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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68

168화 각자의 길 (6)

168화 각자의 길 (6)

움찔하는 데미안을 보며 에스틸리아는 웃었다.

“네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거 같아서 놀랐니?”

대답은 없다.

그렇지만 에스틸리아의 눈에는 보인다. 데미안이 품은 여러 감정. 그가 지닌 세계수의 혼돈을 통해.

“디네베 이전의 신녀가 누구였는지 아니?”

“엘리샤의 어머니라고 들었어요.”

“그녀도 순혈이 아니었지. 따뜻하고 강한 사람이었어. 얼간이 쭉정이에 겁쟁이 울보였던 엘리샤와는 달리.”

“······이제는 겁쟁이 울보까지 추가된 건가요.”

“네 눈에는 엘리샤가 어른처럼 보일지 몰라도 내 눈에는 아니야. 그 아이는 어릴 때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어. 얼간이에, 쭉정이에, 겁쟁이에, 울보지.”

“없다고 너무 막말하시는 거 아니에요?”

“너 없을 때 네 욕할 것 같아 불안하니?”

“조금요.”

에스틸리아는 데미안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흐응. 역시 귀엽네. 루나와 세실리아만 아니었으면 내가 확 덮쳐버릴 텐데.”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은 것 같은데요.”

“내가 몇 살인 줄 알고?”

“엘리샤보다는 많잖아요.”

“연상은 싫으니? 이렇게 젊고 예쁜데?”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러면?”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닌 거, 아니까요.”

에스틸리아의 눈이 배시시 가늘어졌다.

“아까 말했잖니. 사람의 마음은 자주 변한다고.”

“정말로 변하면 다시 이야기해 주세요. 심각하게 고민해 볼게요.”

“아하하하하!”

데미안의 팔을 치며 웃던 에스틸리아가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그거 아니? 너, 쿠훌린과 닮았어. 정확히 말하자면 어린 시절의 쿠훌린을.”

그러고는 데미안의 귀에 속삭였다.

“나는 쿠훌린의 머리카락을 몰래 금발로 바꿔본 적이 있거든.”

에스틸리아는 그날을 회상했다. 자신의 변한 머리색을 보고 불같이 화내던 소년.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시간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어.

나를 남겨두고.

***

하늘을 바라보는 에스틸리아의 눈은 슬퍼 보였다.

그래서 나는 화제를 돌렸다.

“엘리샤에게 머리 염색 마법을 가르친 것도 에스틸리아죠?”

“그 아이는 제 머리색을 싫어했거든. 라이칸이 자꾸 놀린다는 이유로. 얼간이 엘리샤. 사내아이란 마음에 드는 여자아이를 괴롭히는 짓궂은 방식으로 관심을 드러낸다는 것도 모르고.”

“왜 울보 라이칸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엘리샤가 엉엉 울며 내게 하소연했거든. 라이칸을 혼내주고 싶은데 힘으로 이길 수가 없다고. 그래서 마법을 가르쳐줬어. 엘리샤는 지독하게 혼나면서도 열심히 배웠지. 그 결과로 몇 달 후 ‘울보’라는 별명은 라이칸의 것이 되었어.”

에스틸리아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녀의 얼굴이 밝아지자 나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섬의 전통이 이어졌다면 엘리샤의 어머니는 신녀가 되지 않았을 거야. 은월병으로 죽는 일도 없었겠지.”

“하지만 은월병은 이그드라실 혈족에게 무작위로 찾아드는 병이잖아요.”

“순혈은 은월병에 걸리지 않아.”

“네?”

“은월병은 순혈이 아닌 이그드라실이 신녀가 되며 발생한 부작용이거든. 그래서 ‘피의 저주’라고 불리는 거야.”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라바다는 루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은월병은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던 병이라고.

“궁금하니? 왜 순혈인 내가 신녀가 아닌 것인지. 왜 순혈이 아닌 이그드라실이 신녀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무슨 낯짝으로 돌아온 것이냐. 에스틸리아.’

스카자하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에스틸리아를 마주한 그녀는 단 하나의 강렬한 감정을 드러냈었다. 분노.

나는 에스틸리아에게 묻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내가 묻고 싶던 모든 것이 목 아래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다정하구나. 너는.”

에스틸리아의 두 손이 내 볼을 감쌌다. 잠시 그렇게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불쑥, 나의 품에 손을 넣었다. 뭐야. 정말로 덮치려고?

“이렇게 귀여운 아이는 더 빨리 소개해 줬어야 하는 거 아니니?”

에스틸리아의 손에는 먼지가 들려 있었다.

그녀가 먼지를 향해 속삭였다. 그래. 네가 쿠훌린을 구해준 거로구나.

“아르카넘 홀로 돌아갈 거니?”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다.

“말했듯이 리아논의 병은 낫지 못할 거야. 만약 루나가 아르카넘 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너는 어떡할 거니?”

“에스틸리아는.”

“그 빌어먹을 할망구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 봤잖니. 은월섬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루나가 아르카넘 홀에 가지 않는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까.

일 년 전에는 루나와의 헤어짐을 각오하며 제국행을 결정했다. 카인에게 세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리고 아리엘과 친분을 쌓기 위해.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나는 아리엘과 가까워졌고, 세실도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아니.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나와 함께 가자. 데미안.’

“고민하는구나? 루나를 선택할지. 세실리아를 선택할지.”

“이번에는 진짜 아니거든요.”

“설마 ‘에스틸리아’라는 선택지도 생긴 거니? 이야. 여자 꼬시는 기술이 훌륭한데?”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에스틸리아를 돌아봤다.

“충분히 고민해 보렴.”

에스틸리아가 내 뺨을 꼬집으며 웃었다. 이어,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봤다.

“뭐해? 마차 고장 났니?”

***

은월섬은 깊어진 겨울의 품에 안겨있었다.

창가에 기대어 멍하니 밖을 내다보던 나는 방문 두드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데미안. 잠깐 할 이야기가 있어.”

문을 연 이는 루나였다.

“여기서는 말고, 밖에서.”

루나는 말없이 계단을 내려가 성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녀의 옆을 걸었다. 바람이 불었지만 많이 차갑지는 않았다.

루나는 마을의 불빛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걸었다.

“데미안.”

돌연 루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주저앉았다. 내가 마주 앉자 그녀가 나를 끌어안았다. 오열하고 있다.

“흐흑······! 흐흐흑······!”

내 품에서 한참을 울던 루나가 고개를 들었다. 투명한 눈동자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데미안······. 나······ 내일 못 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아 나도······. 너희들과 약속했지만······, 하지만 아빠를······, 흐흑······, 아빠를 저대로 두고 갈 수는 없어······.”

나는 오늘 쿠훌린을 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차가워진 리아논의 시신을 내려다보던, 마치 영혼이 빠져버린 듯한 처참한 얼굴을.

“언제나 밝고 활기찼던 아빠가······, 아빠가 저러고 있단 말이야······. 먹지도······, 자지도 않고, 저렇게 멍한 얼굴로······! 아빠의 저런 얼굴은······, 저런 얼굴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단 말이야 데미안······!”

격렬한 진동이 느껴진다. 그녀만의 떨림일까. 아니면.

나는 멍하니 밤하늘의 보름달을 올려다봤다.

‘구경하러 갈까? 데미안.’

왜일까.

지금 카인의 목소리가 떠오르는 이유는.

‘쿠훌린에게 혼나지 않을까?’

‘걱정 마. 절대 들키지 않을 테니까.’

‘세실도 데리고 가자.’

‘세실은 아마 가고 싶지 않을걸.’

히죽 웃던 카인의 얼굴.

‘오늘은 둘이서 가자. 데미안.’

카인과 함께 성을 내려가 벽을 넘었다. 그러고 보니 녀석은 그 비밀 통로를 어떻게 알았을까.

‘언덕까지 경주다! 데미안!’

카인은 정말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귀를 스치는 바람 소리.

얼어붙은 들풀이 부서지던 소리.

별과 달의 노랫소리.

‘나와 함께 가자. 데미안.’

그동안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그래서 나의 심연 깊숙이 꼭꼭 감춰두었던 그날의 감정을 나는 흐느끼는 루나를 품에 안은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카인과 함께하고 싶다.

하지만······.

다시 바람이 분다. 나와 루나를 떼어내려는 듯 집요하게 밀려든다. 나는 더욱 강하게 루나를 끌어안았다. 들썩이던 그녀의 어깨가 잦아든다. 울음을 그치고 있다.

유난히 꼬리 길던 차가운 바람도 울음을 그쳤다.

***

이른 아침, 은월호의 돛이 펴졌다.

엘리샤는 배에 오르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활기찬 모습이었다. 리아논의 장례를 치르며 누구보다 슬피 울던 그녀를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카인. 괜찮아?”

세실은 카인이 걱정되었다.

은월호에는 벨락, 에스틸리아, 엘리샤를 포함한 몇몇 단원들, 그리고 카인과 세실이 타고 있었다.

“루나를. 그냥 둘 수. 없었을 거야.”

세실의 조심스러운 말에 카인은 고개만 끄덕였다.

배가 움직이자 내내 육지를 바라보던 카인이 쓸쓸히 고개를 숙였다. 세실은 카인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역시 오지 않는구나······.’

오늘 아침 성을 나서며 쿠훌린은 카인과 세실의 어깨에 손을 얹어 주었다. 희미하게 미소도 머금었다. 하지만 그렇게 슬픈 미소는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루나는 마을을 벗어나는 카인과 세실에게 달려와 엉엉 울었다. 해안까지 따라오려는 루나를 카인은 억지로 막았다.

‘루나를 부탁해. 데미안.’

“세실리아.”

카인의 목소리에 세실은 그를 돌아봤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동정심에 나를 따라올 필요는 없어.”

“그런 거. 아니야.”

카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세실은 카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말할 수 없이 슬픈 듯도, 어찌 보면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네가 섬을 떠나기 싫어하는 거, 알고 있어.”

세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고마워 세실리아. 지금까지 나의 부탁을 들어줘서. 아르카넘 홀에 따라와 줘서.”

세실은 당황했다.

카인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돌아가. 데미안과 쿠훌린이 있는 곳으로. 너의 집으로.”

“나. 나는······.”

카인의 손이 부드럽게 세실의 어깨를 짚었다.

“나는 괜찮아. 잘 해낼 수 있어. 엘리샤와 에스틸리아도 있잖아.”

그의 말은 세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이었다. 섬에 남고 싶었다. 루나와 쿠훌린 곁에 있고 싶었다. 데미안의 곁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카인을 떠날 수는 없다. 자신마저 섬에 남는다면 카인은 혼자가 된다.

‘세실은 내 친구다. 나는 친구를 버리지 않아.’

“어서, 세실리아. 영원히 못 볼 것도 아니잖아?”

카인이 소년처럼 웃었다.

“우리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잖아. 타인 때문에 간절히 원하는 것을 포기할 필요는 없어.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결정하는 거야.”

순간 세실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카인이 저렇게 말해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의 말이 맞다.

세실은 지금껏 친구들을 따라다니기만 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세실.’

죄책감에 떨던 세실에게 쿠훌린은 그렇게 말해주었다. 데미안도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세실은 잠시나마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카인은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데미안과 루나가 함께하지 않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데미안과 루나도 자신의 의지로 섬에 남는 것을 택했다. 모두 다 스스로의 길을 나아가고 있다.

오직 나만이, 여전히 남의 삶을 살고 있었다.

“······카인.”

살다 보면 수많은 선택지를 마주한다. 어떤 결정을 내리듯 정답이란 없을 것이다. 스스로 결정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태어나 처음이었다.

이토록 기분 좋게 울리는 심장의 고동은.

첨벙!

바다로 뛰어들었다. 단원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깔깔대는 에스틸리아의 웃음소리도 들렸다.

“또 보자! 세실리아!”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카인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팔을 뻗었다. 다리를 움직였다. 드넓은 바다 위를 힘껏 헤엄쳤다.

하늘은 파랬다. 바다도 파랬다. 머리 위로 흰 구름이 보였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물 위에도 하얗게 물거품이 일었다.

서서히 바다빛이 변해갔다. 투명해졌다. 발아래로 까끌까끌한 모래가 느껴졌다.

두 발로 땅을 디디며 일어섰다. 좌우로 머리를 털어내자 반짝이는 물방울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제야 세실은 뒤를 돌아봤다. 은월호는 이미 점처럼 작아져 있었다. 세실은 카인이 짓고 있을 표정을 따라 해보았다.

어금니를 드러내며 힘껏 미소 지었다.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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