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162

162화 눈치

162화 눈치

축제 이후 나와 루나의 관계가 변하는 일은 없었다.

우리는 이전처럼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조금 짜증 나는 점은 주위 학생들마저도 나와 루나의 사이를 의심하지 않았다는 거다.

“루나 크라소타가 데미안 시니야카를 지명한 진짜 이유 들었어?”

“들었어! 다친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서라고!”

“아아, 역시 마음씨까지 아름다운 달빛의 공주······!”

“제발 나와 결혼해 줘······!”

빌어먹을. 누가 저런 헛소문을.

좀 들리지 않게 말하든지 해라.

“그렇다면 루나 크라소타는 원래 누구를 지명하려 했을까?”

“그걸 말이라고 하니? 당연히 카인이겠지.”

“듀얼의 두 우승자가 함께 춤추는 모습도 멋졌을 거 같아······!”

“하지만 카인은 아리엘라 플랑브아즈와 연인 사이잖아.”

카인과 아리엘이 연인이라는 소문은 이제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이전보다 더욱 친밀해졌다. 나는 카인에게 아리엘과의 관계를 물은 적이 있다. 카인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을 피했다.

이번 아르카넘 듀얼과 블레이드 듀얼 본선에 오른 학생들에게는 월반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한다. 현재 이자크 펠리온 교장을 포함한 여러 교수가 모여 회의하고 있다. 탈리야의 경우를 생각한다면 듀얼의 두 우승자인 카인과 루나는 단번에 4학년으로 진급할 수도 있다.

.

.

.

“세실리아! 우리 왔어!”

치유실 문을 열며 루나가 외쳤다. 나도 루나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세실은 아직 치유실에 머무르고 있다.

세실이 고양이 같은 눈으로 나를 봤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나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세실은 루나가 무도회의 상대로 나를 지명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는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었다.

‘나, 아직도 어린애 같아?’

루나의 목소리가 아른아른 귓가를 울린다.

가늘게 눈을 좁히며 미소하던 얼굴. 달처럼 빛나던 머리카락.

그때의 루나는 정말로 성숙해 보였고, 아름다웠다.

‘대답해 줘서 고마워. 이제 세실리아를 만나러 갈 거지?’

그 말과 함께 루나는 내게 밀착했던 몸을 떼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뒤돌아 치유실로 달려갔다. 내가 자리를 떠나자마자 루나에게 구애하는 얼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루나. 데미안.”

세실의 목소리가 나를 생각에서 끌어냈다.

“카인. 은?”

“또 아리엘과 데이트 중이겠지 뭐. 흥! 요즘 아주 입이 귀에 걸렸다니까? 나랑 데미안하고는 놀아주지도 않아!”

루나가 두 검지로 제 입술 끝을 귀까지 밀어 올리며 말했다.

당연하게도 카인은 저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다. 카인이 우리와 놀아주지 않는다는 것도 지나치게 과장된 표현이다. 물론 세실도 그런 것쯤은 알고 있다.

나와 루나를 흘끗거리던 세실이 속삭이듯 말했다.

“어쩌면. 자리를. 피해주려는 게······.”

“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루나의 반문에 세실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루나가 주위를 두리번대며 물었다.

“비비안 교수님은 어디 계셔?”

그러고 보니 비비안 교수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환자를 두고 사라질 사람은 아닌데.

“비비안 교수는 출장 준비로 짐을 꾸리고 있습니다.”

“꺄악!”

“히익!”

세실의 침대 아래에서 데굴데굴 굴러 나오는 에스틸리아 교수를 보자마자 세실과 루나가 비명을 질렀다.

하마터면 나도 소리 지를 뻔했다. 대체 뭐야 이 사람은. 언제부터 저 아래에 있었던 거지?

“아. 아으······!”

세실은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으로 내 팔을 꼭 쥐고 있었다.

루나는 저만치 벽에 주저앉아 있다.

“비비안 교수 대신 세실리아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몸을 일으킨 에스틸리아 교수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까, 깜짝 놀랐잖아욧!”

빽 소리친 루나가 경계하는 얼굴로 다가왔다.

에스틸리아 교수가 히죽 웃으며 우리를 둘러봤다.

“참고로 저도 비비안 교수와 함께 떠납니다.”

“네?”

“음? 뭡니까 그 표정은. 설마 데미안 시니야카, 저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

“아니요.”

“그렇군요.”

에스틸리아 교수가 나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이 마치 궁지에 몰린 쥐를 바라보는 굶주린 고양이 같아서 나는 움찔했다.

“그럼 데미안의 개인 지도는 어쩌고요? 아니, 마법학부 수업은요?”

“데미안 시니야카의 개인 지도는 당분간 휴업입니다. 남은 수업은 엘리시아 프림로즈 교수가 맡기로 했습니다. 무능력한 얼간이 쭉정이에다가 쓸데없이 수다스럽기까지 한 인물이지만 나름 잘 교육해 두었으니, 한 사람 몫은 할 겁니다.”

엘리샤 정도 되는 마법사를 저렇게 말하는 사람은 에스틸리아 교수뿐일 거다.

마법에 대해 알아갈수록 나는 엘리샤가 얼마나 뛰어난 마법사인지 실감하고 있다. 그런 엘리샤를 에스틸리아 교수는 어린애 다루듯한다.

나는 에스틸리아 교수가 오필리아 플랑브아즈나 모르가나보다 강한 마법사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무슨 출장이죠? 그것도 비비안 교수님과 함께.”

“알 것 없습니다.”

“······.”

내 물음을 일축한 에스틸리아 교수가 물끄러미 나를 봤다.

“그건 그렇고 데미안 시니야카. 축제가 끝난 뒤 치유실에 기이한 기운이 떠돌고 있었습니다. 마력임에는 분명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내가 발현했던 세계수의 혼돈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이지만 그날 나는 취해 있었다. 내려앉는 함박눈과, 무도회장의 화려한 분위기와, 루나의 아름다운 자태와, 그리고 세실에게.

세실이 다시금 내 팔을 꼭 쥐는 게 느껴졌다.

나는 침착을 가장하며 말했다.

“비비안 교수님의 치유 마법이겠죠.”

“설마 내가 비비안의 마력을 구분 못 한다고 생각하는 거니?”

에스틸리아 교수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그녀의 시선이 내 얼굴을 탐색하듯 훑었고, 잠시 후 피식 웃음을 뱉었다.

“염려마시길. 마력의 흔적은 말끔히 지워두었으니. 하지만 좀 더 신중하게 구는 편이 좋을 겁니다. 아르카넘 홀에는 눈과 귀가 많으니까.”

뒤돌아 치유실 문을 열고 나가던 그녀가 아, 하며 덧붙였다.

“아픈 다리로도 꽤 잘 추더군요. 세실리아.”

.

.

.

“데미안. 에스틸리아 교수님이 하신 말씀, 사실이야?”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루나가 물었다.

“뭐가?”

“세실리아와 춤췄다는 거.”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뜨겁다. 빨개진 것 같은데.

“흐응. 그렇구나?”

“······.”

“세실리아와 사귀기로 한 거니?”

“아닌데.”

“그러니?”

물끄러미 나를 보던 루나가 히죽 웃었다.

“데미안.”

“응.”

“에스틸리아 교수님 말이야. 조금 무섭지 않니?”

“조금이 아니라 엄청 무섭지.”

“그치? 엘리샤도 꼼짝 못 하는 거 같더라. 지난번에 엘리샤가 나를 찾아와 엄청나게 하소연한 적이 있었어. 에스틸리아 교수님의 개인 연습실에서 개처럼 얻어터졌다면서 막 눈물 콧물까지 흘리더라니까? 그렇게 펑펑 우는 엘리샤는 정말 처음 봤어.”

그때를 떠올리는 듯 루나의 눈동자가 허공을 바라봤다.

“그래서 내가 에스틸리아 교수님께 건의드린다고 하니까 엘리샤가 막 비명을 지르면서, 절대로 그러지 말라는 거야. 그러더니 자기가 한 말은 모두 잊어달라며 신신당부하고는 사라졌어.”

“······나는 엘리샤의 그 마음 알 것 같아.”

루나가 키득키득 웃었다.

“에스틸리아 교수님은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분인 것 같아. 말투도 시시때때로 바뀌고, 표정도 그렇고, 문득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보면 의외로 온화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고,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다시 무심해지고.”

“에스틸리아 교수님이 너를 온화한 눈으로 본다고?”

“응.”

“잘못 봤겠지. 그럴 사람이 아니야.”

“아니야! 한두 번이 아니었는걸?”

그러고 보니 나도 느낀 적 있다.

에스틸리아 교수의 연습실에서 고위 마법을 연습하기 전이었던가.

‘너는 우승하지는 못할 거야.’

‘그래도 예선 탈락할 거라는 말은 안 하시네요.’

‘그런 얼간이라면 애초에 개인 지도를 하지도 않았어.’

‘칭찬인가요?’

‘얼간이가 아니라는 말이 칭찬으로 들리니? 너도 참 자존감 낮은 녀석이네.’

그렇게 말하는 에스틸리아 교수의 눈빛은 묘하게 따스했었다.

내 입술에 미소가 지어졌다. 지옥처럼 괴로운 훈련이었으나 돌이켜 보면 그리운 기억이다. 물론 그립다기에는 얼마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당분간 에스틸리아 교수와의 개인 지도가 없기 때문일까, 나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나는 에스틸리아 교수에게 사제의 정을 느끼고 있다.

***

에스틸리아 교수와 비비안 교수가 아르카넘 홀을 떠나고, 며칠이 흘렀다.

“자! 지금부터 시범을 보일 테니 두 눈 똑바로 뜨고 잘 보도록! 아하하하하!”

엘리샤는 생각보다 잘하고 있다. 눈치 볼 사람이 없어져서인지 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수업에 임했다. 학생들도 그녀의 수업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세실의 발목 상태는 많이 호전됐다. 비비안 교수는 학교를 떠나기 직전까지 세실을 세심히 돌보았고, 회복에 필요한 약재를 충분히 만들어두었다. 현재는 치유실의 조교수들이 그 약재를 활용해 세실을 치유 중이다.

“데미안.”

오늘도 나와 루나는 세실을 보러 치유실을 향하고 있다.

“응. 루나.”

“이제 곧 겨울방학이네?”

시간은 참 빠르게 흐른다.

내가 이 세계로 들어온 지도 3년이 훌쩍 넘었다.

“그러게. 벌써 겨울방학이라니. 여름방학을 플랑브아즈 저택에서 보냈던 게 얼마 전 같은데.”

그러고 보니 루나는 플랑브아즈 저택에서의 휴가를 즐거워했고, 또 가고 싶어 했었다.

“루나. 이번에도 아리엘의 초대를 받을 수 있을까?”

“카인은 요즘 어때?”

갑자기 말을 돌린다.

아랫입술이 조금 내밀어져 있는데.

“카인은 왜?”

“그냥.”

“카인과 무슨 일이 있었어?”

“아니 아니! 절대 아니야! 카인과는 아무 일도 없어!”

‘카인과는’ 아무 일도 없다.

그럼 다른 사람과 문제가 있는 모양이군.

“아리엘과 무슨 일 있었어?”

“아앗! 앗!”

루나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소설 속의 루나와 달리, 눈앞의 루나는 속마음이 너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난다.

“무슨 일인데? 루나.”

아랫입술이 본격적으로 튀어나온다.

“······아리엘이 나한테 조금 차가워진 거 같아.”

“아리엘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식사하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잖아.”

루나가 후우, 한숨을 뱉었다.

“데미안.”

“응?”

“너는 정말 여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루나의 발이 멈춰 섰다.

“여자의 웃음과 친절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돼. 미묘한 표정 변화라는 게 있다고. 시선 처리라든가, 말투도 그렇고.”

“내가 보기에는 전과 같던데?”

“으휴······! 너에게 물어본 내가 바보지.”

나는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심 눈치가 부족하다고 여기던 루나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무슨 소리야. 나는 제법 눈치가 빠른 편이라고. 방금도 봐봐. 네가 아리엘과 문제가 있다는 걸 바로 알아챘잖아.”

“흐응. 그러셔?”

“당연하지.”

“그거 아니? 너는 눈치가 빠르다고 말할 자격 없어.”

“왜.”

루나가 주저하듯 입술을 떼었다.

“나와 세실리아의 마음을 조금도 알지 못하니까.”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