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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42

142화 차원의 돌 (2)

142화 차원의 돌 (2)

은은한 달빛이 내려앉는 창 아래, 오필리아 플랑브아즈 공작은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그녀가 손에 든 와인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카인 시니야카를 직접 보니 어떠셨습니까.”

바스티안의 물음에 오필리아의 눈동자가 잠시 먼 곳을 떠돌았다. 그녀는 와인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니. 그는 하센베르크가 아니에요. 만약 그 아이가 빌헬름의 혈육이라면, 저는 분명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오필리아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의심과 망설임의 미묘한 빛을 띠었다.

카인 시니야카가 했던 말 때문이다.

‘아리엘은 아름답고 기품이 넘치는 여인입니다.’

오필리아는 다시 와인잔을 입술에 가져갔다. 방황하듯 흔들리던 그녀의 눈길이 바스티안을 바라봤고, 살짝 미소했다.

그래. 당신은 이미 내 마음을 읽었겠지.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은 저의 인생에서 다른 무엇보다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카인 시니야카의 말은 오필리아에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녀는 카인을 보며 빌헬름을 느꼈다.

그의 말투. 표정. 그가 했던 말.

‘오필리아. 너와 함께했던 시간은 내 인생에서 다른 무엇보다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거야.’

그래 놓고는 나를 배신했지.

“하센베르크와 관련이 없다고 보십니까.”

“아직은 확신할 수 없어요. 그 아이에게는 무언가 숨겨진 것이 있는 것 같으니까. 빌헬름의 혈육은 아니더라도, 어떤 연결 고리는 있는지도 모르죠.”

“계속 주시하겠습니다.”

“데미안 시니야카라는 아이도 범상치 않았어요. 의외로 그 아이는 카인 시니야카와 비슷한 기운을 풍기더군요. 마치 진짜 형제처럼.”

“그러니 의형제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럴지도요.”

오필리아가 작게 한숨을 뱉었다.

“그건 그렇고, 바스티안도 아까 아리엘의 표정을 봤어야 했어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서신을 봤을 때부터 짐작하기는 했지만, 후······, 아리엘이 카인 그 아이에게 완전히 홀린 모양이에요. 그 도도하고 오만했던 아가씨는 어디로 사라진 건지.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사내에게 푹 빠져서는. 대체 누구를 닮아서 저러는······.”

투정 부리듯 중얼거리던 오필리아의 얼굴이 돌연 붉어졌다.

“아, 아무 말도 하지 마. 바스.”

***

아리엘은 서재의 열쇠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두려움, 그리고 설렘으로 가득했다. 카인과 함께 저택의 고요한 밤을 가로지르는 것은 마치 금지된 사랑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걱정하지 마 아리엘. 들키지 않을 거야.”

카인의 속삭임이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의 자신감 넘치는 말투는 아리엘의 불안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혔다. 그러나 그녀의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어머니께 들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녀를 계속 괴롭혔다.

아리엘과 카인은 서재로 향하는 복도를 조심스레 걸었다. 주위는 고요했지만, 그 고요함이 오히려 아리엘을 더욱 긴장하게 했다. 아리엘은 지금 맨발이었다. 하이힐의 굽 소리를 염려했기 때문이다. 물론 마법을 발현해 소리를 지우는 방법도 있었으나 어머니께 감지될 가능성이 컸다.

“후우······.”

무사히 서재에 도착한 아리엘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카인을 돌아봤다. 하이힐을 신지 않은 탓에 카인과의 눈높이 차이가 벌어진 것을 느낀 아리엘은 흠칫 놀라 발뒤꿈치를 들었다. 그런 아리엘을 보며 카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리엘은 열쇠를 꽂고 문을 조심히 열었다. 그녀는 한순간 호흡을 멈췄다. 만약 누군가가 우리를 발견한다면? 그래서 어머니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러나 다행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리엘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카인과 함께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밀폐된 서재 안은 낮과 다른 신비로운 분위기로 가득했다. 책장 사이로 흐르는 달빛이 그들의 발걸음을 밝혀주었다. 아리엘은 카인의 손을 잡으며, 그를 따라 서재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마음은 두근거리고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카인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쪽이야. 카인.”

아리엘이 조심스레 책장 하나를 조작했다. 그러자 책장의 모습을 한 숨겨진 문이 천천히 열리며, 그 뒤에 감춰진 작은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밀 서재였다.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카인이 초를 꺼내 불을 붙였고, 그것을 확인한 아리엘이 서둘러 문을 닫았다. 비밀 서재는 오래된 책의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촛불의 은은한 조명이 그리 크지 않은 이 공간을 더욱 신비한 분위기로 만들었다.

“여기에 있는 거야? 아리엘.”

아리엘은 카인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카인은 어떻게 ‘그 책’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까. 아리엘은 그것이 궁금했지만, 카인을 향한 마음이 너무 깊어져 그 이유를 묻지 못했다. 자칫 물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까 두려웠다.

“고마워. 아리엘.”

아리엘의 두려움을 달래듯 카인이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아리엘은 욕구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금 카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때, 카인이 아리엘을 번쩍 안아 올려 테이블 옆 의자에 앉혔다. 아리엘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이후 벌어진 일은 그녀를 정말 소스라치게 놀라게 했다.

“카, 카인······!”

품에서 손수건을 꺼낸 카인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먼지로 더럽혀진 아리엘의 발을 깨끗이 닦아 주었다. 아리엘의 얼굴이 수줍음과 행복으로 붉게 물들었다. 카인의 행동은 마치 백마 탄 왕자가 아름다운 공주를 대하는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비밀 서재를 살펴보던 카인이 책 한 권을 찾아 들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이어 촛불의 빛에 의지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리엘은 멍한 눈으로 카인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깊은 눈, 곧게 뻗은 코, 단정한 입술, 섬세한 귀, 밤하늘처럼 반짝이는 머리카락.

아리엘의 마음속에서 거대한 파도가 일었다. 그녀는 직감했다. 자신의 세계가 온통 카인을 위한 것이 되어버렸음을. 아리엘은 자신이 카인의 세계에 온전히 속해있음을 느꼈다. 카인이 원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그녀는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카인의 눈동자는 책의 페이지를 탐독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옆에 앉은 아리엘의 존재조차 잊을 정도로 그는 책의 내용에 사로잡혔다.

카인이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모르가나의 암시 때문이었다.

‘내게 플랑브아즈 공작에 관해 말하려던 이유가 뭐지?’

‘그녀가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죠.’

‘도움이라고?’

‘당신은 복수를 원하죠?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볼까요? 대륙 최강의 살수 가문인 블레오파드를 지배하고, 당신에게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존재. 만약 그 존재가 제국에 있다면 어떨까요.’

이후 모르가나는 말했다. 오필리아 공작의 딸 아리엘라 플랑브아즈가 아르카넘 홀에 입학할 것이라고. 그래서 카인은 아르카넘 홀에서 아리엘라에게 접근했다. 당시의 그가 ‘그림자 군주’의 자그만 흔적이라도 찾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는 없었으니까.

‘나, 네가 좋아.’

루나의 목소리가 일순 머리를 스쳤지만, 카인은 의식적으로 그것을 머릿속에서 몰아냈다.

‘플랑브아즈 저택에는 당신이 알고 싶어하는 비밀이 있을 거랍니다?’

모르가나는 플랑브아즈 저택에서 ‘차원의 마력에 관한 연구’라는 이름의 책을 찾으라고 했다. 마음이 급해진 카인은 무작정 제국으로 진입했고, 우여곡절 끝에 플랑브아즈 저택에 잠입하는 것에 성공했다. 물론 그 이후 오필리아의 손에 처참하게 당했지만.

오필리아 플랑브아즈는 엄청난 실력의 마법사였다. 카인은 그녀가 모르가나보다 약하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카인은 제국에서, 그리고 플랑브아즈 저택에서 여러 번의 회귀를 경험하며 오필리아와 아리엘라에 대해 알게 되었다. 즉, 카인은 아르카넘 홀에서 아리엘을 처음 만난 것이 아니었다.

<차원의 마력에 관한 연구>

저자: 빌헬름 하센베르크, 오필리아 플랑브아즈

그리고 마침내 카인은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었다. 놀랍게도 이 책은 카인의 아버지인 빌헬름 하센베르크과 오필리아 플랑브아즈가 공동 저술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카인의 마음은 혼란스러워졌다.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거지? 오필리아에게는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인가!’

‘그것은 결코 사용해서는 안 될 저주받은 힘이다!’

저주받은 힘.

그 힘을 연구하던 하센베르크와 플랑브아즈.

‘하센베르크는 힘의 위험성을 깨닫고 연구를 포기했다. 이미 수년 전의 일이다! 그 힘을 좌지우지하려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은 오만이다!’

하센베르크는 힘의 위험성을 깨닫고 연구를 포기했다.

그렇다면 플랑브아즈는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

그 결과가 이 책 안에 있을 것이다.

‘아버지. 당신은 무엇을 숨기고 있었죠. 오필리아 플랑브아즈 공작과 함께 이 책을 쓴 이유는······.’

카인은 페이지 속으로 더욱 깊게 빠져들었다.

***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낯선 환경이기 때문일까. 흠, 그럴 리가.

아무튼 이유 모를 갑갑함이 느껴진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머릿속 생각을 정리했다.

아리엘은 카인에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저택에 방문하며 더욱 그렇게 되었다. 영악한 카인 녀석.

다행인 점은 아리엘이 나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루나는 아마도 아리엘이 아르카넘 홀에서 사귄 여학생 중 가장 가까운 사이일 거다.

‘동화책이 있어! 엄청 많아! 전부 아리엘이 읽는 건가 봐!”

‘아······! 아아······!’

아리엘은 아직 세실에게 존대한다. 세실도 아리엘이 아닌 ‘아리엘라’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전처럼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적대감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따지고 보면 나와 루나가 아리엘의 애칭을 부르는 것이 의외인 상황이다. 소설 속의 아리엘은 이렇게 쉽게 타인에게 애칭을 부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여전히 아리엘은 미아에게 거리를 두며 존대하고 있다.

즉, 나의 예상보다 빠르게 나와 루나와 세실은 아리엘과 가까워졌다. 일이 순조롭게 흘러간다는 이야기다. 세실도 이전처럼 나와 가까워졌다. 그래서 나는 세실을 카인에게 빼앗길 것 같다는 우려를 상당 부분 머릿속에서 지웠다.

서재에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동화책을 읽던 세실을 상기한 나는 피식 웃었다. 아마도 세실은 그런 책을 처음 봤겠지. 그러자 문득 떠올랐다. 고위 마법에 대해 쓰여있던 책.

“······.”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도 오지 않는데, 그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다. 아리엘의 말에 의하면 이 저택의 서재는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고, 열쇠도 필요했으니까.

그러나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방문으로 걸어가 문손잡이를 쥐었다. 잠시 후에는 세계수의 혼돈으로 기척을 지운 채 어둠에 물든 복도를 살금살금 걷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어차피 열쇠가 없어서 들어가지도 못할 텐데, 하면서도 나는 두근두근 기대감을 느꼈다.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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