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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53

153화 사자심왕의 대리

베아트리체가 좌표를 탐색해 도약한 공간 너머에는 새하얀 ‘빙하’였다.

“여긴…….”

밟은 땅에서부터 지평선 너머까지 거대한 얼음. 마치 대륙 전체가 얼어붙은 것 같은 광대한 빙하가 펼쳐져 있다.

“놀랍군요. 마치 얼음의 땅…….”

“춥지 않소?”

레온은 심상치 않은 한기에 베아트리체를 걱정했다.

“괜찮답니다. 마술로 체온을 올리면──”

베아트리체는 체온을 올리는 마술을 부렸지만, 그것이 생각보다 미비한 효과임을 깨달았다.

“마술… 마력의 운용에 제약이 있군요. 소모율이 높아진 데다 효과도 구할은 떨어졌어요.”

“짐도 마찬가지네. 성물이 소환되지 않는군. 성법도 제대로 펼쳐지지 않아.”

베아트리체의 표정에 낭패감이 들었다. 자신의 마술과 달리 레온의 성법은 그 격이 다른 힘이다.

그런 힘마저 봉쇄되는 제약이라니? 이곳이 대체 어떤 공간이기에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오해하지 말게. 성법 자체는 사용하려면 할 수 있어. 이른바 가성비가 너무 떨어지게 된다는 걸세.”

“다행이군요. 일단… 다시 돌아가도록 할까요? 저도 모든 마력을 더하면 게이트를 한 번은 열 수 있어요.”

“아니, 돌아간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을 걸세. 이 공간을 얼리는 힘은 성법에 준하는 강력한 힘이야. 외투를 입고 오는 정도로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즉, 이곳은 반드시 이 페널티를 감수하고 탐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체, 그대는 어떤 마술도 사용하지 않고 온존해두게. 여차하면 게이트를 열어야 하니.”

“그래야겠네요. 그보다 폐하…….”

베아트리체는 게이트를 열기 위해 가지고 있던 불카누스의 의식단검을 보였다.

낡은 단검이 이전보다 선명하게 불타고 있다. 내부에서부터 흐르는 용암 같은 불길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불카누스 경과 더 가까워졌군. 그의 단검이 우리를 이끄는 이정표가 될 걸세.”

레온은 베아트리체에게서 단검을 받아들고 보다 빙하의 대륙을 걷기 시작했다,

* * * *

빙하의 대륙은 두 사람에게 갖가지 페널티를 줬다.

‘시공간 동결’이라는 특성 속에서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그저 불카누스의 의식단검이 번뜩이는 방향을 찾아 무작정 걷는 수밖에.

하지만 두 사람을 괴롭히는 건 비단 차가운 얼음대륙뿐만이 아니다.

“얼음 폭풍이에요.”

베아트리체는 벌써 몇 번이나 마주한 눈보라에 혀를 찼다.

이 빙하대륙은 끝없는 이상기후현상으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멸하려 든다.

“…….”

직접 닿지도 않았음에도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 이곳에서 버틸 수 있는 건 극소수의 초인뿐.

“후우…….”

“괜찮나?”

“네… 하지만, 서둘러 피해야겠군요. 죄송해요.”

“그대의 마술을 봉한 것은 짐이다. 스스로를 탓하지 마시게.”

마력을 온존하기 위해 마술을 봉인한 베아트리체는 평범한 여성과 다를 게 없다.

“일단 얼음 폭풍을 피하지.”

방향을 전환해 돌아간다. 꽁꽁 언 빙하의 땅은 걷는 것조차 여의치 않다. 그나마 눈이 쌓이니 잘 미끄러지지 않는 게 위안 삼을만한 일일까?

하지만 걸을 때마다 발목까지 잠기는 눈. 베아트리체에 이르러선 무릎이 잠겨 움직일 수 없을 정도다.

“무례를 용서하시게.”

“폐하…?!”

레온은 그녀를 번쩍 들어 안고 걸어간다. 놀란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뻐금거렸지만, 레온은 개의치 않았다.

“비상시다. 참아주었으면 하는군.”

“저야… 괜찮습니다만, 폐하는…….”

물론 레온이 여인 한 명을 안았다고 해서 체력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긴 하지만.

“짐의 걱정을 하기엔 그대는 깃털처럼 가벼워.”

“후훗, 여인에게 뻔한 이야기 아닌가요?”

“저런. 짐의 언사가 겉치레로 들렸나?”

베아트리체는 그득한 미소를 지으며 레온의 품에 제 몸을 맡겼다.

“아뇨, 제가 가볍기는 하지요.”

“하핫. 의외로 뻔뻔한 말을 태연하게 하는군.”

“논리적인 사실이랍니다.”

평소보다 시시덕거리는 두 사람. 이런 혹독한 환경에서는 말동무라도 있는 것이 위안이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리 그 녀석이라도 데려오는 게 좋았겠어.”

“하리 양의 재능은 뛰어나니까요.”

물론 하리가 할 수 있는 건 레온이 더 잘할 수 있다. 하지만 성력 소비를 최소화하기 위해선 레온 대신 성력을 소모해줄 이가 필요했다.

“재능이 뛰어나긴 하네. 두 분이나 되는 신들이 총애할 정도라면 드문 케이스이긴 하지.”

“만신전에서 새로운 성배기사가 된다면 하리 양이나 소연 양이 될까요?”

문득 궁금했던 사실을 묻는 베아트리체.

만신전에서 성배기사는 전원이 생존자.

레온이야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이나 야피야 지금까지 쌓아올린 업(業)이 영웅을 자처하기에 부족함 없는 생존자들이다.

하지만 레온에게는 더 많은 성배기사들이 필요했다. 라이온하트 왕국 게이트에서 보았던 성배기사들의 숫자는 전성기 라이온하트의 절반조차 되지 않는다든가.

“흠… 두 아이 모두 성배기사로서 부족함 없는 재능이긴 하지.”

“높게 평가하시는군요?”

“재능 있는 자들은 어디에든 있네. 허나, 실제로 이루어내는 자는 적지.”

성배기사로서의 재능. 그 재능도 손꼽아 가려야 할 만큼 극소수이긴 하나, 그중에서도 성배기사로서 인정받는 이들은 더욱 소수다.

“성배기사는 그저 재능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좌가 아니네. 힘과 재능은… 의외로 상관없을 수도 있지.”

레온은 가장 연로한 성배기사를 떠올렸다.

고결하고 충실했던 늙은 기사. 그가 마지막까지 수호한 신념과 신의가 끝내 그를 여신의 기사로 만들었다.

“제레아 경은…….”

레온이 추억을 떠올리려던 찰나, 옅은 숨소리가 가슴께를 타고 올라왔다.

새근새근 잠든 베아트리체는 여러모로 지쳐 보였다.

“서둘러야겠군.”

잠든 베아트리체를 고쳐잡고 레온은 빙하대륙을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 * * *

게이트의 대량발생은 협회와 헌터 길드뿐 아니라 민간인들도 실감할 만큼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미친 우리집 앞에 게이트 생김.

-무슨 색인데?

-노란색!

-별거 아니네. 여긴 주황색임.

-LA 사는데 여기도 난리다. 주 방위군 총출동하고 난리났음.

-터키 여행 왔는데, 관광지 한복판에 게이트 떠서 폐쇄됐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게이트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다. 이는 무언가의 전조처럼 느껴졌다.

“아니, 뭔 바다 한복판에 게이트가 생겼다냐!”

“저거 용궁 아닙니까?!”

목포 앞바다에서 출몰한 게이트에 해경의 경비함들은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어부들을 조기 귀환시키고 조선소에 경고부터 날렸다.

“용궁은 최우선적으로 클리어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거 던전 브레이크 나면 이쪽 바다는 싹 죽습니다!”

“당장 전국에 그 난리가 됐는데 공략대가 파견되려면…….”

3009함장 오 경정은 발만 동동 구르며 수면 위에 드러난 게이트를 응시했다.

당장 공략대의 손이 부족한 상황에서 안 그래도 까다로운 용궁 게이트를 클리어해줄 공략대가 있을까?

“어어? 오 경정님! 레이더 좀 보십시오!”

그때였다. 경비함의 레이더를 살피고 있던 해경이 그에게 보고했다.

“레이더에 움직임 다수 발견했습니다! 중국 어선… 아니, 이거 목포 방향에서 오고 있지 말입니다!”

“어?”

아군 경비함들인가? 아니, 그렇다기엔 레이더에 관측된 크기가 너무 작고 많다.

“거리 100! 90! 70! 아니, 뭐 이리 빨라?!”

경악하는 해경들. 레이더에 관측된 그것들은 쾌속정보다 빠른 속도로 3009함에 다가오고 있다!

“추, 충돌?”

“무장 준비해!”

함장의 지시에 3009함의 40mm 쌍열포와 20mm 발칸이 해당 방향으로 향했다. 하지만 수면 위에는 그 어떤 함정도 없다. 즉, 잠수정이라는 것인데…….

‘한국 한복판에 이만한 잠수정들이 대규모로 운용된다고? 북한인가?’

하지만 북한 잠수함이 어찌 목포 앞바다까지 올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이렇게 대규모로.

최근 북한 쪽 정보가 전혀 안 들어오고 있다지만, 이렇게 느닷없는 공세를 펼칠 이유가 있는가?

“함장님! 발포 허가를…!”

급박해지는 상황 속에서 오 경정은 공격 명력을 내리려 했다. 하지만 그때 오 경정의 뇌리를 스친 무언가가 있었다.

“바, 발포 중지! 손 떼 이것들아!”

오 경정의 다급한 목소리와 거의 동시. 수면 위로 무언가가 올라왔다.

그것은 소형 잠수정이었다. 사람이라면 열 명쯤 탈법한, 한국 해군의 돌고래급 침투 잠수정과 비슷한 500톤급 크기다.

“끼룩!”

잠수정 해치가 열리며 그곳에서 나온 것은 목포에서는 익숙해진 마스코트. 크라샤트리아 족이다.

큼직한 집게발과 특유의 ‘대포갑옷’으로 풀무장한 끼끼룩족 전사는 인간 식으로 경례를 하며 안부를 물었다.

-끼룩! 끼끼룩룩! 끼룩끼룩!

전사의 말은 실시간으로 통역기계로 전해졌다.

“끼끼룩 제1강습상륙대 소속 상급전사 그레이미온 안드류 막시퍼스 클라이젠트임.”

“어, 모, 목포 해안경비대 소속 3009함 함장 오강태 경정이오.”

서로의 소속을 확인한 뒤, 끼끼룩 전사가 말했다.

“목포 해안의 적성세력은 본 부대가 섬멸예정. 위험하니 해당 작전해역에서 물러나기를 권고.”

“그, 그럴 수는 없소! 이곳은 우리 바다이니 우리가… 아니, 그보다 해상작전권도 없이 이렇게 행동하는 건…….”

“구세주. 야크트 스피너 경으로부터 직접 지시. 헌터협회로부터 허가를 맡음. 본관은 헌터협회 공식의 헌터이기도 함. 법적 문제는 없음.”

진짜다. 끼끼룩족 전사가 보여준 헌터층에는 그의 화려하고 위엄 넘치는 이름과 B급 헌터라는 공식인증이 박혀 있었다.

“크흠…! 그럼 본 함은 아직 대피하지 못한 어선 귀환임무로 돌입하겠소. 그레…이미온 상급전사께서는 용궁 게이트를 클리어해주시오.”

“문제없음.”

그러곤 다시 잠수정으로 들어가는 끼끼룩족 전사. 멈춰서 있던 수십 척의 잠수정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후우… 언제 저런 걸 만들었는지.”

“하마터면 쏠 뻔했습니다.”

해경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던 그때였다.

-콰아아아아!

거대한 파도가 3009함을 덮쳤다. 3천톤급의 중형함이 흔들릴 정도로 큼직한 파도였다.

“뭐, 뭐야!?”

“밑에 뭐가 지나간 거야?!”

그들이 그 정체를 깨닫는 건 조금 시간이 지나서였다.

* * * *

한국 헌터협회가 총동원령을 내렸다.

평소 민간길드에 간섭할 수 없다는 이유로 눈치를 보던 헌터협회가 긴급히 10대 길드를 호출한 것은 모두가 이유를 알았다.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님다.”

황금사자 길드장 황금철은 오다가도 자신이 보고 온 게이트의 목격증언을 내놓았다.

“분당에만 게이트 두 개 떴던데 말임다. 저거 누가 잡습니까?”

“경매도 아직 시작 안 했는데, 절차가 복잡하죠.”

헬리콥터를 타고 왔지만, 전국이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란 걸 확인한 이용완이었다. 당장 부길드장인 하유리가 어떤 게이트를 우선적으로 입찰해야 할지 본사에서 고민 중일 정도다.

“다들 오셨군요.”

10대 길드들을 호출한 오강혁 협회장이 피로한 기색으로 입장했다. 그의 뒤로는 야피와 하리가 함께 입장한다.

-뭐야, 사자심왕하고 마술사 여왕은?

-자리를 비웠나?

-다른 게이트 공략중인 거 아냐?

지금까지 만신전의 얼굴마담은 말할 것도 없이 레온이다. 가끔 레온이 바쁠 때면 베아트리체가 대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둘이 보이지 않고 웬 로봇이 대신한다? 지금까지 공적인 자리에서 두문불출하던 야피의 등장은 모두에게 의외였다.

그리고 그런 야피가 태연하게 원탁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고까운 인물도 있다.

“아무리 다문화 다문화 한다지만 기계까지 사람 취급해줘야 하나?”

“김진철 선배!”

상어길드의 김진철. 이 자리에서 가장 거구이자 전신이 문신으로 뒤덮인 위험해 보이는 사내였다.

전직 깡패 출신인 그는 비교적 점잖은 다른 길드장들과 다르게 행동에 거침이 없다.

오강혁 협회장도 만약 레온이 있었다면 김진철이 있는 자리에 그를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 하나 죽어 나가는 꼴은 막아야 하니까.

-끼룩!

그러나 야피는 김진철의 야유에도 불구하고 하리를 좌석에 대신 앉히고는 그 머리 위에 올라섰다.

“회, 회의 때도 이러게요?”

-불만 있음? 유기체?

“끄응…….”

하리는 제 머리 위에 올라탄 야피가 낡은 크리쳐 영화의 괴물 같다고 생각했다. 사람 머리 위에 올라타 사람의 뇌를 조종하는 스릴러물.

-똑바로 서라, 유기체. 시야각 수평유지 경고.

“예옛!”

하리는 냉큼 똑바른 자세로 앉았다.

“힝… 너무해. 나도 이제 S급 헌터고 신들도 두 분이나 모시는 신녀인데…….”

-본기는 성배기사. 법 위에 존재하는 지존임.

“아니, 야피 경? 지존은 폐하 아니세요?”

-지금 폐하 있음?

“……없죠?”

야피는 더 말하지 않고 기계다리로 하리의 뺨을 찰싹 때렸다.

-잘하자.

“……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용완은 생각했다.

‘……인간 시대의 끝이 도래했다.’

저 무시무시한 킬링머신은 사자심왕이 없으면 제어가 안 된다는 걸 실감했다.

“이 새끼들이 지금 날 무시해!”

쾅! 하고 원탁에서 일어나는 거구의 사내. 김진철이 험악한 인상으로 야피와 하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

그 모습을 지켜보는 오강혁. 그는 한숨을 쉬며 모른 척한다.

“흥!”

그것을 암묵적 외면이라고 본 것인지 기세가 등등해진 김진철은 하리의 머리 위에 올라타 있는 야피를 내려다봤다.

“청주의 킬링머신인지 만신전의 성배기사 나부랭이인지 모르겠지만, 기계 주제에 인간님들 있는 곳에서 멋대로 지껄이지 마라. 사람을 데려와!”

“저, 저도 사람인데요?”

조심스럽게 손을 드는 하리에게 김진철이 버럭 소리 질렀다.

“협회 말단은 짜져 있어!”

“으익…!”

S급 헌터의 호통에 움츠러드는 하리. 야피는 그런 하리를 보면서 무엇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카메라 아이가 붉게 빛났다.

“협회장 할배. 이런 장소에 기계가 나서도 되는 거야? 앙?”

“야크트 스피너 경은 충분한 자격을 지니고 있네. 라이온하트 폐하께서 보증하신 일이지.”

오강혁 협회장은 슬쩍 야피를 응시했다. 야피는 뻔히 김진철을 쳐다보고 있었다.

“뭘 꼬나봐? 기계 주제에.”

-고대 유기체의 지적 능력에 어울리는 회화 문단을 조합, 고려 중.

“앙?”

-조합완료. 적절한 문장 완성.

야피의 아이 이모티콘이 어째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김진철을 학습한 것처럼.

-좆밥 새끼 존나 깝치네.

학습을 너무 잘해도 문제였다.


           


Chapter 153

Chapter 153

153화 사자심왕의 대리

베아트리체가 좌표를 탐색해 도약한 공간 너머에는 새하얀 '빙하'였다.

"여긴……."

밟은 땅에서부터 지평선 너머까지 거대한 얼음. 마치 대륙 전체가 얼어붙은 것 같은 광대한 빙하가 펼쳐져 있다.

"놀랍군요. 마치 얼음의 땅……."

"춥지 않소?"

레온은 심상치 않은 한기에 베아트리체를 걱정했다.

"괜찮답니다. 마술로 체온을 올리면──"

베아트리체는 체온을 올리는 마술을 부렸지만, 그것이 생각보다 미비한 효과임을 깨달았다.

"마술… 마력의 운용에 제약이 있군요. 소모율이 높아진 데다 효과도 구할은 떨어졌어요."

"짐도 마찬가지네. 성물이 소환되지 않는군. 성법도 제대로 펼쳐지지 않아."

베아트리체의 표정에 낭패감이 들었다. 자신의 마술과 달리 레온의 성법은 그 격이 다른 힘이다.

그런 힘마저 봉쇄되는 제약이라니? 이곳이 대체 어떤 공간이기에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오해하지 말게. 성법 자체는 사용하려면 할 수 있어. 이른바 가성비가 너무 떨어지게 된다는 걸세."

"다행이군요. 일단… 다시 돌아가도록 할까요? 저도 모든 마력을 더하면 게이트를 한 번은 열 수 있어요."

"아니, 돌아간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을 걸세. 이 공간을 얼리는 힘은 성법에 준하는 강력한 힘이야. 외투를 입고 오는 정도로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즉, 이곳은 반드시 이 페널티를 감수하고 탐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체, 그대는 어떤 마술도 사용하지 않고 온존해두게. 여차하면 게이트를 열어야 하니."

"그래야겠네요. 그보다 폐하……."

베아트리체는 게이트를 열기 위해 가지고 있던 불카누스의 의식단검을 보였다.

낡은 단검이 이전보다 선명하게 불타고 있다. 내부에서부터 흐르는 용암 같은 불길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불카누스 경과 더 가까워졌군. 그의 단검이 우리를 이끄는 이정표가 될 걸세."

레온은 베아트리체에게서 단검을 받아들고 보다 빙하의 대륙을 걷기 시작했다,

* * * *

빙하의 대륙은 두 사람에게 갖가지 페널티를 줬다.

'시공간 동결'이라는 특성 속에서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그저 불카누스의 의식단검이 번뜩이는 방향을 찾아 무작정 걷는 수밖에.

하지만 두 사람을 괴롭히는 건 비단 차가운 얼음대륙뿐만이 아니다.

"얼음 폭풍이에요."

베아트리체는 벌써 몇 번이나 마주한 눈보라에 혀를 찼다.

이 빙하대륙은 끝없는 이상기후현상으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멸하려 든다.

"……."

직접 닿지도 않았음에도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 이곳에서 버틸 수 있는 건 극소수의 초인뿐.

"후우……."

"괜찮나?"

"네… 하지만, 서둘러 피해야겠군요. 죄송해요."

"그대의 마술을 봉한 것은 짐이다. 스스로를 탓하지 마시게."

마력을 온존하기 위해 마술을 봉인한 베아트리체는 평범한 여성과 다를 게 없다.

"일단 얼음 폭풍을 피하지."

방향을 전환해 돌아간다. 꽁꽁 언 빙하의 땅은 걷는 것조차 여의치 않다. 그나마 눈이 쌓이니 잘 미끄러지지 않는 게 위안 삼을만한 일일까?

하지만 걸을 때마다 발목까지 잠기는 눈. 베아트리체에 이르러선 무릎이 잠겨 움직일 수 없을 정도다.

"무례를 용서하시게."

"폐하…?!"

레온은 그녀를 번쩍 들어 안고 걸어간다. 놀란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뻐금거렸지만, 레온은 개의치 않았다.

"비상시다. 참아주었으면 하는군."

"저야… 괜찮습니다만, 폐하는……."

물론 레온이 여인 한 명을 안았다고 해서 체력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긴 하지만.

"짐의 걱정을 하기엔 그대는 깃털처럼 가벼워."

"후훗, 여인에게 뻔한 이야기 아닌가요?"

"저런. 짐의 언사가 겉치레로 들렸나?"

베아트리체는 그득한 미소를 지으며 레온의 품에 제 몸을 맡겼다.

"아뇨, 제가 가볍기는 하지요."

"하핫. 의외로 뻔뻔한 말을 태연하게 하는군."

"논리적인 사실이랍니다."

평소보다 시시덕거리는 두 사람. 이런 혹독한 환경에서는 말동무라도 있는 것이 위안이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리 그 녀석이라도 데려오는 게 좋았겠어."

"하리 양의 재능은 뛰어나니까요."

물론 하리가 할 수 있는 건 레온이 더 잘할 수 있다. 하지만 성력 소비를 최소화하기 위해선 레온 대신 성력을 소모해줄 이가 필요했다.

"재능이 뛰어나긴 하네. 두 분이나 되는 신들이 총애할 정도라면 드문 케이스이긴 하지."

"만신전에서 새로운 성배기사가 된다면 하리 양이나 소연 양이 될까요?"

문득 궁금했던 사실을 묻는 베아트리체.

만신전에서 성배기사는 전원이 생존자.

레온이야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이나 야피야 지금까지 쌓아올린 업(業)이 영웅을 자처하기에 부족함 없는 생존자들이다.

하지만 레온에게는 더 많은 성배기사들이 필요했다. 라이온하트 왕국 게이트에서 보았던 성배기사들의 숫자는 전성기 라이온하트의 절반조차 되지 않는다든가.

"흠… 두 아이 모두 성배기사로서 부족함 없는 재능이긴 하지."

"높게 평가하시는군요?"

"재능 있는 자들은 어디에든 있네. 허나, 실제로 이루어내는 자는 적지."

성배기사로서의 재능. 그 재능도 손꼽아 가려야 할 만큼 극소수이긴 하나, 그중에서도 성배기사로서 인정받는 이들은 더욱 소수다.

"성배기사는 그저 재능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좌가 아니네. 힘과 재능은… 의외로 상관없을 수도 있지."

레온은 가장 연로한 성배기사를 떠올렸다.

고결하고 충실했던 늙은 기사. 그가 마지막까지 수호한 신념과 신의가 끝내 그를 여신의 기사로 만들었다.

"제레아 경은……."

레온이 추억을 떠올리려던 찰나, 옅은 숨소리가 가슴께를 타고 올라왔다.

새근새근 잠든 베아트리체는 여러모로 지쳐 보였다.

"서둘러야겠군."

잠든 베아트리체를 고쳐잡고 레온은 빙하대륙을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 * * *

게이트의 대량발생은 협회와 헌터 길드뿐 아니라 민간인들도 실감할 만큼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미친 우리집 앞에 게이트 생김.

-무슨 색인데?

-노란색!

-별거 아니네. 여긴 주황색임.

-LA 사는데 여기도 난리다. 주 방위군 총출동하고 난리났음.

-터키 여행 왔는데, 관광지 한복판에 게이트 떠서 폐쇄됐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게이트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다. 이는 무언가의 전조처럼 느껴졌다.

"아니, 뭔 바다 한복판에 게이트가 생겼다냐!"

"저거 용궁 아닙니까?!"

목포 앞바다에서 출몰한 게이트에 해경의 경비함들은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어부들을 조기 귀환시키고 조선소에 경고부터 날렸다.

"용궁은 최우선적으로 클리어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거 던전 브레이크 나면 이쪽 바다는 싹 죽습니다!"

"당장 전국에 그 난리가 됐는데 공략대가 파견되려면……."

3009함장 오 경정은 발만 동동 구르며 수면 위에 드러난 게이트를 응시했다.

당장 공략대의 손이 부족한 상황에서 안 그래도 까다로운 용궁 게이트를 클리어해줄 공략대가 있을까?

"어어? 오 경정님! 레이더 좀 보십시오!"

그때였다. 경비함의 레이더를 살피고 있던 해경이 그에게 보고했다.

"레이더에 움직임 다수 발견했습니다! 중국 어선… 아니, 이거 목포 방향에서 오고 있지 말입니다!"

"어?"

아군 경비함들인가? 아니, 그렇다기엔 레이더에 관측된 크기가 너무 작고 많다.

"거리 100! 90! 70! 아니, 뭐 이리 빨라?!"

경악하는 해경들. 레이더에 관측된 그것들은 쾌속정보다 빠른 속도로 3009함에 다가오고 있다!

"추, 충돌?"

"무장 준비해!"

함장의 지시에 3009함의 40mm 쌍열포와 20mm 발칸이 해당 방향으로 향했다. 하지만 수면 위에는 그 어떤 함정도 없다. 즉, 잠수정이라는 것인데…….

'한국 한복판에 이만한 잠수정들이 대규모로 운용된다고? 북한인가?'

하지만 북한 잠수함이 어찌 목포 앞바다까지 올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이렇게 대규모로.

최근 북한 쪽 정보가 전혀 안 들어오고 있다지만, 이렇게 느닷없는 공세를 펼칠 이유가 있는가?

"함장님! 발포 허가를…!"

급박해지는 상황 속에서 오 경정은 공격 명력을 내리려 했다. 하지만 그때 오 경정의 뇌리를 스친 무언가가 있었다.

"바, 발포 중지! 손 떼 이것들아!"

오 경정의 다급한 목소리와 거의 동시. 수면 위로 무언가가 올라왔다.

그것은 소형 잠수정이었다. 사람이라면 열 명쯤 탈법한, 한국 해군의 돌고래급 침투 잠수정과 비슷한 500톤급 크기다.

"끼룩!"

잠수정 해치가 열리며 그곳에서 나온 것은 목포에서는 익숙해진 마스코트. 크라샤트리아 족이다.

큼직한 집게발과 특유의 '대포갑옷'으로 풀무장한 끼끼룩족 전사는 인간 식으로 경례를 하며 안부를 물었다.

-끼룩! 끼끼룩룩! 끼룩끼룩!

전사의 말은 실시간으로 통역기계로 전해졌다.

"끼끼룩 제1강습상륙대 소속 상급전사 그레이미온 안드류 막시퍼스 클라이젠트임."

"어, 모, 목포 해안경비대 소속 3009함 함장 오강태 경정이오."

서로의 소속을 확인한 뒤, 끼끼룩 전사가 말했다.

"목포 해안의 적성세력은 본 부대가 섬멸예정. 위험하니 해당 작전해역에서 물러나기를 권고."

"그, 그럴 수는 없소! 이곳은 우리 바다이니 우리가… 아니, 그보다 해상작전권도 없이 이렇게 행동하는 건……."

"구세주. 야크트 스피너 경으로부터 직접 지시. 헌터협회로부터 허가를 맡음. 본관은 헌터협회 공식의 헌터이기도 함. 법적 문제는 없음."

진짜다. 끼끼룩족 전사가 보여준 헌터층에는 그의 화려하고 위엄 넘치는 이름과 B급 헌터라는 공식인증이 박혀 있었다.

"크흠…! 그럼 본 함은 아직 대피하지 못한 어선 귀환임무로 돌입하겠소. 그레…이미온 상급전사께서는 용궁 게이트를 클리어해주시오."

"문제없음."

그러곤 다시 잠수정으로 들어가는 끼끼룩족 전사. 멈춰서 있던 수십 척의 잠수정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후우… 언제 저런 걸 만들었는지."

"하마터면 쏠 뻔했습니다."

해경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던 그때였다.

-콰아아아아!

거대한 파도가 3009함을 덮쳤다. 3천톤급의 중형함이 흔들릴 정도로 큼직한 파도였다.

"뭐, 뭐야!?"

"밑에 뭐가 지나간 거야?!"

그들이 그 정체를 깨닫는 건 조금 시간이 지나서였다.

* * * *

한국 헌터협회가 총동원령을 내렸다.

평소 민간길드에 간섭할 수 없다는 이유로 눈치를 보던 헌터협회가 긴급히 10대 길드를 호출한 것은 모두가 이유를 알았다.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님다."

황금사자 길드장 황금철은 오다가도 자신이 보고 온 게이트의 목격증언을 내놓았다.

"분당에만 게이트 두 개 떴던데 말임다. 저거 누가 잡습니까?"

"경매도 아직 시작 안 했는데, 절차가 복잡하죠."

헬리콥터를 타고 왔지만, 전국이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란 걸 확인한 이용완이었다. 당장 부길드장인 하유리가 어떤 게이트를 우선적으로 입찰해야 할지 본사에서 고민 중일 정도다.

"다들 오셨군요."

10대 길드들을 호출한 오강혁 협회장이 피로한 기색으로 입장했다. 그의 뒤로는 야피와 하리가 함께 입장한다.

-뭐야, 사자심왕하고 마술사 여왕은?

-자리를 비웠나?

-다른 게이트 공략중인 거 아냐?

지금까지 만신전의 얼굴마담은 말할 것도 없이 레온이다. 가끔 레온이 바쁠 때면 베아트리체가 대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둘이 보이지 않고 웬 로봇이 대신한다? 지금까지 공적인 자리에서 두문불출하던 야피의 등장은 모두에게 의외였다.

그리고 그런 야피가 태연하게 원탁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고까운 인물도 있다.

"아무리 다문화 다문화 한다지만 기계까지 사람 취급해줘야 하나?"

"김진철 선배!"

상어길드의 김진철. 이 자리에서 가장 거구이자 전신이 문신으로 뒤덮인 위험해 보이는 사내였다.

전직 깡패 출신인 그는 비교적 점잖은 다른 길드장들과 다르게 행동에 거침이 없다.

오강혁 협회장도 만약 레온이 있었다면 김진철이 있는 자리에 그를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 하나 죽어 나가는 꼴은 막아야 하니까.

-끼룩!

그러나 야피는 김진철의 야유에도 불구하고 하리를 좌석에 대신 앉히고는 그 머리 위에 올라섰다.

"회, 회의 때도 이러게요?"

-불만 있음? 유기체?

"끄응……."

하리는 제 머리 위에 올라탄 야피가 낡은 크리쳐 영화의 괴물 같다고 생각했다. 사람 머리 위에 올라타 사람의 뇌를 조종하는 스릴러물.

-똑바로 서라, 유기체. 시야각 수평유지 경고.

"예옛!"

하리는 냉큼 똑바른 자세로 앉았다.

"힝… 너무해. 나도 이제 S급 헌터고 신들도 두 분이나 모시는 신녀인데……."

-본기는 성배기사. 법 위에 존재하는 지존임.

"아니, 야피 경? 지존은 폐하 아니세요?"

-지금 폐하 있음?

"……없죠?"

야피는 더 말하지 않고 기계다리로 하리의 뺨을 찰싹 때렸다.

-잘하자.

"……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용완은 생각했다.

'……인간 시대의 끝이 도래했다.'

저 무시무시한 킬링머신은 사자심왕이 없으면 제어가 안 된다는 걸 실감했다.

"이 새끼들이 지금 날 무시해!"

쾅! 하고 원탁에서 일어나는 거구의 사내. 김진철이 험악한 인상으로 야피와 하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

그 모습을 지켜보는 오강혁. 그는 한숨을 쉬며 모른 척한다.

"흥!"

그것을 암묵적 외면이라고 본 것인지 기세가 등등해진 김진철은 하리의 머리 위에 올라타 있는 야피를 내려다봤다.

"청주의 킬링머신인지 만신전의 성배기사 나부랭이인지 모르겠지만, 기계 주제에 인간님들 있는 곳에서 멋대로 지껄이지 마라. 사람을 데려와!"

"저, 저도 사람인데요?"

조심스럽게 손을 드는 하리에게 김진철이 버럭 소리 질렀다.

"협회 말단은 짜져 있어!"

"으익…!"

S급 헌터의 호통에 움츠러드는 하리. 야피는 그런 하리를 보면서 무엇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카메라 아이가 붉게 빛났다.

"협회장 할배. 이런 장소에 기계가 나서도 되는 거야? 앙?"

"야크트 스피너 경은 충분한 자격을 지니고 있네. 라이온하트 폐하께서 보증하신 일이지."

오강혁 협회장은 슬쩍 야피를 응시했다. 야피는 뻔히 김진철을 쳐다보고 있었다.

"뭘 꼬나봐? 기계 주제에."

-고대 유기체의 지적 능력에 어울리는 회화 문단을 조합, 고려 중.

"앙?"

-조합완료. 적절한 문장 완성.

야피의 아이 이모티콘이 어째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김진철을 학습한 것처럼.

-좆밥 새끼 존나 깝치네.

학습을 너무 잘해도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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