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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55

155화 옆자리

적이 몰려온다.

적의 이름은 악마다.

그들이 노래하는 건 끝없는 쾌락이며, 그들이 바라는 건 밑바닥이 없는 타락이다.

“여왕님! 제가 이곳을 지키겠습니다!”

장군이 말했다. 그가 이끄는 결사대가 외쳤다.

익숙한 풍경이다.

밀리고 밀리는 전선, 아군 부대의 퇴각. 본대를 온존하기 위해 방어선을 사수하는 결사의 부대들.

희생을 자처하고, 희생을 명령하고, 희생을 지켜보며 저항군은 계속해서 후퇴한다.

“이 전쟁은… 언제 끝나는 거지?”

그녀의 탄식에 장담할 수 있는 신하들은 없었다.

적은 죽지 않는다.

죽여도 부활해 다시 돌아온다.

그들에게 물질적인 육신은 마력으로 움직이는 골렘과 다를 게 없다.

결사대를 조직해 데몬 게이트 하나를 부숴도 새로운 데몬 게이트에서 악마들이 쏟아져나온다.

숱한 왕국과 도시들이 멸망 당하고 끝내 마지막 남은 도시에서 그녀에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여왕이여, 나와 거래를 하자.]

타락의 정수를 심고 백 년을 버텨낸다면 끝이 없는 전쟁을 끝내고 물러나겠다는 약조.

방법이 없기에 그것을 받아들였고 그간 자신들을 막아선 여왕에게 복수하듯 가혹한 백 년이 시작되었다.

「짐은 사자심왕이다.」

그 남자가 나타나기 전까지.

* * * *

스페로 왕국의 마술사 여왕.

그 드높은 이름과 권위에 어울리지 않게 베아트리체는 아웃도어에 익숙한 사람이다.

왕국의 최고전력으로서, 야전 사령관으로서 즉위 이후 대부분의 삶을 전장에서 보냈다.

파리와 모기가 들끓는 여름 늪지대에서도, 말이 얼어 죽는 혹한의 설원에서도.

야전과 야영을 반복하며 쌓아온 경험은 그녀에게 대체로 대부분의 환경을 견디게 만들었다.

물론 왕국의 얼굴이자, 악마 저항군의 상징적 존재인 그녀는 항상 용모를 깔끔히 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제약이 있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는 그 품위를 지키는 데 실패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으음…….”

눈을 뜬 베아트리체는 드물게 낭패감이 짙은 표정이었다.

무심코 잠들고 말았다. 혹한 속에서 잠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면서도!

하지만 그녀를 반긴 건 설원의 차가운 냉기가 아니라 안온한 온기였다.

“일어났나.”

“폐하?”

레온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타오르는 불길을 맨손으로 저미며 ‘굴’ 가운데를 녹이고 있었다.

장작이 될 만한 나뭇가지 하나 없는 곳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말할 필요도 없이 페토스 신의 불꽃이다.

“눈굴을 팠네. 잠시 쉬어갈 필요가 있으니 말이야.”

베아트리체는 레온 앞에서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에 얼굴을 붉혔다. 그런 그녀에게 웃으면서 성배를 건네는 레온.

“성수일세. 목을 축이게나.”

“이 귀한 것을…….”

성력만 있으면 생성되는 게 성수라지만, 레온은 성력을 조금이라도 아껴야 할 입장이었다. 자신이 마력을 온존하는 것처럼.

그런 생각을 읽었는지, 레온은 걱정 말라는 듯 안심시킨다.

“이 정도는 괜찮네. 필요한 지출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럼… 사양 않겠습니다.”

성배를 받아드는 베아트리체. 이 성배를 완성하기 위해 한 고생을 생각하면 신줏단지에 모셔두어야겠지만, 지금은 그녀의 목을 축이기 위한 물잔일 뿐이다.

쪼르륵, 목덜미로 넘기는 성수의 기운이 따뜻하다. 베아트리체는 새침한 표정으로 레온을 보았다.

“저… 폐하.”

“왜 그러지?”

“제가… 무언가 실례를 저지르진 않았는지.”

“별 내용 없었네. 옛 기억이 떠오르던 모양이더군.”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따금 그녀는 과거의 꿈을 꾼다. 찬란한 영광의 시절. 그 영광의 시대가 몰락해가는 악몽을.

그것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시간이었다.

“부끄러워할 것 없네. 누군들 안 그러겠나.”

“폐하?”

레온은 쓴웃음을 지으며 솔직히 고백했다.

“과거의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지. 돌아가고 싶은 미몽일세.”

“…….”

베아트리체는 입을 꾹 다물고 레온의 이야기에 공감했다.

그녀는 레온의 과거를 안다. 그가 사랑하고 아꼈던 사람들을 잃고, 끝내 마지막까지 싸워왔다는 걸.

모두가 죽고 홀로 남았을 때, 그가 느꼈을 상실감은 얼마나 컸을까?

그 아픔에 그나마 공감할 수 있는 건 온 세상에 자신뿐이리라. 반대로 자신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이 또한…….

“잠시 쉬어갈 생각이네. 좀 더 쉬시게.”

“네…….”

제법 넉넉한 눈굴 속에서 베아트리체는 몸을 끌어안다 자신이 지금까지 무언가를 덮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폐하, 이건?”

“지구에서 우연이 얻게 된 기사의 망토일세. 그 명예로운 기사에게서 받은 선물이지.”

그것은 레온이 명예롭게 성불시켰던 목 없는 기사의 망토였다. 레온이 기념으로 소유하고 있던 망토를 아공간에서 꺼내 덮어준 모양이다.

“폐하는…….”

자신이 망토를 덮고 있으니 레온은 맨몸으로 눈굴에 앉아있는 셈이다. 그러나 레온은 개의치 않은 듯 말했다.

“짐은 괜찮네. 기사이지 않나.”

베아트리체는 문득 대장군 리카르도 번즈가 떠올랐다.

스스로 데스나이트가 되어가면서까지 여왕을 보필하려고 했던 망국의 기사. 그들의 어리석은 충정을 베아트리체는 보답할 수 없었다.

“기사들이란 다들 그런 모양이죠?”

“그리 배웠으니 말이야.”

레온은 대공가에서 태어나 기사도를 철저하게 교육받았다. 남녀가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법을 알았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기사의 의무일세.”

“의무….”

그 끝없는 희생을 과연 의무란 말로 감내할 수 있는 것일까?

적어도 대장군 리카르도 번즈와 그 기사들은, 라이온하트 왕국의 사자심왕은 권리보다도 더 큰 의무를 짊어지던 사람들이다.

“폐하.”

베아트리체는 슬쩍 망토를 들어 올리더니 그 안의 빈공간을 보였다.

“공간이 많이 남습니다. 들어오세요.”

“크흠… 그대의 뜻은 알겠으나…….”

한 망토를 덮으면 자연스럽게 피부를 밀착할 수밖에 없다. 레온은 그것이 레이디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베아트리체는 레온을 내버려 두고 혼자 망토를 덮는 것이야말로 예의가 아니라 여겼고. 무엇보다──

“어서요. 저를 창피하게 만드실 작정이신가요?”

다소 노골적인, 여왕으로선 상당한 각오를 다진 유혹이다.

“레이디에게… 창피를 줄 순 없지.”

레온은 조심스럽게 망토 안으로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살과 살이 밀착한다.

“불편하진 않소?”

“불편하기는요. 더 따뜻해서 좋은걸요.”

레온의 어깨에 기대는 베아트리체. 그녀의 돌발행동에 레온은 드물게 당황했다.

“비체…….”

“이 정도는 허락해주세요. 더 많이는… 바라지 않을 테니.”

“…….”

레온은 말없이 제 어깨를 내어주었다. 그의 옆자리는 오랫동안 비어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새근새근 잠든 베아트리체의 무방비한 모습을 지켜보는 레온.

[레온아, 나의 기사야.]

아리아나의 음성이 레온을 향해 내려졌다.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드물게 레온이 이를 거부했고. 하지만 빛과 정의는 빗발치는 말을 이어나갔다.

[네 여신이 간곡히 바라는 바이다. 언제쯤이면 새 사랑을 하겠느냐.]

여신의 말에 레온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때가 아니라 말했지만, 신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아니, 우리 하리도 어떤가? 참하고 순수한 것이 좋은 부인이 될 것이야.]

포마의 음성에 플르가 바로 면박을 주었다.

[바다는 그 입 다물라. 이번에는 꿈과 죽음의 차례이니. 다음 왕비의 자리는 본녀의 신관장 몫이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잘도 지껄이는군.]

[무엇이 전쟁! 네가 본녀를 능멸하는가!]

눈굴 속의 불길에서 페토스가 한 마디 거들자 플르의 눈빛이 회까닥 돌았다. 그 와중에 한마디 거드는 복수의 신.

[복수자는, 같은 복수자끼리 맺어지는 것이 옳지. 모티베이션이라는 것이다.]

[어둠은 기껏 내놓는 왕비 후보자가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더냐?]

[바다와 전쟁의 신녀와 한 살 차이다. 전쟁.]

[인간들은 그 한 살을 매우 중요시 여기지.]

은근슬쩍 벤타시스까지 끼자 레온은 이마를 짚었다. 그와중에 빛과 정의의 여신은 여유롭다.

[후후, 내 기사로다. 본 여신의 아들이로다. 며느릿감은 내가 정한다.]

“여신이시여… 제 어머니는 둘뿐이옵니다만.”

고아였지만, 지구에서 한 명. 라이온하트의 대공비 한 명. 여신은 숭배의 대상이나 어머니라기에는 좀…….

[세 번째 어미로 하자꾸나.]

“감읍할 따름입니다.”

레온은 제 옆에서 새근새근 잠든 여인의 머리카락을 꼼지락거렸다. 젊고 아름다운 여인. 제게 크나큰 호의를 가진 그녀는 신들의 마음에도 든 모양이다.

[카스티야를 아직 잊지 못하겠더냐.]

“…….”

레온은 쓴웃음을 지으며 제 오랜 사랑을 떠올렸다.

달과 순결의 여신을 섬기던 신관을, 납거하듯 낚아채 사랑을 속삭였다. 분노한 순결의 여신을 달래기 위해 시련을 받아야만 했다.

그토록 어렵게 맺어진 사랑이었기에, 레온은 아내를 애지중지하며 가정을 지켜왔다.

이제는 그녀가 죽고 신들의 품으로 향하였다 하여 새 여인을 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레온아. 내 기사야. 너의 삶은 평범한 여인들과는 함께하기 어렵다. 지고지순한 너의 마음은 그 아이에게도 기쁜 것이나 너의 지친 심신과 해소되지 않는 열락은 어찌할 것이냐.]

아리아나… 그녀는 물론이고 신들은 이 우직한 사자심왕을 걱정했다.

신들조차도 영겁을 살며 인간과의 열락을 공유하고 불같은 사랑을 하기도 한다.

신들이 그러할진대 레온은 너무 오랫동안 자신의 순정을 지켜오기만 했다.

해소되지 않는 열락을 간직하며 오직 피비린내 나는 악마사냥을 반복해온 것이다.

신들이 보기에 레온의 한계는 진작 찾아 왔어야 마땅했다.

[또한 너에게는 의무가 있을 것이다. 라이온하트의 살아있는 유일한 인간으로서. 그 혈통을 생육하고 번성케 할 의무가.]

“…….”

여전히 대답하지 못하는 레온의 뺨을 흘기며 여신이 웃었다.

[별 같이 빛나는 사랑을 하거라, 레온. 너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이다.]

레온은 제 어깨에 몸을 맡긴 채 지친 몸을 뉘인 여왕을 흘겨보았다.

그는 여전히 젊고 건강하다. 여인을 안은 지도 이백 년이 흘렀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

오랜 기억을 떠올린다. 제 사랑의 결실은, 마지막을 좋게 끝내지 못한 그 아이가 살아있다는 희망만으로.

‘경거망동할 수는 없는 노릇이야.’

그러니까 지금은 그저. 참고 인내할 수밖에.

옆자리의 레이디가 춥지 않도록 망토를 고쳐 덮어준다. 혹독한 빙하대륙에서도 맞닿은 여인의 피부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 * * *

“반응이 점점 더 강해지는군요.”

얼마나 탐사를 계속했을까. 베아트리체는 단검의 불길이 점차 선명해지는 방향으로 레온을 이끌었다.

“비체, 주변에 다른 생물은 없는 듯하네.”

며칠째의 탐사 과정에서 두 사람은 이 혹한의 땅에 악마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하긴, 레온이나 베아트리체 정도는 되어야 견뎌내는 이 땅에서 어지간한 악마들은 접근과 동시에 동사할 테니.

“빙하의 악마들은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말이지.”

“나태와 우둔의 악마들 말이지요?”

“그중에서도 차가운 냉기를 품은 악마들이 있네. 꽤 성가신 족속들이지만… 신의 불꽃에 비할 바는 못 되지.”

란돌체 평야의 회전에서 불카누스는 기사단을 이끌고 그들을 격멸했다.

전황은 가히 압도적. 끝내 그들이 악마 군단을 격퇴했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카누스 경과 그 기사단이 실종된 것은 의아한 일이네. 하지만 이곳에 와서 보아하니 불가한 일은 아닌 것 같군.”

이토록 차갑고 시린 대륙이라니. 가히 법칙에 준하는 싸늘함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확신이 드는군. 불카누스 경은 이 대륙에 살아있을 것이라고.”

“콜드슬립… 이라는 거겠죠? 아, 폐하의 세계에서는 이론이…….”

“야피 경한테 들어 대충은 알고 있네.”

레온의 세계에선 거기까지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구인이었던 시절 어렴풋이 들었던 이야기라 아예 생소한 이론은 아니다.

“그들은 신의 기사들이지. 시공간조차 동결한 이 세계에서도 능히 살아남았을 것── 비체.”

그때였다. 레온이 베아트리체를 멈춰 세우고 무언가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페토스시여.”

[그래, 느껴진다. 이토록 가까이 가서야 겨우 찾을 수 있었군.]

전쟁과 불꽃의 신 페토스는 레온과 같은 감각을 공유했다. 그의 타오르는 불길이 레온의 전신을 통해 흘러나온다.

“저곳이네. 저곳에 누군가가 있군.”

두 사람은 서둘러 감각으로 느껴지는 방향을 향했다. 그리고 가까이 갈수록 불카누스의 의식단검에 선명한 불길이 흐른다.

“거대한… 빙하뿐이군요.”

도착한 곳에는 거대하게 우뚝 선 빙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눈과 얼음으로 꽝꽝 얼어붙은 빙벽은 바위가 깎여나간 절벽보다도 단단하고 거대하다.

그 아득한 빙벽을 향해 레온이 앞으로 나섰다.

“잠시 물러나게.”

레온은 성창을 꺼냈다. 페토스의 불꽃이 창끝을 중심으로 맹렬하게 회전한다.

나선의 불꽃은 빙벽과 닿는 순간 빙벽을 녹여버리며 차차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앞으로 나아갔을까? 녹아내린 빙벽의 얼음물이 신성의 불꽃에 의해 증발하며 막대한 스팀을 쏟아내기를 여러 번.

“찾았네!”

레온은 익숙한 갑옷을 발견했다. 그것은 불카누스가 아니었으나──

투구부터 갑옷, 말이 찬 마갑까지 새빨간 기사.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영광의 기사단을 상징하는 부대의 깃발까지.

“폐하, 이들은?”

“발탄의 불타는 검 기사단. 전쟁과 불꽃의 성배기사 불카누스 경의 직속 성배 기사단일세.”

빙벽 안에는 무수한 기사들이 얼어붙은 채 박제되어 있었다.


           


The Knight King Who Returned with a God

The Knight King Who Returned with a God

singwahamkke dol-aon gisawangnim, The King of Knights Returns with the Gods, 신과함께 돌아온 기사왕님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I returned to Earth as the invincible Knight King. But the Gods came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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