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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62

161. 거지남매 – 퇴장과 입장

“…아쉽군요.”

대강 상황을 파악한 레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물을 떠 오지 못했는지 알겠다.

모르긴 몰라도 나는 아침에 이 여자를 만났다. 연애감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 내가 고백 비스무리한 것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레오는 여전히 말을 삼갔다.

이 여자와의 만남이 상당히 중요한 {이벤트}라는 것을 깨달았으나,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를뿐더러. 이 빌어먹을 게임에서 이벤트라는 게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솔직히 대부분 안 좋았다.

그래도 레오는 낙심한 표정을 연기했다. 고백에 실패한 남자가 보일 법한 우울함. 괴로운 기억을 줄줄이 달고 있는 그로서는 그런 표정을 짓는 게 어렵지 않았다.

코로 한숨을 옅게 뱉었다.

고개를 미세하게 떨구고, 눈동자를 사선으로 흔든다. 정말 희망이 없나? 갈등하는 것처럼.

입술까지 달짝, 무슨 말을 하려다 마는 행동을 보이자 크세니아가 말했다.

“그래도 자주 만나요. 레오 씨. 우리 아직 통성명밖에 안 했잖아요?”

그런데, 조금 실망한 어투였다. 그걸 느끼기가 무섭게 레오는 분위기를 확 반전시켰다.

“고맙군요. 그럼 얼마나 자주 만날까요, 크세니아 양?”

좋은 이벤트건, 나쁜 이벤트건 피해선 안 된다. 적어도 이게 뭔지는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가장 끔찍했던 이벤트. 바르바토스의 사도가 됐던 지난 소꿉친구 시나리오는 꿈에라도 나올세라 두렵지만, 정말 많은 보상과 정보를 남겼다. 그 이벤트를 거치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오리아스를 섬기는 에릭 드 예리엘 왕자가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느껴졌을 터였다.

지금은 조금은 만만해졌다. 사도라는 이들이 어떤 힘을 가졌고, 얼마나 많은 제약에 묶여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크세니아의 눈동자가 똥그래졌다. 입가가 씰룩씰룩 비틀리더니 꺄하하 새하얀 목선을 보이며 웃음보를 터뜨렸다.

“크세니아 ‘양’이라고요? 푸핫. 그렇게 받아칠 줄은 몰랐어요, 레오. 그냥 처음처럼 크세니아라고 불러주세요. 제가 괜한 심술을… 쿡… 부렸네요.”

아하…

레오는 슬슬 감이 오기 시작했다. 이 여자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세게 나오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믿어도 되는 사람일까.’

크세니아와 대화하며 레오가 한 생각은 이게 전부였다. 그는 눈앞의 여자를 관찰하고 있었다.

크세니아가 “그럼 약속한 대로 동생을 돌봐주겠어요. 절 만나러 오시는 건 좋을 대로 하세요. 전 항상 여기에 있으니까요.”라고 말했을 때, 레오의 의심은 절정에 달했다.

의심병에 걸렸다고 해도 좋았다. 아무리 호의를 내비친다 한들, 처음 보는 사람이다.

‘카시아라면 모를까, 처음 보는 사람한테 동생을 맡길 수는 없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하면서도 레오는 부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심장이 두근두근, 마음이 기우는 것과 믿음은 별개였다.

하지만 당장 카시아가 어디 있는지 몰랐으므로 레오는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카시아를 찾을 때까지, 하루 이틀 도움받는 건 괜찮겠지.

“그럼 오빠는? 오빠 혼자 집에 가는 거야? 히잉, 싫어. 나도 갈래. 나 두고 가지 마.”

레나가 칭얼거렸다. 레오는 “그럼 못 써!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야지.” 단호히 선을 긋는데…

– 똑똑.

오베르가 나타났다. 아직 극이 끝날 시간이 아니었으나 눈곱을 달고 나타난 것으로 보아 잠에서 깨자마자 우릴 찾아온 모양이었다.

[ 업적 : 패밀리 보스와의 첫 만남 – 깡패들이 당신의 말을 미약하게 신뢰합니다. ]

“여기 있었구나. 아깐 미안했다. 거지들이 어디서 내 이름을 듣고 온 줄 알았어. 그런데 크세니아, 얘네들이랑은 무슨 사이냐? 친척이야?”

“음~ 아니요.”

뚱뚱한 오베르가 들어오자 확 좁아진 방에서 크세니아가 조금은 수줍게 답했다.

“숨겨둔 애인이에요.”

* * *

“이 친구 얼굴값을 하는구만.”

계단을 내려오며, 오베르가 레오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 오랑주 극장 최고의 미녀를 꼬시다니. 크세니아도 그래. 남자한테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눈이 높았던 거였어! 하하하. 이걸 알면 울고불고 난리 칠 친구들이 많을 거야.”

“카시아는 어디 있죠?”

거두절미하고 레오는 본론을 던졌다. 뒤따라오던 오베르는 조금 놀란 기색으로 되물었다.

“카시아를 알아?”

“네.”

“어떻게?”

“…옛날에 도움을 받았던 적이 있어요.”

“그래? 하긴, 카시아는 착하니까… 잠깐, 그런데 그걸 어떻게 나한테 물었어? 내가 카시아를 안다는 걸 알고 있었어?”

“…”

한참을 뜸 들이던 레오는 “그랬죠.” 답했다.

애매모호하지만 단호한 답변에 오베르는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잘됐네. 안 그래도 카시아한테 갈 생각이었는데. 먼저 이것부터 받아.”

오베르가 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극장 1층의 한 창고를 열더니 각종 생필품을 꺼내주었다.

레나가 사용할 이불과 베개, 식기, 옷걸이, 수건 따위의 물건들이었는데, 개중에는 해면(海面, Sponge) 조각 몇 개가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민서는 이 세계에 와서 해면을 보고 정말 놀랐었다.

해면은 바다에 사는 해면동물(海綿動物)의 총칭이다. 이 식물 같은 동물은 바다 밑바닥에 달라붙어 자라는데, 이걸 잘라서 볕에 쬐면 미세한 구멍이 많고, 부드러우며 탄력 좋은 섬유 골격이 남았다.

이게 바로 우리가 아는 스펀지다. 민서는 ‘스폰지밥’이라는 캐릭터를 똑 닮은, 현대문명의 산물로만 알았던 물건이 여기에도 있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고대 로마에서도 이용됐었던 이 물건은 유용했다. 수분을 잘 빨아들이는 성질이 의료용, 세면용으로 아주 적격이었다.

레오도 해면을 사용해본 경험이 있었다. 전쟁터의 병영에서 이걸로 피를 닦았고, 타티안, 가이단 후작가에 머물 때 사용했었다.

뒤처리하는 용도로.

해면은 귀족들에겐 휴지 같은 것이었다. 물에 헹궈 재사용해야 하지만, 뭐, 자기들이 헹굴 것은 아니니까 상관없었다.

여기서는 이걸 왜 주는 걸까?

레오는 아마도 샤워하는 데 쓰이거나 식기를 닦는 용도일 것이라 생각했고, 그게 맞았다.

다만, 평민들 사이에서는 다소 낯선 해면이 여기서는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해면은 피임용으로도 사용됐다.

크세니아의 방으로 레나가 사용할 생활용품들을 옮긴 레오와 오베르는 극장을 나섰다.

잡담하며 걷기를 잠시 그들이 도착한 곳은 시끌벅적한 도떼기시장이었다.

라우노 패밀리가 관리하는 구역 중 하나였기에 레오도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었다.

거지들이 몰려 사는 빈민촌과 가까워서 거지남매 시나리오의 시작점이 되는 장터보다 땅값이 훨씬 저렴한 동네였다.

그때, 레오의 걸음이 멎었다. 멀리 한 가게 앞에서 손님과 흥정하는 여자가 보였다. 매끈한 생머리. 바짝 마른 그 여자는 작업용 가죽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카시아다. 아니, 카시아가 맞나?

그녀는 모든 점에서 그가 알고 있던 모습이 아니었다, 레오가 아는 카시아는 저렇게 웃지 않았다. 저렇게… 말하지 않았다.

“아휴! 그러면 나도 남는 게 없다니깐. 언니, 그러지 말고 봐봐. 여기 마감된 것 보이지? 절대 안 뜯어져. 혹시라도 망가지면 내가 고쳐줄 테니깐, 걱정하지 말고 가져가. 응?”

명랑하게 빛나는 눈동자. 이십 대 중반의 카시아는 불만이 많아 보이는 아주머니를 스스럼없이 대하고 있었다.

“카시아! 나 왔어.”

“앗! 오베르 아저씨, 오랜만이네. 잠깐만 기다려. 언니, 그러면 다른 걸 보여줄까? 쪼금 더 저렴한 게 있기는 해.”

레오는 그녀의 억척스러운 모습을 생경하게 바라보았다. 기어이 신발 두 켤레를 팔아먹은 카시아가 허리에 양팔을 얹고 돌아섰을 때는 숨이 막혔다.

저런 자세를 취할 줄 아는 여자였나. 고개를 치켜들 줄도 알았었던가.

더 놀라운 건 그다음이었다.

“얜 누구야?”

[ 업적 : 카시아가 목숨 바쳐 지킨 남자 – 카시아에게 큰 호감을 얻음. ]

큰 호감에 어찌할 줄 모르고 몸을 비비 꼬았던 카시아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긍지 있는 태도로 레오를 맞았다.

“나도 오늘 처음 본 앤데, 얘가 크세니아 애인이래.”

“뭐? 크세니아한테 남자친구가 있었어? 헤에- 그거 신기한걸. 연극밖에 모르는 애를 어떻게 꼬셨데? 잘생기긴 했네. 그보다 무슨 일이야?”

오베르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하지만 레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오베르가 레나에게 가져다줄 신발을 골랐다. 카시아를 멀거니 쳐다보던 레오는

“너도 신발이 필요하지 않아? 고를 거면 빨리 골라.”

카시아가 그의 다 헤진 짝짝이 신발을 가리켰을 때에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윽고 깔끔한 면 신발이 신겨졌다. 옛날에 카시아가 선물해줬던 신발보다야 못난 것이었지만, 레오의 발에 꼭 맞았다.

카시아가 손을 내밀었다.

“돈은 내야지. 좀 깎아서… 금화 한 닢이야.”

“…네? 그, 금화요?”

“은화 한 닢이라는 소리야. 하하. 얘 동생꺼는 오베르 아저씨가 주는 거지? 뭐? 가불? 가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얼른 안 내놧?”

카시아가 레오의 손에서 은화를 집어갔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럼 가 볼게. 장사 잘하고. 이따 술이라도 한잔할까?”

“아니. 난 바빠. 오늘 팔린 재고를 채워 넣어야지.”

“쯧. 알았다. 그래도 좀 쉬엄쉬엄해라. 빼짝 말라가지곤…”

“내가 알아서 할거거든요? 댁이나 살 좀 빼요. 근육만 키우지 말고. 다 늙어가지곤… 꺄악! 무슨 짓이야!”

오베르가 검지로 찍은 구두약을 카시아의 뺨에 묻혔다. 카시아는 “꺼져! 이 웬수야!” 소리치며 오베르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행복하라는 말이라도 하고 싶다. 하지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던 레오는 우물거리다 조용히 돌아섰다.

카시아에겐 그 어떤 보답도, 작별 인사도 필요치 않아 보였다. 그녀의 삶에서 빠져주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이었다.

발에 편안하게 휘감기는 신발의 촉감을 느끼며 뒤돌아보자 카시아는 그새 흥얼거리며 진열대를 정리하고 있었다.

– “명을 받들겠어요. 행복할게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시끌벅적한 시장통. 보랏빛 앞치마를 입은 그녀가 또렷이 도드라지며 레오의 귀에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 * *

극장으로 돌아온 레오는 지금 내가 기쁜 건지, 슬픈 건지 알 수 없었다.

가슴에 구멍이 난 것처럼 공허하다. 동시에 어떤 감정이 치솟아 그 비어버린 공간을 끊임없이 흔들고 있었다.

기쁜데 기쁘진 않다.

슬픈데 슬프진 않았다.

“허업.”

숨 쉬는 걸 잊고 있었다. 여태껏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나란히 걸어온 오베르는 말이 없었다.

극장은 조용했다.

연극이 끝난 지도 꽤 됐는지 관객은 보이지 않았고, 몇몇 배우들과 극장 꼭대기에 얹혀사는 전(前) 창녀들만 무료히 돌아다녔다.

그리고 무대 위에 레나가 보였다. 아직 꺼지지 않은 조명 아래에서 그녀는 크세니아와 함께 있었다.

“왕을 알현할 땐, 이렇게 인사하는 거예요. 따라 해 보시겠어요?”

“이렇게요?”

“네. 그렇다고 허리를 너무 굽힐 필요는 없어요. 적당히. 예의를 차리되 비굴하지 않을 정도로. 좋아요.”

넓은 무대에 덩그러니 서서 금발, 흑발을 빛내는 두 여자는 너무나도 달랐다. 하지만 둘 다 하얀 원피스를 입었기 때문인지 자매처럼 보이기도 했다.

잠시 우아한 자세를 보인 레나가 허리를 세웠다.

“그런데 제가 왕을 만날 일이 있을까요?”

“연극에선 늘 있는 일이죠. 그래서 전 연극이 좋아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꿈꿀 수 있죠. 당신은 무엇이 되고 싶나요?”

레나는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앙증맞게 고개를 기울일 뿐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크세니아가 미소지었다. 고개 숙여 눈높이를 맞춰주더니 레나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만큼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뜻이니까. 당신은 무엇이든 될 수 있어요. 아, 귀족은 빼고요.”

크세니아가 허리를 폈다.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노래했다.

“왕이시여-! 이 사람을 고귀하게 만드소서-!”로 시작된 그 노래는 레이시아가 바눈을 천거(薦擧)하는 장면이었다.

속닥속닥 대화하다가 대뜸 연극을 시작하는, 채하가 했을 법한 행동.

레오는 서글피 웃었다. 카시아가 퇴장해 공허한 가슴속으로 크세니아가 똑똑, 입장하려는 게 괴롭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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