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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43

143화 차원의 돌 (3)

143화 차원의 돌 (3)

카인의 눈동자 안에서 촛불이 타올랐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고대의 마법과 관련된 복잡한 내용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오필리아 플랑브아즈 공작이 기록한 부분으로, 그녀의 문체는 섬세하고 정교했다.

<본 연구를 통해 저자는 고대의 마법, 특히 빌헬름 하센베르크가 발견한 물질과 그것의 마법적 특성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제공하고자 한다. 이 물질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 추측되며, 발현 방법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가득······>

뒤이은 내용을 보며 카인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에스틸리아 교수에게 수업을 들은 후 마법의 이론 체계가 제법 단단히 잡혀 있었다. 그럼에도 오필리아 공작이 사용한 용어와 개념이 매우 난해했다.

카인은 집중했다. 고대 마법은 그에게 새로운 세계였다. 또한 고대 마법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향후 ‘고위 마법’을 발현하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고대 마법은 소서러의 혼돈과 상당한 연관이 있는 것 같으니까.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저술자가 바뀌었다.

낯익은 필체.

아버지다.

<······그럼에도 고대 시대에 관한 연구는 저자의 오랜 꿈이었다. 기사 가문에서 태어난 나는 어릴 적부터 주위의 기대를 받으며 검을 수련했으나, 마음 한편에는 늘 학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이윽고 나는 가주가 되었고, 오랜 친구인 오필리아 플랑브아즈와 함께 연구를 시작했다.>

카인은 잠시 추억에 젖어 들었다.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검을 수련하는 모습보다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모습이 많았다.

<나와 오필리아 플랑브아즈는 수많은 서적을 탐독한 끝에 비츠크 산맥 너머에 고대의 비밀이 숨겨져 있을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곳은 현시대의 누구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장소였지만, 나는 하센베르크 기사단과 함께 산맥을 넘는다는 무모한 계획을 세웠다. 오필리아 플랑브아즈가 만류했으나 학자의 피가 발동한 나는 호기심을 견딜 수 없어······>

비츠크 산맥.

카인은 이 뒤에 이어질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힘의 작용으로 비츠크 산맥을 넘었을 때 우리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그곳에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있었고, 그 위로는 잘게 부서진 대지가 파편처럼 흩어져 있었다. 나는 그곳을 ‘부서진 땅’이라고 이름 붙였다.>

부서진 땅.

데미안이 말했던 장소가 틀림없다.

<우리 앞에 펼쳐진 부서진 땅은 충격과 경외감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곳에는 예상치 못한 공포가 있었다.>

공포?

<처음에는 인간의 형태로 보였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들의 기괴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들의 육체는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고, 자연의 일부가 된 듯 몸 여기저기에 나뭇가지, 돌덩이, 해초 같은 것들이 부착되어 있었다.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세계의 것이 아니었다.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그들의 표정이었다. 고통과 슬픔이 뒤섞이며 왜곡된 얼굴은 흡사 살아있는 죽음을 보는 듯했다. 눈은 빛을 잃고 공허했으며, 입은 불가능할 정도로 크게 벌어져 있었다. 마치 어떤 저주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데미안은 말했었다.

부서진 땅에서 하센베르크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천막 조각을 봤다고.

그곳에는 괴물이 있었다고.

<많은 이가 죽었다. 하센베르크의 용맹한 기사들도 그들의 기이한 전투 방식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괴물들은 우리의 공격을 쉽게 피하거나 오히려 흡수하며 더욱 강해졌다. 그들은 마법의 힘으로 감싸여 있었고, 기사들의 물리 공격을 허무하게 통과시켰다. 결국 살아남은 이는 나와, 나의 오랜 친우인 ‘프란츠 바우어’뿐이었다.>

프란츠 바우어.

하센베르크의 두 번째 소드마스터이자, 기사단장이었던 사내.

<······나와 프란츠 바우어는 후퇴를 결정했다. 오랜 시간 부서진 땅을 헤매던 우리는 거대한 마력에 둘러싸인 신비한 요람을 발견했다. 말 그대로 그것은 요람이었다. 따스한 생명이 깃든 그 안에는 훗날 나와 오필리아 플랑브아즈가 ‘차원의 돌’이라 명명한 물질이 있었다.>

카인의 눈이 한 단어에 고정됐다.

차원의 돌.

“······저기, 카인.”

카인은 옆을 돌아봤다.

아리엘이 조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머지않아 해가 뜰 거야. 하녀장은 아침잠이 없어 일찍 일어나거든. 하, 하지만 카인이 원한다면 조금 더 있어도······.”

“아. 미안해 아리엘. 이만 가자.”

아리엘이 보석 같은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카, 카인이 원한다면 오늘밤에도 올까? 나는 괜찮아!”

“그래도 될까?”

응!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리엘의 볼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목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고마워. 아리엘.”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리엘이 비밀의 문을 작동해 열었고, 그에 맞춰 카인이 촛불을 껐다.

비밀 서재를 나서며 카인은 창밖에서 서서히 밝아오는 여명을 느꼈다. 아침의 첫 빛이 부드럽게 하늘을 채색하고 있었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지난 걸까.

그때, 카인은 근처에서 희미한 기운을 느꼈다. 아니, 착각인가? 무언가가 감지된 것 같았는데 지금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 느낌을 의심해 보았다.

“카인?”

아리엘의 목소리가 카인의 생각을 끊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고 긴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가 불안함을 내비쳤기에, 카인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 아리엘.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테니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카인은 자신의 혼돈을 은밀하게 발현해 기척을 지울 수 있었다. 플랑브아즈 저택에 잠입해 오필리아에게 수없이 죽어 회귀하며 터득한 능력이었다.

가만. 그렇다면 조금 전에 느꼈던 기운은.

“······응. 카인.”

아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망설이는 눈빛을 좌우로 굴리더니, 와락 카인을 끌어안았다. 목에 닿는 그녀의 얼굴이 뜨겁다. 벌써 세 번째로군.

두 사람은 서재를 빠져나와 열쇠로 문을 잠갔다. 그러고는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걸었다. 고개 돌려 닫힌 서재의 문을 흘끗 바라본 카인은 피식, 입가를 올렸다.

***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어쩐지. 서재의 문이 잠겨있지 않았을 때부터 이상하다 했다.

수 시간 전, 나는 방에서 빠져나와 서재에 도착했다. 살짝 문손잡이를 돌리자 아무런 저항 없이 문이 열렸고, 나는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발각될 경우가 살짝 염려되기는 했지만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로 했다. 그래서 조금 전까지 고위 마법에 관한 책을 읽었다. 달빛이 은은히 새어 들어왔기에 글자를 읽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던 나는 작은 소음을 들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소리가 난 책장 너머에서 카인과 아리엘이 나타났다. 순간 카인의 눈빛이 변했고, 나는 세계수의 혼돈이 나의 기척을 지우고 있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며 숨을 죽였다.

‘카인?’

‘걱정하지 마 아리엘.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테니까.’

아리엘이 카인을 끌어안았다. 이어 두 사람은 서재를 벗어났다.

나는 아직도 정신이 멍했다. 뭐야. 둘이 그런 사이였어? 책장 너머에서는 뭘 한 걸까. 뭘 하긴. 젊은 남녀 둘이 은밀하고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할 일은 하나밖에 없지.

‘······빌어먹을 녀석.’

솔직히 조금 부러웠다. 나는 무한회귀 세계관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세 인물을 모두 가까이에서 봤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만 판단한다면 그중 가장 매력적인 여성은 아리엘이었다. 루나는 선머슴처럼 행동할 때가 많고, 세실은 표정과 말수가 극도로 적으니까.

반면 아리엘은 루나와 세실에 버금가는 외모에 더해 우아한 표정, 말투, 손짓, 세련된 걸음걸이 등의 추가적인 매력 요소를 갖췄다. 아아, 하이힐 버프까지.

‘카인에게 빙의됐어야 했나.’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던 나의 머릿속에 문득 성년의 밤이 떠올랐다.

더듬지 않고 말하는 세실의 목소리는 정말로 매력적이었다. 당시 내가 내린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때의 세실은 많이 취한 상태였고, 의식을 잃어 잠들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아직 세실과 그날의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구나.

“······.”

나는 카인과 아리엘이 모습을 드러냈던 책장으로 다가갔다. 무언가 장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조작하면 책장이 문처럼 열릴 테고, 그 안에는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흔적이 있겠지.

그런데 장치가 보이지 않는다.

‘먼지야. 어떻게 이 책장을 열 수 있는지 알겠어?’

대답은 없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봤다.

먼지가 없다.

‘먼지야.’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이 녀석은 또 어디로 사라진 거지.

결국 장치를 찾지 못한 나는 서재를 벗어나기로 했다. 창밖은 시시각각 밝아지고 있었고, 여기에 계속 머무르는 것은 위험하니까.

서재 밖으로 나온 나는 멈칫했다. 문을 잠가야 하는데 열쇠가 없었다. 서재가 열려 있으면 하녀 중 누군가가 오필리아 공작에게 보고할 거다. 그러면 최악의 경우 서재는 봉쇄될 테고, 나는 고위 마법에 관한 책을 마저 읽을 수 없게 된다.

헥. 헥. 헥.

돌연 옆에서 먼지의 기척이 느껴졌다.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나를 올려다보는 녀석의 입에는 열쇠 하나가 물려 있었다.

.

.

.

잠을 별로 못 잤더니 머리가 멍하다.

먼지 덕분에 서재를 잠그는 것에 성공한 나는 방으로 돌아와 기절하듯 잠들었고, 루나의 목소리에 깨어났다.

“데미안! 벌써 해가 중천이야! 아직도 자고 있으면 어떡해! 어서 일어나! 오늘도 저택을 탐험해야지!”

아아. 루나여. 너무 졸려. 졸리다고.

그러나 루나는 까르르 웃으며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방 밖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하암······.”

작게 하품한 아리엘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얼굴을 붉혔다.

오필리아 공작이 물었다.

“잠을 설친 거니? 아리엘.”

“아, 네. 그사이 아르카넘 홀의 침대에 적응했는지 조금······.”

“침대와 이불을 교체해야겠구나.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푹 자지 못하면 되겠니.”

“감사해요 어머니.”

아리엘이 생긋 웃었고, 그러자 오필리아 공작도 웃었다.

저 모녀는 정말로 그림 같구나.

“저기 아리엘. 오늘도 몰래 서재에 가면 안 돼?”

식사를 마치고 나오며 루나가 아리엘에게 속삭였다. 아리엘이 흠칫 놀라자 루나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세실리아가 동화책을 마저 읽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나도 조금은 흥미가 있기도 하고. 헤헤······.”

“루. 루나. 나는······.”

당황한 세실이 루나의 뒤에 숨었지만 가려지지 않았다. 서재에 가는 것은 나도 찬성이었기에, 그거 좋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리엘은 거절했다. 어제도 위험을 무릅쓰고 한 일이라 곤란하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루나도 무리한 부탁을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나는 카인의 눈치를 보는 아리엘에게서 묘한 긴장과 여운을 느꼈다.

······설마 너희들. 오늘밤도?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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