맹렬한 화염이 압축됐다.

“저놈들을 저승으로 보내버려라!”

-콰앙!

-쾅!

궁수들이 쏜 빛의 화살들이 반인반마에게 꽂히자 정화의 빛이 그들을 산 채로 태웠다.

군단 사이사이에 탄착한 포탄들은 끔찍한 불꽃을 퍼트리며 온 상을 태웠다.

상대의 원거리 무기를 깎아내리면서, 본인들은 일방적으로 원거리 공격을 퍼붓는다.

불합리의 극치인 전쟁술을 앞에 두고 악마 추종자의 군단들은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섰다.

“자리 지켜.”

볼프하르트는 그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 세 발자국 이상 도망친 병사의 목을 친히 베어버리면서 그들의 전진을 강요했다.

“공성전을 시작하라!”

수백 대의 공성탑들이 일제히 몰려든다. 그 탑에 탑승한 악마 추종자들만 십만이다.

“공성탑을 저격한다!”

기사들의 성법이 접근하는 공성탑들을 향해 쏟아졌다.

하늘에서 천둥이 떨어지고, 마른 공기에서 파도가 덮쳤으며, 거대한 불기둥이 공성탑에 직격했다.

흑마법사들의 반격으로 멀쩡한 성벽 위에 암흑기사들이 쏟아져 내리고, 거인들이 화살들을 묵묵히 맞아가며 성벽으로 향한다. 그런 거인들을 향해 솟아난 나무뿌리가 목을 조이며 지하로 끌고 갔다.

“으, 으아아…….”

일반적인 전쟁의 양상이 아니다. 라이온하트 연합군을 공격하는 1차 선발대의 지휘를 맡은 볼프하르트는 자신들이 군대가 아닌 자연재해와 싸우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크으…!”

전투 시작 반나절. 선발대로 투입한 사십 만 악마 추종자 군단이 반절 이상 죽어나갔다.

감전사, 폭사, 동사, 분사, 압사, 익사에 추락사까지.

너무나 많은 죽음들이 그들 앞에 도사렸고, 그것이 불합리할 정도로 한쪽만을 축복하는 신들의 기적임을 모르지 않았다.

[형편없군.]

그때였다. 볼프하르트를 찾아온 거대한 그림자에 오한이 서렸다.

“위, 위대한 존재시여!”

볼프하르트는 곧장 양 무릎을 꿇고 굴종의 자세를 취했다. 한때는 악마와 계약해 기세등등했던 그지만, 막상 현실에서 마주친 대악마들은 하나 같이 괴물들이다.

성배기사들이 항거할 수 없는 재해라면, 이들은 끝없는 악의를 가진 순수악.

지혜와 탐구의 악마군주 카라카엘의 제자인 캐스터 오브 프라즈나는 여섯 개로 갈라진 시선으로 볼프하르트를 꿰뚫는다.

[병력소모가 크군.]

“어, 어디까지나 선발전입니다! 아직 결과는…!”

[놈들 병사 하나를 죽일 때, 이쪽은 백 명이 죽었다. 이 실태를 납득시켜라.]

“소, 소모전입니다!”

볼프하르트의 말에 그를 향해 뻗던 팔을 멈추는 대악마. 그는 서둘러 자신의 전략을 외쳤다.

“놈들의 숫자는 저희의 오십분의 일입니다! 그나마 북부군이 빠져나가면서 그 차이는 더욱 벌어졌지요! 하여 별 가치 없는 악마추종자들로 파상공세를 취해 놈들을 지치게 만들 생각입니다!”

악마 추종자들. 악마가 되지 못해 반인반마에 그친 쓰레기 잡졸들이다.

그런 잡졸들을 소모시켜 놈들을 지치게 만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단지 볼프하르트가 예상하지 못한 건, 악마 추종자 군단이 너무 빨리 녹아내렸다는 거겠지.

[그분께서는 서두르시기를 바란다.]

볼프하르트는 악마군주의 의중을 알기 어려웠다. 상대는 성배기사들이다. 성배의 수호자가 이끄는 군대였다.

대량의 소모가 일어나더라도 착실하고 느릿하게 깎아내는 것이 가장 안전할 터인데.

[정예를 무르고 노예들을 축차 투입해라. 그분께서 지원하실 것이다.]

“……예! 아, 알겠습니다!”

볼프하르트는 그 의중을 깨닫고 바짝 엎드렸다.

자신이 계약한 파괴와 살육의 대악마가 동쪽 전선에서 괴물 오크놈의 손에 뒈져버린 이후 그는 언제 토사구팽당할지 모를 처지.

살기 위해선 쓸모를 증명해야 했다.

* * * *

전장의 폭음이 여기까지 들린다.

하리는 무심코 전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딱! 하고 막대기에 얻어맞았다.

“아곡…!”

“신경 쓰지 마. 너하곤 상관없는 곳이니까.”

눈도 보이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리 정확하게 정수리를 때리는지.

“너는 이만 나가 봐. 생각보다 빨리 끝났으니까.”

“예에…….”

하리는 두근거리는 심장과 팔목에 걸린 아쿠아마린 팔찌를 꼭 쥔 채 방을 나섰다. 그러다가 눈을 감고 있는 천소연을 힐깃거렸고.

“그런데 소연이는 뭘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시킨 거.”

“???”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사벨의 말을 흘려보내고 만신전을 나선다. 반나절부터 시작된 전쟁은 아직 여유롭게 성벽에서 막아내고 있는 모양새다.

“군라르 님도 하루이틀 내로 끝내실 수 있다고 하셨고…….”

문제는 게이트를 여는 것이다. 베아트리체는 지혜의 군주 카라카엘이 게이트에 간섭해 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폐하께서 과연, 지혜의 군주를 쓰러뜨릴 수 있을까?’

악마대공만 해도 그런 괴물이었는데, 군주는 대체 얼마나 강력한 존재일까?

그녀가 내심 안도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원 역사 덕분이다.

혼돈의 군주 말루스와 쾌락의 군주 도트라돈, 지혜의 군주 카라카엘까지.

레온은 세 명의 군주를 쓰러뜨린 대영웅이다. 그런 그가 있는 이미 쓰러뜨린 적이 있는 지혜의 군주를 다시 한 번 쓰러뜨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닐까 하고…….

-콰아아아아아아!

하리는 시야에 꽉 찬 하늘을 멍하니 응시한다.

구름을 뚫고, 타오르는 꼬리를 달고 행성에 들이닥치는 불청객들.

“아.”

뭔가 잘못됐다. 아니, 믿기지 않았다.

하늘을 메운 유성들이.

대륙을, 아니, 행성을 멸망시킬 수 있는 별의 파멸이 다가온다.

어떻게.

폐하는 저런 괴물을 이길 수 있었던 거지?

* * * *

전투가 개시되고 열여섯 시간. 밤하늘을 비치는 파멸의 빛들이 여덟 개.

지혜의 악마군주 카라카엘.

다시 말해 차원을 넘나들어 모든 멀티버스 마법의 종주이며 가장 위대한 마법의 시초.

[행성공전궤도 해석. 병렬연결, 좌표유도 개시.]

본래라면 이 행성을 지나쳤어야 할 혜성들을 끌어당긴다. 그것이 어느 정도의 대마법인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천체에 개입하는 대마법은 기적이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다.

그것이 여덟 개.

손가락 하나에 하나씩. 열두 개 중 여덟 개의 손가락이 유성에 개입한다.

[정밀유도 개시. 강하시 보호마법 자동발현. 유도된 포인트로 일제강습.]

세상에 마법이 새겨진다. 그가 자리한 땅을 중심으로 이 땅에 전례없는 대술식이 전개된다.

직경 32km를 넘나드는 거대한 마법진이 땅에도, 창공에도.

[오오…….]

[위대한 스승이시여…….]

그 전례없는 대마법을 앞에 두고 긴장과 고양으로 대악마들조차 경의를 표한다. 밤하늘에 새겨진 기적에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우주가 탄생한 이래 이만한 대마법을 행사하는 이가 없었으며, 이만한 술식을 짜올리는 현자도 없었다.

마법진에 새겨지는 마력들이 폭풍우처럼 굉음을 내고, 지상의 마법진이 천체와 연결되어 밝게 빛난다.

하나하나가 대마법사들인 캐스터 오브 프라즈나들조차 흉내낼 수 없는 기적.

우러러보아라, 미천한 하등생물들아.

이것이야말로 마법의 종주.

불멸자 중 유일한 대현자.

신성보다도 오래된 악성의 시초이니.

카라카엘.

차원의 대마법사. 가장 위대한 현자.

[너희들의 무엇도 남기지 않겠다. 천체의 무게에 짓눌려라.]

행성의 종말을 알리는 대파괴가 대기권을 뚫고 강하한다.

너무나 끔찍한 현실.

같은 편인 악마들조차 눈을 돌리게 만드는 현실에 연합군은 어떨까.

신들이시여.

저희들을 지켜주소서.

그 순간.

악몽 같은 현실에 절규하는 연합군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한다.

공성전의 최전선. 성벽 위의 망루.

그곳에 한 황금이 검을 들고 있다.

그것은 백색이다.

새하얀 흰 갈기털을 휘날리는 여신의 신수.

당대 최강의 성배 수호자에게 여신이 선물한 전우.

그 백색의 피부 위에 황금마갑이 씌어 지고, 누구도 태우지 않았던 고고한 신수 등 위에 사자심장을 가진 기사가 성창을 번쩍 든다.

“타올라라. 모든 전장의 불꽃이여.”

그 순간, 온 세상의 불꽃이 맹렬히 솟구친다. 그 화염은 정말로 세상을 덮을 것처럼 맹렬하다.

“불카누스 경?”

누군가가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그들 앞에 있는 건 만신의 대리인이다.

[불꽃에 개입?]

카라카엘은 저 ‘신벌’이 가진 힘을 보고 감탄했다.

세상의 모든 불에 간섭하고 있다. 그것이 단지 규모나 파괴적인 힘이 아니라 정말로 ‘세상 모든 불꽃’에 간섭하는 개념이란 것이 놀라운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가장 맹렬한 불꽃이 타오르는 곳.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

행성 대기권을 돌파해 지상으로 낙하하는 유성들. 본래라면 대기권 돌파와 동시에 전소했어야 할 유성들은 카라카엘의 마력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그것을──

──■■■■■■■■■■■■■■■

더욱 맹렬히 불태운다. 대기권 마찰로 인한 단순한 불꽃을, 신의 불꽃으로 변질시켜.

“벼, 별이 타오른다!”

지상에서도 보일 정도로 거대한 불꽃이 떨어지는 별들을 집어삼킨다. 녹아내리는 별들은 그 크기가 실시간으로 줄어든다. 그곳에 대고 레온이 외쳤다.

“록슬리…!”

“예, 폐하!”

레온의 옆을 보좌하던 구리빛 갑옷의 기사가 명을 받들었다. 그에게 레온이 말한다.

“만신전에 피해가 올 만한 조각들을 격추시켜라. 어차피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지대는 신경 쓸 필요없다.”

“명 받잡겠습니다!”

록슬리의 성검이 검집에서 벗어났다. 그의 성검이 찬연한 황금빛을 내비친다.

태양과 심판의 기사. 태양이 뜨지 않는 지금 그는 이 밤하늘에 새로운 태양을 떠오르게 한다.

신벌 <태양발현.>

만신전의 상공. 순식간에 떠오른 태양이 추락하는 유성의 불길을 흡수한다.

본디 불꽃과 태양은 상성이 좋았다. 한 자리에 두 성배기사가 모일 기회가 없어 그렇지.

자신의 태양이 충분한 열 에너지를 흡수했음을 감지한 록슬리가 검을 가리켜 외친다.

“라이온하트의 이단심판관! 록슬리가 추악한 악의를 벌한다!”

추락하는 유성 조각들을 향해 쏘아지는 태양빛. 그 맹렬한 빛은 그 자체로 끔찍한 열병기가 되어 추락하는 조각들을 모조리 꿰뚫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악!

-부, 불이! 불이이이이…!

그 과정에서 태양광의 플레어에 노출된 악마들과 악마 추종자들이 녹아내린 것은 소소한 피해다.

성배 수호자.

그리고 성배기사.

전선에 나선 두 괴물을 앞에 두고 지혜의 군주가 미소 지었다.

[인사치레는 이만하면 됐겠지.]

열두 개의 손가락이 마법을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열두 개의 혜성이 행성궤도에 진입했다.

이에 맞서.

전장의 불꽃을 통제하는 수호자도 태양을 띄운다.

두 개째의 태양.

열두 개의 유성.

공성전이라기보다는 행성과 행성이 전쟁을 벌이는 대행성전.

괴물들의 싸움이다.


           


Chapter 138

Chapter 138

138화 최후의 전투(2)

-카칵! 카카카카칵!

땅이 흔들린다. 지평선 너머에서 몰려오는 검은 얼룩들만 아니었다면, 지진이라 착각했을 것이다.

"아아……."

연합에 이십만 대군이 결집했을 때, 제국군 병사 하이젠은 이토록 강력한 군대가 모였음에 승리의 희망을 품었다.

초월적인 무력으로 혼돈의 군세를 격멸하던 성배기사들과 홀로 오크들을 도륙하는 왕국 정예병들.

무엇보다 제국을 멸망시킨 악마군주 말루스를 쓰러뜨렸다던 사자심왕의 존재는 모든 이들의 희망이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천만의 대군이 일제히 걸어오는 그 모습은, 공포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지평선 끝에서 몰려오는 검은 얼룩은 만신전을 앞에 두기까지 온 세상을 새까맣게 물들었다.

[들어라.]

검은 얼룩 사이에서 한 반인반마가 걸어온다. 인류를 배신하고 악마의 노예가 되기로 자청한 추종자들. 그 메신저가 확성마법을 건 채 다가왔다.

[어리석은 필멸자들아! 지금이라도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라! 그리하면 위대하신 분들께서 너희들에게 자비를 베풀──]

"시끄럽다!!"

그 악마 추종자는 제 할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고함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날아온 창이 포물선을 그리며 그의 심장에 꽂힌 것이다.

-콰직!

악마 추종자의 심장을 꿰뚫고 바닥에 꽂힌 투창. 절명한 악마 추종자를 목격한 선두의 악마 추종자 군단이 분노로 일그러진다.

[전진-하라.]

협상은 없었다. 전 제국 선제후 출신 악마군단장 볼프하르트는 제국군 출신 악마 추종자들에게 외쳤다.

"대포 발사!!"

-쾅! 콰쾅!

-콰콰쾅!

벼락처럼 굉음을 내곤 일제히 쏟아지는 포탄들. 그것은 만신전의 성벽을 단숨에 무너뜨릴 기세였으나 도중에 보이지 않는 막에 튕겨 나갔다.

"크으… 왕국 놈들!"

라이온하트의 원거리 혐오에서 비롯된 군단성법. 만신전 여기저기에서 신관들과 기사들이 펼친 군단성법은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다.

저열한 원거리 무기 따위는 연합군의 그 무엇도 상처 입히지 못할지니.

"예상했다. 하지만 놈들에게 줄 선물은 많지!"

볼프하르트는 투석기를 준비했다. 대포알이 아니라 투석이 됐다 한들 저 장벽에 상처를 입힐 순 없겠지.

하지만 그는 전 제국 선제후였다. 제국의 사령관이었고, 왕국을 적대할 준비를 하던 작자였다.

"쏴라!"

이번에는 투석기가 당겨지며 일제히 무언가를 던진다.

"성법이 있는 한 원거리 무기는…!?"

투석기에서 던져진 것들은 장벽과 부딪치기 직전에 폭발하더니 고깃조각들을 후두둑 떨어뜨렸다.

자연스레 그것을 뒤집어 쓴 병사들은 이내 그 정체를 깨닫고 헛구역질을 한다.

"우욱…!"

"천벌받을 놈들…!"

그것은 부패한 시체였다. 썩어 문드러지거나 가스가 차 부풀어 오른… 마치 너희들도 이렇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처럼.

"어어?"

그것은 경고로 끝나지 않았다. 공중에서 터진 시체들에서 거무튀튀한 녹색 안개를 퍼뜨린 것이다.

"도, 독가스다!"

"입을 막아…!"

저주와 부패의 마법이 걸린 시체들이 성벽 여기저기서 터진다. 성 여기저기에 독안개가 퍼지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악!"

병사들이 독안개를 피해 도주했다. 성벽 위의 병사들이 아래로 내려가려 했고, 성벽 아래 병사들은 도시의 안쪽으로 달리려 했다.

"진형을 갖춰라!!"

그때, 도시 곳곳에서 기사들이 말을 타고 달린다. 워 나이트들이, 단장급의 기사들이 저마다 긴급한 곳을 찾아 독안개를 정화하고 병사들 사이에서 외쳤다.

"자리를 지켜라!"

"방벽을 사수하라!"

"생명의 신관들은 북동쪽의 가스를 우선 정화한다!"

그들은 백전노장들이다. 오랜 시간 악종들과 싸워온 기사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야전에서 즉각 판단했다.

그런 기사들을 따르는 병사들. 기사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병사들은 명령받은 바에 따라 방벽에 전열을 구축한다.

혼란을 틈타 공성추와 공성탑을 밀며 다가왔다.

"궁수들 준비! 화포반 방포 준비!"

성벽을 빼곡히 매운 연합군 궁수들과 제국 화포병들. 그들의 화살과 대포알들이 장전을 맞췄다.

"우리의 무기는 악을 꿰뚫는 정화의 빛이 되리라!"

각 성벽에서 워 나이트들이 성법으로 그들을 축복한다.

화살에는 새하얀 빛이 깃들고, 대포알에는 맹렬한 화염이 압축됐다.

"저놈들을 저승으로 보내버려라!"

-콰앙!

-쾅!

궁수들이 쏜 빛의 화살들이 반인반마에게 꽂히자 정화의 빛이 그들을 산 채로 태웠다.

군단 사이사이에 탄착한 포탄들은 끔찍한 불꽃을 퍼트리며 온 상을 태웠다.

상대의 원거리 무기를 깎아내리면서, 본인들은 일방적으로 원거리 공격을 퍼붓는다.

불합리의 극치인 전쟁술을 앞에 두고 악마 추종자의 군단들은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섰다.

"자리 지켜."

볼프하르트는 그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 세 발자국 이상 도망친 병사의 목을 친히 베어버리면서 그들의 전진을 강요했다.

"공성전을 시작하라!"

수백 대의 공성탑들이 일제히 몰려든다. 그 탑에 탑승한 악마 추종자들만 십만이다.

"공성탑을 저격한다!"

기사들의 성법이 접근하는 공성탑들을 향해 쏟아졌다.

하늘에서 천둥이 떨어지고, 마른 공기에서 파도가 덮쳤으며, 거대한 불기둥이 공성탑에 직격했다.

흑마법사들의 반격으로 멀쩡한 성벽 위에 암흑기사들이 쏟아져 내리고, 거인들이 화살들을 묵묵히 맞아가며 성벽으로 향한다. 그런 거인들을 향해 솟아난 나무뿌리가 목을 조이며 지하로 끌고 갔다.

"으, 으아아……."

일반적인 전쟁의 양상이 아니다. 라이온하트 연합군을 공격하는 1차 선발대의 지휘를 맡은 볼프하르트는 자신들이 군대가 아닌 자연재해와 싸우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크으…!"

전투 시작 반나절. 선발대로 투입한 사십 만 악마 추종자 군단이 반절 이상 죽어나갔다.

감전사, 폭사, 동사, 분사, 압사, 익사에 추락사까지.

너무나 많은 죽음들이 그들 앞에 도사렸고, 그것이 불합리할 정도로 한쪽만을 축복하는 신들의 기적임을 모르지 않았다.

[형편없군.]

그때였다. 볼프하르트를 찾아온 거대한 그림자에 오한이 서렸다.

"위, 위대한 존재시여!"

볼프하르트는 곧장 양 무릎을 꿇고 굴종의 자세를 취했다. 한때는 악마와 계약해 기세등등했던 그지만, 막상 현실에서 마주친 대악마들은 하나 같이 괴물들이다.

성배기사들이 항거할 수 없는 재해라면, 이들은 끝없는 악의를 가진 순수악.

지혜와 탐구의 악마군주 카라카엘의 제자인 캐스터 오브 프라즈나는 여섯 개로 갈라진 시선으로 볼프하르트를 꿰뚫는다.

[병력소모가 크군.]

"어, 어디까지나 선발전입니다! 아직 결과는…!"

[놈들 병사 하나를 죽일 때, 이쪽은 백 명이 죽었다. 이 실태를 납득시켜라.]

"소, 소모전입니다!"

볼프하르트의 말에 그를 향해 뻗던 팔을 멈추는 대악마. 그는 서둘러 자신의 전략을 외쳤다.

"놈들의 숫자는 저희의 오십분의 일입니다! 그나마 북부군이 빠져나가면서 그 차이는 더욱 벌어졌지요! 하여 별 가치 없는 악마추종자들로 파상공세를 취해 놈들을 지치게 만들 생각입니다!"

악마 추종자들. 악마가 되지 못해 반인반마에 그친 쓰레기 잡졸들이다.

그런 잡졸들을 소모시켜 놈들을 지치게 만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단지 볼프하르트가 예상하지 못한 건, 악마 추종자 군단이 너무 빨리 녹아내렸다는 거겠지.

[그분께서는 서두르시기를 바란다.]

볼프하르트는 악마군주의 의중을 알기 어려웠다. 상대는 성배기사들이다. 성배의 수호자가 이끄는 군대였다.

대량의 소모가 일어나더라도 착실하고 느릿하게 깎아내는 것이 가장 안전할 터인데.

[정예를 무르고 노예들을 축차 투입해라. 그분께서 지원하실 것이다.]

"……예! 아, 알겠습니다!"

볼프하르트는 그 의중을 깨닫고 바짝 엎드렸다.

자신이 계약한 파괴와 살육의 대악마가 동쪽 전선에서 괴물 오크놈의 손에 뒈져버린 이후 그는 언제 토사구팽당할지 모를 처지.

살기 위해선 쓸모를 증명해야 했다.

* * * *

전장의 폭음이 여기까지 들린다.

하리는 무심코 전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딱! 하고 막대기에 얻어맞았다.

"아곡…!"

"신경 쓰지 마. 너하곤 상관없는 곳이니까."

눈도 보이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리 정확하게 정수리를 때리는지.

"너는 이만 나가 봐. 생각보다 빨리 끝났으니까."

"예에……."

하리는 두근거리는 심장과 팔목에 걸린 아쿠아마린 팔찌를 꼭 쥔 채 방을 나섰다. 그러다가 눈을 감고 있는 천소연을 힐깃거렸고.

"그런데 소연이는 뭘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시킨 거."

"???"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사벨의 말을 흘려보내고 만신전을 나선다. 반나절부터 시작된 전쟁은 아직 여유롭게 성벽에서 막아내고 있는 모양새다.

"군라르 님도 하루이틀 내로 끝내실 수 있다고 하셨고……."

문제는 게이트를 여는 것이다. 베아트리체는 지혜의 군주 카라카엘이 게이트에 간섭해 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폐하께서 과연, 지혜의 군주를 쓰러뜨릴 수 있을까?'

악마대공만 해도 그런 괴물이었는데, 군주는 대체 얼마나 강력한 존재일까?

그녀가 내심 안도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원 역사 덕분이다.

혼돈의 군주 말루스와 쾌락의 군주 도트라돈, 지혜의 군주 카라카엘까지.

레온은 세 명의 군주를 쓰러뜨린 대영웅이다. 그런 그가 있는 이미 쓰러뜨린 적이 있는 지혜의 군주를 다시 한 번 쓰러뜨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닐까 하고…….

-콰아아아아아아!

하리는 시야에 꽉 찬 하늘을 멍하니 응시한다.

구름을 뚫고, 타오르는 꼬리를 달고 행성에 들이닥치는 불청객들.

"아."

뭔가 잘못됐다. 아니, 믿기지 않았다.

하늘을 메운 유성들이.

대륙을, 아니, 행성을 멸망시킬 수 있는 별의 파멸이 다가온다.

어떻게.

폐하는 저런 괴물을 이길 수 있었던 거지?

* * * *

전투가 개시되고 열여섯 시간. 밤하늘을 비치는 파멸의 빛들이 여덟 개.

지혜의 악마군주 카라카엘.

다시 말해 차원을 넘나들어 모든 멀티버스 마법의 종주이며 가장 위대한 마법의 시초.

[행성공전궤도 해석. 병렬연결, 좌표유도 개시.]

본래라면 이 행성을 지나쳤어야 할 혜성들을 끌어당긴다. 그것이 어느 정도의 대마법인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천체에 개입하는 대마법은 기적이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다.

그것이 여덟 개.

손가락 하나에 하나씩. 열두 개 중 여덟 개의 손가락이 유성에 개입한다.

[정밀유도 개시. 강하시 보호마법 자동발현. 유도된 포인트로 일제강습.]

세상에 마법이 새겨진다. 그가 자리한 땅을 중심으로 이 땅에 전례없는 대술식이 전개된다.

직경 32km를 넘나드는 거대한 마법진이 땅에도, 창공에도.

[오오…….]

[위대한 스승이시여…….]

그 전례없는 대마법을 앞에 두고 긴장과 고양으로 대악마들조차 경의를 표한다. 밤하늘에 새겨진 기적에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우주가 탄생한 이래 이만한 대마법을 행사하는 이가 없었으며, 이만한 술식을 짜올리는 현자도 없었다.

마법진에 새겨지는 마력들이 폭풍우처럼 굉음을 내고, 지상의 마법진이 천체와 연결되어 밝게 빛난다.

하나하나가 대마법사들인 캐스터 오브 프라즈나들조차 흉내낼 수 없는 기적.

우러러보아라, 미천한 하등생물들아.

이것이야말로 마법의 종주.

불멸자 중 유일한 대현자.

신성보다도 오래된 악성의 시초이니.

카라카엘.

차원의 대마법사. 가장 위대한 현자.

[너희들의 무엇도 남기지 않겠다. 천체의 무게에 짓눌려라.]

행성의 종말을 알리는 대파괴가 대기권을 뚫고 강하한다.

너무나 끔찍한 현실.

같은 편인 악마들조차 눈을 돌리게 만드는 현실에 연합군은 어떨까.

신들이시여.

저희들을 지켜주소서.

그 순간.

악몽 같은 현실에 절규하는 연합군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한다.

공성전의 최전선. 성벽 위의 망루.

그곳에 한 황금이 검을 들고 있다.

그것은 백색이다.

새하얀 흰 갈기털을 휘날리는 여신의 신수.

당대 최강의 성배 수호자에게 여신이 선물한 전우.

그 백색의 피부 위에 황금마갑이 씌어 지고, 누구도 태우지 않았던 고고한 신수 등 위에 사자심장을 가진 기사가 성창을 번쩍 든다.

"타올라라. 모든 전장의 불꽃이여."

그 순간, 온 세상의 불꽃이 맹렬히 솟구친다. 그 화염은 정말로 세상을 덮을 것처럼 맹렬하다.

"불카누스 경?"

누군가가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그들 앞에 있는 건 만신의 대리인이다.

[불꽃에 개입?]

카라카엘은 저 '신벌'이 가진 힘을 보고 감탄했다.

세상의 모든 불에 간섭하고 있다. 그것이 단지 규모나 파괴적인 힘이 아니라 정말로 '세상 모든 불꽃'에 간섭하는 개념이란 것이 놀라운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가장 맹렬한 불꽃이 타오르는 곳.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

행성 대기권을 돌파해 지상으로 낙하하는 유성들. 본래라면 대기권 돌파와 동시에 전소했어야 할 유성들은 카라카엘의 마력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그것을──

──■■■■■■■■■■■■■■■

더욱 맹렬히 불태운다. 대기권 마찰로 인한 단순한 불꽃을, 신의 불꽃으로 변질시켜.

"벼, 별이 타오른다!"

지상에서도 보일 정도로 거대한 불꽃이 떨어지는 별들을 집어삼킨다. 녹아내리는 별들은 그 크기가 실시간으로 줄어든다. 그곳에 대고 레온이 외쳤다.

"록슬리…!"

"예, 폐하!"

레온의 옆을 보좌하던 구리빛 갑옷의 기사가 명을 받들었다. 그에게 레온이 말한다.

"만신전에 피해가 올 만한 조각들을 격추시켜라. 어차피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지대는 신경 쓸 필요없다."

"명 받잡겠습니다!"

록슬리의 성검이 검집에서 벗어났다. 그의 성검이 찬연한 황금빛을 내비친다.

태양과 심판의 기사. 태양이 뜨지 않는 지금 그는 이 밤하늘에 새로운 태양을 떠오르게 한다.

신벌 <태양발현.>

만신전의 상공. 순식간에 떠오른 태양이 추락하는 유성의 불길을 흡수한다.

본디 불꽃과 태양은 상성이 좋았다. 한 자리에 두 성배기사가 모일 기회가 없어 그렇지.

자신의 태양이 충분한 열 에너지를 흡수했음을 감지한 록슬리가 검을 가리켜 외친다.

"라이온하트의 이단심판관! 록슬리가 추악한 악의를 벌한다!"

추락하는 유성 조각들을 향해 쏘아지는 태양빛. 그 맹렬한 빛은 그 자체로 끔찍한 열병기가 되어 추락하는 조각들을 모조리 꿰뚫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악!

-부, 불이! 불이이이이…!

그 과정에서 태양광의 플레어에 노출된 악마들과 악마 추종자들이 녹아내린 것은 소소한 피해다.

성배 수호자.

그리고 성배기사.

전선에 나선 두 괴물을 앞에 두고 지혜의 군주가 미소 지었다.

[인사치레는 이만하면 됐겠지.]

열두 개의 손가락이 마법을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열두 개의 혜성이 행성궤도에 진입했다.

이에 맞서.

전장의 불꽃을 통제하는 수호자도 태양을 띄운다.

두 개째의 태양.

열두 개의 유성.

공성전이라기보다는 행성과 행성이 전쟁을 벌이는 대행성전.

괴물들의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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