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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39

139화 최후의 전투(3)

세계의 종말이다.

누구나가 그렇게 생각했다.

운석이 떨어지고, 이를 태워버리는 거대한 불꽃. 그 에너지를 흡수해 격추하는 태양의 존재.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존재들.

천외천의 격돌을 앞에 두고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자들은 어떤 생각을 품는가.

대기층이 갈라지고, 지상이 바싹 구워지며, 하늘의 구름들이 증발하는 종말의 끝에서 검과 창으로 서로를 찌르는 보병들의 감정은 어떠할까.

그럼에도.

이 전장의 국면을 움직이는 건 천외천의 괴물들이 아니다.

유성과 태양은 전쟁의 트리거일 뿐. 결국 전쟁을 진행하는 건 지상의 보병들이다.

“어떻게든 올라!”

불타오른 채 떨어지는 유성과 그런 유성을 영격하는 태양광의 여파에 전신이 익어가면서도 벽을 올라타는 악종들.

“씨발 저새끼들 막아!”

그런 악종들을 떨어뜨리고 찔러 죽이는 병사들. 그들을 지휘하는 기사들이 성벽에서 개념의 힘을 휘두르고, 전쟁기사들… 단장급의 워 나이트들이 군단성법을 전개한다.

라이온하트 왕국 제1 워 나이트 길두스는 세계의 종말을 건 전투를 냉철한 시선으로 내려다본다.

“사흘 내내 떨어진 유성만 백 개 이상. 파편만으로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는 땅이 되어가고 있군.”

과연, 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 땅이 멀쩡할까? 대지와 풍요의 여신께서 힘 쓰신다 해도 복구에는 오랜 세월이 필요할 테지.

“상관없어. 뒤는 보지 않는다. 행성째로 증발해 대륙이 익어버려도 사자심왕의 수호를 받는 우리는 살아남는다.”

이 대지는 그런 마굴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부수적인 피해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승리만을 목표로 할 뿐.

워나이트 길두스가 팔을 뻗었다. 그의 거대한 음성이 도시 전체에 퍼져나갔다.

“성벽의 방비를 두텁게 한다! 여명 기사단! 백장미 기사단! 하마하여 백병전에 돌입하라!”

번쩍거리는 갑주를 입은 기사단들이 말에서 내려 방벽으로 올라간다. 별철검과 갑주로 무장한 기사들은 끔찍한 대화력을 뚫고 진입한 공성탑이 도달한 성벽에 도착했고.

“죽여라!”

“전부 죽여버──”

공성탑의 문이 열리며 악마 추종자들이 쏟아지려던 순간, 역으로 뛰어들었다.

“크아악!”

“놈들이 공성탑으로 뛰어들었──!?”

기사들.

만능의 전쟁꾼들.

성법이라는 규격 외의 힘을 제외하더라도 그들은 백병전의 스폐셜리스트인 그들은 홀로 백 명의 악마 추종자를 베어낸다.

“크으… 왕국 놈들!”

제국 사단장 출신의 볼프하르트는 기사들의 압도적인 백병전 능력 앞에 치를 떨었다.

사흘이다.

유성과 태양의 자연재해 속에서 밀어 넣은 백만 대군은 사실상 대부분이 녹아내리고 말았다.

고작 사흘! 사흘 만에 백만 단위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정신 나간 소모율에 볼프하르트는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이제는 휘하 병력들이 제 명령에 따르지도 않는다.

하긴, 자신이라도 그럴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을 잡아먹는 저 마굴에 돌격하라는 명령을 그 누가 따를까?

아니, 여기서 추가로 백만이 일제히 돌진한다 해도 저 성벽을 넘을 수나 있을까?

‘고위 악마들이 투입되어야 한다! 단순 소모전이라도 이쪽이 일방적으로 패배할 뿐이야!’

볼프하르트는 캐스터 오브 프라즈나에게 병력 동원명령을 내려달라 청하려 했다.

[슬슬 지쳐가는 게 보이는군. 제1군단부터 20군단까지 투입한다.]

“……!”

악마군단은 각자가 10만 이상의 악마들로 구성된 파괴적인 병력들이다. 게다가 각 군단을 이끌고 있는 건 대악마들이었고.

‘빌어먹을…! 역시 우리는 소모품이었나!’

지혜의 군주가 사자심왕을 묶어두고 악마 추종자들은 소모되며 연합군도 지쳐가고 있었다.

일당백의 기사들이 백 단위의 적을 베어낸들 아직 악마의 주력군은 나서지도 않았다.

그리고 지금.

백만이 넘는 악마 추종자들이 소모된 타이밍에 그들을 화살받이 삼아 힘을 축적하고 있던 악마 군단들이 진군한다.

무시무시한 고위 악마들만 수천인 군대가 축차 투입되는 것이다.

“적 대악마 출현!”

“파괴의 대악마다!”

그중에서도 거대한 뿔과 두꺼운 다리, 찢어진 날개를 가진 투사가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드러냈다.

“크으…….”

거친 숨결이 산소를 태운다. 쇠기둥처럼 단단하고 두꺼운 팔로 대지에 강하게 디디고 머리는 낮춘다.

그것이 돌격의 전조현상임을 몰라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진로상의 모든 것을 분쇄할 저돌적인 대돌격이 준비된다.

“온다…!”

그것을 신호로, 바닥을 박차며 주파한다.

“그우어어어어어어어어……!!”

쩌렁쩌렁 울리는 포효에 숨이 멈춘다. 신관들이 대응했다.

불의 성법이 쏟아지고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진다. 하지만 예상외로 빠른 적의 돌진에 신관들이 당황한다.

“쳇! 저 돌진을 막아야 한다!”

바다와 파도의 기사가 삼지창을 들어 성법을 몰아쳤다. 마른 공기에서 쏟아진 파도가 대악마의 돌진경로를 가로막는다.

점이 아닌 면의 파도. 그것은 불타는 악마와 부딪친 순간 치이이익! 하고 스팀을 발생시켰다.

-콰아아아!

전장에 서리는 스팀. 자욱한 물안개 속에서 번쩍 뛰어오르는 이형이 성벽 위에 쾅! 하고 안착했다.

“오, 올라왔다!”

소머리의 붉은 괴물.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흉악스러웠으며 사나운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이 폭풍임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수십 명의 병사들이 거대한 대검에 갈려나간 뒤다.

“젠장…!”

괴물을 막아서려 했던 파도의 기사가 삼지창을 들고 놈에게 달려들었다. 말과 함께 달리는 이 기사의 돌격을 막아낸 이는 지금까지 손에 꼽는다.

“뒈져라…!”

-꽈앙!

대검과 삼지창이 격돌한다. 다음 순간, 부러진 것은 삼지창이었다.

“…….”

“크르르…….”

찰나의 격돌. 말과 함께 허물어지는 기사의 반신. 대악마의 폭력 앞에서 기사조차 일합을 버티지 못했다.

[고작 이거냐, 깡통들아!]

대악마가 포효한다. 그 포효는 병사들을 절망으로 끌고 가기에 충분했다.

“시끄럽다! 더러운 악종아!”

[……?!]

팟! 하고 튀어 오른 무언가가 대악마를 급습한다. 3m를 넘어가는 악마의 대검이 휘둘러져 이를 막았다.

[호오…….]

부딪친 검과 검 너머에서 전해지는 충격. 그것이 제 괴력의 팔조차 흔들리게 만들자 악마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는다.

[강하군. 성배기사 말고도 이만한 강자가 있었나.]

대악마는 젊은 기사를 바라봤다. 그의 이글거리는 시선에도 기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살육과 파괴의 대악마. 둠고어.]

“성배기사 안토크의 아들이자 검의 형제 기사단 단장 아렌느.”

단장급의 기사. 듣기로는 성배기사 수준은 아니라 들었지만, 설마 대악마인 자신을 앞에 두고 이만한 기세라니.

“…….”

아렌느는 방금 전 충돌로 파르르 떨리는 팔을 동여 잡았다. 공격한 건 이쪽인데도, 막은 것만으로 전신에 충격이 왔다. 믿기지 않는 괴력이다.

‘파괴의 대악마들이 유독 괴력으로 유명하다지만…….’

대부분의 살육과 파괴의 악마들이 동방으로 진군했다고 들었는데, 아직 있었던가.

하지만 아렌느는 이만한 괴물이 한 마리뿐이 아님을 알았다.

자신을 중심으로 좌우에 대악마의 출현만 스물 이상. 그것도 각각 파괴의 대악마, 지혜의 대악마, 타락의 대악마, 혼돈의 대악마들이 다수 출현했다.

‘폐하와 록슬리 경이 움직이지 못하는 지금, 우리들 만으로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

아렌느는 알지 못했다. 아니,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전장은 비단 이곳뿐만이 아님을.

* * * *

만신전을 나온 재혁은 하리를 발견했다. 당장이라도 전장으로 달려나가고 싶어 안절부절 못하는 그녀를.

“선배, 저도 끝났슴다.”

“아, 재혁이도 끝났어?”

하리는 파지직 번개가 번뜩이는 재혁의 창을 바라봤다. 전대 천둥의 성배기사가 남긴 보물은 불만스러운 듯 파괴적인 기운을 흩뿌리고 있다.

“역시… 인정은 못 받았나 보네.”

“깜냥이 안 된다고 대놓고 꼽주는데 말임다.”

“그럴 만도 하지.”

성배기사들의 힘과 의지. 그리고 신념을 몇 번이고 목격한 하리였다. 그들의 불굴의 의지는 누군가가 쉽게 계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성물들의 입장에서 보면 한낱 애송이에 불과한 자신들을 인정할 리가 없겠지.

“…….”

그래도 만약 그 힘을 인정받는다면… 당장 저 전장에서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만두십쇼, 선배.”

“으응?”

“저거… 우리가 낄 수 있는 곳이 아님다.”

재혁의 시선이 성벽 너머를 바라본다.

유성이 날아오고 전장의 불꽃이 뭉치고, 태양이 광선을 쏘아댄다.

저게 개인 레벨의 싸움.

저게 악마군주와 성배 수호자의 싸움이다.

저 끔찍한 파괴가 반복되는 전장에서 일반 병사들과 악마들은 얼마나 살아남을까?

대륙이 으깨지고 행성이 뒤흔들리는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최대전력의 파멸전.

여파만으로 만 단위의 병력이 소멸하고 있는 마굴이다.

레벨이 다르다.

“우리 중에서 저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여왕님이나 야피 경 정도일 검다. 과거를 재현했을 뿐인 이 게이트에서 괜히 끼어들었다가 개죽음당하는 건 피해야죠.”

“…….”

“뭐, 어차피 폐하는 이 역사에서 승리하셨담서요. 군주만 셋이나 잡았다는데, 무난히 이기지 않겠슴까?”

그렇다. 본래 역사에서 레온은 끝내 승리했다. 단 한 마리의 악마도 남김없이 모조리 추살하여 흑색 게이트를 탐색하러 온 하리 일행들과 만나게 된다.

레온은 승리의 상징.

끝내 승리하고야만 지상 최강자.

당연히 이 전투도 끝내 승리하는 게 당연──

“잠깐만.”

“선배?”

“최후의 성배 계획은… 원래는 폐기된 계획이잖아.”

“……그랬죠?”

자신들이 게이트에 입장하고 레온에게 조력을 구하면서 숲의 현자들은 최후의 성배를 벼려내기로 했다.

그 여파로.

달과 순결의 신관장 이사벨이 중상을 입었고,

철과 대장장이의 성배기사 안토크가 승천했으며,

만신전의 대성녀와 숲의 현자들이 전장에 투입되지 않았다.

“역사가… 바뀌었잖아.”

바뀌었다. 그것도 아주 크게.

성배기사급 한 명이 전장에 미치는 영향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것이 최소 세 명 이상이 빠졌다.

베아트리체와 야피가 전장에 투입됐다지만, 지혜의 군주에 의해 동체를 잃은 야피는 성배기사에 미치지 못한다.

단순 전력만 비교해도 성배기사 둘은 빠진 데다, 수많은 숲의 현자들도 생각하면 그 차이는 원래 역사보다 훨씬 더 크다.

“이길 수 있는 거야?”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위화감을 느꼈다.

“선배, 저기…….”

“나, 나도 봤어.”

최후의 피난처인 만신전을 향해 몰려드는 피난민들. 그 틈속에서…….

“거기 당신들! 멈춰요!”

하리와 재혁은 만신전을 향해 올라오는 피난민 무리를 제지했다. 그들은 갑작스런 두 사람의 제지에 의아한 눈을 했지만, 하리의 시선은 그들의 중심을 꿰뚫고 있었다.

“거기 로브 쓴 분! 당장 로브 좀 벗어봐요!!”

“…….”

이미 확신을 가지고 검을 뽑은 채 주시하는 하리. 지적받은 로브인은 한동안 침묵하더니 이내 키득거리기 시작한다.

[감이 좋은 분이로군요.]

심연의 끝 바닥에서 울리는 것 같은 웅혼한 목소리. 그것의 비틀린 미소를 본 순간 하리는 본능적으로 공격에 나섰다.

신성의 불꽃, 파도의 권능이 합해진 이중성법이 그를 덮친다. 삿된 존재만을 휩쓰는 성법들이 피난민 무리를 스치려는 순간, 피난민 중 일부가 양팔을 뻗었다.

-콰아!

“……?!”

퍼부어지던 파도와 불꽃이 무위로 돌아간다. 순수하게 강대한 힘에 성법이 해제된 것이다.

그런게 가능한 건가?

“뒈져버렸!”

그때, 하늘이 울리며 벼락이 내리쳤다. 재혁이 울티마의 권능으로 그들에게 벼락을 내리친 것이다.

“와우, 이거 성능 장난 아닌데요? 위력도, 정밀성도 크게 올랐슴다!”

계승받은 성물을 사용한 재혁은 전보다 훨씬 강력해진 번개와 그 정밀도에 감탄했다. 이만하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치명상을 입혔을 거란 기대를 품으면서.

[단장급 기사가 둘인가.]

[아니, 한 명은 성물의 힘이다.]

벼락에 직격당했음에도 피난민들… 아니, 정확히는 피난민의 모습을 한 그것들은 놀라울 정도로 멀쩡했다.

어지간한 고위악마도 성법에 직격당하면 성치 못할 텐데, 저들은 너무나 멀쩡했다.

그리고 사람의 거죽이 벗겨내며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악마들. 그 특유의 날카로운 형상은 하리도 기억에 남아있다.

“쾌락과 타락의 악마들…!”

그것도 대악마급이 넷.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지닌 대악마 중에서도 유독 끔찍한 기운을 쏟아내는 거물이 하나.

로브를 드러내고 불길한 가면을 쓴 정장차림의 남성. 그것은 날카로운 손톱으로 제 가슴께를 받치며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타락대공 퀘이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잘 가시길.]

정중한 목소리 속에 숨겨진 끔찍한 악의가 하리를 향한다. 날카로운 파동이 순식간에 그녀의 목덜미에 도달했다.

“어?”

반응조차 못한 죽음 앞에서 하리가 얼빠진 목소리를 낸 그 순간. 하리의 어깨를 붙잡고 뒤로 당기며 검을 휘두르는 누군가.

-카앙!

“호오?”

타락대공 퀘이는 자신의 손톱을 막아낸 기사를 응시했다. 그 끝에는 하늘과 천둥의 성배기사 길링엄이 있었고.

“가용전력은 모두 성벽에 있는 줄 알았는데… 아직 남은 분이 계셨군요?”

“시끄럽다, 천한 것.”

날카롭게 휘둘러진 칼날. 그것을 피해 뒤로 번쩍 뛰는 퀘이에게 섬광이 닥친다.

-콰쾅!

“”……!!””

막강한 폭발에 대악마들의 시선이 섬광이 날아온 방향으로 향한다.

“폐하께서 만약을 대비하신 보람이 있으셨구만.”

그곳에는 붕대로 얼굴을 가린 순결의 신관장이 활을 들고 서 있었다.


           


Chapter 139

Chapter 139

139화 최후의 전투(3)

세계의 종말이다.

누구나가 그렇게 생각했다.

운석이 떨어지고, 이를 태워버리는 거대한 불꽃. 그 에너지를 흡수해 격추하는 태양의 존재.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존재들.

천외천의 격돌을 앞에 두고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자들은 어떤 생각을 품는가.

대기층이 갈라지고, 지상이 바싹 구워지며, 하늘의 구름들이 증발하는 종말의 끝에서 검과 창으로 서로를 찌르는 보병들의 감정은 어떠할까.

그럼에도.

이 전장의 국면을 움직이는 건 천외천의 괴물들이 아니다.

유성과 태양은 전쟁의 트리거일 뿐. 결국 전쟁을 진행하는 건 지상의 보병들이다.

"어떻게든 올라!"

불타오른 채 떨어지는 유성과 그런 유성을 영격하는 태양광의 여파에 전신이 익어가면서도 벽을 올라타는 악종들.

"씨발 저새끼들 막아!"

그런 악종들을 떨어뜨리고 찔러 죽이는 병사들. 그들을 지휘하는 기사들이 성벽에서 개념의 힘을 휘두르고, 전쟁기사들… 단장급의 워 나이트들이 군단성법을 전개한다.

라이온하트 왕국 제1 워 나이트 길두스는 세계의 종말을 건 전투를 냉철한 시선으로 내려다본다.

"사흘 내내 떨어진 유성만 백 개 이상. 파편만으로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는 땅이 되어가고 있군."

과연, 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 땅이 멀쩡할까? 대지와 풍요의 여신께서 힘 쓰신다 해도 복구에는 오랜 세월이 필요할 테지.

"상관없어. 뒤는 보지 않는다. 행성째로 증발해 대륙이 익어버려도 사자심왕의 수호를 받는 우리는 살아남는다."

이 대지는 그런 마굴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부수적인 피해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승리만을 목표로 할 뿐.

워나이트 길두스가 팔을 뻗었다. 그의 거대한 음성이 도시 전체에 퍼져나갔다.

"성벽의 방비를 두텁게 한다! 여명 기사단! 백장미 기사단! 하마하여 백병전에 돌입하라!"

번쩍거리는 갑주를 입은 기사단들이 말에서 내려 방벽으로 올라간다. 별철검과 갑주로 무장한 기사들은 끔찍한 대화력을 뚫고 진입한 공성탑이 도달한 성벽에 도착했고.

"죽여라!"

"전부 죽여버──"

공성탑의 문이 열리며 악마 추종자들이 쏟아지려던 순간, 역으로 뛰어들었다.

"크아악!"

"놈들이 공성탑으로 뛰어들었──!?"

기사들.

만능의 전쟁꾼들.

성법이라는 규격 외의 힘을 제외하더라도 그들은 백병전의 스폐셜리스트인 그들은 홀로 백 명의 악마 추종자를 베어낸다.

"크으… 왕국 놈들!"

제국 사단장 출신의 볼프하르트는 기사들의 압도적인 백병전 능력 앞에 치를 떨었다.

사흘이다.

유성과 태양의 자연재해 속에서 밀어 넣은 백만 대군은 사실상 대부분이 녹아내리고 말았다.

고작 사흘! 사흘 만에 백만 단위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정신 나간 소모율에 볼프하르트는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이제는 휘하 병력들이 제 명령에 따르지도 않는다.

하긴, 자신이라도 그럴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을 잡아먹는 저 마굴에 돌격하라는 명령을 그 누가 따를까?

아니, 여기서 추가로 백만이 일제히 돌진한다 해도 저 성벽을 넘을 수나 있을까?

'고위 악마들이 투입되어야 한다! 단순 소모전이라도 이쪽이 일방적으로 패배할 뿐이야!'

볼프하르트는 캐스터 오브 프라즈나에게 병력 동원명령을 내려달라 청하려 했다.

[슬슬 지쳐가는 게 보이는군. 제1군단부터 20군단까지 투입한다.]

"……!"

악마군단은 각자가 10만 이상의 악마들로 구성된 파괴적인 병력들이다. 게다가 각 군단을 이끌고 있는 건 대악마들이었고.

'빌어먹을…! 역시 우리는 소모품이었나!'

지혜의 군주가 사자심왕을 묶어두고 악마 추종자들은 소모되며 연합군도 지쳐가고 있었다.

일당백의 기사들이 백 단위의 적을 베어낸들 아직 악마의 주력군은 나서지도 않았다.

그리고 지금.

백만이 넘는 악마 추종자들이 소모된 타이밍에 그들을 화살받이 삼아 힘을 축적하고 있던 악마 군단들이 진군한다.

무시무시한 고위 악마들만 수천인 군대가 축차 투입되는 것이다.

"적 대악마 출현!"

"파괴의 대악마다!"

그중에서도 거대한 뿔과 두꺼운 다리, 찢어진 날개를 가진 투사가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드러냈다.

"크으……."

거친 숨결이 산소를 태운다. 쇠기둥처럼 단단하고 두꺼운 팔로 대지에 강하게 디디고 머리는 낮춘다.

그것이 돌격의 전조현상임을 몰라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진로상의 모든 것을 분쇄할 저돌적인 대돌격이 준비된다.

"온다…!"

그것을 신호로, 바닥을 박차며 주파한다.

"그우어어어어어어어어……!!"

쩌렁쩌렁 울리는 포효에 숨이 멈춘다. 신관들이 대응했다.

불의 성법이 쏟아지고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진다. 하지만 예상외로 빠른 적의 돌진에 신관들이 당황한다.

"쳇! 저 돌진을 막아야 한다!"

바다와 파도의 기사가 삼지창을 들어 성법을 몰아쳤다. 마른 공기에서 쏟아진 파도가 대악마의 돌진경로를 가로막는다.

점이 아닌 면의 파도. 그것은 불타는 악마와 부딪친 순간 치이이익! 하고 스팀을 발생시켰다.

-콰아아아!

전장에 서리는 스팀. 자욱한 물안개 속에서 번쩍 뛰어오르는 이형이 성벽 위에 쾅! 하고 안착했다.

"오, 올라왔다!"

소머리의 붉은 괴물.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흉악스러웠으며 사나운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이 폭풍임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수십 명의 병사들이 거대한 대검에 갈려나간 뒤다.

"젠장…!"

괴물을 막아서려 했던 파도의 기사가 삼지창을 들고 놈에게 달려들었다. 말과 함께 달리는 이 기사의 돌격을 막아낸 이는 지금까지 손에 꼽는다.

"뒈져라…!"

-꽈앙!

대검과 삼지창이 격돌한다. 다음 순간, 부러진 것은 삼지창이었다.

"……."

"크르르……."

찰나의 격돌. 말과 함께 허물어지는 기사의 반신. 대악마의 폭력 앞에서 기사조차 일합을 버티지 못했다.

[고작 이거냐, 깡통들아!]

대악마가 포효한다. 그 포효는 병사들을 절망으로 끌고 가기에 충분했다.

"시끄럽다! 더러운 악종아!"

[……?!]

팟! 하고 튀어 오른 무언가가 대악마를 급습한다. 3m를 넘어가는 악마의 대검이 휘둘러져 이를 막았다.

[호오…….]

부딪친 검과 검 너머에서 전해지는 충격. 그것이 제 괴력의 팔조차 흔들리게 만들자 악마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는다.

[강하군. 성배기사 말고도 이만한 강자가 있었나.]

대악마는 젊은 기사를 바라봤다. 그의 이글거리는 시선에도 기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살육과 파괴의 대악마. 둠고어.]

"성배기사 안토크의 아들이자 검의 형제 기사단 단장 아렌느."

단장급의 기사. 듣기로는 성배기사 수준은 아니라 들었지만, 설마 대악마인 자신을 앞에 두고 이만한 기세라니.

"……."

아렌느는 방금 전 충돌로 파르르 떨리는 팔을 동여 잡았다. 공격한 건 이쪽인데도, 막은 것만으로 전신에 충격이 왔다. 믿기지 않는 괴력이다.

'파괴의 대악마들이 유독 괴력으로 유명하다지만…….'

대부분의 살육과 파괴의 악마들이 동방으로 진군했다고 들었는데, 아직 있었던가.

하지만 아렌느는 이만한 괴물이 한 마리뿐이 아님을 알았다.

자신을 중심으로 좌우에 대악마의 출현만 스물 이상. 그것도 각각 파괴의 대악마, 지혜의 대악마, 타락의 대악마, 혼돈의 대악마들이 다수 출현했다.

'폐하와 록슬리 경이 움직이지 못하는 지금, 우리들 만으로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

아렌느는 알지 못했다. 아니,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전장은 비단 이곳뿐만이 아님을.

* * * *

만신전을 나온 재혁은 하리를 발견했다. 당장이라도 전장으로 달려나가고 싶어 안절부절 못하는 그녀를.

"선배, 저도 끝났슴다."

"아, 재혁이도 끝났어?"

하리는 파지직 번개가 번뜩이는 재혁의 창을 바라봤다. 전대 천둥의 성배기사가 남긴 보물은 불만스러운 듯 파괴적인 기운을 흩뿌리고 있다.

"역시… 인정은 못 받았나 보네."

"깜냥이 안 된다고 대놓고 꼽주는데 말임다."

"그럴 만도 하지."

성배기사들의 힘과 의지. 그리고 신념을 몇 번이고 목격한 하리였다. 그들의 불굴의 의지는 누군가가 쉽게 계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성물들의 입장에서 보면 한낱 애송이에 불과한 자신들을 인정할 리가 없겠지.

"……."

그래도 만약 그 힘을 인정받는다면… 당장 저 전장에서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만두십쇼, 선배."

"으응?"

"저거… 우리가 낄 수 있는 곳이 아님다."

재혁의 시선이 성벽 너머를 바라본다.

유성이 날아오고 전장의 불꽃이 뭉치고, 태양이 광선을 쏘아댄다.

저게 개인 레벨의 싸움.

저게 악마군주와 성배 수호자의 싸움이다.

저 끔찍한 파괴가 반복되는 전장에서 일반 병사들과 악마들은 얼마나 살아남을까?

대륙이 으깨지고 행성이 뒤흔들리는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최대전력의 파멸전.

여파만으로 만 단위의 병력이 소멸하고 있는 마굴이다.

레벨이 다르다.

"우리 중에서 저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여왕님이나 야피 경 정도일 검다. 과거를 재현했을 뿐인 이 게이트에서 괜히 끼어들었다가 개죽음당하는 건 피해야죠."

"……."

"뭐, 어차피 폐하는 이 역사에서 승리하셨담서요. 군주만 셋이나 잡았다는데, 무난히 이기지 않겠슴까?"

그렇다. 본래 역사에서 레온은 끝내 승리했다. 단 한 마리의 악마도 남김없이 모조리 추살하여 흑색 게이트를 탐색하러 온 하리 일행들과 만나게 된다.

레온은 승리의 상징.

끝내 승리하고야만 지상 최강자.

당연히 이 전투도 끝내 승리하는 게 당연──

"잠깐만."

"선배?"

"최후의 성배 계획은… 원래는 폐기된 계획이잖아."

"……그랬죠?"

자신들이 게이트에 입장하고 레온에게 조력을 구하면서 숲의 현자들은 최후의 성배를 벼려내기로 했다.

그 여파로.

달과 순결의 신관장 이사벨이 중상을 입었고,

철과 대장장이의 성배기사 안토크가 승천했으며,

만신전의 대성녀와 숲의 현자들이 전장에 투입되지 않았다.

"역사가… 바뀌었잖아."

바뀌었다. 그것도 아주 크게.

성배기사급 한 명이 전장에 미치는 영향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것이 최소 세 명 이상이 빠졌다.

베아트리체와 야피가 전장에 투입됐다지만, 지혜의 군주에 의해 동체를 잃은 야피는 성배기사에 미치지 못한다.

단순 전력만 비교해도 성배기사 둘은 빠진 데다, 수많은 숲의 현자들도 생각하면 그 차이는 원래 역사보다 훨씬 더 크다.

"이길 수 있는 거야?"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위화감을 느꼈다.

"선배, 저기……."

"나, 나도 봤어."

최후의 피난처인 만신전을 향해 몰려드는 피난민들. 그 틈속에서…….

"거기 당신들! 멈춰요!"

하리와 재혁은 만신전을 향해 올라오는 피난민 무리를 제지했다. 그들은 갑작스런 두 사람의 제지에 의아한 눈을 했지만, 하리의 시선은 그들의 중심을 꿰뚫고 있었다.

"거기 로브 쓴 분! 당장 로브 좀 벗어봐요!!"

"……."

이미 확신을 가지고 검을 뽑은 채 주시하는 하리. 지적받은 로브인은 한동안 침묵하더니 이내 키득거리기 시작한다.

[감이 좋은 분이로군요.]

심연의 끝 바닥에서 울리는 것 같은 웅혼한 목소리. 그것의 비틀린 미소를 본 순간 하리는 본능적으로 공격에 나섰다.

신성의 불꽃, 파도의 권능이 합해진 이중성법이 그를 덮친다. 삿된 존재만을 휩쓰는 성법들이 피난민 무리를 스치려는 순간, 피난민 중 일부가 양팔을 뻗었다.

-콰아!

"……?!"

퍼부어지던 파도와 불꽃이 무위로 돌아간다. 순수하게 강대한 힘에 성법이 해제된 것이다.

그런게 가능한 건가?

"뒈져버렸!"

그때, 하늘이 울리며 벼락이 내리쳤다. 재혁이 울티마의 권능으로 그들에게 벼락을 내리친 것이다.

"와우, 이거 성능 장난 아닌데요? 위력도, 정밀성도 크게 올랐슴다!"

계승받은 성물을 사용한 재혁은 전보다 훨씬 강력해진 번개와 그 정밀도에 감탄했다. 이만하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치명상을 입혔을 거란 기대를 품으면서.

[단장급 기사가 둘인가.]

[아니, 한 명은 성물의 힘이다.]

벼락에 직격당했음에도 피난민들… 아니, 정확히는 피난민의 모습을 한 그것들은 놀라울 정도로 멀쩡했다.

어지간한 고위악마도 성법에 직격당하면 성치 못할 텐데, 저들은 너무나 멀쩡했다.

그리고 사람의 거죽이 벗겨내며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악마들. 그 특유의 날카로운 형상은 하리도 기억에 남아있다.

"쾌락과 타락의 악마들…!"

그것도 대악마급이 넷.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지닌 대악마 중에서도 유독 끔찍한 기운을 쏟아내는 거물이 하나.

로브를 드러내고 불길한 가면을 쓴 정장차림의 남성. 그것은 날카로운 손톱으로 제 가슴께를 받치며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타락대공 퀘이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잘 가시길.]

정중한 목소리 속에 숨겨진 끔찍한 악의가 하리를 향한다. 날카로운 파동이 순식간에 그녀의 목덜미에 도달했다.

"어?"

반응조차 못한 죽음 앞에서 하리가 얼빠진 목소리를 낸 그 순간. 하리의 어깨를 붙잡고 뒤로 당기며 검을 휘두르는 누군가.

-카앙!

"호오?"

타락대공 퀘이는 자신의 손톱을 막아낸 기사를 응시했다. 그 끝에는 하늘과 천둥의 성배기사 길링엄이 있었고.

"가용전력은 모두 성벽에 있는 줄 알았는데… 아직 남은 분이 계셨군요?"

"시끄럽다, 천한 것."

날카롭게 휘둘러진 칼날. 그것을 피해 뒤로 번쩍 뛰는 퀘이에게 섬광이 닥친다.

-콰쾅!

""……!!""

막강한 폭발에 대악마들의 시선이 섬광이 날아온 방향으로 향한다.

"폐하께서 만약을 대비하신 보람이 있으셨구만."

그곳에는 붕대로 얼굴을 가린 순결의 신관장이 활을 들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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