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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48

147. 약혼관계 – 유안 외전

“일어낫! 이 게으름뱅이 자식아. 해가 떴는데도 일어나지 않다니, 뉘 집 자식인지 싹수가 글러 먹었구나.”

오늘도 유안은 거친 고함과 함께 아침을 맞았다. 졸린 눈을 비비며 지저분한 모포를 밀치고 일어난 그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입에 붙은 사과를 잠결에 거듭했다.

이 숙소에서 일한 지도 두 달이 넘었다. 하지만 유안은 꼭두새벽에 일어나기가 여전히 쉽지 않았다.

“주둥이만 일어났구나. 벌떡 안 일어나?! 빨리 가서 물을 떠 와야 할 것 아니냐. 손님들이 가시기 전에 말에게 물이랑 여물을 먹여놔야 한단 말이닷!”

“지, 지금 가요. 아앗, 때리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유안은 손을 번쩍 치켜든 뚱뚱한 숙소 주인장의 곁을 재빨리 빠져나갔다.

뼈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한기를 느끼며 우물로 달려간 그는 달그락달그락- 물을 긷기 시작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꼭 들려주십시오. 저희 ‘얼음섬’ 여관은 언제나 최고의 서비스를 보장하겠습니다.”

무탈히 숙박비를 받아든 주인장이 떠나는 손님의 뒤에 대고 거듭 인사했다. 그러곤 돌아서서 같이 고개를 조아리던 유안을 내려다보았다.

찔끔.

맞을까 봐 지레 몸을 움츠렸지만, 주인장은 유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했어. 가서 밥 먹고, 손님이 나간 방을 치워놓도록 해. 잠이 그렇게 많아서야 밥 벌어먹고 살겠어?”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사내자식이 말이야, 어깨 딱 펴고! 당당하게 벌어먹을 수 있다고 해. 뭐라고 했다고 기죽어있지 말고.”

“…네.”

“이럴 땐 네! 하고 크게 대답하는 거야, 짜식아. 내가 너만 할 때는…”

훈계를 뒤로하고, 유안은 숙소 식당으로 들어갔다.

숙식하며 일하는 소년에게 주어지는 아침 식사는 거친 빵조각 몇 개와 한 잔의 차가운 우유였다. 그마저도 서둘러 입에 구겨 넣고, 우유로 입가심한 유안은 떠난 손님의 방을 청소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렇게 일 년 하고도 반이 흘렀다.

“유안!! 빨리 일어나!”

“일어났어요!”

“누워있잖아!”

“신발 신고 있다구요! 보지도 않고 그래.”

투덜거리면서도, 유안은 헐레벌떡 밖으로 나왔다. ‘오늘 아침에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었나?’ 의아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없다. 어제 다 해놨다.

그는 뺨을 쓰다듬으며 툴툴거렸다.

“오늘은 방 빼는 손님도 없는데 왜 이렇게 야단이에요.”

“음. 나왔구나. 오늘은 어디 나랑 같이 나갔다 오자꾸나.”

“지금요?”

“아니. 점심 먹고.”

유안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따졌다.

“아니, 그럼 왜 저를 그렇게 깨우신 거예요. 놀랐잖아요.”

“하하하. 그냥 아침밥 먹게 빨리 나오라고 한 거지. 자, 앉아라.”

숙소 주인장이 빙긋 미소지었다. 그는 소리를 지르거든 이 녀석이 호다닥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침을 먹은 뒤, 숙소 곳곳을 빗자루질하고, 빨랫감을 양잿물에 재우고, 마구간 바닥을 닥닥 긁어내는 오전 일과가 끝났다.

유안은 주인장과 함께 작은 손수레를 밀었다. 식자재를 사러 가는 것이었는데, 유안이 동행하기는 처음이었다.

동문을 통과하자 낯설지 않은 대로가 펼쳐졌다.

멀지 않은 곳에 그의 집이었던 저택이 있었고, 이 대로는 그가 어릴 적 마차를 타고 지나다니던 길이었다.

잠시 그 길을 생경하게 바라보던 유안이 얼굴을 붉혔다.

손수레를 힘껏 밀었다. 숙소 주인장이 “어엇! 갑자기 왜 이래? 천천히 밀어.”라고 나무랐으나, 그는 고개 숙인 채 양팔로 수레를 밀어나갈 뿐이었다.

창밖으로 은화를 던지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누가 은화에 맞거든 꾸벅, 감사하다고 절하는 모습을 나는 우습게 바라봤었다.

이윽고, 한 청과물 가게에 도착했다. 여름 햇살에 머리가 반짝이는 사내가 짓궂게 인사했다.

“허허, 야만인. 어서 오시게. 처음 보는 애를 데리고 왔네그려?”

“하하, 대머리. 오늘도 반짝반짝하구만. 얘한테 뭘 좀 가르쳐주러 왔지. 앞으로는 얘가 물건을 사러 올 거야.”

숙소 주인장도 지지 않았다. 굵은 팔뚝에 새겨진 깃털 문신을 꿈틀거리며 유안을 앞으로 밀어 소개했다.

“자네 아들인가?”

“아니, 우리 가게에서 일하는 애야. 인사드려라. 대머리 아저씨라고 부르면 된다.”

“예끼!”

두 장년 사내의 농지거리가 오갔다. 하지만 유안은 예의상으로라도 웃어줄 수가 없었는데…

그는 청과물 가게 안쪽에 있는 소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소년도 유안과 눈을 마주치자 정색하며 마주 보았다.

다니엘 카자크.

친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유안이 귀족일 적에 만났던 또래의 귀족이었다.

* * *

다니엘과 유안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유안이 가게에 들를 때마다 함께 손수레를 채웠고, 일이 끝나거든 수레 옆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말은 별로 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어떤 위안이 되어주었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았다.

둘 다 한때 귀족가의 후계자였고, 부모님을 잃었으며, 아스터 왕국의 편을 들었기에 재산을 몰수당했다.

하지만 분명한 차이점도 있었는데, 다니엘은 그를 돌봐주는 사람이 많았다. 이 청과물 가게의 대머리 점주도 그중 하나였다.

이는 다니엘의 아버지, 카자크 남작이 평소 아랫사람들에게 인덕을 베푼 덕분이었다.

카자크 남작가의 시종, 시녀들은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다. 비록 남작을 죽이기 위해 습격해온 기사들을 막아낼 힘은 없었으나, 다니엘만큼은 숨겨줄 수 있었다.

“유안, 이것 봐봐.”

오늘도 평소처럼 나란히 주저앉아 길거리를 바라보는데, 다니엘이 무언가를 꺼내 보여주었다.

작은 보석이 박힌 장신구 몇 개. 별것 아니지만, 지금의 그들로서는 대단히 값진 보물이었다.

“난 떠날 거야. 당장은 아니고, 조금만 더 자라면. 같이 갈래?”

“…떠난다고? 어디로?”

“그것까진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 그냥…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아서.”

“왜?”

다니엘은 침묵했다. 입을 오물거려 서투르게 말을 고르는가 싶더니 고백했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겠지만… 나를 돌봐주는 아저씨랑 아주머니들을 보기 괴로워. 자꾸 돌아가신 어머니랑 아버지가 떠올라서 못 견디겠어. 솔직히… 다 잊어버리고 도망치고 싶어. 너는 안 그래?”

“…모르겠어.”

“그럼 여기에 남을 거야?”

“…”

유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해볼게.” 대충 말하고 손수레를 몰아 숙소로 돌아가는데, 다니엘의 말을 곱씹던 그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왈칵 치밀어올랐다.

가문은 망했다. 집도 절도 없이 숙소에 빌붙어 살아가는 인생. 사실 다니엘과 함께 떠나서 나쁠 것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이대로 떠날 순 없다.’

유안이 손수레를 세웠다. 제 가슴속 응어리진 감정의 정체를 알아차린 소년은 수레 손잡이를 으스러지게 쥐었다.

부모님의 이름이 적힌 공고문을 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

그건… 증오였다.

그가 여태껏 부려본 치기 어린 투정이나 진심이 담기지 않은 분노와는 비교할 수 없이 깊은 감정이었기에, 어린 소년이 여태껏 눈치채지 못한 것이었다.

유안은 손수레를 다시 밀었다.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되려 차분하게 내려앉은 그가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어두운 저녁이었다.

식자재를 식당으로 옮겨두고, 유안은 아저씨를 찾아갔다. 한데 아저씨가 보이지 않아서 숙소 주변을 한참 돌아다녔다.

이윽고, 유안은 산책을 나왔는지 한 넓은 공터를 어슬렁거리고 있는 숙소 주인장을 발견하고 말했다.

“아저씨.”

“…”

“아저씨. 저 떠날 거예요.”

“…”

“그동안 고마웠어요.”

“…재미있는 놈이로구나. 왜 떠난다는 것이냐?”

돌아서려는데, 주인장 아저씨가 어두컴컴한 얼굴로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낮았으나, 증오에 휩싸인 유안은 퉁명스럽게 통보했다.

“할 일이 있어서요. 막지 마세요.”

“그래. 넌 쓸모가 없구나.”

“…뭐라고요?”

아저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무감정한 눈동자를 마주한 소년은 뿌득, 이를 악물었다.

그래. 이런 세상이었지.

챙겨야 할 짐도 없었기에 돌아선 그는 맨몸으로 바르나울을 향해 걸었고, 그런 유안의 뒷모습을 숙소 주인장이 싱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까마귀 떼가 푸다닥, ‘홍련달’을 향해 날아올랐다.

* * *

“돌아가. 너 같은 꼬맹이는 필요 없어.”

“제발요. 아무 잡일이라도 좋아요. 시키는 데로 열심히 할게요.”

“아, 거참. 끈질기네. 얌마,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 아이고, 단장님 출근하셨습니까.”

“뭐야? 무슨 일이야?”

사무실을 지키는 용병에게 사정하던 유안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덩치가 크고 혈기왕성한 장년의 사내가 있었다.

그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유안은 재빨리 그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렸다.

“여기서 일하게 해주세요. 부탁드려요. 무슨 일이든 할게요.”

“이 자식이 감히 단장님께! 썩 떨어지지 못해? 단장님 죄송합니다. 당장 내쫓겠습니다.”

용병이 유안을 떼어냈다. 발버둥 치는 소년을 문밖으로 던져버리려는데, 엘슨이 손을 저었다.

“내려놔. 애한테 무슨 짓이야. 꼬맹아, 미안하지만 우리 용병단에서는 네가 할 일이 없을 것 같구나. 얼마 안 되지만 이것 가지고 가서 뭐라도 사 먹으렴.”

동화 두 개.

유안은 잠시 망설이다 그 동화를 받아들었다. 고개를 꾸벅, 예의 바르게 숙이고는 후다닥 달려나갔다.

“으이그… 단장님은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입니다.”

“어쨌든 잘 돌려보냈잖아. 너야말로 조심해. 용병단 이름을 바꾼 지 얼마 안 됐는데, 사람을 그런 식으로 내쫓으면 안 좋은 소문이 돌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러다 거지들이 몰려오면 어쩌시려고요?”

“그럼 도망쳐야지. 파하하하하.”

엘슨은 웃음보를 터뜨리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또 왔구나?”

“여기서 일하게 해주세요!”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던 유안의 방문은 계속되었다. 엘슨의 출퇴근 시간에 맞춰 사흘간 반복되었고, 매번 동화를 넘겨주던 엘슨은 혀를 차고야 말았다.

“에라이. 이럴 바에는 고용하는 게 더 싸게 먹히겠다. 야, 얘 데리고 가라.”

“이런 꼬맹이를 얻다 씁니까?”

“낸들 알아? 용병들 심부름꾼으로 쓰던가, 삶아 먹던가. 알아서 해.”

“아니, 대장님. 이런 꼬맹이가 어떻게 용병들 심부름을… 아! 알겠습니다. 헤헤.”

사무일을 맡은 용병은 엘슨의 말을 알아듣고는 유안을 데려갔다.

그리고 넉 달이 흘렀다.

한껏 추워진 겨울. 송년회를 겸해 용병들의 숙소를 둘러보기 위해 찾아온 엘슨의 눈에 유안이 들어왔다.

“…쟤 아직도 있었냐?”

“아이고, 말도 마세요. 어찌나 독종인지… 두들겨 맞으면서도 떠날 생각을 안 해요.”

용병들은 거칠다.

아무리 그래도 깡패들만 하겠느냐마는, 그들도 칼밥을 먹는 건장한 사내들이고, 한번 상단을 따라 나가면 수개월 만에 돌아오기 일쑤여서 자신의 쉬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방해하면 곧장 주먹이 날아갔다.

해서 용병들의 숙소 관리는 그들에게도 꿀리지 않는 떡대들, 또는 넉살 좋은 아주머니에게(젊고 예쁘면 큰일 난다.) 맡기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쬐끄만한, 딱 한 대 때려보기 좋을 소년이 있다면?

밥 가져오라 때리고, 옷 치우라고 때리고, 이불 안 갈아놓았냐고 걷어차기 십상이었다.

엘슨은 제 키보다 높이 쌓인 빨랫감을 하나하나 얼음물에 담가 손빨래하는 유안을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덱스터 용병단의 번창을 위하여!”

“위하여어어!”

용병 숙소 식당에서 잔치가 열렸다.

용병들은 부어라! 마셔라! 술을 퍼먹었다. 매일매일 배급되는 반 파인트(pint, .57리터)의 ‘칼라도스’ 외에는 술을 먹는 게 금지인 그들로서는 오늘만큼 신나는 날이 없었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엘슨은 몇 번 건배한 술에 알딸딸한 취기를 느끼며 밖으로 나왔다.

최근에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피우기 시작한 연초를 물고, 끄으응- 기지개를 켜는데, 숙소 마당 멀리에 유안이 보였다. 빨래가 이제야 끝났는지, 그는 팔짝 뜀박질하며 허공 높이 걸린 빨랫줄에 옷을 널고 있었다.

연기를 뿜으며, 엘슨은 조용히 다가갔다. 황혼이 지는 마당을 배경으로 팔짝팔짝 뛰는 소년의 모습은 어쩐지 애틋한 것이었다.

엘슨은 다 태우지 못한 연초를 떨궈 짓밟고는, 축축한 옷 몇 벌을 집었다. 그새 바스락한 살얼음이 붙은 옷가지를 턱, 대강 빨랫줄에 걸치자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렇게 걸면 안 말라요.”

“그렇겠지.”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엘슨은 옷을 고쳐 걸었다.

묵묵히 옷을 너는 시간이 지나갔다. 일을 마친 엘슨은 유안의 어깨를 두드려주려 손을 뻗었는데, 움찔, 소년이 움츠러드는 것을 보았다.

맞는 줄 알았나 보다.

엘슨이 쪼그려 앉았다. 그 커다란 덩치를 굽혀 소년의 눈높이에 맞춰주고는, 그의 푸석푸석한 머리와 뺨을 한 번 쓰다듬었다.

“고생해라.”

돌아서서 다시 식당을 향하는 엘슨. 유안이 그를 물끄러미, 제 뺨을 쓸며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뒤, 새해를 맞으며 유안이 일하는 장소가 바뀌었다.

그는 덱스터 용병단 사무실에서, 그것도 단장님의 시종 일을 맡게 되었는데, 할 일이 많지 않았다.

애초에 엘슨은 시종을 둔 적도 없었고, “전 글을 읽을 줄 모릅니다.”라고 발뺌해놨기에 사무실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배달과 같은 잔심부름뿐이었다.

고된 노동에 만성이 된 유안. 그는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눈치를 보았지만, 엘슨은 그에게 별다른 일감을 주지 않았다.

해서 그날그날 유안이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엘슨의 식사를 챙겨주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네가 먹고 싶은 걸 사 오라.”라는 말에 소심하게 빵조각을 사 갔다가 “이걸 누구 코에 붙이냐? 좀 더 기름진 걸 사 와.”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함께 밥을 먹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는 줄 아느냐? 아무리 그래도 죽여버릴 수는 없어서, 놈의 갑옷이랑 칼을 똥통에 던져버렸지.”

“…그 기사가 가만있지 않았을 텐데요?”

“뭐 어쩔 거야. 난 바르나울을 떠났는데. 녀석도 기사단에서 나오지 않고서는 날 쫓아올 방법이 없었을걸? 파하하하하하하.”

“…무모하시네요.”

칼로 어지간히 깊이 찔려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유안이 관찰한 엘슨은 말이 많았다.

순전히 재미를 위해 떠드는 인간.

유안은 그런 것이야말로 평민들의 못난 버릇 중 하나라고 배웠지만, 자기가 이를 즐겁게 듣고, 종종 맞장구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일찍 퇴근했던 엘슨이 만취해 돌아왔다. 사무실에서 숙식하는 유안은 ‘저 인간이 웬일로 술을 마셨지?’ 의아해하며 그를 부축했다.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하하. 좋은 소식이 들어왔구나. 아주 좋은 소식이… 끄윽.”

엘슨이 체스터필드에 걸터앉았다.

이 침대 겸용 소파는 얼마 전에 엘슨이 큰맘 먹고 구입한 것이었는데, 방금까지 유안이 자고 있었던 터라 담요와 베개가 깔려 있었다.

“내… 조카가, 끄윽. 약혼을 했… 아이고, 취한다. 유안. 미안한데 끄윽, 물 좀… 가져다주겠니?”

“네. 잠시만요.”

횡설수설하는 엘슨을 두고 물을 뜨러 내려간 유안은 멈칫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멀뚱멀뚱 서 있던 그는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고, 엘슨에게 물 한 잔을 내밀 때는 등 뒤로 단검이 들려 있었다.

“유안.”

물을 받아든 엘슨이 그를 빤히 쳐다봤다.

들킨 것일까? 한때 준기사였던 엘슨이 만약 눈치챘다면, 유안의 목은 당장 날아갈 것이 분명했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유안은 답하지 않았다. 엘슨이 눈치를 채고 못 채고를 떠나서 그는 갈등하고 있었고, 엘슨이 쐐기를 박았다.

“혹시… 끄윽, 미안하다. 혹시 내 아들이 되어줄 생각은 없니?”

“……왜요?”

“글쎄다. 밥해줄 마누라도 없이 살다가, 끄윽. 밥을 주는 사람이 생겨서 이러는 건지. 네가 나를 좀 끄윽, 닮은 것 같아서… 이러는 건지 모르겠구나.”

꿀꺽, 꿀꺽.

물을 마신 엘슨이 드러누웠다. 우렁차게 코를 골며 잠들자 유안은 단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아무도 모르게 한 짓이었지만, 그날 밤, 유안은 잠든 엘슨의 손을 자신의 뺨에 대어보았다. 그의 손은 잔인하게도, 따뜻했다.

몇 달 뒤, 엘슨의 양자가 된 유안은 ‘아버지’의 저택으로 짐을 옮겼다.

담벼락에 빽빽하게 새겨진 원망의 글귀들을 스쳐 간 그는 하인의 안내를 받아 저택을 둘러보았다.

“여긴 저와 제 마누라가 쓰는 집입니다. 평소엔 제가 없지만 뭐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제 마누라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여긴 창고인데… 허허, 들어가 보시겠어요? …그리고 여기엔 우물이랑 샤워장이 있습니다. 아! 도련님, 이것 보십시오. 아마 처음 보시는 걸 겁니다.”

세탁기. 샤워장 뒤편에는 나무로 만든 세탁기가 놓여 있었다.

“엄청 비싼 거라는데, 주인님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지난달에 사들이셨죠. 여태껏 저택에 돈 한 푼 안쓰던 양반… 죄송합니다. 돈 한 푼을 안 쓰시던 분이 웬일인지… 저희 마누라가 참 좋아합니다.”

“…왜요? 이건 여성분이 돌리시기엔 힘이 좀 부칠 텐데요.”

“바로 그겁니다. 빨래를 제가 전담하게 됐거든요. 하하. 저쪽으로 가보실까요? 옛날엔 저 마구간에 말 두 필이 있었는데 주인님이 그걸…”

그 이후로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작지만 그래도 저택이라 부를만한 크기의 집. 주인을 은근히 친구처럼 대하지만 예의 바른 하인과 맘씨 좋은 아주머니. 경제적으로 풍족한 유서 깊은 기사 가문.

여기서도 유안은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아버지가 된 엘슨도 그에게 바라는 게 없어서, 하루는 물어보았다. 그러자 돌아온 답변은,

“너 하고 싶은 거 해라.”

라는 것이었다.

그날 밤.

잠을 자다 중간에 깬 유안이 헐떡거렸다. 그러기를 한참, 그는 조용히 마당으로 나왔다. 하인 아저씨가 깨지 않도록 주의하며 창고에서 작은 목검을 꺼내왔다.

노엘 덱스터가 어릴 적에 사용했다는 목검이다. 유안은 그걸 저주와 원망이 가득한 담벼락에 마구 두드렸고, 기어이 부러뜨렸다.

부러진 목검을 내던진 유안은 어쩔 줄 모르고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꿈을 꿨다.

드넓은 백작가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꿈을.

하지만 꿈속에 어머니는 없고, 근사한 귀족의 옷을 차려입은 아버지의 얼굴은… 우스꽝스럽게도 엘슨의 얼굴이었다.

“아아… 아아아아아아아!”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노엘 덱스터에 대한 증오도 엘슨의 너털웃음에 가려져 희미해져 가고 있는 것이었다.

난 귀족이다. 귀족. 귀족… 이었다.

유안은 부러진 목검을 집었다. 갈기갈기 뜯어진 나무를 힘으로 억눌러 맞춰보려 했지만, 한 번 생긴 금은 사라질 줄을 몰랐고, 유안도 엘슨을 ‘아버지’라 부르는 일이 없었다.

적어도 남들 앞에서는.

– 쿵쿵.

그로부터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틈틈이 용병단의 일을 돕기도, 무료하게 집에서 검술을 훈련하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유안이 문을 열었다. 거기엔…

“저는 레오 덱스터라 합니다. 큰아버지를 뵈러 왔습니다.”

아버지를 닮은 청년이 와 있었다. 유안은 이렇게 말했다.

“도련님을 문전박대할 수도 없고, 모르는 사람을 집에 들일 수도 없는 제 처지를 이해해주십시오.”

아버지를 닮은 당신을 내보낼 수도, 그렇다고 본 적도 없는 노엘 덱스터를 들일 수도 없는,

그의 본심이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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