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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67

167화 각자의 길 (5)

167화 각자의 길 (5)

삐걱, 침대 다리가 기울어지는 소음에 엘리샤는 눈을 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방. 오랜만에 돌아온 집이다. 아직도 이곳에는 엄마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그녀는 일부러 이 집을 관리하지 않았다.

엘리샤는 침대에 누운 채 이불을 당겨 끌어안았다. 다시 삐걱, 그녀의 나이보다 오래된 침대가 말을 건다. 퀴퀴한 냄새. 하지만 그리운 그때를 떠올리게 하는.

엘리샤는 끝도 없어 보이는 허공의 어둠을 멍하니 응시했다. 나는 무얼 하는 것일까.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가르쳐 줘. 엄마.

어둠은 점차 눈에 익어갔다. 어스름히 형태를 드러내는 것은 벽과 천장을 잇는 네모난 선과, 그 아래의 낡은 테이블. 그리고 의자에 걸터앉은 누군가.

“······!”

엘리샤가 반응하기도 전, 벼락처럼 밀려든 손아귀가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나를 속였더군요. 엘리샤.”

어둠 속에 떠오른 호박색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말했을 텐데요. 당신의 목줄. 내 손에 있다고.”

“카······인······!”

“이제야 의구심이 풀렸네요.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강한 마법사가 될 수 있었는지. 쿠훌린이 어떻게 아무런 문제 없이 우리에게 아르카넘 홀의 입학시험을 치르게 할 수 있었는지.”

엘리샤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눈앞의 짙은 그림자는 자신이 알던 카인이 아닌 것 같았다.

“당신이 제국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아르카넘 홀의 특별 교수로 임용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에스틸리아 교수 덕분이겠죠. 말해봐요 엘리샤. 나와의 관계를 그녀에게 말했나요? 당신은 처음부터 이중 첩자였나? 아니면 당장의 살길을 모색하기 위해 이리저리 들러붙는 박쥐 같은 인간인가.”

엘리샤의 얼굴이 붉게 팽창했다. 그녀는 호흡할 수 없었다.

“겁쟁이인 당신이 그동안 누구를 흉내 낸 가면을 쓰고 있었는지도 알겠더군. 네 스승인 에스틸리아. 그래. 그 여자의 하늘색 눈동자를 처음 봤을 때부터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었지.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이 아득한 눈빛. 나는 이미 경험한 적이 있거든.”

엘리샤는 카인의 손목을 쥐며 발버둥 쳤다. 억지로 마법을 발현하려 하자, 시커먼 손이 엘리샤의 입을 틀어막았다.

“닥치는 편이 좋아. 정말로 죽고 싶지 않다면.”

엘리샤는 공포감에 짓눌려 카인을 바라봤다. 그의 말이 맞다. 겁쟁이 엘리샤는 에스틸리아를 동경했고, 그녀의 당당한 모습을 흉내 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엘리샤가 쓴 얄팍한 가면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카인의 그림자가 연기처럼 멀어졌다.

엘리샤는 터져 나오려는 기침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이제 말해봐요 엘리샤. 내가 알아야 할 것에 대해. 남김없이.”

***

이튿날, 1층 식당에서 마주한 카인은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루나는 두 눈이 퉁퉁 부어 있다. 그런 그녀를 카인이 누구보다 세심히 챙겼다.

지난밤 신녀의 방문은 없었다. 예상한 일이기도 했다. 달은 아직 차오르지 않았다. 보름달이 떠오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아침 식사를 마친 나는 리아논의 방으로 올라갔다. 피로는 완전히 회복됐다. 오늘 최선을 다한다면, 어쩌면 리아논의 병을 낫게 할 실마리를 찾을지도 모른다.

“데, 데미안. 어때?”

방을 나서는 내게, 루나가 간절한 기대를 품은 눈으로 물었다. 그러나 내 표정을 보고는 바로 울상이 됐다.

루나의 저런 얼굴을 보는 것이 너무 괴롭다.

“데미안.”

성을 찾아온 에스틸리아가 나를 불렀다. 내게는 어떤 의미에서 구원이었다.

에스틸리아는 나를 데리고 마을을 벗어났다. 은월섬의 겨울은 따스한 편이다. 한겨울에도 들풀의 일부가 살아 있다. 아마도 세계수 이그드라실의 영향이겠지.

사각사각, 장난치듯 들풀을 밟으며 걷는 에스틸리아는 나보다 어린 소녀처럼 보였다.

“몇 살이에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나는 당황했다.

그러나 에스틸리아는 화내지 않았다.

부드럽게 입가를 올리며 그녀가 나를 돌아봤다.

“왜. 너무 어려 보이고 예쁘니?”

“네.”

그녀의 분노가 두렵기도 했지만,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에스틸리아가 맑게 웃었다.

그러고는 발뒤꿈치를 들어 내 목을 팔로 휘감았다.

“비밀 하나 알려줄까? 나의 사랑스러운 제자에게.”

“······그 제자를 어제 죽이려 하셨잖아요.”

툴툴대면서도 나는 재빠르게 자세를 낮춰, 내 목에 매달린 그녀를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내가 정말 죽일 거로 생각했니?”

“쿠훌린이 막아줄 거라는 기대도 있었어요.”

“그래. 그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니까.”

에스틸리아가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보면 볼수록 디네베가 떠오른다. 생김새는 분명 차이가 있는데도.

“그래서 그 비밀이 뭔데요?”

“궁금하니?”

“네.”

“나는 늙지 않아.”

“네?”

히죽 미소 지은 에스틸리아가 돌연 내 등에 매달렸다.

졸지에 그녀를 업게 된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그녀의 두 다리를 받쳤다.

“이야. 엉덩이를 더듬는 손길이 아주 전문적인데? 루나에게도 이랬니? 아니면 세실리아에게?”

‘데미안 너! 방금 세실 엉덩이 만졌지!’

‘무슨!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니! 내가 방금 봤는데! 너, 그래서 세실을 업고 가겠다고 했구나! 이번이 처음이 아닐 거야! 변태!’

문득 부서진 땅에서 루나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라 나는 피식 웃었다.

“어머? 얘가 웃네?”

“안 웃었어요.”

“내가 다 봤거든?”

“늙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말 돌리는 거니?”

“네.”

에스틸리아가 까르르 웃으며 내 어깨를 손으로 쳤다.

철없는 여동생을 등에 업은 오빠가 된 기분이다.

“그 말대로. 나는 늙지 않아. 내 몸 안의 시계는 멈춰버렸거든. 성년이 되기도 전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는 시늉이라도 하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구나?”

“늙지 않는 인간은 없으니까요.”

“내가 인간이 아닐 수도 있잖니?”

“설마 엘프예요?”

“아니. 엘프의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어. 나는 이그드라실 중에서도, 순혈이니까.”

“순혈?”

에스틸리아의 자그만 두 손이 내 머리카락을 쥐었다.

“내가 오른쪽 손을 당기면 오른쪽으로 가고, 왼쪽 손을 당기면 왼쪽으로 가는 거야. 알겠니?”

“······.”

“가만히 서서 뭐 하니? 이렇게 양손을 모두 당기면 전력으로 달리는 거야. 가자! 데미안 마차! 이히히힝!”

[전력질주(Lv.4)를 발현합니다.]

.

.

.

“좋아. 아주 성능 좋은 마차였어.”

에스틸리아가 내 등에서 뛰어내렸다.

데미안 마차는 달빛나무 언덕에서 멈춰 섰다.

“이리 오렴.”

에스틸리아의 손짓에, 나는 그녀의 곁에 앉았다.

에스틸리아가 다시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봤다. 나는 왠지 부끄러워져 시선을 피했다.

“흐응. 귀엽네. 왜 루나와 세실리아가 너를 좋아하는지 알겠어.”

“루나는 카인을 좋아해요.”

“그러니? 세실리아는 너를 좋아하고?”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럴 거야. 사람의 마음은 자주 변하거든.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다가도, 다시 보면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지.”

‘여자의 말과 행동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야.’

“누구의 이야기에요?”

“글쎄. 누구의 이야기일까?”

“쿠훌린과는 무슨 관계에요?”

“그렇게 내 나이를 유추해 보려는 거니?”

“그런 의도도 있지만 궁금해서요.”

“순혈에 관해 물었었지?”

“말 돌리시는 건가요?”

“응.”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에스틸리아도 웃었다.

“이 섬은 원래 이그드라실 혈족의 섬이었어. 아주 오래전, 어떤 이유로 대륙에서 분리되어 떠밀려온 작은 조각. 당시 많은 조각이 근해에 떠 있었지만 이 섬만이 살아남았지. 아니, 주위의 조각들을 끌어당기며 더욱 크고 단단한 섬으로 변했어. 그 이유를 알겠니?”

내 눈은 저절로 달빛나무를 돌아봤다.

“세계수 때문인가요?”

“맞았어. 세계수 이그드라실이 이 섬을 지켜준 거야. 당시 섬과 함께 대륙에서 떨어져 나온 소수의 인간이 이그드라실이라는 성씨를 갖게 된 이유이기도 해.”

에스틸리아도 달빛나무를 바라봤다.

“그들이 세계수를 발견한 것은 필연이었어. 정확히 말하면 세계수가 그들에게 자신을 드러냈지. ‘신녀’라는 매개체를 통해. 그렇게 최초의 신녀가 태어났고, 시간이 흐르며 이그드라실 혈족은 세계수와 닮은 은백색 머리카락을 갖게 되었어. 하지만 신력만은 하나의 핏줄을 통해서만 전해졌지. 혈족은 그 유일의 피를 순혈(純血)이라 불렀고, 자연스레 순혈의 이그드라실은 섬의 통치자가 되었어.”

나는 홀린 듯이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내용이다.

“그러던 중, 어느 신녀가 세계수의 의지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했어. 그녀는 혈족에게 배를 만들라고 지시했어. 아무도 배를 만드는 방법을 몰랐지만 신녀는 능숙하게 모든 것을 지휘했지. 그렇게 첫 번째 은월호가 바다에 띄워졌고, 신녀의 간택을 받은 소수의 인간이 대륙으로 떠났어. 그들의 목적은 하나였어. 아르테미스를 만나는 것.”

내 머릿속에 은월호를 타고 떠나는 은백색 머리카락의 사람들이 그려졌다.

“당시 아르테미스는 왕족도, 귀족도 아니었어. 그저 이름깨나 알려진 투박한 용병단의 우두머리였지. 대륙으로 건너간 이그드라실 혈족은 금세 용병단을 찾아냈어. 그리고 단장인 아르테미스와, 헤카테를 비롯한 그의 일부 측근을 섬으로 데려왔지.”

헤카테.

스카자하에서 벨락과 라이칸, 그리고 트리스탄으로 이어지는 아르테미스의 충신 가문.

“섬에 도착한 아르테미스는 신녀를 만났고, 이후 한동안 섬에 머물렀어. 이그드라실은 외부인을 정중히 대했지. 무뢰배 같았던 그들도 점차 섬의 생활에 적응했어. 그중에서도 아르테미스는 신녀와 매우 가깝게 지냈어. 그러면서 점차 외모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지.”

“변화라고요?”

에스틸리아가 손을 뻗어 내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찬란한 금발이던 머리카락이 지금과 같은 은빛으로 바뀌어버린 거야. 게다가 변한 건 외모만이 아니었지. 아르테미스는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되었어. 현대의 사람들은 ‘블러디드’라고 부르는.”

내 눈이 점점 커졌다. 에스틸리아가 피식 미소 지었다.

“그래. 네 생각이 맞아 데미안. 쿠훌린과 루나프레나가 지닌 은월(銀月)의 마력. 그 힘의 발현은 이 섬에서 시작된 거야. 훗날 이곳이 은월섬으로 불리게 되는 기원이자, 당시의 신녀가 아르테미스를 섬에 들인 여러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지.”

“그럼 다른 이유는요?”

“신녀는 먼 훗날 닥쳐올 위험한 미래를 대비하려 했어. 그러나 당시에는 자세한 것을 알 수 없었지. 신력은 대를 이어갈수록 강해지는 힘이니까. 또한 그것이야말로 순혈의 이그드라실에게만 신력이 전해졌던 이유야. 아무튼 당시의 신녀는 어렴풋한 미래를 보았어. 그럼에도 알 수 있었지. 아르테미스에게 섬의 존재를 알리고, 힘의 발현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에스틸리아의 말에 의하면 신력은 순혈의 이그드라실에게만 이어진다. 하지만 디네베는 순혈이 아니다. 게다가 디네베 이전에 신녀가 될 운명이었던 이는 루나였다.

“디네베가 신녀가 된 것이 의아하니?”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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