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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64

164화 각자의 길 (2)

164화 각자의 길 (2)

“아까부터 왜 그리 멍청한 표정이니? 4학년으로 월반하는 우등생들 맞아?”

에스틸리아 교수가 웃었다.

나는 아직도 정신이 없었다.

“저, 저기 교수님.”

“학교 밖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마. 나이 들어 보이는 거 같아 싫으니까.”

“하지만 나이가 많은 건 사실······.”

엘리샤의 말에 에스틸리아 교수가 도끼눈을 떴다.

“호오······. 많이 컸네? 얼간이 엘리샤.”

“히익! 자, 잘못했습니다아아아악!”

저 멀리 날아간 엘리샤가 풍덩! 바다에 빠졌다.

우리는 깜짝 놀라 뱃전으로 달려갔다.

어푸어푸! 엘리샤가 우리를 보며 살려달라고 외쳤다.

“힉! 히익······! 힉!”

단원들에게 구조된 엘리샤가 눈물 콧물을 흘리며 헐떡였다.

벨락이 다가와 말했다.

“에스틸리아. 엘리샤도 이제 은월에서 제법 위치가.”

“꺼져. 벨락.”

벨락이 후우, 한숨을 쉬며 물러갔다.

나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엘리샤를 넘어, 은월의 부단장인 벨락에게까지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너무해요! 엘리샤에게 왜 그래요!”

루나의 외침에 에스틸리아 교수가 피식 웃었다.

“얼간이 엘리샤는 저렇게 다뤄야 해. 그러지 않으면 자꾸 사고를 치거든. 나 원, 꼬맹이일 때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니까? 그러고 보니 울보 라이칸은 어디에 있지? 내가 온다는 걸 알고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친 건가? 어이, 엘리샤.”

“네, 네! 스승님!”

“울보 라이칸은 섬에 있니?”

“지, 지금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흠뻑 젖은 엘리샤가 허겁지겁 달려갔다.

루나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스, 스승님이라고······?”

“저 얼간이에게 그럭저럭 마법을 쓸 수 있게 만든 게 바로 나야. 물론 어디 가서 그런 말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했지. 나까지 격이 떨어질 테니까.”

그제야 나는 엘리샤가 에스틸리아 교수에게 꼼짝 못 하는 본질적인 이유를 알았다.

그녀는 엘리샤의 스승이었다.

“우, 울보 라이칸은 섬에 없습니다! 대륙의 임무를 수행 중입니다!”

어느새 돌아온 엘리샤가 차렷 자세로 외쳤다.

에스틸리아 교수가 한쪽 눈을 찌푸렸다.

“그래? 오랜만에 교육 좀 하려 했더니. 보나 마나 미련곰탱이 벨락이 대피시킨 거겠지. 제 동생은 끔찍이 아끼는 녀석이니까.”

벨락이 큼큼,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궁금해졌다. 얼간이 엘리샤. 울보 라이칸. 미련곰탱이 벨락. 그렇다면 쿠훌린은 뭐라고 부를까. 그러고 보니 에스틸리아 교수는 나를 통해 쿠훌린을 아르카넘 홀로 불러들인 적이 있다.

그러나 내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루나가 뱃멀미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뭐야. 은월섬의 인간이 뱃멀미를?”

에스틸리아 교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루나는 카인과 세실의 부축을 받으며 선실로 들어갔다.

“너는 안 가니? 루나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아닌데요.”

“그럼 역시 세실리아니? 하긴. 그 아이의 몸매는 정말 끝내주니까.”

“······.”

“흐응. 반응을 보니 역시, 둘 다 좋아하는 모양이지?”

나는 조금 찔렸다.

“너는 눈치가 없는 거니? 아니면 눈치가 없는 척하는 거니?”

“그게 무슨.”

“여자의 말과 행동에는 늘 이유가 있는 법이야.”

에스틸리아 교수가 검지로 내 턱을 들어 올렸다.

“죄 많은 사내로구나? 너와 카인은.”

기척도 없이 언제 다가온 걸까.

알면 알수록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다.

돌이켜 보니 나는 치유실 침대 아래 있었던 그녀의 기척도 알아채지 못했다.

“뭘 그리 유심히 보니?”

에스틸리아 교수가 눈웃음을 지었다.

영락없는 내 또래처럼 보인다.

게다가 머리카락이 은백색으로 변하니 디네베를 마주하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몇 살이에요?”

“여자에게 그런 걸 묻는 건 실례야.”

“엘리샤보다는 연상이죠?”

그녀의 뒤에서 엘리샤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바다로 날아갔다.

“너도 바다에 풍덩하고 싶은 건 아니지?”

“절대로 궁금해하지 않겠습니다. 교수······ 아니, 에스틸리아.”

“그래. 좋아.”

에스틸리아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러나 벨락에게 구조되는 엘리샤의 해쓱한 얼굴을 보자마자 궁금증은 저절로 억눌러졌다.

나중에 물어보자. 기회는 올 거다. 제아무리 그녀라 해도 쿠훌린이나 스카자하 앞에서는 저러지 못할 테니까.

“리아논의 병은 낫지 못할 거야. 비비안도 속수무책이었으니까.”

먼 바다를 향해 에스틸리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두 교수의 출장 목적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비비안 교수님도 섬 출신인가요?”

“비비안은 제국의 귀족이야. 그것도 아주 존귀한 가문의. 하지만 놀랄 것 없어. 리아논의 치유를 시도할 때는 섬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만났으니까.”

에스틸리아가 하늘로 눈을 돌렸다.

“슬슬 날개가 펼쳐질 시간인가? 정말 오랜만이네.”

머리 위는 흰 새들로 가득했다.

에스틸리아가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반짝이는 하얀 가루가 길게 좌우로 늘어서며 은빛 날개가 펼쳐졌다.

.

.

.

오랜만에 마주하는 밤의 바다는 아름다웠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어쩌면 나는 김우진이었던 시절에도 바다를 좋아했는지 모른다.

“데미안.”

“응. 세실.”

“리아논. 괜찮을까?”

에스틸리아의 말대로라면 리아논은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괜찮을 거야. 리아논은 은월병도 극복했잖아.”

“꼭. 나았으면. 좋겠어.”

나를 보는 세실의 눈동자는 촉촉했다.

“······루나. 많이. 울었어.”

나는 세실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카인은 아까부터 보이지 않는다. 루나를 달래고 있는 걸까. 하긴, 루나는 뱃멀미로 괴로워할 때마다 카인을 찾았었지.

나는 물끄러미 세실을 바라봤다.

“왜. 왜. 그렇게······.”

세실의 볼이 붉어진다. 시선도 흔들린다.

무도회 날, 치유실에서의 일이 머리를 스쳤다. 그때의 세실은 말을 더듬지 않았었다. 세실은 이전에도 그런 적이 있다. 성년의 밤에, 그녀의 침대 위에서.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 데미안.’

그러나 지금의 세실은 원래 말투로 돌아왔다.

치유실에서의 이야기도 꺼내지 않는다.

‘여자의 웃음과 친절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돼. 미묘한 표정 변화라는 게 있다고. 시선 처리라든가, 말투도 그렇고.’

그동안 나는 세실이 내게 강한 연심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걸까.

확신하기 어려워졌다.

‘여자의 말과 행동에는 늘 이유가 있는 법이야.’

그러고 보니 루나는 무도회의 상대로 왜 나를 지명했을까.

***

루나는 선실 침대에 웅크려 누워 있었다. 배를 탈 때마다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매번 나만 이렇게 뱃멀미로 고통스러워하다니. 불공평해.

하지만 지금은 뱃멀미가 문제가 아니었다. 엄마가 많이 아프다. 엘리샤도, 벨락도, 브란델도, 모두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루나는 너무 불안했다.

“루나.”

데미안이 선실 문을 열며 들어왔다. 루나는 자신이 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른 눈물을 훔쳤다.

데미안이 침대 옆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카인이 함께 있는 줄 알았어.”

꽉 다문 아랫입술이 떨려왔다. 데미안의 목소리를 듣자 갑자기 서러워졌다. 아빠가 그리웠다. 아빠는 루나가 뱃멀미할 때마다 지극정성으로 돌봐줬었다.

“미안해 루나.”

눈앞이 흐릿해졌다가, 맑아졌다. 데미안이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데미안의 손이 닿으니 멀미가 완화되는 기분이었다.

루나는 본능적으로 데미안의 손을 잡았다.

“······루나?”

루나는 놀랐다. 착각이 아니었다.

데미안의 손을 쥐자 멀미 증세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돌연 다정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사랑스러운 루나프레나. 울지 말렴. 데미안은 돌아올 거란다. 언젠가 너희들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서로를 마주하게 될 거야.’

엄마의 목소리. 귀에 대고 속삭이는 듯이 선명하다. 이어, 환각처럼 엄마의 얼굴이 시야에 그려졌다. 엄마가 나를 품에 안고 있어. 엉엉 우는 나를 달래고 있어. 아기처럼 자그만 내 손.

‘어떻게 아느냐고? 사실 이건 비밀인데, 엄마는 가끔 미래를 볼 수 있단다? 거짓말 같다고? 그러면 우리 내기할까? 엄마의 말대로 될지 안 될지 말이야.’

따스하게 미소하는 엄마는 아름다웠고, 무척 젊었다. 루나의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루나는 데미안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시야가 부옇게 흐려지며 풍경이 변했다. 루나는 옆에 누운 아기를 바라봤다. 부드러운 금발. 바다처럼 푸른 눈.

루나는 아기에게 손을 뻗었다. 펼쳐진 자그만 손이 아기의 얼굴을 더듬었다. 아기가 웃는다. 루나는 자신도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눈앞의 아기가 데미안이라는 것도.

루나는 두 팔을 뻗어 데미안을 안았다. 데미안은 루나의 품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어느새 루나는 그의 품에 안겨있었다.

‘사랑스러운 루나프레나. 데미안이 그렇게 좋니? 그래서 언제까지고 함께하고 싶은 거니? 엄마와 아빠처럼?’

루나는 데미안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뱃멀미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데미안의 기분 좋은 향기를 느끼며 루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은월섬에 도착한 뒤에야 나는 루나에게서 해방됐다.

선실에서 나를 침대로 끌어당긴 루나는 내 품에서 기절한 듯이 잠들었다. 루나가 나를 너무 꼭 끌어안고 있어서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엘리샤, 세실, 카인이 번갈아 선실 문을 열었다가 말없이 사라졌다. 에스틸리아만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놀렸다.

‘덮치기 전이니? 아니면 벌써 끝?’

수 시간 후, 잠에서 깨어난 루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내게 변태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아주 잠시였다. 내가 침대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루나는 멀미를 시작했고, 애걸하는 표정으로 안아달라고 했다.

변태로 매도당한 것을 사과받은 뒤에야 나는 조심조심 루나에게 다가갔다. 루나가 반색하며 나를 안았다. 나는 비좁은 침대에 다시 루나와 눕게 되었고, 정말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

세실이 고양이 같은 눈으로 나를 본다. 눈이 마주치자 평소와 다른 반응이다. 볼이 붉어지지도, 시선을 피하지도 않는다.

에스틸리아가 세실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그러자 세실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가자고.”

에스틸리아는 기분 좋게 웃으며 걸었다. 여유롭게 주위를 둘러보고, 심호흡하며 섬의 공기를 느꼈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이 반가운 듯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특히 루나가 그랬다.

“엄마아아······!”

결국 루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우리들이 쫓았다. 저 멀리 마을의 전경이 보였다. 몇몇 사람들이 마을 앞에 나와 있다.

가까이 가자 그들의 얼굴이 확인됐다. 가운데 선 인물은 스카자하였다. 우리를 본 그녀의 눈이 사납게 꿈틀댔다.

“무슨 낯짝으로 돌아온 것이냐. 에스틸리아.”

에스틸리아가 드디어 임자를 만났다. 스카자하는 쿠훌린마저 두려워하는 인물이다. 나는 스카자하에게 혼쭐이 나는 에스틸리아의 모습을 내심 기대하며 뒤를 돌아봤다.

에스틸리아가 뱀처럼 눈을 빛대며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빌어먹을 할망구. 아직도 안 뒈졌어?”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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