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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42

142화 라이온하트 왕국. 후일담

“우아아악…!”

“뛰어들어…!”

게이트가 열림과 동시에 일제히 입구를 향해 몸을 던지는 이들.

빛이 있었고, 어둠이 있었으며, 끝내 세상이 그들 시야에 들어왔다.

“나, 나왔다?!”

“하, 하리 선배!”

“재혁아!”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그들을 반긴 것은 만신전의 다른 기사들과 병사들이다.

“하리야! 괜찮냐!”

이상사태에 협회장 오강혁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던 김진수 과장이 허겁지겁 달려왔고, 구대성이 다른 기사들과 함께 그들을 부축했다.

여섯 명은 지친 숨을 고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베아트리체조차 지금은 품위를 신경 쓰지 못할 정도다.

“…….”

그런 그들 앞에 레온이 다가왔다. 너무나 반갑고, 사무친… 사자심왕의 얼굴에 다들 슬픔이 깃든다.

“무엇을 보았느냐.”

“……폐하.”

하리는 주섬주섬 품속에서 한 성물을 꺼내 들었다. 달의 성배였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희생하고, 지켜내려했던, 대장장이의 성배기사 안토크가 벼려내고, 숲의 현자들이 추출하고, 대성녀가 희생해 완성한.

그 물건을 보고 레온은 단번에 게이트 안에서 벌어진 일들을 짐작했다.

“200여년 전, 짐은 최후의 성배를 완성하겠다던 군라르의 제안을 거부했지.”

그것이 순결의 신관장과 숲의 현자들, 대성녀의 희생을 담보로 하기에.

무엇보다 이것을 만들려 들면 악종들이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임을 알았기에.

“많은 희생이 있었고, 많은 죽음이 있었겠구나. 그래, 그곳에서 다른 이들은 어땠느냐?”

“멋…있어요.”

하리는 울먹거리며 희생한 이사벨과 아냑을 떠올렸다.

“세상에서 최고로 멋졌슴다!”

재혁은 메말라 죽어가면서도 미래를 기약한 군라르를──

“지켜줬어요. 다들.”

타락대공에 맞섰던 길링엄을──

-끼룩.

마지막 불꽃을 태워가며 달의 파편을 제련했던 안토크와 별동대의 희생을──

“폐하께선 마지막까지 싸우셨지요. 미래를 위해.”

끝내 지혜의 군주를 베어내고 미래로의 길을 열어준 사자심왕을──

“와줬어요. 카리나 대공이요. 폐하를 위해 돌아왔어요.”

이사벨의 부탁으로 시작했으나 끝내 거스름돈을 받아낸 천소연은 뿔나팔 소리와 함께 나타난 카리나 대공과 북부군을 기억했다.

그들이 보았던 건 시대의 종말을 향해 달려나가는 영웅들의 이야기.

신성을 따르고, 명예를 지키고, 영광을 추구했던 기사들의 눈부신 여정의 끝.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향해 무언가를 남겼던 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런가.”

그들 눈앞에 있는 사자심왕이야말로.

과거에서부터 이어지는 미래를 펼쳐나갈 기사들의 왕이다.

* * * *

레온 드라고니아 라이온하트.

성배기사들을 이끄는 명예로운 사자심왕은 인간의 순수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속박과 굴종에서 얻는 평화를 거부하고 자유인으로서 명예롭게 죽는 것이 영광됨을 믿었다.

설령 그 끝이 몰살이라 할지라도.

“크으…….”

검을 쥔 손이 파르르 떨린다. 너무 많은 피를 흘린 끝에 정신이 혼미했고 다리는 흔들렸다. 끝내 육신이 쓰러지려던 그를 지탱한 것은 등 뒤에 맞닿은 누군가의 팔이다.

“이렇게 쓰러지실 분은… 아니잖습니까.”

“록슬리 경…….”

태양과 심판의 성배기사 록슬리. 그가 한쪽 만 남은 팔로 레온을 지탱하고 있었다.

한때 찬란한 영광의 성배기사였던 그는 이미 치명상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한쪽 팔은 뜯겨나갔고, 성검은 부러졌으며, 갑옷은 육신과 함께 구겨졌다.

불괴의 검과 갑주가 저토록 망가지기 위해서 그가 돌파해온 사지는 얼마나 두터웠을까? 필시 자신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으리라.

“곁에서 죽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의 왕이시여.”

마지막까지 충성스러운 이 명예로운 기사에게, 레온이 할 수 있는 말은 한 가지뿐.

“함께 싸워 영광이었네.”

기사에게 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레온의 그 한 마디만으로, 록슬리는 만족하며 눈을 감았다. 그의 육신에서 모든 힘이 사라졌고, 남은 힘을 이어받은 레온은 다시 일어섰다.

‘카리나는…….’

전장의 옆구리를 찔러오던 북부군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딸아이와 마지막 해후를 하진 못했으나 그것이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카스티야, 자신의 아내가 선물한 빛은, 마지막에는 그를 향해 찾아왔으니.

‘생각해보면 참 기나긴 삶이었구나.’

젊은 나이에 과로로 죽어 이 세계에 환생했다.

드라고니아 대공의 적자로서, 아름다운 어머니를 보고서 미래의 연애문제는 없겠다 안도했고, 창문 바깥에 펼쳐진 이세계의 풍경을 보며 판타지를 기대했다.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쥔 검에 두근거리며 검기니 오러니 기대를 품었더랬다.

「이것도 여신의 인도겠지, 참으로 가르칠 보람이 있겠소.」

성배기사 고르딕 경의 가르침을 받아가며 세상이 녹록지 않음을 깨달았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단련에 생각했던 이세계 판타지가 아니라며 불평을 토로하기도 했다.

성배기사가 되기 위한 여정을 떠날 때는 또 어땠나?

청소년기에 세상을 떠돌며 퀘스트를 받기 위한 하염없는 여정을 헛웃음을 치며 쏘다니지 않았던가.

「길두스일세! 도와주어 고맙군!」

「으하하하! 젊은 친구가 실력이 대단하군! 안토크라 하네!」

「트리맨 군라르다. 그대와 여정을 같이해도 괜찮겠는가?」

평생의 친구들을 만났고.

「울프릭 드라고니아 대공의 아들 레온 드라고니아여. 그대의 명예와 신실함을 증명할 퀘스트를 수여하겠도다.」

여신을 만났다.

워나이트가 되고, 성배기사가 되고.

오크들과 전쟁을 벌이고, 대악마를 쓰러뜨려 붕어한 선왕을 이어 사자심왕으로 선택되고.

그 명예로운 여정 속에서,

「저는 순결을 맹세한 신관이에요. 폐하께서 저처럼 미천한 것 때문에 여신의 분노를 사시면 안 됩니다.」

사랑을 했고.

「카스티야! 이 아이의 이름은 카리나요! 이 아이가 내 뒤를 이어 드라고니아의 대공위를 이을 것이네!」

아이를 낳았다.

여정은 계속된다.

「폐하, 제가 저 야만의 땅에서 성물을 호송하고 오겠나이다.」

존경하던 노쇠한 성배기사가 길을 떠났고,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폐하! 제국이… 제도가 멸망했습니다.」

혼돈의 군주가 점거한 제국을 향해.

「전 세계에서 게이트가 열리고 있습니다! 놈들의 숫자가 셀 수 없을 지경입니다!」

그로 인해 촉발된 대전쟁을 계속하면서.

「폐하! 적의 군단들이 이동 중입니다!」

「드라고니아 대공령에 놈들이…….」

아내를 잃었고.

「내가 불카누스다!!」

의지하던 기사도 적의 빙하대공과 함께 실종됐다.

그 뒤에도 레온의 역사는 끝없는 전쟁의 역사였다.

그가 짊어져야 할 너무 많은 것들. 마지막을 맞이할 각오를 다졌을 때, 그들이 찾아왔다.

「한하리라고 하는 신녀더군요. 대단한 성력을 지닌 아이에요. 어디서 저런 아이가 튀어나왔는지…….」

익숙한 고향의 이름. 혹시나 해서 찔러보니 역시나였다.

「서, 서울! 서울입니다! 대한민국이요!」

그들의 이야기는 놀라웠다.

설마 미래의 자신이 보낸 기사들이 자신 앞을 찾아오다니.

그리고 허탈했다.

결국 우리의 운명은 멸망이었던 탓이다.

그토록 오랜 저항도, 목숨을 건 항전도 끝내 멸망으로 끝났다.

홀로 살아남아 끝내 모든 악마들에게 복수를 하고서야 지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내의 언니인 이사벨도, 오랜 친구인 길두스나 안토크, 군라르도.

충성스러운 길링엄과 록슬리도. 자신의 가장 귀한 보물인 카리나도.

마지막까지 자신을 희망으로 여겼던 수많은 병사들과 시민들도.

모두 죽어 자신만이 남는다는 것인가.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있다.」

초탈한 시선 속에서 레온에게 아리아나가 속삭였다.

「레온, 네가 기억하지 않느냐. 네가 그 증거이지 않느냐. 영광과 명예 속에서 쓰러졌던, 그 모든 이들의 총의가 너에게 남지 않았느냐.」

비록 멸망할 운명일진저, 스스로 만신전을 제 심장에 보관하고, 모든 이들의 끝이 도달하는 낙원을 품고.

끝내 의지를 이어가는 존재가 있다.

제15대 사자심왕 레온 드라고니아 라이온하트가 바로 그이니.

그렇다면.

이 재현된 세계의 자신의 역할은.

「미래로 나아간 짐을 조력하는 것이겠구나.」

그리고.

예정된 모든 죽음을 딛고 일어선 사자심왕에게, 악마들이 다가왔다.

[어리석구나, 라이온하트.]

웅장한 성벽은 무너지고, 기사들은 쓰러졌으며, 병사들은 화마에 집어 삼켜졌다.

명예 없는 악마들이 명예로운 자들의 죽음을 짓밟고 만족스럽게 거닐었다.

비록 악마군주 카라카엘과 수많은 대악마들이 죽고 나서도, 여전히 그들은 많았고, 그들의 적은 이제 최후의 기사만이 남았다.

[이것이 네 무덤인가? 짓이긴 시체 속에 파묻히는 것이?]

[하찮은 발버둥은 충분했느냐? 나약한 계집의 종이여. 네 이쑤시개로 대해를 찌른들 파도가 물러날 줄 알았더냐.]

[네 피로 적신 잿더미 위에 파멸의 신전을 세우리라. 네 같잖은 명예는 네 백성의 고기와 함께 씹히겠지.]

레온은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악마들은 그가 비통함과 무력감에 사무쳐 무너졌다 여겼다.

…….

그건 오만한 착각이다. 기사는 그저 숨을 고르고 악마들이 접근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얄팍한 승리감에 도취된 대악마가 레온의 무릎마저 굽히려 다가온 순간──

-써걱!

“……?!”

성검의 빛이 대악마의 무릎 정강이를 통과했다. 일격에 무릎 밑이 사라진 대악마가 마지막으로 목격한 것은 제게 뛰어든 기사의 모습.

-데구르르르르.

대악마가 두 합에 목이 떨어지자 악마들이 움츠러들었다. 수십의 대악마들이 이를 갈며 분노했다.

“무덤이라 했느냐? 그들의 시신 속에 묻히는 것이 불명예라 여겼느냐.”

성배가 빛난다. 소유자에게 무한한 활력을 부여하는 여신의 성유물. 그 소유자는 늙지 않으며, 금방 상처를 회복하며, 무한한 성력을 발휘하게 한다.

“보아라! 영광스러운 싸움 끝에 쓰러진 명예 있는 자들의 품을! 그들 속에 묻히는 것이 어찌 불명예일 수 있을까! 이보다 더한 명예가 어디 있단 말이냐!”

악마들은 굴하지 않는 기사를 둘러싸면서도 움츠러드는 것을 막지 못했다.

“내 피 위에 신전을 세우겠다고? 명예를 씹어대겠다고? 실로 저열한 패배자들의 발상이로구나. 하찮은 악종들이 비열한 열등감을 해소하는 방법은 협소하기 그지없군!”

그들은 깨달았다. 이 위대한 시대의 정신은, 자신들이 끝내 타락시킬 수 없음을.

“난 여기 서 있다, 악마들. 나는 싸울 것이다. 너희들은 결코 나를 패배시킬 수 없을지니. 영원히 그 굴욕을 기억하라!”

두려워하라, 악마들이여.

네놈들이 타락시킬 수 없는 신들의 기사가 여기 있다!

레온의 마지막 말을 들어줄 수 없다는 듯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드는 악마들.

그들의 얄팍한 승리감을 조금이라도 더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의 패배감을 숨기기 위해.

하지만 그들은 성배 수호자의 포효를 삼키지 못했다.

“라이온하트에…! 영광 있으라!!”

끝없는 싸움이 재개된다.

앞으로 200년을 이어질, 홀로 남은 전쟁이 시작된다.

하지만 기사는 포기하지 않는다.

영광의 기사왕은, 신들의 사자심왕은.

모든 고난과 불리를 극복하고서.

승리할 운명이기에.

* * * *

-기록 완료. 데이터 저장.

만신전의 구석진 공방. 피로한 전투를 막 끝내고 귀환했으면서도 강철의 성배기사는 쉬지 않고 작업에 몰두했다.

데이터의 백업 및 저장.

그것은 게이트 안에서 그가 경험하고 축적한 정보의 모든 것들을 세분화하여 카테고리 별로 정리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무기는 살생을 위한 도구이되, 그것이 올바른 자에게 쥐어졌을 때, 세상을 지키는 방패가 되리니.」

억지로 생명을 유지하면서, 하얗게 새어가던 머리카락의 기사가 마지막까지 두드리던 망치질.

그의 평생에 걸쳐 관철한 삶의 태도를.

-끼룩.

강인공지능은 냉정하게 데이터화해 저장한다. 그러고선 마지막으로 데이터의 폴더명을 정해야 할 때가 왔다.

-「13A057-77 영상데이터」…….

정해진 형식에 따라 무기질적으로 생성된 폴더명. 야피는 그대로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려다 데이터 속 연산작업을 중지한다.

「어떻나? 자네, 내 제자 안 하겠나?」

-……

유기물의 주제넘는 제안. 그저 기술습득을 위해 그의 움직임을 파악했던 강인공지능에게 그 발언만큼 우스운 것도 없다. 하지만…….

-끼룩.

야피는 슬쩍 폴더명을 고쳤다. 그것이 스스로도 무의미하고 비합리적인 이름임을 알면서.

폴더명 변경.

변경된 폴더명.

『깨달음』

데이터 작업을 종료합니다.


           


Chapter 142

Chapter 142

142화 라이온하트 왕국. 후일담

"우아아악…!"

"뛰어들어…!"

게이트가 열림과 동시에 일제히 입구를 향해 몸을 던지는 이들.

빛이 있었고, 어둠이 있었으며, 끝내 세상이 그들 시야에 들어왔다.

"나, 나왔다?!"

"하, 하리 선배!"

"재혁아!"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그들을 반긴 것은 만신전의 다른 기사들과 병사들이다.

"하리야! 괜찮냐!"

이상사태에 협회장 오강혁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던 김진수 과장이 허겁지겁 달려왔고, 구대성이 다른 기사들과 함께 그들을 부축했다.

여섯 명은 지친 숨을 고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베아트리체조차 지금은 품위를 신경 쓰지 못할 정도다.

"……."

그런 그들 앞에 레온이 다가왔다. 너무나 반갑고, 사무친… 사자심왕의 얼굴에 다들 슬픔이 깃든다.

"무엇을 보았느냐."

"……폐하."

하리는 주섬주섬 품속에서 한 성물을 꺼내 들었다. 달의 성배였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희생하고, 지켜내려했던, 대장장이의 성배기사 안토크가 벼려내고, 숲의 현자들이 추출하고, 대성녀가 희생해 완성한.

그 물건을 보고 레온은 단번에 게이트 안에서 벌어진 일들을 짐작했다.

"200여년 전, 짐은 최후의 성배를 완성하겠다던 군라르의 제안을 거부했지."

그것이 순결의 신관장과 숲의 현자들, 대성녀의 희생을 담보로 하기에.

무엇보다 이것을 만들려 들면 악종들이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임을 알았기에.

"많은 희생이 있었고, 많은 죽음이 있었겠구나. 그래, 그곳에서 다른 이들은 어땠느냐?"

"멋…있어요."

하리는 울먹거리며 희생한 이사벨과 아냑을 떠올렸다.

"세상에서 최고로 멋졌슴다!"

재혁은 메말라 죽어가면서도 미래를 기약한 군라르를──

"지켜줬어요. 다들."

타락대공에 맞섰던 길링엄을──

-끼룩.

마지막 불꽃을 태워가며 달의 파편을 제련했던 안토크와 별동대의 희생을──

"폐하께선 마지막까지 싸우셨지요. 미래를 위해."

끝내 지혜의 군주를 베어내고 미래로의 길을 열어준 사자심왕을──

"와줬어요. 카리나 대공이요. 폐하를 위해 돌아왔어요."

이사벨의 부탁으로 시작했으나 끝내 거스름돈을 받아낸 천소연은 뿔나팔 소리와 함께 나타난 카리나 대공과 북부군을 기억했다.

그들이 보았던 건 시대의 종말을 향해 달려나가는 영웅들의 이야기.

신성을 따르고, 명예를 지키고, 영광을 추구했던 기사들의 눈부신 여정의 끝.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향해 무언가를 남겼던 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런가."

그들 눈앞에 있는 사자심왕이야말로.

과거에서부터 이어지는 미래를 펼쳐나갈 기사들의 왕이다.

* * * *

레온 드라고니아 라이온하트.

성배기사들을 이끄는 명예로운 사자심왕은 인간의 순수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속박과 굴종에서 얻는 평화를 거부하고 자유인으로서 명예롭게 죽는 것이 영광됨을 믿었다.

설령 그 끝이 몰살이라 할지라도.

"크으……."

검을 쥔 손이 파르르 떨린다. 너무 많은 피를 흘린 끝에 정신이 혼미했고 다리는 흔들렸다. 끝내 육신이 쓰러지려던 그를 지탱한 것은 등 뒤에 맞닿은 누군가의 팔이다.

"이렇게 쓰러지실 분은… 아니잖습니까."

"록슬리 경……."

태양과 심판의 성배기사 록슬리. 그가 한쪽 만 남은 팔로 레온을 지탱하고 있었다.

한때 찬란한 영광의 성배기사였던 그는 이미 치명상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한쪽 팔은 뜯겨나갔고, 성검은 부러졌으며, 갑옷은 육신과 함께 구겨졌다.

불괴의 검과 갑주가 저토록 망가지기 위해서 그가 돌파해온 사지는 얼마나 두터웠을까? 필시 자신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으리라.

"곁에서 죽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의 왕이시여."

마지막까지 충성스러운 이 명예로운 기사에게, 레온이 할 수 있는 말은 한 가지뿐.

"함께 싸워 영광이었네."

기사에게 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레온의 그 한 마디만으로, 록슬리는 만족하며 눈을 감았다. 그의 육신에서 모든 힘이 사라졌고, 남은 힘을 이어받은 레온은 다시 일어섰다.

'카리나는…….'

전장의 옆구리를 찔러오던 북부군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딸아이와 마지막 해후를 하진 못했으나 그것이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카스티야, 자신의 아내가 선물한 빛은, 마지막에는 그를 향해 찾아왔으니.

'생각해보면 참 기나긴 삶이었구나.'

젊은 나이에 과로로 죽어 이 세계에 환생했다.

드라고니아 대공의 적자로서, 아름다운 어머니를 보고서 미래의 연애문제는 없겠다 안도했고, 창문 바깥에 펼쳐진 이세계의 풍경을 보며 판타지를 기대했다.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쥔 검에 두근거리며 검기니 오러니 기대를 품었더랬다.

「이것도 여신의 인도겠지, 참으로 가르칠 보람이 있겠소.」

성배기사 고르딕 경의 가르침을 받아가며 세상이 녹록지 않음을 깨달았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단련에 생각했던 이세계 판타지가 아니라며 불평을 토로하기도 했다.

성배기사가 되기 위한 여정을 떠날 때는 또 어땠나?

청소년기에 세상을 떠돌며 퀘스트를 받기 위한 하염없는 여정을 헛웃음을 치며 쏘다니지 않았던가.

「길두스일세! 도와주어 고맙군!」

「으하하하! 젊은 친구가 실력이 대단하군! 안토크라 하네!」

「트리맨 군라르다. 그대와 여정을 같이해도 괜찮겠는가?」

평생의 친구들을 만났고.

「울프릭 드라고니아 대공의 아들 레온 드라고니아여. 그대의 명예와 신실함을 증명할 퀘스트를 수여하겠도다.」

여신을 만났다.

워나이트가 되고, 성배기사가 되고.

오크들과 전쟁을 벌이고, 대악마를 쓰러뜨려 붕어한 선왕을 이어 사자심왕으로 선택되고.

그 명예로운 여정 속에서,

「저는 순결을 맹세한 신관이에요. 폐하께서 저처럼 미천한 것 때문에 여신의 분노를 사시면 안 됩니다.」

사랑을 했고.

「카스티야! 이 아이의 이름은 카리나요! 이 아이가 내 뒤를 이어 드라고니아의 대공위를 이을 것이네!」

아이를 낳았다.

여정은 계속된다.

「폐하, 제가 저 야만의 땅에서 성물을 호송하고 오겠나이다.」

존경하던 노쇠한 성배기사가 길을 떠났고,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폐하! 제국이… 제도가 멸망했습니다.」

혼돈의 군주가 점거한 제국을 향해.

「전 세계에서 게이트가 열리고 있습니다! 놈들의 숫자가 셀 수 없을 지경입니다!」

그로 인해 촉발된 대전쟁을 계속하면서.

「폐하! 적의 군단들이 이동 중입니다!」

「드라고니아 대공령에 놈들이…….」

아내를 잃었고.

「내가 불카누스다!!」

의지하던 기사도 적의 빙하대공과 함께 실종됐다.

그 뒤에도 레온의 역사는 끝없는 전쟁의 역사였다.

그가 짊어져야 할 너무 많은 것들. 마지막을 맞이할 각오를 다졌을 때, 그들이 찾아왔다.

「한하리라고 하는 신녀더군요. 대단한 성력을 지닌 아이에요. 어디서 저런 아이가 튀어나왔는지…….」

익숙한 고향의 이름. 혹시나 해서 찔러보니 역시나였다.

「서, 서울! 서울입니다! 대한민국이요!」

그들의 이야기는 놀라웠다.

설마 미래의 자신이 보낸 기사들이 자신 앞을 찾아오다니.

그리고 허탈했다.

결국 우리의 운명은 멸망이었던 탓이다.

그토록 오랜 저항도, 목숨을 건 항전도 끝내 멸망으로 끝났다.

홀로 살아남아 끝내 모든 악마들에게 복수를 하고서야 지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내의 언니인 이사벨도, 오랜 친구인 길두스나 안토크, 군라르도.

충성스러운 길링엄과 록슬리도. 자신의 가장 귀한 보물인 카리나도.

마지막까지 자신을 희망으로 여겼던 수많은 병사들과 시민들도.

모두 죽어 자신만이 남는다는 것인가.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있다.」

초탈한 시선 속에서 레온에게 아리아나가 속삭였다.

「레온, 네가 기억하지 않느냐. 네가 그 증거이지 않느냐. 영광과 명예 속에서 쓰러졌던, 그 모든 이들의 총의가 너에게 남지 않았느냐.」

비록 멸망할 운명일진저, 스스로 만신전을 제 심장에 보관하고, 모든 이들의 끝이 도달하는 낙원을 품고.

끝내 의지를 이어가는 존재가 있다.

제15대 사자심왕 레온 드라고니아 라이온하트가 바로 그이니.

그렇다면.

이 재현된 세계의 자신의 역할은.

「미래로 나아간 짐을 조력하는 것이겠구나.」

그리고.

예정된 모든 죽음을 딛고 일어선 사자심왕에게, 악마들이 다가왔다.

[어리석구나, 라이온하트.]

웅장한 성벽은 무너지고, 기사들은 쓰러졌으며, 병사들은 화마에 집어 삼켜졌다.

명예 없는 악마들이 명예로운 자들의 죽음을 짓밟고 만족스럽게 거닐었다.

비록 악마군주 카라카엘과 수많은 대악마들이 죽고 나서도, 여전히 그들은 많았고, 그들의 적은 이제 최후의 기사만이 남았다.

[이것이 네 무덤인가? 짓이긴 시체 속에 파묻히는 것이?]

[하찮은 발버둥은 충분했느냐? 나약한 계집의 종이여. 네 이쑤시개로 대해를 찌른들 파도가 물러날 줄 알았더냐.]

[네 피로 적신 잿더미 위에 파멸의 신전을 세우리라. 네 같잖은 명예는 네 백성의 고기와 함께 씹히겠지.]

레온은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악마들은 그가 비통함과 무력감에 사무쳐 무너졌다 여겼다.

…….

그건 오만한 착각이다. 기사는 그저 숨을 고르고 악마들이 접근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얄팍한 승리감에 도취된 대악마가 레온의 무릎마저 굽히려 다가온 순간──

-써걱!

"……?!"

성검의 빛이 대악마의 무릎 정강이를 통과했다. 일격에 무릎 밑이 사라진 대악마가 마지막으로 목격한 것은 제게 뛰어든 기사의 모습.

-데구르르르르.

대악마가 두 합에 목이 떨어지자 악마들이 움츠러들었다. 수십의 대악마들이 이를 갈며 분노했다.

"무덤이라 했느냐? 그들의 시신 속에 묻히는 것이 불명예라 여겼느냐."

성배가 빛난다. 소유자에게 무한한 활력을 부여하는 여신의 성유물. 그 소유자는 늙지 않으며, 금방 상처를 회복하며, 무한한 성력을 발휘하게 한다.

"보아라! 영광스러운 싸움 끝에 쓰러진 명예 있는 자들의 품을! 그들 속에 묻히는 것이 어찌 불명예일 수 있을까! 이보다 더한 명예가 어디 있단 말이냐!"

악마들은 굴하지 않는 기사를 둘러싸면서도 움츠러드는 것을 막지 못했다.

"내 피 위에 신전을 세우겠다고? 명예를 씹어대겠다고? 실로 저열한 패배자들의 발상이로구나. 하찮은 악종들이 비열한 열등감을 해소하는 방법은 협소하기 그지없군!"

그들은 깨달았다. 이 위대한 시대의 정신은, 자신들이 끝내 타락시킬 수 없음을.

"난 여기 서 있다, 악마들. 나는 싸울 것이다. 너희들은 결코 나를 패배시킬 수 없을지니. 영원히 그 굴욕을 기억하라!"

두려워하라, 악마들이여.

네놈들이 타락시킬 수 없는 신들의 기사가 여기 있다!

레온의 마지막 말을 들어줄 수 없다는 듯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드는 악마들.

그들의 얄팍한 승리감을 조금이라도 더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의 패배감을 숨기기 위해.

하지만 그들은 성배 수호자의 포효를 삼키지 못했다.

"라이온하트에…! 영광 있으라!!"

끝없는 싸움이 재개된다.

앞으로 200년을 이어질, 홀로 남은 전쟁이 시작된다.

하지만 기사는 포기하지 않는다.

영광의 기사왕은, 신들의 사자심왕은.

모든 고난과 불리를 극복하고서.

승리할 운명이기에.

* * * *

-기록 완료. 데이터 저장.

만신전의 구석진 공방. 피로한 전투를 막 끝내고 귀환했으면서도 강철의 성배기사는 쉬지 않고 작업에 몰두했다.

데이터의 백업 및 저장.

그것은 게이트 안에서 그가 경험하고 축적한 정보의 모든 것들을 세분화하여 카테고리 별로 정리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무기는 살생을 위한 도구이되, 그것이 올바른 자에게 쥐어졌을 때, 세상을 지키는 방패가 되리니.」

억지로 생명을 유지하면서, 하얗게 새어가던 머리카락의 기사가 마지막까지 두드리던 망치질.

그의 평생에 걸쳐 관철한 삶의 태도를.

-끼룩.

강인공지능은 냉정하게 데이터화해 저장한다. 그러고선 마지막으로 데이터의 폴더명을 정해야 할 때가 왔다.

-「13A057-77 영상데이터」…….

정해진 형식에 따라 무기질적으로 생성된 폴더명. 야피는 그대로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려다 데이터 속 연산작업을 중지한다.

「어떻나? 자네, 내 제자 안 하겠나?」

-……

유기물의 주제넘는 제안. 그저 기술습득을 위해 그의 움직임을 파악했던 강인공지능에게 그 발언만큼 우스운 것도 없다. 하지만…….

-끼룩.

야피는 슬쩍 폴더명을 고쳤다. 그것이 스스로도 무의미하고 비합리적인 이름임을 알면서.

폴더명 변경.

변경된 폴더명.

『깨달음』

데이터 작업을 종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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