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169

168. 거지남매 – 내면

레오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고개를 똑바로 치켜들어 키가 큰 페테르 백작을 쏘아보며 말했다.

“모른 척하실 필요 없습니다, 백작님. 다 알고 왔으니까요.”

“…저희가 만난 적이 있습니까?”

게스타브 페테르 백작은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귀족다운 행동이다. 그네들은 여간해선 본심을 솔직히 털어놓으려 들지 않았다.

솔직함은 손쉬운 무기다.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공감을 사고 도움을 얻을 수 있지만, 언제라도 꺼낼 수 있는 패였다.

반면 본심을 숨기기는 어렵다.

한번 들통이 나면 되돌릴 수 없어서 귀족은 언제나 말과 몸가짐에 주의하는 것이었다.

물론, 레오에겐 들통이 난 지 오래였다. 과거라 하기도 뭐한 이전에 그는 본심을 속삭였었다.

– “왕자님. 또 도망가십니까?”

– “하하하. 놀라셨군요. 아주 어렸을 때 몇 번 뵀었는데… 기억하지 못하시겠죠? 하지만 저는 처음 뵌 순간에 바로 알아봤죠. 두 분 다 살아계셨군요.”

“백작님은 제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아주 어렸을 적에 몇 번 뵀었는데…”

레오가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정면돌파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미약한 반응이 있었다. 페테르 백작의 무표정한 얼굴이 움찔, 흔들렸고, 레오는 그의 가면에 쐐기를 박아넣었다.

“아니면, 남작님이라고 칭해야 기억하시겠습니까?”

“…물러가 있게.”

백작이 곁에 있던 집사에게 손짓했다. 집사가 나가자 공손한 예법을 취했는데. 오른손을 배에 붙이고 왼손을 등에 대어 허리를 숙이는, 왕 또는 왕자를 맞이하는 자세였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진 않았다. 백작은 허리만 살짝 굽혔을 뿐, 눈은 레오를 뜯어보고 있었다.

“앉으시지요.”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모나크 남작은 불가사의한 왕자를 한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놀랍군요.”

많은 것이 내포된 감탄이었다.

살아있는 게 신기하다. 근위기사가 된 것은 놀랍다. 그리고, 날 기억하는 건 경악스럽다.

왕자를 만난 건 십 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그는 소년이라 부르기도 어려운 어린이였고, 왕궁을 둘러보다 우연히 만난 왕자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한 것이지, 기억하길 바라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천재.

이 왕자는 타고난 천재임이 틀림없었다. 에릭 왕자가 그렇게 급하게 동생을 내쫓은 이유를 게스타브는 알 것 같았다.

“공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묻었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유감이군요.”

– 달그락.

게스타브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차렸고, 레오는 짐짓 찻잔을 휘저었다.

이번엔 레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질문을 들었다는 듯이, 슬픈 감정을 덤덤히 내비칠 뿐이었다.

난 이러고 있어도 된다. 이제 말을 꺼내 수습해야 하는 사람은 백작이었다.

하지만 왕자가 그런 수작을 부리고 있음을 모를 백작이 아니었다.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어서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지 궁금해서 한 질문이었고, 공주가 죽었다면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게스타브는 그럼 나를 왜 찾아왔을까 ─ 더듬어 나갔다.

“일은 고되지 않으십니까?”

“다행히 할 만합니다.”

“그러시군요. 근위기사시니, 타탈리아 왕가의 은덕이겠습니다.”

레오의 눈썹이 꿈틀, 치켜 떠졌다.

감히 내가 예리엘 왕가의 적통임을 알면서 다른 왕가의 은덕을 운운하다니… 비록 떠보기이지만, 여기서 나는 화를 내야 했다.

하지만 화내는 것도 저자의 예측 반경 안에 있는 행동이다.

내게 야심이 있는지. 없는지.

화내거든 제 야심을 위해 부탁하러 온 처지이므로 어쨌든 화를 낸 대가로 불리한 입장에 설 것이고, 긍정하거든 야심 없는 일개 기사로서 찾아왔다고 받아들일 것이었다.

양쪽 다 만족스럽지 않다.

레오는 차를 홀짝 들이켜 시간을 벌었다. 조심스럽게 골라낸 단어로 모나크 남작을 흔들었다.

“아니요. 주신의 은덕입니다.”

“…”

이건 무슨 뜻인가.

백작은 오랜만에 갈증으로 목이 타오르는 걸 느꼈다.

아무 의미 없는 말일 수도 있다. 왕자가 십자교회의 신도라면.

하지만 그러기에는…

[ 퀘스트 : 귀족도살자 50/50 – {기품} 능력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

[ 퀘스트 : 반역자 10/10 – {왕의 피} 능력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범상치 않았다. 이런 사람이 말을 되는대로 뱉을 리 없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혹시? 하는 생각이 스쳤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굳이 주신을 들먹였다는 건…

“독실한 신도이신가 봅니다.”

“모나크 남작님만 하겠습니까?”

내게도 차가 있었으면.

게스타브 모나크 남작이 혀로 입술을 훔쳤다. 하지만 몸이 천천히 기울더니 남작은 불경스럽게 다리를 꼬아버렸다.

당신은.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어째서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제가 교회에 성실히 다니는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축성 받은 장신구를 차지 않았다 해서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중요한 건 ‘내면’이 아니겠습니까?”

“옳으신 말씀입니다. 왕자님께서는 저에 관해 정말 많은 걸 알고 계시는군요. 그러면… 제겐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제기랄. 똑같은 반응이다. 레오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베르크 추기경도 이랬다.

페테르 백작의 이름을 흘리자 귀족의 대화 따위는 집어치우자는 태도를 보였고, 이후로 백작과 관련한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걸 알아낼 생각이었다.

{바르바토스의 팔찌}로 백작을 매혹해 충성의 맹세를 받아내고, 모든 것을 실토하게 할 계획이었다.

가이단 후작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이래서는 곤란했다. 이 주제로 더 자극했다간, 지금 대화하는 자리까지도 깨질 위험이 다분해 보였다.

어쩔 수 없어졌음을 느낀 레오는 다시 찻잔을 들었다. 호로록, 차를 마시며

[ 업적 : 에릭 드 예리엘을 만남 – 예리엘 왕가를 섬기는 모든 귀족에게 미약한 호감을 얻음. 에릭 드 예리엘에게 미약한 호감을 얻음. ]

[ 업적 : 클리안 드 타탈리아를 만남 – 타탈리아 왕가를 섬기는 모든 귀족에게 미약한 호감을 얻음. 클리안 드 타탈리아에게 미약한 호감을 얻음. ]

두 개의 호감 업적을 믿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찻잔은 점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절 도와주십시오.”

코웃음을 치지는 않았지만, 레오는 그랬을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제가 왜 왕자님을 도와드려야 합니까?”

“…백작님은 현재의 위치에 만족하십니까? 두 왕국에 발을 걸치신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으십니까. 제가 복위하면…”

“만족한다고 하면.”

페테르 백작이 말을 끊었다.

꼬았던 다리를 풀어 몸을 앞으로 기울였는데, 그는 이를 드러내며 미소짓고 있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타티안 후작의 친구로 만족하신다는 것이군요. 그렇다면 조금 실망입니다.”

게스타브 페테르 백작은 놀란 표정이었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하하하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왕자님께서는 겁이 없으시군요. 타티안 후작을 만나시다니… 그 용기를 높이 사, 제가 조언을 하나 해드리지요.”

웃음이 그쳤다. 이어진 그의 목소리는 마치 누가 들을세라 경계하듯, 낮았다.

“후작을 어떻게 만나셨는지는 몰라도 접근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 친구는 아주 무서운 사람이지요. 왕자님께서 여기에 들렀다는 것도 곧 알게 될 겁니다.”

“…후작이 제 정체를 안다는 말씀입니까?”

“아니요. 이 나라의 누가 왕자님이 왕자님인 걸 알아채겠습니까.”

백작은 더는 말할 생각이 없는지 몸을 젖혔다. 입맛을 다시며 찻잔을 바라보는 게, 흥미가 식은 것 같았다.

“그, 그럼… 절 도와주실 의향이 없으십니까?”

레오가 매달렸다. 절박한 마음을 억누르려 애썼으나 그럴수록 틈이 벌어지는 게 사람의 말이었다.

페테르 백작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레오를 가만히 바라보며 무엇을 고민하는지 답변이 나오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다행히, 긍정이었다. 조건이 딸린.

“좋습니다. 도와드리지요. 하지만 저도 알아볼 것이 있으니 조금 기다리셔야 하겠습니다.”

여기다 대고 충성을 맹세하라면, 안 되겠지. 레오는 터덜터덜 페테르 백작의 저택을 떠났다. 그나마 위안이 된 건 백작이 떠나는 왕자에게 깍듯한 예의를 보였다는 점이었다.

믿어도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 * *

레오는 왕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극장에 들러 잠시 크세니아를 만났는데, 늦은 시간이라 잠이 많은 레나는 이미 꿈나라였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해가 저물어 마땅히 갈 곳이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 어두운 극장 객석에 앉았다.

“레나는 요즘 어때요?”

“잘 지내고 있어요. 연기를 참 빨리 배우네요.”

서먹한 기류가 흘렀다. 크세니아는 고개를 돌린 채 입을 열지 않았고, 레오도 이젠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이 여자가 마음에 든다. 이유는 없지만, 부정하지 못하겠다. 단순히 채하를 닮아서 그런 것이라 하기엔, 민서가 너무 희미했다.

‘…그래. 카시아가 무슨 상관이냐.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이제는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는데…’

레오가 크세니아의 손을 붙잡았다.

말랑말랑한 손바닥을 감싸자 크세니아가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부녀자의 손을 이런 식으로 잡으시면 곤란해요.”

“외간남자의 입술을 빼앗으신 것도 조금은 곤란했어요.”

어두워서 보이진 않지만, 크세니아가 살짝 웃은 것 같았다. 레오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미안해요.”

“…뭐가요?”

“제가 너무 무심했어요. 동생을 맡겨놓은 주제에 자주 찾아오지도 않고… 동생만 보고 돌아갔던 적이 많았어요.”

“…그리고요?”

“저번엔 거짓말을 했었죠. 동생 앞이라 엉겁결에 한 말이지만, 마음이 많이 상했을 거예요.”

“그리고요?”

“…손 한번 잡아드린 적이 없던 것 같네요. 밥만 얻어먹고…”

“그리고요?”

“……제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려드리지도 않았네요. 저는 지금…”

“그건 궁금하지 않아요. 그리고요?”

크세니아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레오는 곰곰이 생각해 말했다.

“………사랑한다고 말씀드린 적도 없네요. 예쁘다고는 말했던가요? 제가 말주변이 없었… 읍!”

입에 촉촉한 것이 달라붙었다. 거친 숨소리가 오가고, 그의 무릎에 오른 크세니아가 말했다.

“당신은 미안한 게 너무 많아요. 그 한마디면 될 것을 갖다가.”

레오가 크세니아의 뺨을 쓸었다. 구불구불한 머리칼을 목 너머로 넘기며 속삭였다.

“그래요. 사랑해요. 우리.”

“…그거 마음에 드네요. 하지만…”

크세니아가 레오의 입술을 매만졌다. 깎아지른 턱과 여문 목젖을 쓰다듬더니 작게 귓속말했다.

“여기선 불편하지 않겠어요?”

* * *

간이침대가 딸린 분장실. 레오가 흐트러진 옷을 주웠다.

그의 종자의 옷이었지만, 아무래도 빨아서 돌려줘야 할 것 같았다.

일렁이는 양초 아래서 레오는 분장실의 옷을 아무거나 골라 입고는, 땀 범벅이 된 크세니아의 입에 입술을 맞추며 말했다.

“일어나요. 저 이제 가야 해요.”

크세니아가 일어났다. 허리를 톡톡 두드린 그녀도 옷을 주워입었다.

“레오. 다음엔 언제 와요?”

“언제 왔으면 좋겠어요?”

“내일요.”

“하하. 미안해요. 그건 어렵겠네요. 최대한 일찍 올게요.”

“알겠어요. 하지만 다음 주에 <데모니오스> 공연이 있다는 거 잊지 마세요. 안 오면 레나가 섭섭해할 거예요.”

다음 주라…

레오는 손가락을 꼽아 날짜를 계산해보았다.

아스틴 왕국의 왕자가 도착하는 날이다. 길버트 포르테와 클로에 드 타탈리아 공주가 첫날에 바로 사고를 치진 않았으므로 시간이 될 것 같았다.

레오는 그럼 다음 주에 오겠노라 약속하고 극장을 떠났다.

극장 앞 길가에서 어슬렁거리는 오베르에게 인사하고 밤길을 걸어 돌아가는데, 레오는 올 때와 달리 어떤 자신감이 붙어 있었다.

크세니아한테 같이 떠나자고 부탁해야겠다.

길버트 포르테와 공주가 키스하는 것만 막고, 그는 콘라드 왕국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페테르 백작이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도와주건 도와주지 않건 상관없다.

생각해보면, 꼭 {이벤트}라는 걸 따라가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에릭 왕자가 오리아스를 불러내는 순간, 어떤 짓을 해서건 베르크 추기경을 근처에 두고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거짓말하건, 기사들을 동원해 납치하건, 방법은 많다.

최후의 순간에도 비굴하지 않았던 추기경. 그는 가시나무 숲에서 며칠 밤낮을 시달리고도 바르바토스의 사도가 된 레브 앞에서 전의를 불태웠었다.

오리아스의 사도를 보고 나 몰라라 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가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늦지 않았다.

타아문 마을에서 겨울을 났던 지난 회차에 비하면 몇 달의 여유가 있었고, 어느 기사가 내게 충성을 바치는지도 모조리 알고 있었다.

기사들을 몰래몰래, 조심해서 회유한다고 고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며칠 있으면 봉급이 나오니까… 여비는 충분하지.’

근위기사의 증표도 있으니 관문 통과도 쉽다. 근위기사는 힘들어서 못 하겠다고 은퇴하면 그만이었다.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래 봬도 내가 소드마스터가 될지도 모를, 장래가 촉망되는 기사다.

딴 왕국으로 갈까 걱정하면 걱정했지, 못 간다고 위압하진 못한다.

왕궁에 도착했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레오는 종자의 옷을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근위기사인 그에겐 시녀도 한 명 배정되어 있었으므로 알아서 빨아다 놓을 것이었다.

넓은 방.

사치스럽지는 않으나 갖춰질 것은 다 갖춰진 방 침대로 몸을 던졌다. 레오는 뺨을 발갛게 물들이던 크세니아가 떠올라 활짝 미소 지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