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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5

#외전 2 애인 있어요

“아, 네. 금방 데리러 갈게요. 상록관이라….”

전화를 끊은 경수는 급하게 겉옷을 걸치고 일어났다. 작업실에서 개인 컴퓨터로 FPS 게임을 하던 동기들이 나갈 준비를 하는 경수를 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경수 어디 가?”

“…아는 동생 데리러.”

“에이, 설마 그래놓고 의리 없게 먼저 집에 가는 건 아니지? 같이 밤새 준다며! 나 아직 하나도 못 했단 말이야.”

“봐서? 우리 사이에 무슨 의리야, 누구세요?”

“저 새끼 튀네.”

정말 코앞인데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취해 전화가 걸려오게 만들다니. 먼저 집에 안 가고 기다리길 잘한 것 같았다. 경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작업실은 중문 바로 앞에 위치한 상록관에 있었다. 중문에서 5분 정도 걸으면 있는 호프집에 들어간 경수는 얼마 둘러보지도 않고 노을을 찾아낼 수 있었다.

교양 수업에서 몇 번 본 얼굴도 있는 걸 보니 한 테이블에 새내기들과 2학년을 함께 섞어 둔 것 같았다. 겉옷과 패딩을 쌓아 올린 자리 옆에서, 옷더미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노을이 보였다. 술잔을 부딪치다 말고 갑자기 나타난 낯선 얼굴에, 여러 명이 동시에 경수를 쳐다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내가 불렀어. 얘 데리러 오신 거 맞죠? 노을아, 일어나 봐. 네가 찾던 형 왔다.”

전화를 걸었던 사람의 목소리였다. 경수는 노을을 잡아 일으켰다. 그는 눈을 멍하게 뜨더니 벌떡 일어나 목을 끌어안았다.

“…….”

“…….”

“…….”

차라리 천노을이 눈에 안 띄는 놈이면 참 좋았을 텐데. 처음 만났을 때보다 키가 한 뼘이 더 컸고, 얼굴도 오밀조밀 예쁘장하니 시선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술 버릇이 이게 뭐야. 당장 안 일어나?”

“으응….”

뺨을 가볍게 툭툭 두드려보았다. 하지만 노을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앓는 소리만 냈다. 다른 놈들은 멀쩡해 보이는데 유독 천노을만 해롱거리는 게 수상했다. 경수는 얘가 정말 취한 게 맞는지 영 의심스러워 눈을 가늘게 뜬 채 노을의 눈치를 살폈다.

“일단 나가요, 나가.”

부축을 도와주려던 여자는 노을이 경수에게 너무 착 달라붙어 있는 바람에 손도 못 대고 그저 따라 나오기만 했다. 계단을 걸어 올라오자마자 세차게 부는 바람에 노을이 어깨를 움츠렸다.

“죄송해요. 선배들이 다 얘한테만 잔을 몰아서…. 그냥 과방에 던져두면 되는데, 굳이 연락을 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고집 되게 세던데.”

“……얘가 만만한 게 저라서 그래요….”

“그런데 저 알죠? 저는 그쪽 아는데!”

내내 노을을 걱정스레 부축하고 있던 경수가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여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전에 어디선가 본 느낌이 들었다. 분명 어떤 교양 수업이었던 것….

“전에 저희 같은 조였는데. 교양같이 들었었잖아요. 인간과 철학. 중간에 드랍하셨지만….”

“아, 맞다. 네 기억해요.”

얼굴이 굉장히 익숙했는데 그 말을 들으니 대충 기억이 났다. 4인 1조로 짜인 교양과목의 조에서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드랍은… 죄송합니다. ……무슨 소리 하는지 이해가 안 가서….”

경수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이 주일 정도 듣다가 도저히 못 하겠다 싶어 드랍 기간에 과목을 버린 기억이 있었다. 교수님도 지나치게 조용하신 분이었고, 내용을 풀어 설명해주기보다는 프린트 내용을 그대로 읊다시피 하셨다. 그리고 인문학 과목은 너무 졸리고 이해가 안 가서 혼자 들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이후 저희 조 다 드랍했으니까. 저도 버렸어요, 그 과목.”

“아, 헉….”

뜻밖의 소식에 경수는 반가움을 느꼈다.

“말 놔도 돼요. 그쪽도 현역이면 우리 동갑이잖아요. 혹시… 재수했어?”

“현역 맞아요.”

어색하게 답하는 경수에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말 놓으라니까. 노을이랑 되게 친한 형이면 자주 보겠네!”

“……?”

노을과 친해도 그녀를 자주 볼 이유는 없었다. 경수는 눈을 깜빡이며 생각에 잠겼다.

“우리 섹션이거든, 얘. 천노을 얘가 내 뻔 후배.”

이 학교엔 학번이 같은 선후배끼리 연결해, 뻔 선배 뻔 후배로 서로 챙겨 주는 멘토링제가 있었다. 말 진짜 안 들을 텐데, 얘…. 경수는 벌써부터 그녀의 고생길이 훤히 보여 무심코 그녀를 동정하고 말았다.

“…힘내.”

“응?”

“아냐.”

인간과 철학을 같이 들었던 사람이면 휴대폰에 아직 전화번호도 남아 있을 것이다. 경수는 가끔 노을을 찾을 때 그녀에게 연락을 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문득했다.

“뭐야…. 둘이 분위기 왜 이래요…? 뭐지? 이거 뭐지?”

어느새 노을이 눈을 게슴츠레 뜬 채 둘을 번갈아 보았다. 여전히 경수의 부축을 받은 채 말이다.

“깼으면 놔.”

경수는 노을의 팔을 내팽개쳤다. 비틀거리다 겨우 똑바로 선 노을은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형, 지금 바라…읍.”

“너 졸려 보인다.”

“암으앙아”

술김에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경수는 노을의 입을 콱 틀어막은 채 고개를 꾸벅 숙였다.

“겉옷 아무거나 걸치고 나오지…. 추우니까 들어가요. 아, 아니, 들어가.”

그녀는 추운 날씨임에도 얇은 카디건 하나만 걸친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경수는 더 할 말이 없어 잠시 입을 달싹이다 가볍게 묵례를 한 뒤돌아섰다. 그녀의 표정에 미미한 변화가 일었다. 눈이 살짝 휘어진 것도 같았다. 천노을, 자꾸 뒤돌아보지 말라니까! 경수에게 입을 막혀 끌려가면서도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던 노을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

“쟤 뭐냐?”

동기 여학생은 왜 혼자 작업 중이냐며 작업실에 들어와 경수를 훼방 놓다 낯선 얼굴을 발견했다. 노을은 작업실 구석에 펼쳐진 간이침대에서 쌕쌕 자고 있었다.

“다른 과 신입생. 아는 동생인데… 나 내일 오전 수업 있어서 그냥 여기서 재우려고.”

“뭐야, 좁은데 돈 내고 자…헙! 아니 미친, 존나 맨날 자고 가도 돼….”

작업실 중간에 놓인 큰 테이블을 돌아 침대 옆으로 다가간 동기는 노을의 얼굴을 보곤 금세 말을 바꿨다. 학교 안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페이스였다. 그녀는 방심하고 있다 찾아온 시각적인 자극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잠자는 노을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방해하지 말고 가서 놀아.”

“조용히 방해하면 안 돼? 얜 왜 우리 과 안 왔대…?”

“나 하는 거 보니까 우리 과는 싫대.”

“나도 우리 과 싫어.”

“나도….”

그렇게 말은 하지만 공부나 주구장창 해야 하는 과보다는 훨씬 적성에 맞았다. 시간과 아이디어로 6학점을 때울 수 있는 학과가 아니었다면 진작 때려치우고 지방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실제로 경수는 물리 과목이나 대학 영어는 아무리 벼락 치기를 해도 A 학점을 받은 적이 없었다.

“자는 애 구경하지 말고 빨리 나가!”

경수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옆 작업실에선 때아닌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마 한 학기 동안 얼마나 마셨는지 세어본다며 또 술병을 작업실 한쪽에 가득 모아둘 것 같았다. 병 모으는 취미가 있는 놈이 이번엔 옆 작업실로 배정되었기 때문이다. 노을을 구경하던 동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흥미가 떨어졌는지 작업실을 빠져나갔다.

아무도 없는 작업실, 들리는 것은 컴퓨터 본체가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소리와 창문 사이로 새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 그리고 노을의 숨소리뿐이었다. 침대가 좁아 그냥 책상에 엎드려 자려던 경수는 옆을 돌아보곤 노을의 옆에 가서 앉았다. 창문은 닫혀 있어도 아직 실내는 싸늘해, 경수는 이불 대신에 누군가 두고 간 롱패딩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그 옆에 비스듬히 누운 채 꾸벅꾸벅 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웅성거리는 소리에 일어나보니 벌써 해가 밝아 있었다. 졸린 눈을 떠보니 아니나 다를까 자신은 이번에도 노을을 안고 자고 있었다. 작실이니 자제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기의 애완 베개를 끌어안고 잤는데, 그 인형은 땅바닥에 처참하게 떨어져 있었다. 꼭 누군가 내던진 것처럼 멀리 날아가 있었다.

“형, 일어났어요?”

몸통을 끌어안았던 팔이 풀어지자 노을이 물었다. 경수는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 미안. 내가 또….”

“괜찮아요. 이게 형 잠버릇인데요, 뭐….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노을은 그제야 몸을 일으키며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했다. 강의에 들고 갈 책을 챙기는 척하며 구석에 있던 둘을 힐끔거리던 동기들은, 노을이 세수를 하고 오겠다며 작실을 나서자마자 경수에게 달려들었다.

“야, 쟤 누구냐? 왜 안고 자?”

“아는 동생. 안고 자는 건 잠버릇이라, 그래서 내가 따로 자는 거 아니면 어디서든 같이 못 자잖아….”

“우리 과는 아니지? 신환회에서도 저런 애는 못 봤는데.”

“우리 과 아니고…. 그냥 친한 동생이라 데려왔어.”

경수는 바닥에 떨어진 베개를 주워 먼지를 털며 대답했다.

“씨발! 내 베개 왜 바닥에 버렸냐? 김경수 개새끼야!”

“안고 자다가 던졌나 봐. 근데 그거 원래 더러웠다? 작년부터 안 빨았잖아. 솔직히 그거 꿉꿉한 냄새 나, 좀 빨아….”

분명 인형을 처음 사 왔을 때는 새하얬던 것 같은데, 어느새 천이 누리끼리해져 있었다. 작실에 무슨 물건을 가져다 두면 거의 돌려쓰다시피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까 걔 여자 친구 있어?”

경수는 잠시 고민하다 나중이 되면 더 귀찮아질 걸 생각해, 초장부터 있다고 해 버리기로 결심했다.

“응, 있어.”

“그래? 뭐, 상관없어. 골키퍼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냐?”

갑자기 날이 섰던 눈빛은 이후 그녀의 친구가 웃으며 건넨 말에 언제 그랬냐는 듯 풀어졌다.

“야, 골 들어가도 골키퍼는 안 바뀌어.”

맞아, 맞아. 경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야 내가 쟤랑 친해서 많이 아는데, 둘이 좋아서 죽고 못 살아. 아마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었던 애로 아는데…. 음… 고백도 쟤가 먼저 했을걸? 뭐, 자세히는 모르고, 아무튼 애인 있어.”

“아… 괜히 설렜네. 개 빡쳐 왜 저렇게 생겼냐?”

“……여친 예뻐?”

“예, 예쁘….”

경수는 말을 더듬었다. 아무리 그라도 제 입으로 가상의 여자 친구가 예쁘다고 말하기는 망설여졌다. 왜냐하면 그게 본인이었으니까.

“엄청 예쁘진 않나 보네.”

“아냐, 존나 예뻐! 희망 버려! 넘보지 마!”

경수는 작실 중앙 테이블에 걸터앉으며 당부하듯 소리쳤다.

“…반응이 왜 그래? 안 넘봐, 안 넘봐. 그냥 저런 애랑 사귀는 앤 얼마나 예쁜가 해서. 한번 보고 싶다. 나도 예쁜 여자 좋아하는데~”

경수는 양심통을 느꼈다.

“아무튼 남친 후보는 다른 데 가서 찾아봐. 임자 있어….”

그때 작실 문이 열리고 노을이 얼굴을 디밀었다. 그러자 다들 헛기침을 하며 경수 곁에서 떨어져 나갔다. 노을은 전날 술 때문에 휘청이던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말끔한 얼굴로 다가와 경수 앞에 앉았다. 그리고 불만 가득한 얼굴로 속삭였다. 형 인기 많네요…. 물론 노을 탓에 저들에게 시달렸던 경수는 코웃음을 쳤다.

“나 곧 나가야 하는데, 너는?”

“저도 나가요. 그런데… 가끔 시간 빌 때 여기 놀러 와도 돼요?”

그는 경수 대신에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해맑게 물었다. 경수는 위기감을 느꼈다.

“아니, 안….”

“당연히 되지, 커피 사 들고 놀러 와.”

“…….”

동기들은 제게 보여주지 않는 상냥한 얼굴로 노을을 상대했다. 노을이 먼저 말할 건수를 주자, 성별에 관계없이 한 마디씩 어색하게나마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 대화에서 배제된 경수는 쓸쓸하게 다음 강의 프린트를 뽑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

며칠 뒤, 노을과 함께 자연관 앞 잔디밭을 가로질러 가는 데 전화가 걸려왔다. 노을의 뻔 선배인 지혜였다. 노을은 의기양양하게 전화를 받더니 다짜고짜 통보했다.

“선배, 늦었어요. 저 경수 형이랑 밥 먹을 건데요. 선배는 혼자 먹어요! 그럼….”

경수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아냐, 마침 잘 됐네. 같이 먹자! 나 지금 자연관 2층이야. 너희 보이거든? 그런데, 노을이 너 학장 잔디 밟으면….

경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하자 천천히 노을에게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학생들, 뭐 하는 거야! 당장 안 나가!”

“……?”

-아하하! 튀어. 그럴 줄 알았다. 도망쳐서 학생회관 앞으로 와.

노을은 어리둥절하게 경수를 돌아보았다. 경수는 노을을 내버려 두고 먼저 줄행랑을 쳤다. 노을은 한발 늦게 배신감 어린 얼굴로 그 뒤를 따라 달렸다. 그렇게 둘은 잔디밭을 반대로 가로질러 도망쳤다.

경비원이 둘의 뒤를 쫓는 동안, 다른 학생이 이때다 하고 잔디밭을 가로질러 달렸다. 그러자 경비원은 둘을 쫓는 것을 그만두고 새로운 학생을 쫓아 달렸다. 그러자 또 반대쪽에서 다른 학생이 잔디밭에 발을 디뎠다. 경비원은 갈팡질팡했다.

“…왜 저래요.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축제 전까지는 학장 잔디 들어가면 뭐라 해.”

학기 초가 되면 잔디가 이제 막 파릇하게 자란다는 이유로 잔디밭을 밟지 못하게 했다. 학장이 애지중지하는 잔디밭이라며 학장 잔디라는 명칭이 붙었는데, 이렇게 잔디밭에 들어오는 학생이 생기면 자연관 1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비원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빙 둘러 가는 것보다 커다란 잔디밭을 가로질러 가는 게 훨씬 빨랐기 때문에, 이따금씩 위험을 감수하고 경비원을 농락하며 달려가는 이들이 많았다.

“방금 쟤네 하는 거 봤지? 경비 아저씨가 누구 쫓아가면서 멀어지면 잔디밭 들어가면 돼. 그럼 안 걸려. 다 그렇게 해.”

“무슨 그런….”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노을은, 곧 뭔가 깨달았다는 듯 경수를 돌아보며 학교 투어를 시켜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응응, 그래. 경수는 몇 년간 요령을 익혔기에 그의 말을 무시하는 데에는 도가 텄다. 그렇게 둘은 학생회관 앞에서 지혜를 마주칠 수 있었다.

*

당분간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그녀는 노을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하기야 뻔 선배니 노을이 감당하기 힘든 놈인 걸 금방 알아차렸을지도 몰랐다.

“다음에 이거 들어봐. 다른 거 말고 꼭 김정화 교수님으로 들어야 해. 이분 출석 체크 안 하고 나한테 5년 족보 다 있거든? 중간 기말 없고, 쪽지시험 볼 때만 가면 돼.”

“오오….”

지혜는 숨겨진 꿀 교양이라며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아직 아는 사람이 몇 없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경수는 덩달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심드렁해 보이는 것은 노을뿐이었다.

“…선배, 선배가 그걸 형을 왜 줘요?”

“천노을, 닥쳐. 얘가 준다는데 왜 네가 나서?”

“맞아 맞아!”

죽이 척척 맞는 두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노을은 입이 댓 발 나왔다.

“가만 보면 형은 사람 안 가리고 되게 잘해주는 것 같아요….”

노을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뭘?”

“그래, 경수 성격이 좋은데 어떻게 하냐. 너도 뻔 선배인 나한테 좀 잘 해봐.”

“선배 저한테 애정 갈구해요 지금? 죄송한데….”

“윽, 생각해보니 필요 없는 것 같아. …아니 그런데, 노을이 넌 경수 친구들한테만 잘하잖아! 그 정도로만 예쁘게 굴어봐, 좀!”

“……?”

처음 듣는 소리였다. 물론 노을이 제 작실에서 통성명을 한 이들과는 인사를 하고 다니는 것까지는 알았으나, 지혜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정도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확연히 태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노을아.”

“…….”

“너 무슨 속셈이야.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주위 사람들부터 공략해 두려던 의도밖에 없었던 노을은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제가 뭘 했다고… 앗, 형 거 나왔다!”

노을이 반가운 듯 식당 전광판을 가리켰다. 경수는 영 찜찜한 눈초리를 노을에게서 떼지 못한 채 배식대로 발걸음을 향했다. 경수가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 노을은 지혜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녀의 표정에 봄기운이 가득 묻어났다.

“선배, 경수 형 애인 있어요.”

“…응?”

다짜고짜 정곡을 찌르는 노을의 말에 지혜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리고 눈앞에 손을 마구 내저었다.

“야아, 나 그런 것 아니야, 무슨 소리를….”

“선배 맨날 저 어딨냐고 물어보고 다닌 거 다 알아요. 그런데 막상 저 보면 반가워하는 기색도 아니고….”

“그게….”

“그거 다 경수 형 찾던 거잖아요. 맞죠?”

눈을 가늘게 뜬 채, 어쩐지 은근하게 느껴지는 노을의 말투에, 지혜는 아차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노을아, 미안한데 너 질투하니? 누나는 너 같은 만인의 연인 타입은 별로다.”

노을은 그녀의 착각을 바로잡아주는 대신에 타입이란 단어에 꽂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경수 형은 무슨 타입이에요?”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따라 해. 그 성질머리를 어떻게 고치니…. 노을이 너는 환생을 열 번 정도 해야 가능할 거야.”

“무슨 착각을 하시는 거예요, 선배. 저도 애인 있는데요?”

“네가? …그 애인은 보살이라니?

“보살은 아니고 그냥 평범하게 예쁜 사람이에요. 그리고 선배보다 훨씬 착하고 귀여워요. 그리고 또, 전 제 성격을 바꿀 생각 따위 전혀 없어요. 제 애인이 저 성격 보고 좋아하는 거라서요.”

노을은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아… 아무튼 나 좋아하는 건 아니지? 그럼 다행이고.”

그래도 성격은 좀 고쳐봐, 인마…. 지혜는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노을은 은근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꺼냈다.

“하여간 애인이 있는 경수 형은 이제 그만 좋아하셨으면 좋겠어요. 선배를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

노을은 측은한 얼굴로 살짝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형 애인분을 저도 아는데, 엄청 예쁘고 매력 있고 성격도 좋고 돈도 많아요.”

“…….”

“둘이 너어~무 잘 어울려서, 솔직히 가끔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요, 저도. …참, 오늘 아침에도 봤는데, 여전하더라고요. 막 제 앞에서 뽀뽀도 하고 그랬어요.”

“아, 응….”

“다른 건 모르겠고, 경수 형이 그분을 더 좋아해요. 그래서 몇 년째 엄청 안달이거든요, 형이?”

“뭐가 안달이야?”

금세 제자리로 돌아온 경수가 물었다. 노을은 말을 마저 잇기보다는 경수를 올려다보며 방긋 웃었다.

“네 애인 얘기 중이었는데….”

지혜의 말에 경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노을을 돌아보았다. 노을은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멀쩡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이 새끼가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당장 들어야만 했다. 경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물었다.

“뭐, 뭐라고 했는데?”

“그냥 너 사귀는 사람 있다고…. 엄청 예쁘다, 뭐 이런 얘기….”

“…….”

…씨발, 내가 왜 내 입으로 이런 얘기를 해야 하지?

순식간에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실연을 당한 지혜는 똥 씹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별것도 아닌 얘기인데도, 꼴에 애인 얘기가 나왔다고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보니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라고 지혜는 생각했다.

반년 전, 조별로 짜여 수업하는 교양에서 잠깐 봤었던 사람이지만 키도 크고, 보기 드물게 성실하고 성격도 좋은 데다, 무엇보다도 웃는 모습이 그녀에게 취향 적격이었다. 남자답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보니 얼굴도 단정하니 호감이 생겼을 뿐이다.

“별 얘기 안 했어요. 그냥 형 애인 자랑 좀 했어요.”

“……자랑을 왜 해? …무슨 자랑?”

“그냥 되게 예쁘고, 성격 좋고… 형이 그분 엄청 많이 좋아한단 말?”

경수는 손바닥으로 얼굴의 열을 식히다 노을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미, 미친 새끼야…. 그걸… 어떻게 네 입으로….”

“제 말이 틀려요?”

노을은 눈을 휘어 웃으며 되물었다. 경수는 입을 달싹이더니 이내 얼굴까지 빨개져 고개를 작게 저었다.

“…….”

진심을 다해 좋아한 건 아니라 해도, …아무리 봐도 아까웠다. 저런 타입의 남자는 한 번 좋아한 사람은 끝까지 좋아할 것 같은데. 벌써 저 정도로 애인분을 좋아한단 말이야? 도대체 어떤 여자길래…. 지혜는 시무룩하게 잠깐 피어올랐던 풋사랑을 속으로 접었다.

*

「정원: ㅎ경수야ㅎㅎ」

「나: 천노을 스무 살 다른과 아는 동생 닮은 누나 형 동생 없음 커피 안 좋아함 기프티콘 쓸 줄 모름 생일 지남 오래 사귄 여자 친구 있음 여친 예쁨 바람 피울 생각 없다고 함」

「정원: 아 응ㅋㅋㅋㅋㅋㅋ 고마오…!」

「나: ㅇㅇ」

「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미친 얼마나 시달렸으면ㅋㅋㅋㅋ」

「재영: 이 정도면 그냥 공지로 등록해둬도 될 것 같음ㅋㅋㅋㅋㅋ」

「김이혁: 불쌍한 새낔ㅋㅋ 자동이네ㅋㅋㅋㅋㅋㅋ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 ㅡㅡ;;」

단톡방에서 경수의 이름이 불리기만 하면 옆에 같이 다니는 사람이 누군지 묻는 일이 잦았다. 경수는 이제 감흥 없는 얼굴로 천노을의 신상정보를 줄줄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경수는 메신저로 들어가 노을이 보낸 사진 목록에서 그의 시간표를 확인해보았다. 곧 연락이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다시 홈 화면으로 돌아온 경수는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나 내일 수업 몇 시지.’

‘열 시 반, 인문관 330호예요.’

‘…….’

경수는 노을이 듣는 과목을 모조리 암기할 정도로 머리가 좋지는 않았다. 노을의 휴대폰 배경화면은 제 시간표가 아닌 경수의 시간표였다. 심지어 물어보기만 하면 자동 응답기처럼 과목 정보가 툭 튀어나오기도 했다.

점심시간이면 꼭 어디냐며 전화를 걸어오고, 작실을 같이 쓰는 동기들과는 지나가며 인사까지 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경수도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노을의 동기들과 안면을 트고 번호까지 교환했다. 노을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나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툴툴거리는 것뿐이었다.

「김이혁: 근데 우리 과도 아닌데 왜 이리 익숙하냐ㅋㅋㅋ 누가 보면 니네가 사귀는 줄 알 듯ㅋㅋ」

“헉 씨발.”

경수는 기지를 발휘해 답장했다.

「나: 나 걔한테 돈 빚져서 그래ㅎㅎ」

그는 노을을 빚쟁이로 만들었다.

「나: 사실 같이 다니는 게 아니라 걔가 나 감시하는 거임」

「정원: 오잉… 너 빚졋서??」

「나: 응 전에 변제일에 한 번 튀었더니;; 이제 따라붙어서 감시도 하네ㅠ 끈질긴 새끼ㅎㅎ」

「김이혁: ? 김경수 당ㅇ장 돈 갚아 씨발」

「나: 이따 줌;;」

다행히 위기는 잘 넘긴 것 같았다. 경수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고 나서 금세 잊어버렸다. 이후로는 왜 이렇게 자주 붙어 다니냐고 묻는 사람이 사라졌다. 그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형… 저 고민 있어요.”

어느 날, 노을이 식권 끝을 구부러뜨리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경수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뭔데.”

“형 동기들이 요즘 저만 보면 돈 빌려달라 해요…. 왤까요?”

“걔네가? 모형 재료비가 많이 드나? …그래서 빌려줬어?”

“아뇨. 형도 아닌데 왜 빌려줘요, 제가.”

경수는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천노을을 아주 잘 키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거래는 부모 자식 간에도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럼 됐지 뭐. 네가 돈 잘 빌려주게 생겼나 보네.”

너 호구 취급당한 거야. 경수는 노을의 고민을 별것 아니라고 다독이며 흘려 넘겼다.


           


The Dark Mage’s Return to Enlistment

The Dark Mage’s Return to Enlistment

gwihwanhaessneunde ibdae jeonnal-ida I returned, but it was the day before enlistment. 귀환했는데 입대 전날이다
Score 3.3
Status: Ongoing Native Language: Korean

Kim Minjun, who was a normal high school senior in South Korea, was suddenly summoned to another world and became a dark magician.

Minjun, who persevered through all sorts of hardships with the single-minded goal of returning home, saved this other world with his dark magic.

Casting aside a life as a hero and guaranteed riches, he returned to Earth.

Just when he was about to fully enjoy his life, a problem arose. A dungeon break occurred, and monsters began pouring out. Not only did this threaten the peaceful Earth life that Minjun had just returned to… But on his very first day back, he was also ordered to enlist in the mili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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