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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56

156화 발탄의 불타는 검 기사단

라이온하트와의 대전쟁에서 악마들은 끔찍한 피해를 입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군주를 잃은 살육과 파괴, 지혜와 탐구, 쾌락과 타락, 혼돈과 파멸의 악마들.

특히 지혜와 탐구의 악마들은 왕국군과의 전면전에서 대공을 비롯한 최고위 대악마 대부분을 잃은 것이다.

그 전쟁에서 악마들은 누구나 군주 또는 대공을 잃었다. 그중에서도 나태와 우둔의 대악마들은 미묘한 처지에 가깝다.

그들은 군주를 잃지도, 대공을 잃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잃지는 않았다.

“벨로타스님…!”

나태와 우둔의 악마대공 카드샤의 영지 앞 관측기지. 그곳의 수장을 맡으며 빙하대륙을 관측하는 나태의 대악마는 얼음 관측자 벨타타의 다급한 보고에 눈을 떴다.

“말해…….”

귀지를 파면서 비대한 몸통을 쿰척쿰척 움직이는 벨로타스. 나태의 대악마답게 그는 세상 무료한 표정으로 벨타타를 응시했다.

이곳 빙하대륙 관측기지는 태생이 나태하고 게으른 악마들의 시간 때우기용 기지다.

이백여 년 전, 이곳에서 나태와 우둔의 악마대공 카드샤가 그들과 공멸한 뒤, 그 봉인을 지키라는 명목상의 기지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백여 년 전의 사건 이후 악마조차도 살지 못하는 불모지가 되었으나 마계 한복판에 있는 빙하대륙에서 누가 그곳에서 작당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악마들이야 서로 못 믿는 족속들이라지만, 저 안에 있는 것은 악마의 천적 같은 존재다.

모든 악마를 파멸시키는 방사능 덩어리나 마찬가지인데, 누가 그것을──

“빙하대륙 내부에 에너지가 관측됐습니다! 제0파멸원소입니다!”

“흐음…!”

느릿한 반응을 보이던 벨로타스가 드물게 비대한 몸체를 움직였다.

“봉인이 풀렸나?”

“그,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카드샤 님의 마력반응이 아직 깨어나지 않았으니까요!”

그건 다행이었다. 놈과 함께 묻혀있는 빙하대공이 깨어나지 않았다면 최악의 사태는 아니다.

“카드샤 님의 마법이 느슨해진 건가.”

빙하대공 카드샤가 대륙을 얼어붙게 하는 대마법을 펼친지도 200여 년.

지혜와 탐구의 악마들은 이론상 천 년은 갈 봉인이라고 했건만 어찌 벌써 봉인이 풀리기 시작한단 말인가!

“크, 큰일입니다. 그, 그 남자가… 그 괴물이 풀려난다면…!”

그날이 재현된다.

끔찍한 살육의 날.

하늘에서 불꽃과 함께 떨어진 그 남자에 의해──

“너는 먼저 특전대를 이끌고 가라. 나는 동원할 수 있는 군단을 이끌고 곧장 향하겠다.”

대살육.

벨로타스는 옆구리의 화상을 움켜쥐며 트라우마를 떠올렸다.

* * * *

“이들이 성배 기사단이로군요.”

“발탄 불타는 검 기사단. 그들이 틀림없소.”

레온이 성창의 불꽃을 얼음벽에 내다 꽂았다.

“지금부터 이들부터 구출하겠네.”

신성의 불꽃은 신성의 신도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 불꽃이 녹여내는 건 오직 그를 가둔 얼음 덩어리뿐.

-솨아아아아!!

막대한 스팀이 뿜어져 나오며 빙벽이 녹아간다. 쩌저적 하고 갈라지는 빙벽에서 기사가 떨어져 나왔다.

-쿵!

바닥에 처박히기 직전, 레온이 받아주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착지하는 기사와 말. 가히 본능적인 움직임. 그가 정신을 차린 건 수초 뒤였다.

“흡…!”

투구가 척! 하고 올라가며 번뜩이는 시선. 기사가 검을 휘두른 건 순식간이었다.

“이 찢어 죽일 악종아! 죽어라!!”

“폐하!”

기사가 휘두른 검을 막는 레온의 성검. 기사가 눈을 부릅떴다.

“폐, 폐하?!”

“건강한 것 같아 다행이네.”

“폐하!”

자신이 검을 휘두른 상대가 레온이었다는 사실에 기겁하며 무릎을 꿇는 붉은 기사.

“그래, 짐이 사자심왕 레온 드라고니아 라이온하트다.”

“예…! 발탄 불타는 검 기사단 삼번검 라이하르 데버이옵니다!”

“라이하르 경. 현재 그대의 상태를 알고 있나? 어디까지 기억하지?”

“으음….”

라이하르는 잠시 기억을 떠올리다가 자신이 기억하는 최신의 정보를 밝혔다.

“저희는 란돌체 평야에서 빙하대공과 그 군단과 싸우다 데몬 게이트를 열고 도주하는 놈을 쫓았습니다!”

때는 이백여 년 전, 란돌체 평야에서 불카누스의 군단과 빙하대공의 군단이 격돌했을 때였다.

회전에서 끝내 승리한 불카누스와 기사단은 도주하는 대공을 끝장내기 위해 데몬 게이트 내부로 추격했고, 그곳에서 악마들을 도륙하다 어느 시점에서 기억이 끊겼다는 것이다.

“라이하르 경. 물어볼 것이 있어요.”

“……대단한 꿈과 죽음의 성력이로군요. 레이디께선 누구시지요?”

“스페로 왕국의 여왕이자 당대의 꿈과 죽음의 신관장 베아트리체 알리기에리 스페로예요.”

“스페로 왕국?”

들어본 적 없는 왕국의 이름에 고개를 기웃거리다 레온의 시선을 받은 라이하르는 최고로 정중한 예를 갖추었다.

“여왕전하셨습니까. 게다가 성녀이기도 하시니 예를 갖춤에 부족함이 없는 귀인이십니다.”

라이하르가 예를 갖추며 인사한 후 베아트리체가 질문을 마저 했다.

“경이 이 땅에 도착했을 때, 이곳은 이처럼 얼음으로 가득한 땅이었나요?”

“아닙니다. 황폐한 땅이긴 했으나 이런 빙하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군요.”

“무엇을 좀 알아내셨소. 비체?”

레온의 물음에 베아트리체는 자신의 가설을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이 대륙은 악마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 같군요. 불카누스 경과 기사단 여러분들은 그것에 휘말려 동결된 것 같고요.”

“흠… 군주급 악마가 개입한 것 같나?”

“그 정도 되는 악마가 개입했다면 차라리 불카누스 경을 쓰러뜨리는 쪽을 택했겠죠. 하지만 빙하대공이라면…….”

“그렇군. 놈이 힘이 못 미치자 이 대륙째로 시공간을 동결한 건가.”

대공급 악마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가며 시도한다면 불가능할 것 같진 않다.

“이 세상은 그들의 세상이지요. 마소로 오염시킬 필요도 없는 정진정명 마력으로 이루어진 땅. 이곳에서라면 그들은 기적이라도 일으킬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아마… 빙하대공 또한 아직 살아있겠죠.”

즉, 이대로 기사단이 묻혀있는 빙벽을 녹이다보면 빙하대공을 마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제없네. 그런 것이 두려웠다면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을 테니.”

────!!

그 순간, 공간이 일렁이는 특유의 소리가 울린다. 그것이 게이트 소환의 전조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폐하, 악마들입니다.”

베아트리체가 그들을 가리켰다. 빙벽으로부터 약 오백 미터. 그곳에 열린 게이트에서 수백의 악마들이 쏟아져 나왔다.

“놈들도 눈치챘나.”

“생각보다 빨리 왔군요. 이곳을 상시 감시하는 기지라도 있었던 걸까요?”

베아트리체는 난처함을 느꼈다.

그녀는 현재 마술을 사용할 수 없다. 시공간조차 동결시키는 이 혹한의 대지에서 게이트를 열려면 자신의 마력을 쏟아부어야 하기 때문이다.

‘폐하 또한 빙벽을 녹여내 기사단과 불카누스 경을 구출해야 해. 그럼 믿을 건…….’

라이하르 데버. 발탄 불타는 검 기사단원인 그 한 명밖에 비는 손이 없다.

“라이하르 경!”

“예, 폐하.”

“일분 버텨라.”

그것은 베아트리체가 듣기에 자살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적의 숫자는 일차적으로만 족히 수백. 전력 차는 압도적이다.

“명, 받잡겠습니다.”

그러나 기사는 그저 투구를 고쳐 쓰고 전선으로 향할 뿐이다. 그는 검과 방패를 들고 두 사람을 뒤로했다.

“폐하…….”

“믿고 지켜보시게.”

레온은 그 말을 끝으로 빙벽으로 향했다. 그러는 사이 악마들이 라이하르를 향해 포반을 내세웠다.

악마들은 의외로 고화력 주의다.

그들의 병기는 현대 지구 따위가 비교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고, 마법은 그들이 종주인 기술이다.

자연스레 마도과학이 발전하며 최하급 악마 따위가 다루는 마포는 거인조차 쓰러뜨린다.

-발사준비!

-셋! 둘! 하나! 위력사격 개시!

처음으로 쏘아진 것은 나태의 악마들이 끌고 온 거대 마포다. 마정석을 소모하여 쏘아지는 이 마탄은 현대 지구의 전함 따위는 일격으로 찢어발길 수 있었다.

-꽝!

아찔한 굉음과 함께 포탄이 포물선을 그린다. 영점을 잡기 위한 시범사격. 하지만 포수의 숙련 덕분인지 마탄은 곧이곧대로 선임기사 라이하르를 향해 똑바로 나아갔다.

“이런 장난감 따위로…….”

귀찮다는 듯 손을 휘두른다. 맨몸으로 휘두른 주먹은 정확히 날아드는 마탄을 후려쳤다.

-깡!

튕겨 나간 마탄이 빙벽이 박힌다. 마탄의 위력만으로는 결코 부술 수 없을 터인 빙벽이 그가 후려친 힘이 더해져 박힌 돌처럼 파고들었다.

-기, 기사…….

편력의 길을 걸으며 자신을 증명한 끝에 나이츠 오브 렐름이 된 자들.

성법은 물론이고 경이로운 근력과 기동성을 가진 이들 중에서 손에 꼽힌 베테랑만이 성배 기사의 기사단원이 된다.

“답례를 돌려주도록 할까.”

떨어진 얼음 조각을 쥐는 라이하르. 그의 팔이 투구를 하는 야구선수처럼 젖혀졌다.

-꽈앙!

맨손으로 던져진 얼음 투석이 공기를 가르며 수백 미터의 거리를 무위로 돌린다.

그것은 악마들의 방진을 단숨에 꿰뚫고 일직선상으로 파고들더니 마포를 박살 내고서야 멈췄다.

-미친…….

성배 기사단.

성배기사가 선택한 초인군단의 일원.

그들은 ‘강함’을 정의하는 기준이다.

-도, 돌격해라!

악마들이 일제히 돌진한다.

“발탄 불타는 검 기사단 삼번검.”

붉은기사의 검집에서 검이 뽑힌다. 그의 별철검은 마치 작렬하는 화염이 압축된 것처럼 새빨갛다.

“라이하르 데버. 발검.”

그 순간, 불타는 회오리가 별철검에 몰아쳤다.

* * * *

뒷일을 기사 한 명에게 맡겨두고 레온은 빙벽을 살펴보았다.

빙벽은 거대하고 단단하다. 성법이 아니면 이것을 효과적으로 녹일 방법 따윈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역시 한 번에 녹여버려야 하나.”

레온에게는 이 빙벽을 녹여버릴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랬다간 감당 못 할 파도가 들이닥치겠지.’

이만한 빙벽이다. 단번에 녹여버리면 가히 쓰나미에 준하는 파도가 사방을 덮칠 터.

라이하르 경이야 버틸 수 있어도 게이트를 열기 위해 마력을 온존하고 있는 베아트리체는 파도에 휩쓸릴 테지.

‘파도의 성법을 사용하면 녹아내린 물을 제어할 수는 있다.’

문제는 이만한 빙벽을 모조리 녹여버릴 대성법을 사용하고서 녹아내린 물을 제어하는 성법까지 사용하면 그 뒤의 여력이 없다는 것.

할 수는 있지만, 예전처럼 성력을 마구잡이로 낭비할 수도 없는 처지이니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아니, 믿을만한 이들이 있지 않은가.”

레온은 이 안에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들도 할 수 있기에.

“성검이여.”

아공간에서 검집에 잠든 성검이 모습을 드러낸다.

성검을 소환하는 것만으로 막대한 성력이 소모되며 레온의 앞에 당도했다.

초대 사자심왕의 검집에서 뽑히는 성검. 그 검에 성력을 집속시킨다.

페토스의 불꽃이 벼려지고, 성검의 극광이 온 사방을 비친다. 그가 성검에 바라는 것은 하나.

내 앞의 모든 겨울을 베어버려라.

타오르는 불기둥이 그대로 휘둘러졌다.

기체가 묵직한 무게감을 싣는다는 모순을 가지고 빙벽을 향해 낙하한다.

────■■■■■■■■!!

불기둥과 충돌한 빙벽이 그대로 붕괴한다.

녹아내림과 동시에 증발한 수증기가 스팀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콰아아아아!!!

미처 증발하지 않은 물이 파도처럼 일제히 쏟아진다. 이것은 악마들뿐 아니라 아군까지 휩쓸 것이다.

“이쯤에서 멈춰야 하나.”

성검을 아공간으로 수납한 레온은 그대로 바다와 파도의 권능을 사용했다.

성법 <파도치기>

당장이라도 온 사방을 물바다로 만들 것 같았던 막대한 질량이 그대로 멈춰 선다. 파도의 권능을 사용하는 레온의 바람대로 부자연스럽게 허공에서 정지했다.

그것을 누군가는 어리석다 여길지도 모른다.

아군 한 명의 희생을 감수하면 수백, 수천의 악마들을 휩쓸 수 있을 텐데, 굳이 힘을 소모해가면서 파도를 막아내다니?

그러나 레온의 시선은 멈춰선 파도 너머로 향하고 있다.

-다그닥! 다그닥!

파도 너머. 수만 톤의 물로 가득 찬 그 중심에서 있을 수 없는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발탄 불타는 검 기사단.”

이백여 년의 봉인에서 헤어나와, 무엇이든 곤혹스러울 그들에게 사자심왕이 명했다.

“적을 섬멸하라.”

이에 기사단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호응한다.

“”잔악!””

“”잔학!””

“”잔혹!””

숨결에서 불길을 일으키며, 박찬 자리에 말발굽 모양의 불꽃을 남기면서.

“”무자비한 죽음을…!!””

오랜 봉인에서 뛰쳐나온 기사단.

불꽃으로 제련된 전쟁신의 기수들이 이백 년 전 끝내지 못한 전투를 재개했다.


           


Chapter 156

Chapter 156

156화 발탄의 불타는 검 기사단

라이온하트와의 대전쟁에서 악마들은 끔찍한 피해를 입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군주를 잃은 살육과 파괴, 지혜와 탐구, 쾌락과 타락, 혼돈과 파멸의 악마들.

특히 지혜와 탐구의 악마들은 왕국군과의 전면전에서 대공을 비롯한 최고위 대악마 대부분을 잃은 것이다.

그 전쟁에서 악마들은 누구나 군주 또는 대공을 잃었다. 그중에서도 나태와 우둔의 대악마들은 미묘한 처지에 가깝다.

그들은 군주를 잃지도, 대공을 잃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잃지는 않았다.

"벨로타스님…!"

나태와 우둔의 악마대공 카드샤의 영지 앞 관측기지. 그곳의 수장을 맡으며 빙하대륙을 관측하는 나태의 대악마는 얼음 관측자 벨타타의 다급한 보고에 눈을 떴다.

"말해……."

귀지를 파면서 비대한 몸통을 쿰척쿰척 움직이는 벨로타스. 나태의 대악마답게 그는 세상 무료한 표정으로 벨타타를 응시했다.

이곳 빙하대륙 관측기지는 태생이 나태하고 게으른 악마들의 시간 때우기용 기지다.

이백여 년 전, 이곳에서 나태와 우둔의 악마대공 카드샤가 그들과 공멸한 뒤, 그 봉인을 지키라는 명목상의 기지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백여 년 전의 사건 이후 악마조차도 살지 못하는 불모지가 되었으나 마계 한복판에 있는 빙하대륙에서 누가 그곳에서 작당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악마들이야 서로 못 믿는 족속들이라지만, 저 안에 있는 것은 악마의 천적 같은 존재다.

모든 악마를 파멸시키는 방사능 덩어리나 마찬가지인데, 누가 그것을──

"빙하대륙 내부에 에너지가 관측됐습니다! 제0파멸원소입니다!"

"흐음…!"

느릿한 반응을 보이던 벨로타스가 드물게 비대한 몸체를 움직였다.

"봉인이 풀렸나?"

"그,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카드샤 님의 마력반응이 아직 깨어나지 않았으니까요!"

그건 다행이었다. 놈과 함께 묻혀있는 빙하대공이 깨어나지 않았다면 최악의 사태는 아니다.

"카드샤 님의 마법이 느슨해진 건가."

빙하대공 카드샤가 대륙을 얼어붙게 하는 대마법을 펼친지도 200여 년.

지혜와 탐구의 악마들은 이론상 천 년은 갈 봉인이라고 했건만 어찌 벌써 봉인이 풀리기 시작한단 말인가!

"크, 큰일입니다. 그, 그 남자가… 그 괴물이 풀려난다면…!"

그날이 재현된다.

끔찍한 살육의 날.

하늘에서 불꽃과 함께 떨어진 그 남자에 의해──

"너는 먼저 특전대를 이끌고 가라. 나는 동원할 수 있는 군단을 이끌고 곧장 향하겠다."

대살육.

벨로타스는 옆구리의 화상을 움켜쥐며 트라우마를 떠올렸다.

* * * *

"이들이 성배 기사단이로군요."

"발탄 불타는 검 기사단. 그들이 틀림없소."

레온이 성창의 불꽃을 얼음벽에 내다 꽂았다.

"지금부터 이들부터 구출하겠네."

신성의 불꽃은 신성의 신도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 불꽃이 녹여내는 건 오직 그를 가둔 얼음 덩어리뿐.

-솨아아아아!!

막대한 스팀이 뿜어져 나오며 빙벽이 녹아간다. 쩌저적 하고 갈라지는 빙벽에서 기사가 떨어져 나왔다.

-쿵!

바닥에 처박히기 직전, 레온이 받아주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착지하는 기사와 말. 가히 본능적인 움직임. 그가 정신을 차린 건 수초 뒤였다.

"흡…!"

투구가 척! 하고 올라가며 번뜩이는 시선. 기사가 검을 휘두른 건 순식간이었다.

"이 찢어 죽일 악종아! 죽어라!!"

"폐하!"

기사가 휘두른 검을 막는 레온의 성검. 기사가 눈을 부릅떴다.

"폐, 폐하?!"

"건강한 것 같아 다행이네."

"폐하!"

자신이 검을 휘두른 상대가 레온이었다는 사실에 기겁하며 무릎을 꿇는 붉은 기사.

"그래, 짐이 사자심왕 레온 드라고니아 라이온하트다."

"예…! 발탄 불타는 검 기사단 삼번검 라이하르 데버이옵니다!"

"라이하르 경. 현재 그대의 상태를 알고 있나? 어디까지 기억하지?"

"으음…."

라이하르는 잠시 기억을 떠올리다가 자신이 기억하는 최신의 정보를 밝혔다.

"저희는 란돌체 평야에서 빙하대공과 그 군단과 싸우다 데몬 게이트를 열고 도주하는 놈을 쫓았습니다!"

때는 이백여 년 전, 란돌체 평야에서 불카누스의 군단과 빙하대공의 군단이 격돌했을 때였다.

회전에서 끝내 승리한 불카누스와 기사단은 도주하는 대공을 끝장내기 위해 데몬 게이트 내부로 추격했고, 그곳에서 악마들을 도륙하다 어느 시점에서 기억이 끊겼다는 것이다.

"라이하르 경. 물어볼 것이 있어요."

"……대단한 꿈과 죽음의 성력이로군요. 레이디께선 누구시지요?"

"스페로 왕국의 여왕이자 당대의 꿈과 죽음의 신관장 베아트리체 알리기에리 스페로예요."

"스페로 왕국?"

들어본 적 없는 왕국의 이름에 고개를 기웃거리다 레온의 시선을 받은 라이하르는 최고로 정중한 예를 갖추었다.

"여왕전하셨습니까. 게다가 성녀이기도 하시니 예를 갖춤에 부족함이 없는 귀인이십니다."

라이하르가 예를 갖추며 인사한 후 베아트리체가 질문을 마저 했다.

"경이 이 땅에 도착했을 때, 이곳은 이처럼 얼음으로 가득한 땅이었나요?"

"아닙니다. 황폐한 땅이긴 했으나 이런 빙하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군요."

"무엇을 좀 알아내셨소. 비체?"

레온의 물음에 베아트리체는 자신의 가설을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이 대륙은 악마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 같군요. 불카누스 경과 기사단 여러분들은 그것에 휘말려 동결된 것 같고요."

"흠… 군주급 악마가 개입한 것 같나?"

"그 정도 되는 악마가 개입했다면 차라리 불카누스 경을 쓰러뜨리는 쪽을 택했겠죠. 하지만 빙하대공이라면……."

"그렇군. 놈이 힘이 못 미치자 이 대륙째로 시공간을 동결한 건가."

대공급 악마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가며 시도한다면 불가능할 것 같진 않다.

"이 세상은 그들의 세상이지요. 마소로 오염시킬 필요도 없는 정진정명 마력으로 이루어진 땅. 이곳에서라면 그들은 기적이라도 일으킬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아마… 빙하대공 또한 아직 살아있겠죠."

즉, 이대로 기사단이 묻혀있는 빙벽을 녹이다보면 빙하대공을 마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제없네. 그런 것이 두려웠다면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을 테니."

────!!

그 순간, 공간이 일렁이는 특유의 소리가 울린다. 그것이 게이트 소환의 전조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폐하, 악마들입니다."

베아트리체가 그들을 가리켰다. 빙벽으로부터 약 오백 미터. 그곳에 열린 게이트에서 수백의 악마들이 쏟아져 나왔다.

"놈들도 눈치챘나."

"생각보다 빨리 왔군요. 이곳을 상시 감시하는 기지라도 있었던 걸까요?"

베아트리체는 난처함을 느꼈다.

그녀는 현재 마술을 사용할 수 없다. 시공간조차 동결시키는 이 혹한의 대지에서 게이트를 열려면 자신의 마력을 쏟아부어야 하기 때문이다.

'폐하 또한 빙벽을 녹여내 기사단과 불카누스 경을 구출해야 해. 그럼 믿을 건…….'

라이하르 데버. 발탄 불타는 검 기사단원인 그 한 명밖에 비는 손이 없다.

"라이하르 경!"

"예, 폐하."

"일분 버텨라."

그것은 베아트리체가 듣기에 자살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적의 숫자는 일차적으로만 족히 수백. 전력 차는 압도적이다.

"명, 받잡겠습니다."

그러나 기사는 그저 투구를 고쳐 쓰고 전선으로 향할 뿐이다. 그는 검과 방패를 들고 두 사람을 뒤로했다.

"폐하……."

"믿고 지켜보시게."

레온은 그 말을 끝으로 빙벽으로 향했다. 그러는 사이 악마들이 라이하르를 향해 포반을 내세웠다.

악마들은 의외로 고화력 주의다.

그들의 병기는 현대 지구 따위가 비교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고, 마법은 그들이 종주인 기술이다.

자연스레 마도과학이 발전하며 최하급 악마 따위가 다루는 마포는 거인조차 쓰러뜨린다.

-발사준비!

-셋! 둘! 하나! 위력사격 개시!

처음으로 쏘아진 것은 나태의 악마들이 끌고 온 거대 마포다. 마정석을 소모하여 쏘아지는 이 마탄은 현대 지구의 전함 따위는 일격으로 찢어발길 수 있었다.

-꽝!

아찔한 굉음과 함께 포탄이 포물선을 그린다. 영점을 잡기 위한 시범사격. 하지만 포수의 숙련 덕분인지 마탄은 곧이곧대로 선임기사 라이하르를 향해 똑바로 나아갔다.

"이런 장난감 따위로……."

귀찮다는 듯 손을 휘두른다. 맨몸으로 휘두른 주먹은 정확히 날아드는 마탄을 후려쳤다.

-깡!

튕겨 나간 마탄이 빙벽이 박힌다. 마탄의 위력만으로는 결코 부술 수 없을 터인 빙벽이 그가 후려친 힘이 더해져 박힌 돌처럼 파고들었다.

-기, 기사…….

편력의 길을 걸으며 자신을 증명한 끝에 나이츠 오브 렐름이 된 자들.

성법은 물론이고 경이로운 근력과 기동성을 가진 이들 중에서 손에 꼽힌 베테랑만이 성배 기사의 기사단원이 된다.

"답례를 돌려주도록 할까."

떨어진 얼음 조각을 쥐는 라이하르. 그의 팔이 투구를 하는 야구선수처럼 젖혀졌다.

-꽈앙!

맨손으로 던져진 얼음 투석이 공기를 가르며 수백 미터의 거리를 무위로 돌린다.

그것은 악마들의 방진을 단숨에 꿰뚫고 일직선상으로 파고들더니 마포를 박살 내고서야 멈췄다.

-미친…….

성배 기사단.

성배기사가 선택한 초인군단의 일원.

그들은 '강함'을 정의하는 기준이다.

-도, 돌격해라!

악마들이 일제히 돌진한다.

"발탄 불타는 검 기사단 삼번검."

붉은기사의 검집에서 검이 뽑힌다. 그의 별철검은 마치 작렬하는 화염이 압축된 것처럼 새빨갛다.

"라이하르 데버. 발검."

그 순간, 불타는 회오리가 별철검에 몰아쳤다.

* * * *

뒷일을 기사 한 명에게 맡겨두고 레온은 빙벽을 살펴보았다.

빙벽은 거대하고 단단하다. 성법이 아니면 이것을 효과적으로 녹일 방법 따윈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역시 한 번에 녹여버려야 하나."

레온에게는 이 빙벽을 녹여버릴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랬다간 감당 못 할 파도가 들이닥치겠지.'

이만한 빙벽이다. 단번에 녹여버리면 가히 쓰나미에 준하는 파도가 사방을 덮칠 터.

라이하르 경이야 버틸 수 있어도 게이트를 열기 위해 마력을 온존하고 있는 베아트리체는 파도에 휩쓸릴 테지.

'파도의 성법을 사용하면 녹아내린 물을 제어할 수는 있다.'

문제는 이만한 빙벽을 모조리 녹여버릴 대성법을 사용하고서 녹아내린 물을 제어하는 성법까지 사용하면 그 뒤의 여력이 없다는 것.

할 수는 있지만, 예전처럼 성력을 마구잡이로 낭비할 수도 없는 처지이니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아니, 믿을만한 이들이 있지 않은가."

레온은 이 안에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들도 할 수 있기에.

"성검이여."

아공간에서 검집에 잠든 성검이 모습을 드러낸다.

성검을 소환하는 것만으로 막대한 성력이 소모되며 레온의 앞에 당도했다.

초대 사자심왕의 검집에서 뽑히는 성검. 그 검에 성력을 집속시킨다.

페토스의 불꽃이 벼려지고, 성검의 극광이 온 사방을 비친다. 그가 성검에 바라는 것은 하나.

내 앞의 모든 겨울을 베어버려라.

타오르는 불기둥이 그대로 휘둘러졌다.

기체가 묵직한 무게감을 싣는다는 모순을 가지고 빙벽을 향해 낙하한다.

────■■■■■■■■!!

불기둥과 충돌한 빙벽이 그대로 붕괴한다.

녹아내림과 동시에 증발한 수증기가 스팀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콰아아아아!!!

미처 증발하지 않은 물이 파도처럼 일제히 쏟아진다. 이것은 악마들뿐 아니라 아군까지 휩쓸 것이다.

"이쯤에서 멈춰야 하나."

성검을 아공간으로 수납한 레온은 그대로 바다와 파도의 권능을 사용했다.

성법 <파도치기>

당장이라도 온 사방을 물바다로 만들 것 같았던 막대한 질량이 그대로 멈춰 선다. 파도의 권능을 사용하는 레온의 바람대로 부자연스럽게 허공에서 정지했다.

그것을 누군가는 어리석다 여길지도 모른다.

아군 한 명의 희생을 감수하면 수백, 수천의 악마들을 휩쓸 수 있을 텐데, 굳이 힘을 소모해가면서 파도를 막아내다니?

그러나 레온의 시선은 멈춰선 파도 너머로 향하고 있다.

-다그닥! 다그닥!

파도 너머. 수만 톤의 물로 가득 찬 그 중심에서 있을 수 없는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발탄 불타는 검 기사단."

이백여 년의 봉인에서 헤어나와, 무엇이든 곤혹스러울 그들에게 사자심왕이 명했다.

"적을 섬멸하라."

이에 기사단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호응한다.

""잔악!""

""잔학!""

""잔혹!""

숨결에서 불길을 일으키며, 박찬 자리에 말발굽 모양의 불꽃을 남기면서.

""무자비한 죽음을…!!""

오랜 봉인에서 뛰쳐나온 기사단.

불꽃으로 제련된 전쟁신의 기수들이 이백 년 전 끝내지 못한 전투를 재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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