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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60

160화 선택 (2)

160화 선택 (2)

아르카넘 홀의 광장은 프로스트 갈라를 기다리며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눈부신 마법 조명과 장식들이 반짝거렸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광장 위로 부드러운 빛을 뿌렸고, 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학생들의 설렘과 기대는 따스하게 녹아내렸다.

“누구에게 춤 신청을 할 거야?”

“아직은 말 못 해. 하지만 곧 알게 될 거야.”

“마음에 둔 상대가 있구나!”

“응. 용기 내볼 거야.”

학생들은 무도회가 시작되기 전에 짝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축제 전부터 공공연히 연인 관계를 자랑했던 이들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조바심을 내며 주위를 기웃거렸다.

한쪽에서는 어느 여학생이 용기를 내어 마음에 품은 남학생에게 다가가 고백했다. 다른 쪽에서는 누군가 거절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빌어먹을 청춘이로군.”

“우리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샬리.”

“샬리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이 덩치만 커다란 멍청이가.”

샤를로트 교수와 자크 교수가 미소를 머금은 눈으로 학생들을 바라봤다.

광장 중앙에 설치된 커다란 크리스탈 볼이 반짝이는 빛을 발했다.

자크 교수가 피식 웃었다.

“주인공 등장인가.”

대화를 멈춘 학생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같은 곳을 돌아봤다.

에스틸리아 교수가 걸어오고 있었고, 그녀의 곁에는 카인이 있었다.

***

크리스탈 볼이 빛나며 아르카넘 듀얼 우승자의 등장을 알렸다. 카인은 턱시도를 입고 있었고, 그것이 그의 훤칠한 키와 세련된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카인 시니야카······!”

“그와 무도회에서 함께 춤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학생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카인은 에스틸리아 교수와 함께 커다란 원형 단상으로 올라갔다. 그의 귀에는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이 다른 생각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너, 무도회의 상대로 누구를 지명할 거야?’

데미안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귀를 울렸다.

카인은 아리엘을 선택할 생각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놓은 계획이다. 아리엘의 마음을 함락하고, 그녀를 통해 오필리아 플랑브아즈의 비밀을 알아내어 자신의 목적에 다가가기 위해.

그러나 카인은 지금, 흔들리고 있다.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선택을 해. 적어도 오늘만큼은.’

데미안의 그 말이 마음속에 꼭꼭 감춰둔 아픈 감정을 건드렸다.

“루나 크라소타는 왜 안 오지?”

‘루나’라는 이름이 카인의 상념을 깨웠다.

“어서 보고 싶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달빛의 공주를.”

“아아······, 정말 아름답겠지?”

“그러고 보니 루나 크라소타가 치마를 입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잖아!”

“앗! 그러네!”

카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루나는 플랑브아즈 저택에 있는 내내 치마를 입고 있었지만 저들이 알 리 없었다.

카인과 눈이 마주친 여학생들이 기도하듯 두 손을 맞잡았다. 마치 한 사람을 보는 듯이 한결같은 표정. 그러던 중, 카인은 아리엘을 발견했다.

아름답고 기품이 넘치는 여자. 첫인상과 달리 아이 같은 순수함을 지닌.

“달빛의 공주는 언제 오는 거지?”

“곧 오겠지. 아무래도 여학생이니 준비 시간도 더 필요할 테고.”

“하지만 너무 늦는데?”

“그러게. 이상하네.”

시간이 흐를수록 웅성거림은 커졌다.

카인도 의구심을 느끼며 에스틸리아 교수를 돌아봤다.

“비비안 교수는 칠칠찮은 면이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시길.”

루나의 몸단장을 맡은 이는 비비안 교수였다.

잠시 후 비비안 교수가 광장에 나타났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이었고, 혼자였다.

***

광장의 화려한 빛은 치유실 창문 너머로도 보였다.

솔직히 조금 아쉬웠다.

별생각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나는 무도회를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너도 프로스트 갈라에 관심이 있는 거야? 루나.’

‘당연하지 데미안! 엄청 기대돼! 세실리아도 요즘 그 얘기뿐이야!’

‘루. 루나······!’

그때의 루나는 기대감으로 가득한 모습이었다. 두 볼을 붉히며 내 눈치를 보던 세실 역시도.

나는 잠든 세실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이전에도 잠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 적이 있다. 은월섬에서였고, 그때의 세실은 술에 취했었다.

“너도 무도회를 기대했지? 세실.”

나는 살짝 흐트러진 세실의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비비안 교수 덕분에 세실은 곤히 잠들었다. 비비안 교수는 치유 마법뿐만 아니라 약초를 다루는 능력도 뛰어났다.

아마도 ‘드림 위스퍼’에 몇몇 약초를 섞어 만들었겠지. 드림 위스퍼는 3년 전, 마석 광산을 탈출한 내가 카론 늪지에서 채집한 약초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머지않아 세실은 드림 위스퍼로 쿠훌린을 잠들게 한 뒤, 혼절한 나를 업고 달아났었다.

‘테오도 데리고 가야지. 족제비와 덩치도.’

‘두고. 가자.’

‘뭐라고?’

‘돌아가면. 위험해.’

그날의 대화가 떠오른다.

세실은 감정 표현이 많이 서툴렀었다.

‘나는······ 친구들을 두고 가지 않아.’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세실은 바르르 어깨를 떨며 괴로워했다.

당시의 나는 세실의 심정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내 말을 들은 세실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미안해. 세실.”

나는 세실의 이마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러던 중 주머니 속의 먼지가 내게 신호를 보냈고, 나는 뒤를 돌아봤다.

치유실 문이 열리며 에스틸리아 교수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오. 덮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

“너는 루나가 좋은 거니? 세실리아가 좋은 거니?”

“······그런 말 하려고 오신 건가요.”

“아니.”

“그럼 왜.”

에스틸리아 교수가 히죽 웃었다.

“루나가 사라졌어.”

.

.

.

밤공기가 차갑다.

나는 루나를 찾아 달리고 있다.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치유실에는 에스틸리아 교수가 있기로 했다.

‘먼지야. 이쪽으로 가면 루나가 있는 거 맞지?’

먼지는 혀를 헥헥대며 앞장서 달렸다.

아르카넘 홀은 굉장히 넓고, 그래서 이런 밤중에 사람 하나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먼지와 미니맵의 도움이 있다면 내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먼지야. 잠깐 이리 와 봐. 아공간에서 목발을 꺼내야겠어.’

걸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달리니 다리의 통증이 상당했다.

그런데 먼지는 나를 흘끗 돌아보더니 내 말을 무시하며 계속 달렸다. 야! 이리 오라니까!

‘그건 그렇고 루나는 왜 사라진 거야.’

별일은 아닐 것이다. 치유실을 떠날 때까지 루나에게서는 별다른 이상 징후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에스틸리아 교수의 말에 의하면 몸단장을 마친 루나가 돌연 비비안 교수를 따돌리며 달아났다고 한다. 당연히 비비안 교수의 능력으로는 루나를 쫓아갈 수 없다. 뭐, 드레스를 입고 많은 사람 앞에 나서려니 갑자기 부끄러워졌다든가, 그런 이유겠지.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뽀얀 입김 너머로 루나를 닮은 동그란 달이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머지않아 눈이 내릴 것 같다.

헥. 헥. 헥.

먼지의 숨소리가 커졌다. 그와 동시에 나는 미니맵에서 우호적 표식을 발견했다.

이제 보니 주위 풍경이 낯익다. 얼마 전 쿠훌린을 만났던 곳이다.

사륵.

고요한 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사이로 내려앉는 달빛이 그림처럼 루나를 비췄다.

루나는 눈이 부시도록 흰 드레스를 입고 벤치에 앉아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그녀의 눈동자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나는 그 모습에 잠시 넋을 잃었다.

“앗! 아앗?”

예술 작품처럼 앉아있던 루나가 흠칫 놀라 외쳤다. 호다닥 달려간 먼지가 그녀의 품으로 뛰어올랐기 때문이다.

루나가 나를 돌아봤다. 나를 발견한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 커다란 눈동자가 몇 번인가 깜빡이더니, 루나가 환하게 웃었다.

“루나. 왜 여기에 있어?”

나는 두근거림을 애써 억누르며 그녀의 옆에 앉았다.

루나가 소녀처럼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고개를 숙였다. 아랫입술이 살짝 내밀어져 있다.

“돌아가자. 모두 너를 기다리고 있어.”

“······세실리아는?”

“세실은 아직 자고 있어. 지금은 에스틸리아 교수님이 치유실에 계셔.”

“정말?”

루나가 눈을 빛내며 나를 돌아봤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숙이며 다시금 다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왜 그래? 루나.”

루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광장으로 가지 않을 거야?”

“······갈 거야.”

“그럼 어서 가자.”

“데미안은?”

“나는 치유실로 돌아가야지.”

다시 아랫입술이 튀어나온다.

“어린애처럼 왜 그래. 카인도 아까부터 너를 기다리고 있대.”

루나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나는 어린애 같아?”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은은한 화장에, 빛나는 장신구를 착용하고,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은 루나는 아리엘 이상의 성숙한 여인으로 느껴졌다.

“광장으로 데려다줄게.”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단둘이, 계속 그녀를 보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던 루나가 내 손을 잡았다.

***

“달빛의 공주다!”

누군가의 외침이 들린 순간, 카인은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인파가 물결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루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아, 달빛의 공주······!”

“아름다워······!”

남학생들이 시선이 일제히 루나에게 꽂혔다. 아니, 광장의 모든 이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카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마음속 혼란이 다시금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너, 무도회의 상대로 누구를 지명할 거야?’

정신을 차려보니 루나는 단상에 올라와 있었다.

카인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은 그녀가 교수와 학생들을 향해 차례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광장의 그 누구도 루나를 탓하지 않았다.

아리엘마저도 홀린 듯한 눈으로 루나를 바라봤다.

“이제야 듀얼의 두 주인공이 모였군요.”

언제 나타났는지 에스틸리아 교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자크 펠리온 교장이 헛기침하며 단상으로 다가오는데, 돌연 에스틸리아 교수가 하늘 위로 마법의 불꽃을 터뜨리며 프로스트 갈라의 시작을 알렸다.

학생들이 두 팔을 흔들며 환호했고, 교장은 무안한 얼굴로 뒤돌아 사라졌다.

“카인 시니야카. 루나 크라소타. 무도회를 함께하고 싶은 상대를 지명하시길.”

선택의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왔다.

카인은 조금 당황했다.

그 순간 바람이 일며, 그의 시야로 붉은 잎새들이 흩날렸다.

‘카인. 나······.’

바람에 흔들리는 은빛 머리카락.

그 아래로 보이는 동그란 어깨.

작고 섬세한 손.

손을 내밀어, 꼭 잡고 싶었던.

‘나, 네가 좋아.’

그녀의 음성이 머리를 울린 순간, 카인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리엘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그 위로 데미안의 얼굴이 겹친다.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선택을 해.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래. 오늘만큼은.

그날 잡지 못했던, 그녀의 손을······.

“데미안 시니야카.”

구슬처럼 영롱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속삭이듯 아프게 다가왔다.

카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루나는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게 미소하고 있었다. 별빛 같은 눈망울 속으로 빠져들 것만 같다.

그녀의 입술이 다시 한번 열렸다.

“저는 데미안을 지명하겠어요.”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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