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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66

166화 각자의 길 (4)

166화 각자의 길 (4)

“섬에 몇 해 동안 신녀가 등장하지 않았다고 해서 의아했는데, 그 안에 숨어 있었니?”

나는 에스틸리아의 말에 경악했다.

에스틸리아는 여전히 디네베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확신의 미소도 더욱 짙어졌다.

디네베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무슨······.”

“호오. 신체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건가? 하지만 분명 무언가를 느꼈을 텐데.”

에스틸리아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현실로 착각될 만큼 선명한 꿈을 꾼 적 없니? 특히 보름달이 떠오른 밤에 말이야.”

‘이 아이는 자각하지 못했어. 지금 너와 함께 겪는 일도 흐릿한 꿈 정도로만 여길 테지. 디네베의 육체가 성숙할 때까지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 몸에 갇혀있어야 해.’

언젠가 들었던 신녀의 말이 머리를 스쳤다. 그래서 나는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체 에스틸리아는 어떤 사람이지? 지금껏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신녀의 존재를 감지하다니.

“아······. 아······!”

무언가가 떠오른 듯 디네베가 나를 돌아봤다. 이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빠르게 시선을 피하더니, 두 뺨을 붉히며 식은땀을 흘렸다.

“에스틸리아.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말 그대로. 신녀는 등장하지 않은 것이 아니야. 네 딸의 몸 안에 숨어있지.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모르지만.”

“아,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디네베의 몸에 신녀가 숨어 있다니. 시, 신녀는 또 뭔데요?”

루나가 에스틸리아와 디네베를 번갈아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에스틸리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

“너, 설마 성년이 된 딸에게 신녀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거니? 왜? 은월섬의 인간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일인데.”

그녀의 입술이 이내 비웃음을 머금었다.

“네 딸이 영원히 순수한 소녀처럼 살아가길 원했던 거니? 하긴 루나 크라소타, 아니 루나프레나 아르테미스는 검술 실력과 상반되는 조금도 어른스럽지 않은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더군. 그래서 늘 친구들이 노심초사하며 붙어 있었지. 머릿속이 꽃밭으로 채워진 철없는 공주의 호위 기사처럼 말이야.”

쿠훌린이 눈썹이 조금 꿈틀거렸다.

그 모습을 통해 나는 그가 에스틸리아의 말을 일부 시인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머, 머릿속이 꽃밭이라니! 그런 적 없어요!”

그 말이 맞다. 루나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어린아이 같을 뿐, 성숙한 정신세계를 지녔다. 에스틸리아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그녀라면 지난 두 학기 동안 루나가 어떤 인물인지 충분히 파악했을 테니까.

그럼에도 에스틸리아가 저런 날 선 언행을 하는 이유는 쿠훌린을 자극하기 위해서다. 아마도 은월섬의 성인 중에서 신녀의 존재를 모르는 이는 루나뿐이겠지. 나와 카인과 세실은 어차피 외부인이니까.

“아, 아저씨!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신녀가 뭔데요! 왜 나만 모르냐고요!”

“아하하하! 이거 걸작이네! 너, 아저씨라고 불리는 거니?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딸에게?”

에스틸리아가 깔깔 웃었다.

루나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봤다가, 세실에게 시선을 돌렸다.

“세실. 너도 몰랐니?”

“으. 응. 몰랐어.”

“데미안. 너는?”

내가 우물쭈물하자 루나의 눈꼬리가 사납게 휘어졌다.

“데미안······! 너······!”

“뭐야 데미안. 너는 알고 있었구나? 저 아이가 신녀라는 걸.”

에스틸리아가 흥미롭다는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그때, 위층에서 카인의 고함이 들렸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벌떡 일어나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녀석답지 않은 다급한 외침. 무슨 일일까. 설마 리아논이······!

쿠훌린의 손이 부술 것처럼 문을 밀어 열었다.

“리아논!”

카인의 옆얼굴이 보였다.

그는 멍하니 리아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아논이 곤히 잠들었다는 것을 확인한 쿠훌린이 안도의 숨을 뱉었다.

“무슨 일이냐. 카인.”

쿠훌린의 물음에, 카인은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다고 답했다.

나는 그 말을 믿기 어려웠다.

잠꼬대였다고? 그게?

“그래. 오랜 여행에 지쳤을 테지. 이만 푹 쉬도록 해라.”

내 곁을 스쳐 지나는 카인을 보며 나는 조금 놀랐다. 녀석의 눈이 피처럼 붉다. 게다가 슬픔이 아닌 다른 감정이 느껴진다. 마치 공포 비슷한.

‘설마. 아니겠지.’

머릿속 생각을 털어낸 나는 리아논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세계수의 혼돈을 발현했다.

.

.

.

어둑한 조명이 내려앉은 방 안에는 나와 쿠훌린, 그리고 에스틸리아가 있었다.

쿠훌린의 표정은 어두웠다.

내 능력으로도 리아논을 낫게 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어서 얘기해 봐. 그 아이가 신녀라는 걸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쿠훌린과 달리 에스틸리아는 히죽 웃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나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녀는 쿠훌린보다 더욱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니까, 신녀가 네 입을 막았다는 말이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지만 굳이 왜 그랬을까? 은월섬의 모든 이를 당혹스럽게 만들면서까지.”

어디까지 진실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에스틸리아의 물음에 답하려면, 원래는 루나가 신녀가 될 예정이었다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오늘 있었던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렴. 가여운 디네베를 위해서라도. 루나프레나를 위해서라도.’

“······그건 모르겠어요.”

나는 사실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신녀는, 아니 세계수 이그드라실의 의지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다.

아무리 쿠훌린과 에스틸리아가 인간을 초월한 능력자라 해도 그 의지를 오롯이 헤아리고 이해할 수는 없다.

“숨기는 거니?”

에스틸리아의 눈빛은 마치 나의 내면을 뿌리째 탐색하는 듯했다. 나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카인이 무한회귀자라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

내가 밝힌 내용은 신녀가 된 디네베와 달빛나무 언덕에 오른 적이 있고, 그렇게 세계수의 혼돈을 얻었다는 것. 그리고 ‘어떤 이유’로 디네베의 미성숙한 육체에 깃든 신력이 힘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까지였다.

“은월병의 치유법은 어떻게 알았니?”

“세계수의 혼돈을 얻으며 알게 되었어요.”

“너는 거짓말하고 있어.”

에스틸리아의 눈에는 단호한 확신이 배어있었다.

“왜 그럴까? 설마 우리를 농락하며 즐기는 것은 아닐 테고.”

“에스틸리아.”

“아저씨는 빠져있어. 그거 아니? 네가 바보처럼 말랑하게 구니까 네 딸이 그렇게 천진난만한 거야. 물론 나는 그런 성격을 싫어하지 않아. 지금이 평온의 시대라면 말이지.”

에스틸리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제국에서 불온한 바람이 불고 있어. 서부가 힘을 모아 단단한 세력을 일구고 있더군. 조만간 전쟁이라도 벌일 것처럼.”

그녀의 말은 사실이다.

머지않아 서부 제국과 동부 제국 사이에서 국지적 전쟁이 발발한다.

“네가 흑기사라는 놈에게 칼 맞고 누워있는 동안 강력한 흑마법진이 발생했지. 암영의 수장도 네몬 블레오파드로 바뀌었고. 게다가 대륙의 이상 현상은 이미 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야. 소서러에 관한 신녀의 예언도 사실이었지. 알겠니? 모든 상황이 신녀의 다음 예언을 손 모아 가리키고 있어. 세계의 격변. 그리고 혼돈의 시대.”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을 뜬 에스틸리아가 돌연 내 목을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두 소서러를 이 세계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구원의 해답일는지도 모르지.”

나는 진심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지금까지 알던 에스틸리아의 눈빛이 아니다. 마을 앞에서 단원들과 대치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직감했다. 에스틸리아는 나와 카인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사실이 있다. 카인은 무한회귀자다. 만약 에스틸리아가 카인을 죽인다면, 되살아난 녀석은 그녀를 최우선 타깃으로 삼을 거다.

“에스틸리아!”

쿠훌린이 에스틸리아에게 검을 겨눴다. 그도 느낀 거다. 에스틸리아의 살기가 ‘진짜’라는 것을.

“흐응. 이제야 사내다운 얼굴이 됐네? 거봐. 할 수 있잖아. 왜 그렇게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었던 거니? 큰 딸에게 미움받아서? 병든 아내 때문에? 하지만 그 정도로는 나를 막을 수 없어. 내 눈을 속이지는 못해. 너는 약해졌어. 흑기사에게 당한 뒤로. 뭣하면 시험해 봐도 좋아. 이 거리라면 내가 데미안을 불태우는 것보다 네 검이 빠를지도 모르지. 하지만 신중해야 할 거야. 정말로 나를 죽일 생각으로 덤비지 않으면 일말의 기회마저 사라질 테니까.”

내 의지와 상관없이 혼돈이 꿈틀거렸다. 마치 숙주의 죽음을 직감한 기생 생물이 생존의 욕구를 탐하듯이.

“까불지 않는 게 좋아 데미안. 나는 소서러 따위 두려워하지 않거든.”

에스틸리아의 입술 사이로 잡음의 파동이 일었다. 그러자 꿈틀대던 혼돈이 꼬리를 내리듯 잦아들었다. 혼란스럽다. 지금껏 나는 이 정도의 공포를 느껴본 적이 없다.

“에스티!”

쿠훌린의 외침과 함께, 목의 압력이 지워졌다.

파동과 살기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에스틸리아는 편안하게 의자에 앉아 찻잔을 입에 가져가고 있었다.

이 정도의 상황이 벌어졌지만 아무도 오지 않는다. 에스틸리아가 무언가의 방법으로 이곳을 밀실로 만들어버린 거다.

“······빌어먹을. 이런 장난은 그만둬. 에스티.”

“장난으로 보였니?”

나는 가쁜 숨을 뱉으며 목을 매만졌다. 그녀의 말대로 장난이 아니었다. 조금 전 에스틸리아가 보였던 살기는 진짜다. 그 증거로, 쿠훌린은 검까지 뽑아 들어 그녀를 막으려 했으니까.

하지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에스틸리아가 내게 그런 살기를 보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찻잔을 비운 에스틸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푹 쉬렴.”

***

“흐응. 이게 얼간이 엘리샤의 솜씨라는 거지?”

쿠훌린이 든 등불에 의지해, 에스틸리아는 두 개의 관에 누운 시신을 내려다봤다.

“너희들이 하는 짓,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데?”

말과 달리 쿠훌린을 돌아보는 에스틸리아의 표정은 온화했다.

“그래서, 내게 원하는 게 뭐니? 시신의 보존?”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지.”

“에스티.”

“······그렇게 부르는 걸 보니 다른 부탁도 있는 모양인데.”

등불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붉었다.

“네 눈에는 어떻게 보이지?”

“묻고 싶은 게 정확히 뭐니?”

“두 시신이 같은 핏줄을 지녔는지 알고 싶어.”

“역시 하센베르크였나.”

에스틸리아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나라도 그런 것까지 알 수는 없어. 뭐, 그 빌어먹을 할망구의 계략에 넘어갔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신녀께서 힘을 회복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건가.”

“마음 아프니? 네 딸이 신녀라는 게.”

“데미안 덕분에 디네베는 은월병을 극복했어.”

“재발하면.”

“치유제 만드는 방법을 알아.”

“비비안은 리아논의 증세가 어떤 병의 후유증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어.”

“데미안에게는 왜 그런 거지? 정말로 죽일 셈이었나?”

에스틸리아는 쿠훌린이 의도적으로 화제를 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데미안은 그 일과 관계없어. 에스티.”

“나도 알아.”

“그런데 왜.”

에스틸리아는 대답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녀도 화제를 돌렸다.

“엘리샤가 조금 수상해.”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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