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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41

141화 라이온하트를 위하여

전투는 종극으로 향한다.

지혜의 군주와 성배 수호자가 무한한 힘의 대결 끝에 소강상태에 접어든 사이.

악마들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밀어붙였고 끝내 성벽을 넘어섰다.

“자리를 지켜라! 시민들이 후퇴할 때까지 버텨!”

워 나이트들이 기사와 병사들을 독려하며 방어전을 수행했지만, 그것도 시간벌이에 불과하다.

만신전 내부로 잠입한 악마들은 빛의 파동으로 인해 소멸되었지만, 만신전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대성녀와 성배기사와는 연락이 닿지 않고, 외성은 무너져 내려 수백 만 단위의 악마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후퇴하라! 내성으로 후퇴하라!”

결국 남은 선택지는 외성의 성벽과 만신전 사이의 내성. 그 시가지에서의 농성밖에 없다.

“아아…….”

“으아아아앙…!”

코앞까지 다가온 악마의 열기에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을 감싸는 어머니들.

항전의 의지를 피우는 남자들. 이젠 그 남자들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해졌다.

“…….”

제국 은사자 단장 발터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직감했다. 끝이 다가오고 있노라고.

이미 기사들 대부분이 죽었다. 병사들도 몸이 성한 자가 없었고, 정예병들은 진작 소진된 지 오래.

“후우…….”

“폐하…!”

왕국의 절대적인 수호자였던 사자심왕도 사흘이 넘는 유성을 요격하기 위해 힘을 다 쏟은 시점이었다.

이제 끝이 다가온다.

발터는 코앞까지 다가온 종말에 겁이 나기 시작했다.

“대피하시면… 안 됩니까?”

“발터 경!”

아렌느가 기겁하며 말했지만, 제국의 은사자 단장은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지금이라도 퇴로를 뚫고 도주해 나중을 기약한다면…….”

발터의 말에 레온이 담담히 대답했다.

“이곳을 벗어나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일단 살아야지요. 살아남으셔야지요. 이곳에 남는다 하여 개죽음 말고 있습니까?”

발터의 목소리는 발악에 가까웠다. 무의미한 희망의 교합일 뿐이었다.

“…….”

“폐하 제발! 제발 저희들에게 살길을 열어주십시오!”

아직까지도 삶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못한 그를 보며 레온은 그것이 부질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 세계는 이렇게 끝을 맞이한다.

그것은 정해진 미래이며, 이 싸움은 그것을 재현했을 뿐인 과거이다.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 않을까?

싸우든, 도망치든. 결국 미래는 바뀌지 않을 테니.

“아니.”

그렇지 않다. 레온의 시선이 구석에서 마력고갈로 숨을 헐떡이는 은발의 여인을 향했다.

그 옆에서 자신을 정비하며 무장을 점검하는 기계거미를 확인했다.

그리고… 후방에서 있었던 빛의 파동. 대성녀 아냑과 제 오랜 친구의 죽음을 확인시켜준 여신의 음성.

달과 순결의 신관장 이사벨과 하늘과 천둥의 성배기사 길링엄은 악마대공과 대악마들을 쓰러뜨리고서야 멈춰 섰다.

전방에서 기사들을 규합하며 지휘하던 워 나이트 길두스와 그의 아들 갈베론은 끝내 후퇴하는 부대를 따라나서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은 그저 과거를 재현했을 뿐인 역사의 반복이 아니다.

지구에서 찾아온 이방인들. 그들을 위해, 미래의 자신을 위해 바뀐 역사다.

비록 그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지언정, 이 역사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다.

그렇기에 무의미하지 않다.

그렇기에 아직 항전할 의미가 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아니, 끝나지 않았네. 아직 싸우고 있는 이들이 있어.”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자신은 싸우고 있었고, 세대와 세대를 거쳐 기사들이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후퇴는 없다. 피난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항전의 의지를 불태운다. 그 선택에 발터 단장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까지 와서… 저희들이 무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병력은 채 일만도 남지 않았고, 적의 군대는 아직도 셀 수 없이 많다. 못해도 수백 배다.

그 끝없는 군대를 향해 인간의 미약한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말에 탑승해라.”

“폐하…?”

“말에 탑승해, 창을 쥐어라. 그리고 나가 싸우자.”

최후의 돌격을 말한다. 너무나 무의미해 보이고, 발악에 가까운, 실제로도 발악인 항전을, 사자심왕이 말하였다.

“아직도 명예와 영광을 위해 싸우자는 소릴 하십니까! 어차피 개죽음입니다!”

그 무례에 가까운 발언에도 주변 기사들은 그것을 지적할 정신이 없었다. 지친 몸은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레온은 그들 모두를 아우르는 목소리로 강인한 의지를 밝힌다.

“우리의 긍지를 위해.”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을 불멸한 것을 위해.

레온은 발터 단장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강압적이지 않은, 독려와 함께하기를 원하는 손길이었다.

“짐과 함께 싸웁시다. 말을 타고 마지막까지.”

“폐하…….”

“제국을 위해. 당신이 지켜야 했던 선량한 시민들을 위해.”

레온의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을 향한다.

생존한 드워프, 엘프… 그리고 기사들. 또 시민들. 또또──미래에서 온 자들.

“이 땅 위에 명예 있는 자들의 마지막 불꽃이 꺼지기까지.”

돌격을.

다시 한번 돌격을.

함께.

레온의 명령 아닌 부탁. 이에 가장 먼저 호응한 것은 다그닥다그닥 힘차게 말발굽 소리를 내며 다가온 새하얀 말이었다.

“고맙구나, 나의 오랜 맹우여.”

그녀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레온이 올라탔다. 이에 기사들이 저마다 자신의 말에 올라타고, 말 없는 자들은 굳건한 두 다리로 일어섰다.

“폐하…….”

베아트리체와 합류하기 위해 찾아온 붉은머리 소녀와 그 일행이 다가온다. 레온은 말 위에서 그들에게 말했다.

“지켜봐라. 그리고 기억하라. 이 시대의 우리들이 남긴 마지막 질주를.”

레온은 결연한 의지를 불태우며 앞장섰다. 그 뒤를 기사들이 따른다. 자유민 병사들이 따른다.

“자, 가자! 스탈리온!”

사자심왕은 제 애마의 옆구리를 차며 날카롭고 우렁찬 포효를 터뜨렸다.

그것은 최후의 질주였으되 체념한 것도, 포기도 아니다. 자신이 남길 미래를 위해 길을 만든다.

확실한 패배를 알면서도, 끝없는 어둠을 향해 빛이 질주한다.

“명예를 위하여.”

“”영광을 위하여…!!””

“””라이온하트를 위하여──!!””””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뿔나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진다. 그와 동시에 내성의 시가지를 질주하는 기사단.

“……!?”

돌격해오는 기사들을 앞에 두고 악마들이 당황한다. 궁지에 몰린 쥐가 일제히 몰려드는 그 모습은 얼핏 보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키이에에에엑!?

“마, 막아앗…!”

그러나 눈부신 빛과 함께 돌격하는 기사단은 악마들의 눈을 멀게 했고, 그들의 방비를 무너뜨렸다.

충돌의 순간, 악마들의 육신이 터져나가며 검은 얼룩들이 밀려 나간다.

빛을 동반한 기마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며 이 세상에서 지워져 간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기사들은 포효를 내지르며 눈앞의 악마들을 닥치는대로 베었고, 돌파했다. 그 뒤를 따르는 병사들이 창을 꼬나쥐고 악마의 심장을 관통했다.

그 빛나는 돌격 앞에서는 고위악마들도, 대악마도 소용이 없었다. 소형종도 대형종도 관계없었다.

누구도 막아내지 못할 대돌격. 최후의 일만 결사대가 자아내는 쐐기진형은 시내의 모든 악마들을 뚫고, 부서진 성문조차 통과하여 끝없는 파도를 뚫고 지나간다.

빛이 있었고, 파도가 휩쓸었으며, 벼락이 떨어지고 불꽃이 태운다.

모든 기적들이 그들과 함께하였으며, 모든 신성이 성배 수호자와 함께했다.

돌격. 돌격. 다시 돌격.

마치 무너져내린 산의 능선을 구르는 거대한 바위처럼. 그 무엇도 저 돌격을 막아내 못할 것처럼 보였다.

허나.

천만이라는 숫자는 불가능함도 가능하게 만든다.

언제까지고 계속해서 돌파할 거 같았던 빛의 군세가 무한한 어둠에 잠식된다. 지혜의 군주 카라카엘은 저들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알았다.

[슬슬 끝이군. 마무리 짓겠다.]

군주의 손가락이 빛의 군세를 향한다. 다음 순간, 파멸의 광선이, 자욱한 어둠이, 끔찍한 저주가.

빛의 군세를 깎아내리고, 기사들을 죽이고, 질주를 멈춰 세운다.

끝내 어둠이 빛을 잠식했을 때, 카라카엘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 기나긴 신성과의 사투도 끝났다. 이제 악의 시대다.]

그 승리의 미주에 취했던 그때.

─────────────!!!!!!!

우렁찬 뿔나팔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진다. 고막을 때리는 굉음에 카라카엘과 악마들의 시선이 모두 서쪽 능선을 향한다. 그곳에서 한 무리의 기마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흑마를 탄 한 기사는 가장 선두에서 악의 군세를 응시한다.

“사자심왕께선 아직도 포기하지 않으셨군.”

“대공각하의 아버지시니까요.”

부관의 말에 드라고니아 대공. 카리나는 피식 웃는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시다니, 대체 누가 각하를 설득한 겁니까?”

“복수의 신에게서 거스름돈을 남긴 계집이라더군.”

「후회하실 거예요. 대공 각하도, 폐하도. 저는 알아요.」

마치 미래에서 보고 온 것처럼, 자신과 같은 복수자는 그리 전했다.

“가스파르! 적의 중앙을 돌파한다! 델보스케! 너는 우익을 맡아 사자심왕을 둘러싼 병력의 옆구리를 찔러라!”

드라고니아 대공이 말을 타고 병사들을 독려한다. 북부군, 그들의 의지를 대리하는 자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놈들의 옅은 암흑을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들이야말로 이 세상 가장 깊고 깊은 어둠일지니!”

어둠과 복수의 신 벤타시스와 계약한 복수자들. 그들은 복수를 위해 영혼을 걸었고, 복수를 해낼 힘을 받았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기사에 필적하는 괴력난신들. 그들을 이끄는 대공이 복수의 성력으로 제련된 마검을 휘두르며 암흑의 무리에 향한다.

“복수를 위해! 정의를 위해!!”

“”라이온하트를 위해!!””

어둠의 군세가 지면을 달린다. 기세 높게 달려오는 3만의 북부군에 맞서 지혜의 악마들은 수많은 마법으로 응수했다.

허나, 지옥불이 그들 한가운데로 떨어지더라도, 맹독의 안개가 그들을 가로막더라도, 북부군의 기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카리나 대공을 필두로 한 복수자들은 고작 그따위 견제구로 무너지지 않는다.

그들의 들끓는 복수의 의지가, 복수의 신이 함께하는 가호가 기어코 악마와 그들 사이의 거리를 좁힌다.

창을 꼬나쥐고, 대형종들이 거구를 자랑하며 가로막아도──

충돌의 순간, 모든 것이 휩쓸려나갔다.

[인간 놈들…….]

질린다.

질려버릴 정도로 끈질기다.

고작 3만이다. 이 무량대수의 군단 앞에서 한 줌에 불과한 병력으로 돌격한 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명예를 위해? 긍지를 위해?

우주의 티끌조차 되지 못하는 저 무지몽매한 필멸자들이 왜 그런 찰나의 가치에 목매다는지, 이 세계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는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묻힐 것이다. 너희들은 이 파도에 거스를 힘이 없다. 찰나의 저항이 조금 늘어난들 무슨 의미가 있지?]

하지만 거슬린다. 거슬려서 참을 수가 없다. 카라카엘의 열두 손가락이 북부군의 선두를 향한다.

사자심왕처럼 거슬리는 존재감을 가진 저 대공부터 처리해야겠다.

신성강림────

[???!!]

아주 잠깐. 조금 더 위협적인 적의 군세를 저격하기 위해 술식을 짜올리던, 그 잠깐의 틈새.

“방심했구나.”

황금의 기사가 뛰어들고 있었다.

모든 위험을 무릎 쓰고, 모든 무모를 강행하여──

[네놈…?!]

──끝내 모든 불리를 돌파하여.

[다른 놈들은 대체 뭘…?!]

카라카엘은 금방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사자심왕의 빛나는 극광 뒤에 강림한 이 세계의 신성들.

빛과 정의의 아리아나.

전쟁과 불꽃의 페토스.

생명과 풍요의 데메라.

하늘과 천둥의 울티마.

태양과 심판의 타타르.

바다와 파도의 포마.

달과 순결의 디나.

꿈과 죽음의 플르.

철과 대장장이의 헤토.

그 무수한 신성들이, 성배기사를 희생 삼아 강신해야했던 그들이 일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파괴적인 힘이 대악마들을 찢어발기고, 악마의 파도를 뒤집어 엎어버리며 사자심왕을 여기까지 인도했다.

[불가하다…!]

어찌 사람의 몸으로, 단일개체의 역량으로 저토록 많은 신들을 강림시킬 수 있단 말인가.

[어찌…!!]

북부군을 향하던 열두 가지 대마법들이 급격히 사자심왕을 향한다. 하나하나가 파멸적인 그것에 맞서 레온의 성검이 빛난다.

전성기.

사자심왕 레온 드라고니아 라이온하트 최강의 시절 온전했던 이 검은,

불괴(不壞), 결코 부서지지 않으며──

휘황(輝煌), 결코 꺼지지 않으며───

극광(極光), 어둠을 가르는 무한한 빛이니.

불굴, 불후, 불패의 상징이어라.

찬란하게 빛나는 이 검이야말로 신성의 상징. 신의를 대리하는 성배기사들의 정점.

“악에게 죽음을! 오직 죽음을!!”

빛이 뿜어졌다.

살아있는 반신의 성력으로 가속된 극광이 전장의 열기째로 악을 집어삼켰다.

무수한 마법을 탐구하고 지혜를 쌓아올린 악마군주 카라카엘이라 할지라도 모든 신성한 빛을 머금은 극광 앞에서는 저항할 수 없었으니.

사악한 악성에게는 비명을 지를 찰나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빛이 그 자리에 있으매, 이 찰나의 순간… 세상의 사악이 사라졌다.


           


Chapter 141

Chapter 141

141화 라이온하트를 위하여

전투는 종극으로 향한다.

지혜의 군주와 성배 수호자가 무한한 힘의 대결 끝에 소강상태에 접어든 사이.

악마들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밀어붙였고 끝내 성벽을 넘어섰다.

"자리를 지켜라! 시민들이 후퇴할 때까지 버텨!"

워 나이트들이 기사와 병사들을 독려하며 방어전을 수행했지만, 그것도 시간벌이에 불과하다.

만신전 내부로 잠입한 악마들은 빛의 파동으로 인해 소멸되었지만, 만신전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대성녀와 성배기사와는 연락이 닿지 않고, 외성은 무너져 내려 수백 만 단위의 악마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후퇴하라! 내성으로 후퇴하라!"

결국 남은 선택지는 외성의 성벽과 만신전 사이의 내성. 그 시가지에서의 농성밖에 없다.

"아아……."

"으아아아앙…!"

코앞까지 다가온 악마의 열기에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을 감싸는 어머니들.

항전의 의지를 피우는 남자들. 이젠 그 남자들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해졌다.

"……."

제국 은사자 단장 발터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직감했다. 끝이 다가오고 있노라고.

이미 기사들 대부분이 죽었다. 병사들도 몸이 성한 자가 없었고, 정예병들은 진작 소진된 지 오래.

"후우……."

"폐하…!"

왕국의 절대적인 수호자였던 사자심왕도 사흘이 넘는 유성을 요격하기 위해 힘을 다 쏟은 시점이었다.

이제 끝이 다가온다.

발터는 코앞까지 다가온 종말에 겁이 나기 시작했다.

"대피하시면… 안 됩니까?"

"발터 경!"

아렌느가 기겁하며 말했지만, 제국의 은사자 단장은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지금이라도 퇴로를 뚫고 도주해 나중을 기약한다면……."

발터의 말에 레온이 담담히 대답했다.

"이곳을 벗어나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일단 살아야지요. 살아남으셔야지요. 이곳에 남는다 하여 개죽음 말고 있습니까?"

발터의 목소리는 발악에 가까웠다. 무의미한 희망의 교합일 뿐이었다.

"……."

"폐하 제발! 제발 저희들에게 살길을 열어주십시오!"

아직까지도 삶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못한 그를 보며 레온은 그것이 부질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 세계는 이렇게 끝을 맞이한다.

그것은 정해진 미래이며, 이 싸움은 그것을 재현했을 뿐인 과거이다.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 않을까?

싸우든, 도망치든. 결국 미래는 바뀌지 않을 테니.

"아니."

그렇지 않다. 레온의 시선이 구석에서 마력고갈로 숨을 헐떡이는 은발의 여인을 향했다.

그 옆에서 자신을 정비하며 무장을 점검하는 기계거미를 확인했다.

그리고… 후방에서 있었던 빛의 파동. 대성녀 아냑과 제 오랜 친구의 죽음을 확인시켜준 여신의 음성.

달과 순결의 신관장 이사벨과 하늘과 천둥의 성배기사 길링엄은 악마대공과 대악마들을 쓰러뜨리고서야 멈춰 섰다.

전방에서 기사들을 규합하며 지휘하던 워 나이트 길두스와 그의 아들 갈베론은 끝내 후퇴하는 부대를 따라나서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은 그저 과거를 재현했을 뿐인 역사의 반복이 아니다.

지구에서 찾아온 이방인들. 그들을 위해, 미래의 자신을 위해 바뀐 역사다.

비록 그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지언정, 이 역사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다.

그렇기에 무의미하지 않다.

그렇기에 아직 항전할 의미가 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아니, 끝나지 않았네. 아직 싸우고 있는 이들이 있어."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자신은 싸우고 있었고, 세대와 세대를 거쳐 기사들이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후퇴는 없다. 피난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항전의 의지를 불태운다. 그 선택에 발터 단장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까지 와서… 저희들이 무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병력은 채 일만도 남지 않았고, 적의 군대는 아직도 셀 수 없이 많다. 못해도 수백 배다.

그 끝없는 군대를 향해 인간의 미약한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말에 탑승해라."

"폐하…?"

"말에 탑승해, 창을 쥐어라. 그리고 나가 싸우자."

최후의 돌격을 말한다. 너무나 무의미해 보이고, 발악에 가까운, 실제로도 발악인 항전을, 사자심왕이 말하였다.

"아직도 명예와 영광을 위해 싸우자는 소릴 하십니까! 어차피 개죽음입니다!"

그 무례에 가까운 발언에도 주변 기사들은 그것을 지적할 정신이 없었다. 지친 몸은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레온은 그들 모두를 아우르는 목소리로 강인한 의지를 밝힌다.

"우리의 긍지를 위해."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을 불멸한 것을 위해.

레온은 발터 단장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강압적이지 않은, 독려와 함께하기를 원하는 손길이었다.

"짐과 함께 싸웁시다. 말을 타고 마지막까지."

"폐하……."

"제국을 위해. 당신이 지켜야 했던 선량한 시민들을 위해."

레온의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을 향한다.

생존한 드워프, 엘프… 그리고 기사들. 또 시민들. 또또──미래에서 온 자들.

"이 땅 위에 명예 있는 자들의 마지막 불꽃이 꺼지기까지."

돌격을.

다시 한번 돌격을.

함께.

레온의 명령 아닌 부탁. 이에 가장 먼저 호응한 것은 다그닥다그닥 힘차게 말발굽 소리를 내며 다가온 새하얀 말이었다.

"고맙구나, 나의 오랜 맹우여."

그녀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레온이 올라탔다. 이에 기사들이 저마다 자신의 말에 올라타고, 말 없는 자들은 굳건한 두 다리로 일어섰다.

"폐하……."

베아트리체와 합류하기 위해 찾아온 붉은머리 소녀와 그 일행이 다가온다. 레온은 말 위에서 그들에게 말했다.

"지켜봐라. 그리고 기억하라. 이 시대의 우리들이 남긴 마지막 질주를."

레온은 결연한 의지를 불태우며 앞장섰다. 그 뒤를 기사들이 따른다. 자유민 병사들이 따른다.

"자, 가자! 스탈리온!"

사자심왕은 제 애마의 옆구리를 차며 날카롭고 우렁찬 포효를 터뜨렸다.

그것은 최후의 질주였으되 체념한 것도, 포기도 아니다. 자신이 남길 미래를 위해 길을 만든다.

확실한 패배를 알면서도, 끝없는 어둠을 향해 빛이 질주한다.

"명예를 위하여."

""영광을 위하여…!!""

"""라이온하트를 위하여──!!""""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뿔나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진다. 그와 동시에 내성의 시가지를 질주하는 기사단.

"……!?"

돌격해오는 기사들을 앞에 두고 악마들이 당황한다. 궁지에 몰린 쥐가 일제히 몰려드는 그 모습은 얼핏 보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키이에에에엑!?

"마, 막아앗…!"

그러나 눈부신 빛과 함께 돌격하는 기사단은 악마들의 눈을 멀게 했고, 그들의 방비를 무너뜨렸다.

충돌의 순간, 악마들의 육신이 터져나가며 검은 얼룩들이 밀려 나간다.

빛을 동반한 기마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며 이 세상에서 지워져 간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기사들은 포효를 내지르며 눈앞의 악마들을 닥치는대로 베었고, 돌파했다. 그 뒤를 따르는 병사들이 창을 꼬나쥐고 악마의 심장을 관통했다.

그 빛나는 돌격 앞에서는 고위악마들도, 대악마도 소용이 없었다. 소형종도 대형종도 관계없었다.

누구도 막아내지 못할 대돌격. 최후의 일만 결사대가 자아내는 쐐기진형은 시내의 모든 악마들을 뚫고, 부서진 성문조차 통과하여 끝없는 파도를 뚫고 지나간다.

빛이 있었고, 파도가 휩쓸었으며, 벼락이 떨어지고 불꽃이 태운다.

모든 기적들이 그들과 함께하였으며, 모든 신성이 성배 수호자와 함께했다.

돌격. 돌격. 다시 돌격.

마치 무너져내린 산의 능선을 구르는 거대한 바위처럼. 그 무엇도 저 돌격을 막아내 못할 것처럼 보였다.

허나.

천만이라는 숫자는 불가능함도 가능하게 만든다.

언제까지고 계속해서 돌파할 거 같았던 빛의 군세가 무한한 어둠에 잠식된다. 지혜의 군주 카라카엘은 저들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알았다.

[슬슬 끝이군. 마무리 짓겠다.]

군주의 손가락이 빛의 군세를 향한다. 다음 순간, 파멸의 광선이, 자욱한 어둠이, 끔찍한 저주가.

빛의 군세를 깎아내리고, 기사들을 죽이고, 질주를 멈춰 세운다.

끝내 어둠이 빛을 잠식했을 때, 카라카엘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 기나긴 신성과의 사투도 끝났다. 이제 악의 시대다.]

그 승리의 미주에 취했던 그때.

─────────────!!!!!!!

우렁찬 뿔나팔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진다. 고막을 때리는 굉음에 카라카엘과 악마들의 시선이 모두 서쪽 능선을 향한다. 그곳에서 한 무리의 기마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흑마를 탄 한 기사는 가장 선두에서 악의 군세를 응시한다.

"사자심왕께선 아직도 포기하지 않으셨군."

"대공각하의 아버지시니까요."

부관의 말에 드라고니아 대공. 카리나는 피식 웃는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시다니, 대체 누가 각하를 설득한 겁니까?"

"복수의 신에게서 거스름돈을 남긴 계집이라더군."

「후회하실 거예요. 대공 각하도, 폐하도. 저는 알아요.」

마치 미래에서 보고 온 것처럼, 자신과 같은 복수자는 그리 전했다.

"가스파르! 적의 중앙을 돌파한다! 델보스케! 너는 우익을 맡아 사자심왕을 둘러싼 병력의 옆구리를 찔러라!"

드라고니아 대공이 말을 타고 병사들을 독려한다. 북부군, 그들의 의지를 대리하는 자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놈들의 옅은 암흑을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들이야말로 이 세상 가장 깊고 깊은 어둠일지니!"

어둠과 복수의 신 벤타시스와 계약한 복수자들. 그들은 복수를 위해 영혼을 걸었고, 복수를 해낼 힘을 받았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기사에 필적하는 괴력난신들. 그들을 이끄는 대공이 복수의 성력으로 제련된 마검을 휘두르며 암흑의 무리에 향한다.

"복수를 위해! 정의를 위해!!"

""라이온하트를 위해!!""

어둠의 군세가 지면을 달린다. 기세 높게 달려오는 3만의 북부군에 맞서 지혜의 악마들은 수많은 마법으로 응수했다.

허나, 지옥불이 그들 한가운데로 떨어지더라도, 맹독의 안개가 그들을 가로막더라도, 북부군의 기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카리나 대공을 필두로 한 복수자들은 고작 그따위 견제구로 무너지지 않는다.

그들의 들끓는 복수의 의지가, 복수의 신이 함께하는 가호가 기어코 악마와 그들 사이의 거리를 좁힌다.

창을 꼬나쥐고, 대형종들이 거구를 자랑하며 가로막아도──

충돌의 순간, 모든 것이 휩쓸려나갔다.

[인간 놈들…….]

질린다.

질려버릴 정도로 끈질기다.

고작 3만이다. 이 무량대수의 군단 앞에서 한 줌에 불과한 병력으로 돌격한 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명예를 위해? 긍지를 위해?

우주의 티끌조차 되지 못하는 저 무지몽매한 필멸자들이 왜 그런 찰나의 가치에 목매다는지, 이 세계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는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묻힐 것이다. 너희들은 이 파도에 거스를 힘이 없다. 찰나의 저항이 조금 늘어난들 무슨 의미가 있지?]

하지만 거슬린다. 거슬려서 참을 수가 없다. 카라카엘의 열두 손가락이 북부군의 선두를 향한다.

사자심왕처럼 거슬리는 존재감을 가진 저 대공부터 처리해야겠다.

신성강림────

[???!!]

아주 잠깐. 조금 더 위협적인 적의 군세를 저격하기 위해 술식을 짜올리던, 그 잠깐의 틈새.

"방심했구나."

황금의 기사가 뛰어들고 있었다.

모든 위험을 무릎 쓰고, 모든 무모를 강행하여──

[네놈…?!]

──끝내 모든 불리를 돌파하여.

[다른 놈들은 대체 뭘…?!]

카라카엘은 금방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사자심왕의 빛나는 극광 뒤에 강림한 이 세계의 신성들.

빛과 정의의 아리아나.

전쟁과 불꽃의 페토스.

생명과 풍요의 데메라.

하늘과 천둥의 울티마.

태양과 심판의 타타르.

바다와 파도의 포마.

달과 순결의 디나.

꿈과 죽음의 플르.

철과 대장장이의 헤토.

그 무수한 신성들이, 성배기사를 희생 삼아 강신해야했던 그들이 일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파괴적인 힘이 대악마들을 찢어발기고, 악마의 파도를 뒤집어 엎어버리며 사자심왕을 여기까지 인도했다.

[불가하다…!]

어찌 사람의 몸으로, 단일개체의 역량으로 저토록 많은 신들을 강림시킬 수 있단 말인가.

[어찌…!!]

북부군을 향하던 열두 가지 대마법들이 급격히 사자심왕을 향한다. 하나하나가 파멸적인 그것에 맞서 레온의 성검이 빛난다.

전성기.

사자심왕 레온 드라고니아 라이온하트 최강의 시절 온전했던 이 검은,

불괴(不壞), 결코 부서지지 않으며──

휘황(輝煌), 결코 꺼지지 않으며───

극광(極光), 어둠을 가르는 무한한 빛이니.

불굴, 불후, 불패의 상징이어라.

찬란하게 빛나는 이 검이야말로 신성의 상징. 신의를 대리하는 성배기사들의 정점.

"악에게 죽음을! 오직 죽음을!!"

빛이 뿜어졌다.

살아있는 반신의 성력으로 가속된 극광이 전장의 열기째로 악을 집어삼켰다.

무수한 마법을 탐구하고 지혜를 쌓아올린 악마군주 카라카엘이라 할지라도 모든 신성한 빛을 머금은 극광 앞에서는 저항할 수 없었으니.

사악한 악성에게는 비명을 지를 찰나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빛이 그 자리에 있으매, 이 찰나의 순간… 세상의 사악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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