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165

165화 각자의 길 (3)

165화 각자의 길 (3)

설마 에스틸리아가 스카자하에게 저런 태도를 취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카인, 세실, 심지어 리아논을 걱정하며 달리던 루나도 자리에 멈춰 서며 에스틸리아를 돌아봤다.

“······고얀 것. 그 나이에도 변한 것 하나 없구나.”

“남의 나이 걱정 말고 할망구야말로 관짝으로 들어가. 대체 어떻게 아직 살아있는 거야? 엘프야? 아니지. 엘프가 저렇게 못생겼을 리는 없으니까.”

에스틸리아가 키득키득 웃었다.

벨락이 굳은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꺼져 벨락. 네 어미라고 편들겠다는 거야? 지금 당장 이 빌어먹을 섬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어.”

나는 본능적으로 전투 자세를 취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진심이 배어있었기 때문이다.

“호오?”

에스틸리아의 살기가 순간적으로 나를 향했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견디기 어려운 압박감이 내 몸을 짓눌렀다.

다행히 에스틸리아는 곧 나를 외면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이제 보니 나뿐만 아니라 단원 모두가 전투태세에 들어간 모습이었다.

“왜, 왜 이래요! 모두 그만둬! 데미안! 카인! 자세 풀어! 스, 스승님도 제발······!”

오직 엘리샤만이 에스틸리아와 벨락 사이로 뛰어들며 중재하려 했다. 그러나 한 번 발생한 긴장감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흐응. 그래. 이렇게 나오겠다는 거지.”

에스틸리아가 눈을 번뜩이며 전투의 기운을 내뿜었다. 그녀의 몸에서 폭발하는 듯한 마력이 흘러나왔다. 그 반동으로 엘리샤와 벨락을 포함한 단원들이 뒤로 밀려났다.

여기저기서 검이 뽑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때마다 에스틸리아는 사나운 웃음을 터뜨리며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마치 탈리야를 마주하는 것 같다. 아니, 그 이상의 압도적인 마력!

‘······강해!’

나는 직감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에스틸리아는 은월섬에 깊은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 섬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다. 그녀에게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

나는 엘리샤에게로 눈을 돌렸다. 엘리샤도 나를 보며 눈짓했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에스틸리아에게 달렸다.

“에스틸리아!”

“스승님!”

에스틸리아가 우리에게 마법을 발현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은 없다. 그럼에도 나는 내 선택을 믿기로 했다.

‘여자의 말과 행동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야.’

에스틸리아는 악인이 아니다. 그녀는 입학시험 때 루나의 부상을 내게 알렸고, 탈리야로부터 나를 보호하려 했다.

‘에스틸리아 교수님은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분인 것 같아. 말투도 시시때때로 바뀌고, 표정도 그렇고, 문득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보면 의외로 온화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고,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다시 무심해지고.’

이제야 루나의 말이 와닿는다. 에스틸리아는 늘 우리를 눈여겨봤고, 위험에서 지키려 노력했다. 마치 보호자처럼.

엘리샤는 그런 에스틸리아의 성정을 알고 있을 거다. 그래서 내게 눈짓한 거다.

“꺼져!”

에스틸리아의 강한 목소리와 함께, 나와 엘리샤는 무언가에 부딪히듯 뒤로 튕겨 나갔다. 하지만 에스틸리아는 우리를 해치려 하지 않았다. 단지 밀어냈을 뿐이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우리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뒤로 날아가자 긴장감은 더욱 짙어졌다. 벨락이 제지하지 않았다면 몇몇 단원은 이미 에스틸리아에게 검을 뻗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허공을 나는 와중에도 카인과 세실을 돌아봤다. 다행히 루나가 둘의 개입을 막고 있다.

“에스틸리아!”

그때, 익숙하고 우렁찬 목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그러자 거센 바람이 잦아들듯 에스틸리아의 마력이 잠잠해졌다. 벨락이 후우, 안도의 한숨을 쉬며 외침의 주인공을 돌아봤다.

에스틸리아의 표정이 고요해졌다.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쿠훌린의 앞에서 멈춰 섰다.

“무슨 짓이냐 에스틸리아. 섬으로 돌아오자마자.”

에스틸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에스틸리아. 너에게는 감사하고 있다. 루나와 아이들을 돌봐준 것도. 리아논의 회복을 위해 힘써준 것도.”

에스틸리아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쿠훌린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는 사뭇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에스티.”

그 순간 나는 에스틸리아의 눈동자에서 별빛이 발하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은백색 머리카락으로 변한 그녀를 보며 디네베를 떠올렸던 이유.

에스틸리아의 하늘빛 눈동자는 디네베의 그것과 똑 닮아 있었다.

.

.

.

“엄마아아!”

루나가 울음을 터뜨리며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병상에 누운 리아논은 다른 사람처럼 해쓱했다.

“와 주었구나······. 사랑스러운 루나프레나······.”

리아논이 루나프레나라고 부르는 걸 나는 처음 보았다. 그것이 그녀의 위중한 상태를 암시하는 것 같아 나는 마음이 아팠다.

“아아, 데미안······. 사랑하는 우리 아기······.”

리아논은 나와 루나를 통해 과거를 보는 듯했다. 나는 병상으로 다가갔다. 내 손을 잡으며 그녀가 웃었고, 나도 슬픔을 삼키며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것 보렴 루나프레나······. 데미안은 돌아올 거라고 했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서로를 마주하······.”

리아논의 기침은 갑작스럽게 터져 나왔다. 루나는 비명을 지르며 리아논에게 매달렸다.

쿠훌린이 그런 그녀를 부드럽게 떼어냈다. 그러나 루나는 쿠훌린의 팔을 밀치며 리아논에게 돌아가려 했다. 리아논의 기침은 계속되었고, 디네베가 울며 루나를 끌어안은 뒤에야 루나는 발작을 멈췄다.

“잠시 나가 있거라.”

문을 통해 나오며 나는 에스틸리아를 보았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표정은 무심했지만, 그 안에는 여러 감정이 녹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카······인······.”

리아논의 부름이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카인에게 손짓하며 쿠훌린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카인. 리아논이 너와 나눌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구나.”

쿠훌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카인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

.

.

“배를 탄 뒤로 증세가 더 악화됐다. 약해진 몸으로 항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거지.”

쿠훌린과 나, 루나, 세실, 카인, 디네베, 에스틸리아는 식당에 모여 앉아 있었다.

엘리샤도 함께하고 싶어했지만 에스틸리아가 사나운 눈으로 내쫓았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예요! 비비안 교수님을 섬에 들이면 되는 거였잖아요!”

루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쿠훌린이 그럴 수 없었던 이유를 그녀도 알 것이다.

쿠훌린은 리아논의 남편이지만, 또한 은월섬의 맹주다.

“미안하구나. 루나.”

“비켜요!”

쿠훌린이 루나의 안으려 하자, 루나가 악을 쓰며 밀쳐냈다. 이어 루나는 흠칫 놀란 눈으로 쿠훌린을 보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디네베가 다시금 루나를 끌어안았다. 디네베는 더욱 성숙해졌다. 점점 더 리아논을 닮아간다.

“불렀으면 써먹어야지. 데미안을.”

에스틸리아가 쿠훌린을 보며 말했다.

예상은 했었지만, 그 말을 통해 나는 그녀가 내 숨겨진 힘을 알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카인이 나오는 대로 리아논의 몸을 살펴볼게요.”

“고맙다. 데미안.”

내가 지닌 세계수의 혼돈으로 리아논을 치유할 수 있을까.

부정적인 생각이 자꾸만 마음을 뒤흔든다.

병색이 짙게 밴 그녀의 얼굴을 본 뒤로 그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데미안······!”

루나가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절박한 기대가 어려 있었다. 저 얼굴이 환한 미소로 바뀔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텐데.

디네베도 루나와 비슷한 감정을 담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문득 신녀가 된 디네베와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은월목의 신녀라면 리아논의 몸 상태에 대해 자세히 알지도 모르······.

“이봐, 신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옆을 돌아봤다.

에스틸리아의 눈은 디네베를 똑바로 향해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걸렸다.

“섬에 몇 해 동안 신녀가 등장하지 않았다고 해서 의아했는데, 그 안에 숨어 있었니?”

***

카인은 리아논의 머리맡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았다.

그는 왜 리아논이 자신을 따로 불렀는지 알 수 없었다. 카인은 그녀에게서 어머니와 같은 사랑을 느꼈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데미안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카인······.”

리아논의 목소리는 연약하고 나지막했다.

“손을······ 잡아주렴······.”

카인은 조심스레 리아논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했다.

한때 아름답고 생기 넘치던 그녀가 이렇게 변해버린 현실이 카인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왜······. 이제야······.”

카인의 목소리가 억눌린 채로 흘러나왔다. 리아논은 분명 이전부터 병의 신호를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녀는 우리를 부르지 않았을까.

카인은 다시금 찾아들 아픔을 직감했다. 그는 자신이 망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어떤 인간이 가족의 죽음을 열 번이 넘도록 견딜 수 있다는 말인가.

또한 그는 회귀의 과정에서 자신이 점점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괴이한 감각은 모르가나의 마법진에서 벗어나 홀로 제국을 향한 뒤로 더욱 선명해졌다. 수없이 죽고 되살아나며, 그는 강해졌다. 그러나 감정이 점점 마비되어 간다.

회귀는 그의 정신을 침식시키고 있다.

“울지 말렴······. 울지 말려무나 카인······.”

카인은 이 슬픔이 괴로우면서도 반가웠다. 데미안과 루나 외에도 자신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남아 있었다.

나는 인간이야.

나는 감정을 느낄 수 있어.

나는 아직, 망가지지 않았어.

“리아논.”

카인은 눈앞의 안개를 털어내고 리아논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리아논은 부릅뜬 눈으로 카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상한, 생소한 표정이었다. 지금까지 알던 그녀의 얼굴이 아니었다. 병색이 완연하다는 것과 무관하게, 마치 다른 사람이 눈앞에 있는 듯했다.

카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리아논은 믿을 수 없는 악력으로 카인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카인······!”

리아논의 외침은 속삭임처럼 가느다랬지만 카인의 귀에는 절규처럼 울려 퍼졌다.

“안 돼······! 안 돼 카인······!”

카인은 숨도 쉴 수 없이 리아논의 눈빛에 사로잡혔다. 리아논의 눈동자는 카인이 아닌, 불가사의한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했다.

“아아······! 제발······!”

리아논의 숨결이 불규칙해졌다.

카인의 마음속에 공포가 치솟았다. 리아논이 이대로 세상을 떠날 것만 같았다.

“대륙으로······ 돌아가서는······ 안 돼······!”

그녀의 말이 어두운 예언처럼 카인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카인은 방문을 향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발소리가 심장의 고동처럼 귀를 울렸다.

“너는 모두를 파멸로 인도할 거야. 카인.”

부서질 듯한 소음을 내며 방문이 열렸다. 카인은 멍한 눈으로 리아논을 돌아봤다.

리아논은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그의 손등과 심장에 지워지지 않은 자국을 남긴 채.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