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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50

149. 약혼관계 – 아비커(avviker)

“받아라. 이거면 국경을 쉽게 넘을 수 있을 거다. 무운을 빈다.”

엘슨이 제법 묵직한 돈 꾸러미와 서류, 용병패 두 개를 건넸다.

그걸 받아든 레오는 배웅해주신 큰아버지께 꾸벅, 인사를 올렸다. 무뚝뚝한 표정의 유안에게도 가볍게 묵례하고는 저택을 떠났다.

성큼성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가는 레오. 한창 엘슨과 유안, 마중 나온 하인 아저씨와 아주머니께 작별인사를 하던 레나는 후다닥 그를 뒤쫓았다.

그런데 그가 가는 방향은 당초에 이야기했던 방향이 아니어서 레나가 물었다.

“레오? 어디 가는 거야?”

“…”

레오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먼 여행길이 될 것이라 두 사람은 제법 무거운 등짐을 지고 있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걸어 나갔다.

막 빠져나온 동문을 돌아보며, 레오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좀 안전하겠지.

며칠 전, 아신의 흔적을 본 이후로 그는 불안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무언가 수작을 부리는 듯한 브리나 자작 정도는 감당할 만했지만, 악신의 사도라면 이야기가 다른 것이었다.

민서가 이런 상황을 맞닥뜨렸다면 어찌 대응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레오 덱스터는 바르나울을 그냥 떠나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떠날 명분도 있었다.

어제저녁, 엘슨이 어떻게 알아 왔는지, 전쟁 때문에 마우닌 대회가 열리지 않게 됐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마우닌 대회를 통해 기사가 되고자 했던 레나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레오에겐 정말이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처음엔 에이브릴 성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려 했다. 그렇지만 레나가 돌아가려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해서 그는 “그럼 우리 아스터 왕국에서 열리는 레티이 대회에 나가자. 이대로 돌아갈 순 없잖아?”라며 레나를 설득했다.

설득은 어렵지 않았다. 레나는 어떻게든 성과를 내어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녀가 너무 이른 나이에 대전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나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녀의 형편없는 사냥 솜씨가 문제였다.

아이나르 부족의 관례상 대전사는 사냥팀을 이끌어야 했다.

그런데 사냥은커녕 덫조차도 제대로 놓을 줄 모르는 사람이 대전사가 되어 버렸으니… 아무리 대전사가 사냥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드물다 할지라도 그런 레나에게 사냥팀을 맡길 수도, 그렇다고 대전사에게 아무런 일도 맡기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골머리를 앓던 아이나르 부족장과 대전사들은 고민 끝에 묘안을 내놓았다. 레나더러 아이나르 부족을 대표해 마우닌 대회에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얄팍한 시간 벌기다. 그걸 레나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 “흥! 그럼 돌아왔을 때의 전 기사가 되어 있을걸요?”

심통이 난 레나는 호언장담했고, 레나의 아버지, 데호르만은 레오에게 슬쩍 귀띔했다. 하다못해 덫 놓는 법이라도 가르쳐 놓고 돌아와 달라고.

“레오옷! 너 자꾸 내 말 무시할 거야? 뭐가 이렇게 급해? 그리고 상단이랑 동행하려면 시장으로 가야지, 왜 밖으로 나온 거야?”

슬슬 짜증이 나는지 레나가 걸음을 멈췄다. 잡아끌리던 손을 반대로 당겨 레오를 멈춰 세웠다.

돌아선 레오는 잠시 우물거리다 답했다.

“…미안해. 아직 레티이 대회까지는 시간상 여유가 있잖아. 그러니까… 음… 우리 천천히 여행하면서 가면 안 될까?”

“여행?”

“그래.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관광도 하고, 맛있는 거 있으면 사 먹기도 하고. 어때?”

레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야 좋긴 한데… 그럼 왜 이렇게 일찍 출발하자고 한 거야? 그럴 거면 돌아가자. 볼거리는 수도에 더 많고, 너희 큰아버지 댁에서 머물면 숙박비도 안 들잖아. 란이랑 앤 언니도 한 번밖에 못 봐서 섭섭했는데 잘됐네.”

타당한 반론이었다. 하지만 저곳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저긴 위험하다.

레오는 엉겁결에 돌아가지 않아도 좋을 핑계를 만들어 뱉었다.

“우리, 큰아버지 댁에서는 방을 같이 쓰기가 좀… 그렇잖아. 보는 눈도 있고.”

“무, 뭐?”

레나의 눈이 똥그래졌다. 봄 햇살에 익어가는 꽃봉오리처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그녀는 이내 시선을 회피했다.

좋은 핑계였다.

하지만 레나가 움찔움찔, 가만히 서서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맞잡은 그녀의 손을 따라 부끄러움이 전염되었다.

한 번 결혼해본 기억이 있어서 내뱉을 수 있는 말이었는데, 기억과 실제는 전혀 달랐다.

“아, 아니 저기, 그게 아니라. 내 말은…”

“…”

두 사람은 커다란 등짐을 맨 채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레나가 고개를 푹 숙이곤 걸어 나가기 시작하고서야 그 대로변을 뜰 수 있었는데…

그녀는 동문을 향하지 않았다.

* * *

레나와 레오는 조금 이른 시간에 숙소를 잡았다.

더블이냐 트윈이냐는 숙소 주인장의 질문에 레오는 망설이다가 더블을 골랐다.

“이쪽입니다.”

뚱뚱한 숙소 주인장이 그들을 안내했다. 바르나울 외곽을 구경하며 진정을 되찾았던 레나는 다시 얼굴을 붉혔고, 레오도 헛기침하며 딴청 피웠다.

이윽고 도착한 방. 침대는 당연히 하나였다.

그런데 좁은 방의 절반을 채운 그 침대에 조금 남사스러운 캐노피(canopy, 침대 위에 장식이나 방충 등을 목적으로 매달거나 고정한 천)가 달려있어서 레나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저희 ‘얼음섬’ 여관은 언제나 최고의 서비스를 보장합니다. 따뜻한 목욕물도 금방 가져다드릴 수 있고, 그 밖에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네, 네에…”

주인장이 사라지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레오는 침대 왼편으로, 레나는 침대 오른편으로 멀찍이 떨어졌다. 각자 짐을 푸는 동안 단 한마디의 말도 오가지 않았다.

짐을 다 풀고 나니 할 것이 없었다. 침대 양쪽에 살그머니 걸터앉은 두 사람은 서로 반대 방향의 벽을 쳐다보았다.

“…아, 진짜!”

결국, 레나가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야! 레오. 우리 술이나 마시자. 이게 무슨 꼴이야. 하면 하는 거지. 약혼까지 한 마당에 부끄러울 게 뭐가 있다고.”

호탕한 척, 부끄러움을 숨기려는 행동이었다. 레오도 쑥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짓궂은 웃음을 지어 본심을 덮어씌웠다.

“그래. 먼저 밥부터 먹고 오자.”

“…!”

레나의 얼굴이 더 이상 붉어지지 못할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은 레오도 어쩔 줄 모르고 고개를 돌렸다.

“그, 그래… 바, 밥부터 먹고…”

휘적휘적, 오른팔과 오른발을 동시에 뻗으며 앞서가는 레나. 그녀를 따라 식당으로 내려온 레오는 술안주가 될만한 저녁 식사와 도수가 높은 술을 주문했다.

“죄송합니다. 보시다시피 지금 손님이 많아서… 요리는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숙소 주인장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의 말마따나 식당에는 남는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옷차림으로 보아 대부분이 야만인 부족 전사들이었는데, 마우닌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수도로 몰려든 이들로 보였다. 매년 초여름에 열리는 마우닌 대회가 개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직 널리 전파되지 않은 것이었다.

레오는 괜찮으니 술부터 달라 말했다. 재빨리 한 통의 ‘칼라도스’를 가져다준 주인장은 서둘러 주방으로 돌아가 일손을 돕기 시작했다.

요리를 기다리며 레나와 레오는 술잔을 통 맞부딪쳤다. “응큼한 놈. 얘가 이런 놈인 줄을 진작에 알았어야 했는데.” ─ 중얼거리며 레나는 비장하게(?) 술을 들이켰다. 레오도 벌컥벌컥, 그녀의 페이스를 따라잡았다.

“호오! 술을 마실 줄 아는 청년들이로구만!”

그때, 옆자리에서 식사 중이던 한 중년의 전사가 말을 걸었다. 레나는 말을 걸어줘서 고맙다는 듯 호기롭게 빈 술잔을 들어 보였다.

레오와 단둘이 마주 보고 있기가 부담스러워서 내심 대화가 이어지기를 바랐는데, 그 전사는 싱긋 웃으며 박수 쳐주고는 제 동료들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우리도 한잔할까?”

“아서. 내일 일찍 떠나야 하는데, 술을 마시면 쓰나.”

“에헤이. 설마 우리 ‘알바세테’ 부족의 대전사께서 숙취를 걱정하시는 겐가? 하하하. 자네도 참 많이 늙었어.”

친구의 도발에 중년의 전사는 훗, 코웃음 쳤다. 상투를 틀고도 남아서 흘러내린 굵직한 모발을 쓸어넘기며 타박했다.

“또, 또. 그놈의 술 때문에 우리가 아직도 수도를 못 벗어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루가 멀다고 술잔치를 벌이면 어쩌자는 게야.”

“뭐 어때? 아직 시간은 많잖아. 마누비울까지 가는데 넉 달이면 충분하지 않나? 그러지 말고 한 잔만 하세. 딱 한 잔이야. 어때 친구들? 다들 괜찮지?”

다른 동료들은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이었다.

장거리 여행을 나오기가 처음인지라 시일에 여유를 두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친구들. 심지어 늦어도 상관없다는 태도여서 그는 에라이, 동의하고 말았다.

“…좋아. 정말로 한 잔일세.”

허나 한 잔으로 시작한 술은 쉽사리 두 잔이 되기 마련이었다. 다섯 전사들은 이내 왁자지껄, 술을 퍼마시기 시작했다.

“주인장도 이리 오시게! 손님들도 다 들어가서 일은 끝난 것 같은데… 같이 한잔하지 않겠어?”

“으허허허허. 좋지요. 하지만 술값은 안 깎아드릴 겁니다.”

“그럼! 주인장 몫까지 내가 사지!”

뚱뚱한 주인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합석했다. 역시나 그의 주량은 놀라울 정도여서 전사들이 혀를 내둘렀다.

“어이구야. 술 다 없어지겠다. 두 통 더 시켜야겠어. 이 친구, 인제 보니 아주 고단수였구만.”

“아~ 그럼. 내가 왜 여태껏 남아 있었겠나. 혹시 불러주지 않을까 싶어서 얼쩡거렸지.”

푸하하하하하! 전사들의 웃음이 텅 빈 식당을 울렸다.

레나와 레오는 여전히 옆자리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그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 방으로 들어갈 텐데, 만취해서 못 볼 꼴을 보이고 싶지도 않아서 서로 눈치 보며 술을 조절하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그런데 말이야. 여기 여관 이름은 누가 지은 건가? 얼음섬 여관이라니, 꼭 저어기 북쪽에 있는 그 얼음섬을 부르는 것 같은걸?”

“하하하하. 그 얼음섬이 맞아. 거기가 내 고향이거든.”

옅은 놀라움이 탁자를 스쳤다.

‘얼음섬’이라는 낯설지 않은 지명에 레나와 레오도 고개를 돌려 숙소 주인장을 바라보았다.

“정말인가? 허어… 그럼 자네는 아비커(avviker) 부족의 생존자였구만. 살아있는 사람이 있는 줄 몰랐어.”

“어라? 자네들은 우리 부족을 아는가? 맞아. 내가 아비커 부족 출신이지. 얼어붙은 바다를 걸어서 탈출한 사람이 바로 나야.”

술기운이 도는지 주인장이 뽐내듯 소매를 걷었다.

중년의 나이임에도 울퉁불퉁한 팔뚝을 자랑하기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팔뚝에 새겨진 문신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기겁한 레오가 번쩍! 검을 뽑았다.

“우왓! 뭐, 뭐야?”

“레오! 무슨 짓이야?!”

술자리가 아수라장이 됐다.

벌떡 일어난 레오는 주인장의 목에 검 끝을 들이밀었고, 깜짝 놀란 전사들은 몸을 튕기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깃대와 깃가지가 붉게 칠해진 검은색의 깃털 문신.

그건 마르하스(MalHas)라는 아주 오래된, 흉(凶)한 아신의 문양이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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