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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60

159. 민서 외전

민서는 말수가 없는 학생이었다.

아마 어릴 적의 전학이 그 원인일 것이었는데, 안산에 살던 초등학생 때는 그도 발랄한 어린이였다.

“지하철 타고 네 정거장만 가면 된단다. 다음 달이면 이사할 거야, 아들. 그때까지만 지하철로 통학해주겠니?”

운 좋게 분양받은 아파트. 부모님은 기뻐하셨다.

하지만 중학교 1학년이었던 민서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학기 중간에 전학을 가기보다는 2학기 시작에 맞춰 미리 가는 게 낫겠다는 부모님의 판단 때문이었다.

전학을 가냐 안 가냐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가느냐가 문제였다.

– 덜컹, 덜컹, 덜컹.

처음으로 지하철을 타 봤다. 엊그저께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는 부모님이 차로 태워주셨다.

하지만 부모님이 매일매일 통학을 도와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민서는 생소한 지하철에 홀로 몸을 실었다.

출근 시간. 지하철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던 민서는 매끈한 봉을 붙잡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학 가더라도 꼭 자주 보자고 약속한 동네 친구들에게 알려줄 경험담이 생겼다.

지하철에서 내렸다. 고작 네 정거장밖에 오지 않았건만, 내린 곳은 그가 살던 곳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세련된 도시가 중학생의 호기심 어린 눈길을 담담히 받아내었다.

버스를 타고 십 분을 더 달렸다.

버스에는 처음 보는 교복과 학생들이 있었다. 민서는 자신의 빳빳한 교복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러나 여전히 어색했다.

이내 도착한 중학교. 새벽에 출발한 덕에 지각은커녕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으므로 민서는 교무실을 향했다. 아직 출근하지 않은 선생님을 기다리길 잠시, “왔구나.” 대수롭지 않은 인사와 함께 14살 중학생의 떨리는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 * *

“얼른 먹고 가야지. 지각하겠다.”

“…네.”

이사를 했다. 입주한 아파트는 학교와 가까워서 현관을 박차고 나가 5분이면 교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민서는 미적미적, 그 짧은 통학로를 나서길 망설였다.

학교에 가봤자 친구가 없었다.

그건 늦깎이 전학생을 무심히 소개해 준 선생님의 탓도, 학급 또래 친구들의 탓도, 민서의 탓도 아니었다.

만약 민서에게 어떤 잘못이 있다면, 평소 TV를 보지 않아서 또래 친구들이 떠드는 연예인의 이름을 하나도 몰랐다는 것이고, 학급 친구들에게 잘못이 있었다면, 이미 1학기 때 친해질 대로 친해진 데다가, 어느 반의 누가 어느 유치원을 다녔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는 것이고, 선생님의 잘못이라면 민서의 첫 자리를 가장 끝, 짝꿍이 없는 빈자리에 넣어줬다는 것일 터였다.

나는 우리 동네 친구들과는 어떻게 친해졌었지?

민서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들과는 그냥 날 때부터 친했다.

같은 아파트 놀이터에서 흙장난을 쳤고, 곤충을 잡으러 다녔고, 가끔 불장난을 치고, 버려진 철로 주변을 탐험했었다.

여긴 그렇지 않았다. 몇 정거장 차이나지 않음에도 노는 방식이 우리와 전혀 달랐다.

아니다.

어쩌면 비슷했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중학생이 되면서 개발되지 않은 산과 들을 더는 쏘다니지 않고, 피씨방이나 노래방을 다니기 시작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그네들은 민서가 지하철을 타고 멀리 통학하는 동안 몇 발짝씩 더 앞서가고 있었다.

민서가 처음으로 친구라 할만한 친구를 사귄 건 고등학생이 되면서였다. 같은 동네지만, 멀찍멀찍 떨어진 중학교 학생들이 섞였다. 민서에겐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친구를 사귀기가 쉽진 않았다.

민서의 집은 TV를 거의 켜지 않았다. 아버지가 뉴스를 보기 위해 켜는 게 전부. 그의 집에서 TV는 장식품이나 다름없었다.

그 때문에 민서는 여전히 친구들과 대화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사실 민서도 연예인의 이름을 외우려 그렇게 노력하진 않았다.

일단 관심이 없었다. 연예인이라고 해봤자 남이다. 남들의 사생활, 남들이 하는 말, 쓸데없이 웃기기만 한 이야기 따위는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또, 고작 친구를 사귀기 위해 그까짓 것을 섭렵하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런 무의미한 가십에 환호하는 또래들을 비웃으며, 하지만 부러워하며, 민서는 조용히 책을 읽었다.

찬란할 수 있었던 그의 학창 시절은 도서관의 곰팡내 나는 책들처럼 바래져 갔다.

그래도 책을 많이 읽은 덕분이었을까,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한 번의 재수 끝에 민서는 대학엘 갔다.

대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겠다거나 하는 열망이 있진 않았다. 성적에 맞춘 과에 들어간 민서는 본격적으로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재미없네.”

대학생이 되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말은 거짓부렁이었다.

그 무엇도 해결된 것이 없었다. 교수님께서는 그가 평생 공부해온 모든 지식을 부정하셨고, 과제는 매 수업마다 산더미처럼 쏟아졌다. 팀플이란 것은 극도의 인내를 요구하며 인간과 인간관계란 것에 대해 달리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이런 대학 생활조차도 낙원으로 느껴질 만큼 바쁘고 냉혹한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할 터였다.

무료하지만 바쁜 대학 생활을 이어가던 민서. 그래도 그는 젊었다. 인생 달관한 척, 고고히 살아가기엔 그의 가슴 속에 들끓는 청춘이란 것이 있었다.

1학기 중간고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 우연히 발견한 연극 동아리 포스터에 민서는 발길을 돌렸다.

학점, 토익/토플 점수, 1학년 때부터 지원 가능한 인턴쉽, 원만한 인성을 증명할 봉사 활동, 문송하지 않으려면 필요한 국가 자격증, 공부밖에 하지 않은 지루한 삶에 양념을 더해줄 알바 경험담…

챙겨야 할 것이 많았으나, 민서는 ‘대학까지 와서 공부할 생각은 안 하고 술이나 퍼먹는 한량들의 집합소’ ─ 동아리에 가입하고 말았다. 그것도 취업에는 1도 도움이 안 될 연극 동아리에.

그곳에서 채하를 만났다.

동갑이지만 1년 선배였던 그녀는 물결치는 검은 머리를 가진, 웃을 때 입을 가리지 않고, 통닭 앞에서 “치킨치킨 치킨이닭!” 어깨를 들썩이는 여자였다.

설마 그 모습에 반했을까.

그건 호감에 불과했다. 민서가 생각하기론 그녀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연극을 좋아하는 채하는 연습실에서 종종 혼자 방백(傍白)을 했다.

방백은 연극에서 등장인물이 관객을 향해 자신의 생각을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는데, 다른 인물들이 듣지 못하는 것으로 약속된 것이었기에 “혼자 뭐라는 거야?” 옆에서 누가 참견하거든, 짧은 콧등을 찡그리며 싫어했었다.

대신 대사를 연습하고 있을 때, 이어질 대사를 받아주거든 활짝 웃었다. 그 모습에 반했던 것 같다.

채하는 장학금을 타야 한다며 무대 한쪽 구석에 앉아 공부하다가도

“여자는 비밀이 많아요. 저도 그렇고요. 그 까닭은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신비롭고 싶기 때문이에요.”

연극의 한 구절을 읊었고, 어느 날, 민서는 이렇게 돌려주었다.

“남자는 기다리지요. 당신이 베일을 벗는 순간을. 내가 실망할 거라 생각하지 말아요. 나는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을 때처럼 행복해할 테니까.”

“어? 대사가 다른데?”

“그냥… 내 맘대로 바꿔봤어.”

“그래? 그런데 거기서 남자 주인공이 그렇게 말해버리면 전개가 어떻게 되는 거야?”

“글쎄…? 해피엔딩으로 가지 않을까? 봐봐, 원작의 내용은 오해가 쌓이다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잖아.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말한다면, 여자 주인공이 편지를 버리지 않았을 거라 생각해. 그리고 남자 주인공이 그 편지를 읽었더라면 아마 배편을 포기했겠지. 그러면…”

조용한 연습실에서 사각사각, 펜 소리가 울렸다. 채하는 꺄하하하하! “이게 뭐야! 하나도 재미없어. 그럼 그동안 깔린 떡밥들은 다 뭐가 돼?”라며 민서의 급조한 시나리오를 비웃었다. 하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여름방학이 오기도 전에 민서는 텅 빈 연습실에서 채하에게 고백했다. 채하는 이번에는 소리 없이 웃었다. 활짝 지은 미소를 가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풋풋한 연애는 그렇게 시작됐다.

함께 알바해 모은 돈으로 개강하기 전에 후다닥 여행을 다녀왔고, 머리 터지는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연습실에서 함께 보냈다.

겨울 방학엔 대학 동아리를 잠시 벗어나 대학로 연극단에서 경험을 쌓았다. 둘 다 무대에 서진 못했지만 스태프로 일하며 조명과 의상, 무대 장치, 홍보, 공연장 대여와 땜빵 섭외까지… 극장의 다양한 일감과 다사다난을 함께 겪었다.

그리고 민서에게 날아든 영장.

2학년 1학기를 마침과 동시에 민서는 군대에 갔다.

일 년을 넘게 산 자취방을 빼기 전날, 민서와 채하는 함께 밤을 지새웠다. “고무신 단단히 신고 기다릴게.” 말하는 그녀를 끌어안았고, 채하는 약속을 지켰다.

민서가 전역하고 돌아왔을 때는 채하가 4학년, 졸업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일 년 휴학하며 연기를 배운 그녀는 배우가 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극배우는 돈이 되지 않았다. 연봉 70만 원. 의상학과를 나온 채하는 무대 의상을 관리하면 매달 몇만 원을 더 받을 수 있다고 했지만, 채하도 알고, 민서도 알다시피 아무런 차이가 없는 돈이었다.

장래를 약속한 사이에서 응원과 조언은 현실적이다. 민서는 연극은 취미로 남기는 게 좋지 않겠느냐 말했다. 답답한 도돌이표 대화가 반복되며 서로가 지쳐가던 어느 날, 민서는 채하에게 화를 냈다.

그가 4학년, 본격적인 취업 압박을 받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 말은 연극 대사처럼 세련되지 않았다.

“넌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먹고 살 궁리는 안 해? 자기 좋은 것만 하면서 어떻게 살아. 연극배우론 전세는커녕 월세값도 못 벌어.”

“그럼 나더러 하기 싫은 거 하면서 평생 살라는 거야? 난 못해. 솔직히 너도 공무원 하기 싫잖아! 너도 극장 일 하고 싶다면서. 극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었잖아!”

극작가.

세상 웃기는 소리다. 셰익스피어가 다시 태어나도 이 시대엔 굶어 죽는다. 아니면 위대한 영화감독이 되거나.

서로가 너무 달라졌음을 깨달은 두 사람은 이 문제에 관해 더는 이야기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민서는 공무원 공부를 계속해나갔다. 채하는 채하대로 무대에 서고자 노력했고, 가끔 서로가 얼마나 사서 고생하고 있는지를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러다 채하가 무너졌다.

아버지가 급성 뇌졸중으로 돌아가시면서 병원비 한 푼을 못 댄 자신을 원망했다. 연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그때쯤, 민서도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7급 공무원 시험. 5급도 아닌 것이 이렇게나 어려운 거였나, 절망하며 자취방에 틀어박혔다.

우린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주지 못했다. 아니, 특히 내가 채하에게 의지가 되어주지 못했다.

그래도 채하는 슬픔을 딛고 일어나 어떻게든 나아가려 애썼지만, 남자친구란 놈은 세상 다 망했으면,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채하의 의지를 갉아먹었다. 빼앗아 먹은 의지만큼 공부하다가 던져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채하가 말했다. 물결처럼 흩날리던 머리카락을 묶고, 단정한 세미 정장 차림이었다.

– “우리 잠시 떨어져서 각자 시간을 보내자.”

– “우리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나도 뭘 좀 해놓을게. 우리 열심히 해 보자.”

이별 아닌 이별 통보와 스스로의 한심함에 뒤틀릴 대로 뒤틀린 나는, 너도 그럼 그렇구나, 결국 네가 그렇게나 하기 싫다던 일, 취업을 하러 가는구나. ─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말을 뱉어버렸다.

채하는 울지도, 못난 남자친구를 욕하지도 않았다.

“난 널 믿어.”

라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 * *

민서는, 아니, 레오는 눈앞의 여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물결치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 비록 좁지만 꼿꼿이 펴진 어깨, 아담한 체형, 그리고…

무대로 내리꽂히는 스포트라이트.

그녀는 채하가 아니었다. 날카로운 기억이 착각이 되어 민서의 정신을 베고 지나갔을 따름이었다.

돌아가야 한다.

이 지옥에서 탈출해 어떻게든, 어떻게든 채하에게.

민서가 레오 드 예리엘의 정신을 움켜쥐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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